무협지/개방서생

제9장 마정소(魔情嘯)

오늘의 쉼터 2016. 6. 1. 15:38

제9장 마정소(魔情嘯)

 

그 때, 어디선가 퉁소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 퍼졌다.

삘릴리리… 릴리…!

아, 장송곡(葬送曲)!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 보내는 슬픔과 아픔이 짙게 배인 음률이었다.

중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비탄(悲嘆)과 통한(痛恨)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차츰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으흑!"

"우으으……!"

그들은 가슴이 지옥의 불구덩이에 떨어진 듯 고통을 느끼기 시작했다.

순간, 혈살신마가 당황한 신색으로 장소성을 터뜨렸다.

"와하하하하…!"

잔인사황도 그를 거들었다.

"아우우…!"

사자후(獅子吼)가 단명곡을 쩌렁하게 울리며 퉁소의 음률에 대항했다.

그러나 퉁소 소리는 오히려 더 강해져만 갔다.

귀신의 호곡성(號哭聲)인 양 천지간에 메아리치는 음률로 변해 막을 진동시켰으며,

천지를 뒤엎어 버릴 듯 점점 더 광폭해져 갔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을 피끓는 처절함으로 물들이는 음률.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의 전신이 무섭도록 경련했다.

지금 그들의 내공 수위는 합쳐 사 갑자(甲子)를 상회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마치 풍랑 이는 바다에 내던져진 일엽편주(一葉片舟) 마냥 밀리다니….

'정사마천궁주 외에 천하 누구가 이토록 놀라운 내력과 신공을 지녔단 말인가?'

그들의 시야에 누덕누덕 기운 웃차림의 비쩍 마른 거지가 들어왔다.

퉁소를 불며 다가오는 그를 발견한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은 귀신을 본 듯 눈을 휩떴다.

"정사… 마천궁… 주!"

"소걸군……!"

그럼 태사의에 앉은 채 시해(弑害)당한 정사마천궁주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분노와 슬픔에 들끓던 중인들은 또 다른 충격에 빠져들었다.

냉한웅의 걸음이 태사의 앞에서 멈추어졌다.

그는 천지를 슬픔 속으로 몰아넣던 마정소를 입술에서 뗀 후,

도 끝도 없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자결해라."

담담한 표정과 음성이었지만, 마정소를 쥔 손은 격동으로 인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혈살신마와 잔인사황이 동시에 무릎을 끓었다.

"어쩔 수 없었소이다. 저희가 천마존을 섬기며 당한 고초를 주군께서도 잘 아시지 않소이까?"

"군자이사이난설야(君子易事而難說也)…

섬기기는 쉬워도 기쁘게 해 주기는 어렵다라는 말처럼

천마존은 수하들의 어떤 희생에도 만족해 하지 않으셨소이다."

"주군께선 천마존의 뜻에 따라 행동하시니, 불안하기 그지없었소이다.

저희의 얼마 남지 않은 여생마저 그렇게 바칠 수가 없어 부득이…."

잔인사황이 말을 하다 말고 쌍수(雙手)를 내뻗었다.

순간, 무음(無音) 무형(無形)의 강기가 냉한웅의 전신 요혈은 물론 주위 삼 장 이내를 뒤덮었다.

잔양수라지(殘陽修羅指) 중 열 개의 손가락에서 동시에 지풍(指風)을 날릴 수 있는 연환지(連幻指).

냉한웅의 대나이신법(大羅理身法)에 대비한 적절한 수법이었다.

하나, 기지와 총명이 절정에 달한 냉한웅이 어찌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았겠는가?

더구나 천망의까지 입고 있으니….

노련하기 그지없는 혈살신마가 비수를 휘둘렀다.

"혈참(血斬)-!"

전광석화도 같은 동작이었다.

석년에 천마존조차도 이 초식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으니, 그 빠르기와 강함을 말해 뭣하겠는가?

무상보리신공(無上菩提神功)으로 전신을 보호하고 있던 냉한웅은 꼿꼿히 선 채 지풍(指風)을 받아 냈다.

그리고 비수의 광채가 목을 노린 순간, 슬쩍 무릎을 구부려 상체를 낮추며 그것을 이빨로 물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천하에 오직 그만이 터득한 분심공(分心功)을 사용, 좌수를 내찔렀다.

천존칠선의 천존패혈류(天尊覇血流)를 공수도(空手刀) 수법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동시에 우수에 쥐고 있던 마정소로는 무형어검강(無形御儉 )인 무상범천(無上汎天)을 펼쳤다.

푸욱-!

좌수가 잔인사황의 호신강기를 꿰뚫고 복부(腹部)를 헤집었을 때.

창-!

마정소는 보검인 비수를 동강내고, 혈살신마의 목에 한 줄기 혈흔을 남겼다.

두 개의 입에서 폐부를 짓이기는 듯한 달단마의 비명이 뿜어져 나와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냉한웅의 좌수엔 핏물이 주르르 흘러 떨어지는 내장이 들려져 있었다.

그는 가죽 공처럼 터져 나간 잔인사황의 복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옛정을 생각해 자결하라 했거늘….'

혈살신마의 몸엔 머리통이 보이지 않았다.

목이 완전히 절단되어 떨어져 나간 것이다.

냉한웅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눈에 뜨이지가 않았다.

어딘가 풀숲에 가려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머리통을 잃은 몸뚱아리를 걷어차 오 장 밖으로 날려 버린 후, 명하였다.

"이 자의 귀두(鬼頭)를 찾아 오시오!"

순간, 뇌웅의 신형이 빛살처럼 풀숲에 한 바퀴 원을 그리고 나왔다.

그의 손에는 눈을 부릅뜬채 노려보고 있는 혈살신마의 머리통이 들려져 있었다.

냉한웅은 뇌웅이 머리통을 발밑에 내려놓기 무섭게, 짓밟아 뭉개 버렸다.

그의 잔인성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잔인사황은 놀랍게도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어도 숨만 붙어 있다면

빠르게 치유가 되어 살아나는 사극무형강(邪極無形 )의 신비롭기 그지없는 효능 때문이었다.

하나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일부 내장이 냉한웅의 손에 뽑혀 나간지라,

고통만 그만큼 연장될 뿐이었다.

"크으… 군주… 제발… 죽여 주… 십…."

냉한웅은 더듬더듬 죽여 주기를 간청하는 그를 바라만 볼 뿐, 전혀 손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씨익…!

냉한웅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의 물결이 일었다.

"네놈의 사극무형강 덕분에 본존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

퍽-!

그가 오른발을 들어 머리통을 짓밟자, 수박이 깨어지는 듯한 음향이 일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정사마천궁의 군웅들은 오싹 몸을 떨었다.

하지만 사대밀령주들의 표정은 오히려 환해졌다.

'이젠 우리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로구나.'

이들이 내심 기뻐하는 사이, 냉한웅은 비통한 얼굴로 태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월… 녀… 개…!"

그럼 정사마천궁주 냉한웅으로 변신했던 인물이 월녀개였단 말인가?

그렇다.

태사의에 앉아 있던 그의 체구와 얼굴이 서서히 변화해 이젠 여인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었다.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월녀개의 얼굴에서 격앙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사라지고, 
입가엔 평온한 미소마저 감돌고 있지 않은가?

냉한웅은 왈칵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장난꾸러기 같으니… 정사마천궁주로 행세해 보겠다고 떼를 쓰더니…."

그는 피투성이인 월녀개의 시신을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그대는 나의 죽음을 대신해 기쁜 모양이구려.

그러나 내 마음도 그대와 함께 죽어 버렸다오."

이어 곡구(谷口)를 향해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뜻밖의 사태에 놀란 사대밀령주들이 황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천존,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설마… 속하들을 버리시진 않겠지요?"

냉한웅은 먼 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정사마천궁도 이젠 내게 하등의 의미도 없소. 월녀개와 함께 떠날 거요. 우리의 소월선부로…."

다음 순간, 월녀개을 안은 냉한웅의 신형이 한 줄기 빛처럼 허공을 긋고 사라졌다.

그리고 태사의엔 월녀개가 꼭 움켜쥐고 있던 백옥섭선, 천존선(天尊扇)이 대신 놓여져 있었다.

향 두어 자루 탈 시각이 흘렀을까?

다시금 마정소의 음률이 흐느낌인 양 단명곡에 울려 퍼졌으나, 차츰 멀어져 귀에 들리지 않았다.

<명부사혼전(冥府死魂殿)이 선풍원(善風院)을 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구원을 바람.>

만통자가 보낸 전서(傳書)의 내용은 촌각(寸刻)을 다툴 만큼 긴박했다.

정사마천궁 임시 궁주인 패천군 뇌웅은 급히 세 영주들을 불러들였다.

사대밀령주는 별 다른 의견 교환 없이 합의했다.

선풍원이 정사마천궁과 직접적 관련은 없으나,

원주(院主)인 정사마천궁주의 체면을 생각해 그대로 방관할 수 없다는 결정이었다.

그들은 궁내(宮內)의 수하들 중 비교적 무공이 떨어지는 일부만을 남겨 놓고 출발하기에 이르렀다.

"크윽!"

"아아악……!"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비명이 야공(夜空)을 흔들어 댔다.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선풍원(善風院).

명나라 성도(城都) 한복판인 이 곳에

대막(大漠)의 명부사혼전(冥府死魂殿) 고수들이 대거 습격을 해 온 것이다.

관(官) 따위는 발가락 사이에 낀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이런 행위야말로

그들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선풍회와 정사마천궁 고수들도 기습 정보를 입수하고 대기한 터라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선풍원에서는 일선(一仙), 삼옹(三翁), 칠기(七奇) 중의 여섯 명을 비롯한

각 문파의 고수급 인물들이 동원됐다.

정사마천궁도 자신들에 속한 모든 문파들의 영수(領首)들과

고수급 인물들까지 불러들여 합세했으니, 그 세력이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특정  문파에 속해 있지않은 수많은 정협지사들도 돕기를 자청해 나섰으니….

명부사혼전은 머리 수에 있어 상대의 절반도 채 못 되었다.

한데, 별로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일류고수라 불리울 만한 무공을 지녔으며…

이제(二帝) 중의 한 명인 사패(四覇), 육혈(六血) 중의 세 명, 팔군(八君) 등

십육 명의 악명 높은 고수들이 가담한 것이다.

이들 십육 명 개개인의 무공은 일선에 비해서만 한 수 이상 차이날 뿐,

삼옹보다 약간 손색이 있으며 칠기와는 평수를 이룰 정도였다.

그러나 임시 궁주인 패천궁 뇌웅의 마음을 어둡게 한 것은 눈에 보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독불장군처럼 중원무림을 휘저어 온 그들이

암중(暗中) 인물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눈치챈 것이다.

'그 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만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긴 했다.

'혹시 천존께서… 이거 내가 무슨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쓴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번 대접전의 배후엔 강호비사집에 기록될 만한 내용이 감추어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다음 순간, 그는 쌍장을 좌우로 나누어 날렸다.

"쥐개끼 같은 놈들!"

펑- 펑-!

가죽 공 터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명부사혼전의 두 고수가 삼 장 밖으로 퉁겨져 나뒹굴었다.

양쪽에서 암습을 가하려던 두 명을 가볍게 한 그는 산책하듯 이리저리 신형을 날렸다.

양측 정예(精銳)가 몰려 있는 국화림(菊花林)의 형세를 살피던 그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직은 염려할 만한 상황이 아니군.'

일제와 사패, 삼혈과 접전을 벌이는 일선, 삼옹, 육기의 모습엔 여유가 넘쳐 흘렀다.

단지 팔군(八君)만이 좌충우돌, 선풍회와 정사마천궁의 젊은 고수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일순, 뇌웅의 미간에 여덟 팔(八)가 그려졌다.

"실력이 엇비슷한 상대를 고르지 않고… 비겁한 늙은 놈들아!"

호통이 터져 나온 순간, 기다렸다는 듯 팔군의 신형이 뇌웅을 에워쌌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구궁팔괘(九宮八卦)를 밟아 나갔다.

'명이(明夷)로부터 시작하여 비(賁), 기제(旣濟), 가인(家人)… 
역으로 밟아 동인(同人), 대유(大有), 귀매(歸妹), 미제(未濟)….'

주역(周易)에 뛰어난 뇌웅이라 진법을 간파할 수 있었지만, 내심 크게 탄복했다.

'팔문정쇄진(八門情碎陣)을 참으로 절묘하게 변형했구나.

여덟 명의 움직임 또한 한 몸과도 같으니, 적이지만 칭찬해 줄 만하다.'

뇌웅도 침착하게 구구미종보(九九迷踪步)를 펼쳐 십여 개의 환영(幻影)을 만들어 냈다.

이 때, 팔군 중 누군가의 입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도예팔호미(倒曳八虎尾 : 여덟 마리 호랑이 꼬리를 끌어당긴다)-!"

암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팔군은 공세로 전환했다.

여덟 자루의 검이 한 줄기 검기로 변해 너울너울 춤었다.

그 모양은 마치 태산만한 호랑이가 긴 꼬리를 휘둘러 대는 듯하였다.

팔군의 공력이 합쳐 이루어진 검기가 아닌가?

긴 꼬리로 휘감아 버리듯 후려치자,

구구미종보가 만들어 낸 환영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실체인 뇌웅은 무림인들이 쓰기를 부끄러워하는 뇌려타곤 수법으로 뒹굴어 겨우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패천도(覇天刀)를 뽑아 들었다.

불사천마교주인 불사군(不死君) 방고갈(方高葛)과의 대결에서조차 뽑아 들지 않았던 보도(寶刀).

순간, 그의 신형이 곧장 중부(中孚)를 딛고는 기제(旣濟)로 옮겨 갔다.

"패천유일(覇天有一)!"

뇌정(雷霆) 같은 도광(刀光)이 꼬리의 중간을 갈랐다.

일도를 쳐낸 뇌웅은 득의의 미소를 머금었다.

'속도와 위치가 정확했다. 다음은 오른발로 고(蠱) 방위를 디디며….'

그는 빙글 몸을 돌려 빈틈이 생길 것으로 예상한 지점으로 신형을 날렸다.

"어헉!"

그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비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자리로부터 네 줄기 검기가 쏘아진 것이다.

후미에서도 네 줄기 검기가 밀려왔다.

'제기랄, 호랑이 꼬리를 잘못 밟았군.'

그는 또다시 몸을 뒹굴어 피하며 도를 떨쳤다.

챙- 챙- 챙- 챙-!

여러 개의 철쟁을 동시에 두드리는 것 같은 음향이 메아리쳤다.

체면 구기는 수법이긴 했으나, 태방위를 선점한 그는 재빨리 한숨을 돌리며 공세를 취했다.

"패천귀일(覇天歸一)- 패천연월(覇天烟月)- 패천연과(覇天烟跨)-!"

패천도법(覇天刀法)은 태산이라도 가를 듯 자뭇 그 위세가 놀라웠지만,

명칭은 아취(雅趣)가 철철 넘쳐흘렀다.

쉬쉭- 쉭익-!

뇌정도가 섬전보다 빠르게 사면팔방을 갈랐지만, 번번이 허공만을 베고 말았다.

팔군이 펼치는 검진은 뇌웅의 짐작보다 훨씬 더 오묘하여, 그를 계속 궁지에 몰아넣었다.

뇌웅은 슬쩍 허리에 빈틈을 내주어 적들을 유인했다.

팔군이 어떠한 고수들인가?

성공한다 해도 크게 베임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자신의 살을 내주고, 대신 상대의 뼈를 가르는 고육지책(苦肉之策).

하나 그들은 속는 척 치고 들어왔다가 반격을 가하기도 전에 되빠지는 수법으로 기력만을 빼놓았다.

뇌웅은 참다 못해 벽력 같은 고함을 터뜨렸다.

"제기랄, 뭐가 도예팔호미(倒曳八虎尾)냐? 도예팔호미(倒曳八狐尾)지!"

천중사기(天中四奇) 중의 천도탈흔(天賭奪魂) 방문웅(方文雄)과 
중원일괴(中原一怪) 공문건(孔文建)은

난화림(蘭花林)에서 명부사혼전의 고수들과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공문건의 쾌검이 미친 듯 살광(殺光)을 발했다.

"죽고 싶은 놈들은 얼마든지 오너라! 크흐흐흐…!"

그의 눈동자는 광기(狂氣)로 번뜩였으나, 검을 휘두르는 수법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파팟-!

공문건의 광검(狂劍)이 신묘하게 방향을 꺾자, 또 한 명의 머리통이 목에서 떨어져 나갔다.

"크윽!"

벌써 여섯 명째… 그의 무공은 명성, 아니 악명(惡名)에 비해 훨씬 높았다.

아마도 중원광인(中原狂人)이라는, 매우 좋지 않은 소문 때문에 실력이 낮게 평가된 것이리라.

공문건은 시체의 웃자락에 쓰윽 검을 문질러 피를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방문웅이 세 명의 고수에게 합공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리 크게 몰리는 기색은 아니었다.

'천도탈혼이 도박술에만 능한 게 아니었군. 하나, 도움은 필요하겠어.'

그는 허리를 꺾으며 지면을 박차 비스듬히 신형을 날렸다.

"방형(方兄), 소제에게도 좀 나눠 주구려."

파파팟팟-!

살음(殺音)이 연속으로 작열한 순간,

합공을 가하던 세 고수 중 두 명의 입에서 비명이 토해졌다.

동시에 방문웅의 철선(鐵扇)도 나머지 한 명의 천령개(天靈蓋)를 도끼로 쪼개듯 내리쳤다.

"큭!"

박 터지는 소리와 비명이 뒤섞여 분별이 혼한스런 음향이 목 위에서 일었다.

방문웅은 철선을 쥔 채 포권하여 구명(求命)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공형(孔兄)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쯤 저승길을 헤매고 있었을 거요."

"원 별 말씀을… 소제의 도움이 아니더라도 공형은 무사했을 거외다."

방문웅은 그가 어울리지 않게시리 겸손을 떨자, 실소를 머금었다.

'세인들이 그를 중원광인(中原狂人)이라 부르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된 듯싶군.

역시 중원일괴(中原一怪)가 적합한 별호(別號)야.'

이 때 홀연, 어디선가 방울 소리가 들려 왔다.

딸랑- 딸랑- 딸랑- 딸랑-!

구유명부(九幽冥府)에서 들려 오는 듯 음산하기 짝이 없는 음향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뛰고 마음이 어지러움을 느낀 이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요?"

"글… 쎄올시다…."

딸랑- 딸랑- 딸랑-!

방울 소리가 뒤편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챈 그들은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순간, 등골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백색괴인(白色怪人).

온 전신을 하얀 헝겁으로 싸맨 괴인이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움푹 패인 두 눈에서는 얼음보다도 싸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귀신아, 죽어랏!"

공문건과 방문웅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짓쳐 들었다.

푹- 퍽-!

검과 철선이 괴인의 가슴과 복부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런데 참으로 괴이한 현상이었다.

괴인은 전혀 충격을 받지 않은 듯 여전히 꼿꼿히 서 있었으며,

에서 한 방울의 피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다음 순간, 괴인의 쌍수가 벼락같이 움직였다.

크르르륵-!

지독한 악취와 흑무(黑霧)가 그의 열 개 손톱 사이에서 뿜어져 나와 주위를 뒤덮었다.

흑무 속에서 공문건과 방문웅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결코 악취를 견디다 못해 내지른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괴인은 입을 크게 벌려 다시 흑무를 빨아들었다.

빠르게 흑무가 사라진 자리에는 형태조차 알아보기 힘들 만큼 검게 변색되고

우그러진 두 구의 사체(死體)만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두 구의 시체는 차츰 흑수(黑水)로 변해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천령호혼강시대법(天靈呼魂 屍大法).

사술(邪術)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것으로,

사도인(邪道人)들마저 익히기를 꺼려해 실전된 지가 이백여 년이나 된 수법이다.

그런데 이 괴인들이 바로 천령호혼이라 불리우는 방울 소리에의해 조종당하는 강시( 屍)들이었으니….

무려 이십여 구에 달하는 강시들은 피 냄새를 쫓아

죽화림(竹花林), 국화림(菊花林), 난화림(蘭花林), 매화림(梅花林)을 마구 휩쓸었다.

이들은 일반 강시와 달리 관절의 움직임이 자유로웠으며,

무공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급이었다.

강시들은 선풍원과 정사마천궁 고수들만을 골라 흑무를 뿜어 대었다.

"이 썩은 귀신들아!"

삼옹이 빛살처럼 덮쳐 강시들에게 연속 장력을 날렸지만, 뒤로 휘청였을 뿐 끄떡도 않았다.

육기가 신기(神器)라 할 수 있는 각종 병기들로 깊숙이 찌르고 가르는 등

난타(亂打)해 댔지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열세에 몰려 있던 일제와 사패, 삼혈도 다섯 구의 강시가 가세하자 오히려 일방적 공세로 반전시켰다.

그러니 팔군과 악전고투하고 있던 뇌웅의 처지야 더 말해 뭣하겠는가?

두 구의 강시가 합세하자, 겨우겨우 한 목숨 보전하기에 급급했다.

한 가지 요행은, 상대의 진법이 걸리적거리는 강시에 의해 원활히 펼쳐지지 않은 점이었다.

"아악!"

"크으으……!"

선풍원과 정사마천궁 고수들의 비명 소리가 점점 높아 갔다.

그야말로 시산혈해(屍山血海)!

중원무림의 멸망이 목전에 도래하였다.

누군가의 입에서 비탄에 젖은 음성이 흘러 나왔다.

"천존,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어 메아리치듯 수많은 입들에서 같은 울부짖음이 쏟아져 나왔다.

"오, 천존…!"

"이대로 버려 두시렵니까?"

이 때, 그들의 애원과 호소에 답하는 듯 퉁소 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삘릴리… 삘릴릴리…!

하나, 창자를 도려내는 듯 단장(斷腸)의 아픔을 느끼게 하던 음률이 아니었다.

천군만마가 질타하는 듯 힘차면서도 장중했다.

"소귀(少鬼)가 와 주었군."

난화림(蘭花林)의 거울처럼 맑은 호수(湖水)와 기암괴석,

그리고 돌 틈 사이마다 자태를 드러내고 청신한 향기를 풍기는 난초들….

하나, 난초밭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노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몸 곳곳이 차츰 녹아 내리고 있었다.

검게 변한 피부가 문드러지고, 그것은 다시 흑수(黑水)로….

강시의 흑무에 당한 모습이었다.

진면목으로 돌아온 냉한웅의 신형이 그의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찰나, 그의 두 눈이 무섭도록 부릅떠졌다.

한 줌의 흑수로 변해 가는 개방의 방주 철지영개.

"방… 주‥!"

철지영개의 처참한 몰골을 본 그는 원독에 찬 외침을 토해 냈다.

개방의 소걸군 냉한웅의 뇌리에 방주와 월녀개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그의 신형이 다시 공간을 가르며 질주를 거듭했다.

파파파파팟-!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마정소가 춤을 추었고,

반주를 하듯 환호성과 비명 소리가 줄을 이어 울려 퍼졌다.

"회주님!"

"천존… 정사마천궁주…!"

환호성의 물결을 타듯 냉한웅의 신형이 멋지게 지면을 박차고 비스듬히 치솟아 올랐다.

허공에서 허리 꺾어 머리를  아래롤 향했을 땐,

어느 새 마정소가 파천혈륜으로 바뀌어 있었다.

"혈참(血斬)-!"

순간, 그의 전신이 한 줄기 혈광으로 변해

팔군과 합공(合攻)하고 있는 강시들의 몸을 관통해 지나갔다.

"크르륵…!"

"크큭!"

두 구의 강시 허리가 완전히 양분(兩分)되어 네 토막으로 변했다.

하나 두 팔을 계속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며, 입으로는 기음을 발하고 있었다.

팔군 역시 나뒹굴며 고통에 찬 비명들을 토해 냈다.

냉한웅이 동강난 부위로부터 쏟아져 나온 흑기에 일 장을 가해 그들을 향해 날린 것이다.

또한 일 장을 쳐내는 동시에 파천혈륜은 일선, 삼옹, 육기를 공격하고 있는 다섯 구의 강시들을 노렸다.

"잔폭(殘爆)-!"

동시에 일선의 입에서 당황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멈추시오!"

하나, 이미 파천혈륜이 다섯 구의 강시들을 회 치듯 난도질한 후였다.

냉한웅은 흑무에 장력을 날리며 냉소를 흘렸다.

"조금만 더 일찍 말씀하시지 않고…."

일제와 사패, 삼혈은 좀 전에 팔군이 당한 것을 보았는지라 기겁을 해 뒤로 신형을 날렸다.

냉한웅은 다시 흑무에 일 장을 가했다.

다음 순간, 흑무가 소용돌이로 변해 삼혈을 향했다.

"밀어내랏!"

삼혈은 전력을 다해 소용돌이에 장력을 날렸다.

하지만 장력들은 닿기 무섭게 퉁겨져 흩어지고.

핑-!

화살이 쏘아지듯 더욱 빠르게 회전하여 그들을 덮쳤다.

"……."

중인들은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삼혈의 비명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

그들이 사라진 자리엔 심한 악취를 풍기는 흑수가 고여 있었고, 
그것은 서서히 흙 속으로 스며 줄어들고 있었다.

일선은 노기 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참으로 잔인한 수법이로구나."

그가 이토록 불쾌해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강호무림인들이 손속을 겨룰 때엔 출수와 동시에 명칭을 일러 주는 것이 일례였다.

하지만 냉한웅은 초식을 펼치고 난 후에 폭갈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걸까?

강시는 인간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니면 자기 편 중의 누군가가 저지할 것을 예측하고?

냉한웅은 못 들은 척 등을 돌려 매화림(梅花林)으로 질주했다.

그 곳에도 한 여인이 강시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여섯 명의 명부사혼전 고수들이 희희덕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냉한웅은 전신의 털이 부들부들 떨릴 만큼 노했다.

"천존경혼장(天尊驚魂掌)-!"

콰르릉- 쾅-!

폭음과 함께 강시는 물론, 주위에서 음담패설로 희롱하던 자들까지 곤두박질쳤다.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몽땅 피곤죽이 되어 나자빠진 것이다.

하나, 강시만은 예외였다.

전신을 감싼 헝겁만이 너덜너덜해져

딱딱하게 굳은 살가죽만을 드러내 보였을 뿐, 벌떡 다시 몸을 세웠다.

그 순간, 파천혈륜이 미친 듯 춤을 추어 십여 조각으로 난도분시(亂刀分屍)해 버렸다.

냉한웅은 열화성(熱火性)의 장력을 날려

조각난 시체에서 피어 오르는 흑무마저 태워 버린 후, 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사마천궁주… 당신, 소걸군이 맞지요?"

나긋한 옥음(玉音)이 귓전을 간지럽혔다.

일화(一花)였다.

현 황제인 영종(英宗)의 질녀(姪女)이며,

오행불성선(五行佛聖鮮)의 제자인 설하공주(雪霞公主).

그녀는 연정이 담뿍 어린 눈망울로 냉한웅을 바라보았다.

"모습은 변했지만 눈빛만은 그대로군요.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아세요?"

다음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방심(芳心)을 토해 내 버린 것이니…

그녀는 목덜미까지 붉게 물들였다.

"아이잉… 난 몰라… 잉…!"

수줍고 부끄러워 그녀는 애교 넘치게 허리를 꼬며 얼른 등을 돌렸다.

하나, 냉한웅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반응을 살피며 살풋 고개를 돌려본 그녀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어느 새 냉한웅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지극히 서글픈 미소가 감돌았다.

"일화는 현생(現生)에선 당신과 인연이 없는 듯싶군요."

세상에서 오로지 그녀와 사부인 일선만이 알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혹, 냉한웅도 알고 있을지도 모를….

냉한웅의 타오르는 분노는 사그라 들 줄 몰랐다.

설화공주의 연정 어린 눈빛은 타오르는 가슴에 고통의 기름을 끼얹은 결과만을 가져왔다.

'왜? 왜? 왜…?'

냉한웅은 마음 속으로 계속 자신에게 외치며 방울 소리를 쫓아 신형을 날렸다.

천령호혼의 수법은 강시를 움직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방울이 울리는 위치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묘용도 있었다.

마치 하늘의 구름 속에서 들려 오는가 하면, 땅밑에서부터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을 이리저리 오가는 듯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강시들이 변화 심한 음률을 착오 없이 들을 수 있

자리를 이동하지 않고 조종하는 것이다.

천령호혼강시대법(天靈呼魂 屍大法)은 사극염라경(邪極閻羅經)에 적혀 있는 사술이 아닌가?

이를 잘 알고 있는 냉한웅은 누각의 지붕을 샅샅이 살피고 다녔다.

'강시들을 움직이려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에 자리잡아야 한다.'

선풍원이 얼마나 넓은 곳인가?

또한 네 곳의 화림(花林)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그렇지만 이 점이 방울 울리는 자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짐작하기에 더욱 쉽게 했다.

그만큼 높은 위치여야 하며, 사방을 내려다보기에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국화림(菊花林) 누각 꼭대기 다락방의 창문가에서 연신 번뜩이는 광채.

이를 발견한 냉한웅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

들이라니? 그럼 한 명이 아니란 말인가?

쉬익-!

그의 신형이 창문 안으로 짓쳐 든 순간, 방울 소리가 뚝 끊겼다.

하지만 냉한웅의 손에 당해서가 아니었다.

너무도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냉한웅도 몸이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마저도 전혀 예측치 못한 인물.

"추추귀개… 당신이…?"

그럼 강시들을 조정한 자가 개방의 추추귀개였단 말인가?

사방에 흩어진 강시들을 동시에 움직이려면 적어도 두 명은 필요했다.

추추귀개가 동과 서를, 그리고 또 한 명이 남과 북을….

냉한웅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며 비웃음을 흘렸다.

"백일기, 당신이 여인을 아끼는 것을 보고 정대(正大)한 인물로 짐작했는데… 착각이었군."

백일기는 얼굴을 붉히며 변명했다.

"나도 원치 않았던 일이나,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각자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는 것이니…."

그는 사납게 노려보는 추추귀개의 시선과 마주치자, 급히 입을 다물었다.

보리밀사(菩提蜜寺)의 무학은 실로 경세적이었다.

더구나 백일기의 신분은 어떠한가?

삼봉밀니(三鳳蜜尼)와 동등한 듯싶었다.

무학 역시 결코 그녀들에 비해 낮지 않을 것이다.

추추귀개 정도는 단 일 장으로 박살낼 수 있을 터인데 그를 두려워하다니…

실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천봉밀니(天鳳蜜尼)가 말하길, 두 명의 밀니(蜜尼)와 함께 중원으로 떠났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는 왜 홀로 이 곳에…?'

냉한웅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다시 추추귀개를 노려보았다.

"네놈도 인간이냐? 중원무림과 사문을 배신하는 것도 모라자, 사부까지 처참히 시해하다니…."

추추귀개는 코방귀를 뀌었다.

"흥! 철지영개 따위가 어찌 이 어르신의 사부가 될 수 있단 말이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너와 나는 사형제지간이라 할 수도 있다."

순간, 냉한웅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렸다.

"짐작대로 천마존이 아직 살아 있었구나.

하나 본존이 천마존의 무공을 익히기는 했으나, 사부로 인정한 적은 없다."

그는 백일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봉밀니(地鳳蜜尼)와 인봉밀니(人鳳蜜尼)는 지금 어디 있느냐?"

백일기는 원독에 찬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모두가 너 때문이다. 두 밀니가 천마존의 수중에 들어간 것도, 
내가 그 자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것도… 천봉밀니마저도 네게 죽음을 당하지 않았느냐?"

하나, 냉한응은 추호도 미안한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중원을 탐내 발을 딛지 않았다면 너와 두 밀니가 어찌 지금의 처지가 되었겠는가?

천봉밀니도 마찬가지다.

본존의 목숨을 빼앗으려다 당한 것이니, 응분의 대가를 받은 것이지."

그러나 내심은 반대로 그를 구출해 주고 싶었다.

백일기의 안색이 노기로 붉게 물들었다.

하나, 그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네가 소걸군이란 걸 안다. 

어째서 연약한 여인에게 그토록 혹독한 형벌을 가했느냐?"

일순, 냉한웅의 눈동자에 질투의 광망(光芒)이 번뜩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팽낭자를 떠올리다니…

당신은 그녀를 끔찍이도 좋아했던 모양이군."

"……."

백일기가 머뭇거릴 뿐 입을 열지 못하자, 가슴 속에 질투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팽낭자는 살아 있지? 혹, 죽음을 가장하고 너와 함께 지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냐?"

백일기가 미친 듯 달려들며 고함쳤다.

"닥쳐라! 더 이상 지연을 모욕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동시에 수많은 그의 잔영이 냉한웅을 에워쌌다.

백일기의 목청이 고막을 울렸다.

"천영보리(千影菩提)-!"

호신과 공격을 겸할 수 있는 강기( 氣).

그것이 백일기의 수많은 그림자가 되어 하나하나가 냉한웅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멋진 수법이다!"

냉한웅도 대나이신법의 환자결을 펼쳐 자신의 무수한 그림자를 만들어 내며 진심으로 칭찬했다.

백일기의 무공이 새외천무경(塞外天武經)에 적혀 있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만약 백일기와 두 밀니가 무사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후일의 성취가 무궁무진하리라.

냉한웅의 잔영들도 한몸인 양 장력을 날렸다.

"천뢰지굉(天雷之宏)-!"

명칭 그대로 벽력과 같은 굉음을 내며 닿는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는 장강(掌 ).

쿠르릉- 쾅-!

뇌성벽력이 일어나듯 무시무시한 강기의 소용돌이가 장심으로부터 뻗어 나갔다.

두 강기가 충돌한 순간의 폭음과 위력은

선풍원 내에서 격전을 벌이던 모든 고수들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가공한 충돌음 때문이었다.

고수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목을 집중시켰다.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누각의 다락은 아예 형태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휑하니 드러난 대들보 위에 냉한웅과 추추귀개가 서서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럼 백일기는 어디에 있는가?

누각 밖으로 날려 간 그는 의식을 잃은 채 풀밭에 누워 있었다.

천영보리신공이 냉한웅이 알고 있는 어떤 무공에도 뒤지지 않는 절학이긴 하나,

공력에서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다.

냉한웅이 무형의 부드러운 경력으로 보호해 안착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신의(神醫) 화타(華陀)가 와도 살려 내기 어려울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돌연, 냉한웅의 입에서 폭갈이 터졌다.

"극악한 놈아! 어디 달아나려고…!"

슬그머니 신형을 날렸던 추추귀개가 갑자기 허공에서 허리를 꺾어 쌍수를 내뻗었다.

"천존멸겁강(天尊滅劫 )-!"

냉한웅에게 천마존의 절학을 사용하다니….

혹시나 해서 사용해 본 걸까?

아니면, 죽을 때가 되어서 만용을 부린 걸까?

냉한웅의 입에서도 똑같은 외침이 토해졌다.

"천존멸겁강(天尊滅劫 )-!"

굉음과 함께 공중 폭발이 일어났다.

무려 백여 장 밖까지 혈육의 파편이 날아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도와 주겠다는 천마존의 전음에 따라 공격을 가한 추추귀개.

그가 배신감을 느낄 사이도 없이 죽어 간 것이다.

전력을 다해 일격을 가한 후, 냉한웅은 아차 싶었다.

'교활한 노마(老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추추귀개를 차도살인(惜刀殺人)했구나.'

표면상이긴 했으나, 선풍원의 혈전은 종식되었다.

냉한웅은 군웅들에게 둘러싸여 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치하(致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일부는 진심으로, 그리고 일부는 두려움을 느껴… 

있는 말 없는 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걸 냉한웅이 어찌 모르랴.

하지만 빙긋 웃어 보이며 연신 답례를 했다.

냉혹하기로 소문난 정사마천궁주, 

그것을 벗어 던지고 훨훨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웅휘로운 음성이 단번에 분위기를 깨었다.

"그대가 정사마천궁주인가?"

오장 밖에 한 쌍의 중년남녀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네모 반듯한 얼굴에 늠름한 기상이 어려 있었으며,

부리부리한 눈매는 태산이라도 부술 듯 위맹하게 느껴졌다.

부인인 듯한 여인은 절세미녀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백옥 같은 살결과 고아(高雅)한 기품이 마치 학과도 같았다.

한없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그녀의 입술에 자상한 미소가 감돌았다.

"당신은 결코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였나요?"

사내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부인, 외모로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되오. 인면수심(人面獸心)을 지닌 자들이 세상에 허다하오."

냉한웅은 그가 자신을 가리켜 인면수심을 지닌 자라고 은근히 비난하자, 불쾌했다.

전 같으면 일 장에 요절을 내버리려 했겠지만….

감정이 완전히 타 버려 재로 변한 양 조금도 분노가 일지 않았다.

"두 분은 뉘시오?"

사내가 주위 인물들을 훑어본 후, 대답했다.

"천외천궁(天外天宮)에서 왔네."

중원무림인들이 그를 도와 합공해 오지 않을까 꺼리는 기색이었다.

"천신(天神)과 천선(天仙)…?"

천신의 눈빛에 분노가 어렸다.

"우리 부부는 그대가 새외 무림인들을 마구 학살해 대는 것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천선도 살풋 노기를 띠었다.

"당신은 어찌 그리고 악랄한가요? 

일부 야욕을 지닌 사람들이 중원무림을 욕심내긴 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요."

천선은 삼십대 후반, 천신은 사십대 중반의 중년으로 보였다.

하나 실은 천선이 환갑(還甲)을 넘겼고, 천신은 고희(古稀)를 넘긴 나이였다.

천신이 노성을 질렀다.

"한족이 아닌 무림인들을 모조리 죽여야만 직성이 풀리겠느냐?

기 일이 끝나면 천외천궁마저 찾아가 우리 부부마저 없애 버릴 속셈이었지?"

그들이 시비를 걸어 오자, 냉한웅도 예전의 오만한 성질이 발동했다.

"그렇다면 어쩔 거요?

십대겁란을 일으킬 요지가 있다면,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남겨 두지 않을 거외다."

천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십… 대겁난… 그건 대체 뭔가?"

천선도 영문을 몰라 남편과 냉한웅의 표정을 번갈아 살폈다.

냉한웅은 상황을 제대로 파악도 못한 채 끼여든 그들이 매우 못마땅했다.

"당신들 부부는 본존과 입씨름하러 온 거요? 아니면 싸우러 온 거요?"

천신과 천선은 서로 마주 본 후, 냉음을 토했다.

"새외 무림을 지키려면 한 가지 방법밖엔 없지 않은가?"

중원무림의 무서움을 똑똑히 기억시켜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냉한웅의 눈빛이 살광을 발했다.

"관을 보기 전엔 눈물을 흘리지 않겠군."

천신과 천선도 급히 대응 자세를 갖추고 외쳤다.

"우리 부부도 죽음을 각오하고 왔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을 할망정 결코 살려 두지 않으리라."

바로 이 때, 숨넘어갈 듯 다급한 음성과 함께 가냘픈 인영이 그들 사이에 떨어져 내렸다.

"안 돼요! 싸우… 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