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 35장 한랜드 [10]
{738) 35장 한랜드-19
“서두르지 마.”
왕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두르면 멀리 보지 못한다. 차근차근 쌓아가는 거다.”
이곳은 한랜드 서남쪽의 주택가. 이제는 통나무를 가져다가 단단하게 짓는 주택이 유행이어서
이곳도 이층 통나무 저택이다.
밀집된 주택지역으로 마치 펭귄 떼가 추위를 피해 몰려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펭귄촌’으로도 불린다.
이 펭귄촌이 중국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되었다.
중국인들이 하나둘씩 짓기 시작하다가 집단촌이 된 것이다.
왕춘의 앞에 앉은 우장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대형, 러시아 놈들이 올해 카지노를 4개 허가받았는데 우린 고작 2개요.
한국이 3개, 이런 식으로 가면 우린 밀립니다. 다른 방법을 써야 됩니다.”
한랜드에는 엄청난 투자가 쏟아지고 있었는데 유흥, 관광산업이 대부분이다.
그중에서 카지노가 가장 호황으로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도박꾼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카지노 주변은 온갖 불법, 부정이 성행했고 마약과 매춘이 끼어들었다.
그만큼 이윤이 많은 사업이기 때문이다.
응접실 소파에 둘러앉은 사내는 셋, 그중 말석에 앉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어제 제 정보원한테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본 놈들이 엄청난 물량의 마약을 들여왔다는 것입니다.”
왕춘과 우장의 시선을 받은 사내는 선더, 우장의 부하로 한랜드에 가장 먼저 들어와 기반을 잡았다.
체격이 크고 무표정한 얼굴, 말을 할 때도 입술이 움직이는 것 같지가 않다.
우장의 행동대장이다. 선더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국 조직하고 같이 마약장사를 한다는군요.
판매는 한국 조직이 맡고 이익금을 절반씩 나누기로 했답니다.”
“북한 놈들이 마약 들여왔다가 박살이 났는데.”
우장이 힐끗 왕춘을 보았다. 그것은 왕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긴 한국 조직들도 한랜드 정부에서 밀어주는 김광도한테 눌리는 상황이지.”
“재미있군.”
이윽고 왕춘이 입을 열었다. 눈을 가늘게 뜬 왕춘이 선더를 보았다.
“그 소문, 역공작일지 모른다.
러시아나 김광도 조직에서 야쿠자, 한국 조직들을 씹으려고 내놓은 소문.”
“네, 그것도 계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재미있다.”
왕춘의 목소리에 열기가 올랐다.
“야쿠자하고 미국 마피아가 손을 잡았다던데 미국 놈들이 쏙 빠져 있는 것도 수상하고.”
“예, 부회장님.”
“우리 속담에 불이 크게 날수록 줍는 것이 많다고 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선더는 물론이고 우장도 경청했다.
“잘만 되면 불이 크게 나겠다.”
“부회장님.”
선더가 무표정한 얼굴로 왕춘을 보았다.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미국이 그 배후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마피아가?”
“예, 미국 정부기관하고 말입니다.”
우장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왕춘의 동공이 흐려졌다.
한랜드는 세계 열강의 각축장이나 같다.
마치 꿀에 벌레가 꼬이듯이 다 몰려왔다.
러시아, 미국, 일본, 중국 세계 4대 강국이 한랜드라는 한민족의 동토에 몰려와 주도권 다툼을 한다.
각각의 조직을 내세운 대리전 양상이다.
이윽고 왕춘이 다시 알쏭달쏭한 문자를 썼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 오랑캐를 치는 거다.”
{739) 35장 한랜드-20
오후 10시 반, 한시티 중심부의 ‘서울클럽’ 안이다.
홀을 가득 메운 손님 대부분은 관광객들로 중국인이 절반 이상, 나머지는 일본, 미국인 순이다.
“중국인 비율이 줄어들고 있어요.”
클럽 사장 안영호가 백진철에게 보고했다.
“두어 달 전만 해도 3분의 2 정도가 중국인이었습니다.”
“이게 정상이오.”
콜라잔을 쥔 백진철이 소음이 컸으므로 소리쳐 말했다.
한강회 부회장인 백진철은 김광도를 보좌하는 핵심 측근이다.
안영호도 한강회 회원으로 북한에서 백화점 지배인을 지낸 경력자다.
한강회는 이제 탈북군인뿐만 아니라 북한과 남한 출신까지 모두 가입시켰기 때문에
회원이 4000여 명으로 늘어나 한랜드에서는 가장 큰 사조직이 되었다.
한 모금 콜라를 삼킨 백진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화장실 다녀올게.”
옆자리의 고기수에게 말한 백진철이 서둘러 안쪽 화장실로 다가갔다.
서울클럽은 김광도의 사업장 중 하나로 종업원이 270여 명, 룸이 25개에 플로어가 100평쯤 되는
통나무, 시멘트 혼합 건물이다. 이제 초기의 컨테이너 가게를 대부분 탈피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랜드까지 철도와 고속도로가 개통된 덕분으로 물자 수송이 몇 배나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백진철이 손님들 사이로 사라졌을 때 안영호가 고기수에게 물었다.
“대장 없는 사이에 위스키 한잔 줄까?”
“아이고, 됐습니다.”
놀란 고기수가 손까지 저었다.
“근무시간에 술 마셨다가는 잘립니다.”
고기수는 백진철의 경호원이다.
김광도의 지시로 백진철은 9시부터 새벽까지 업소를 돌아보는데 이제는 하룻밤에 다 끝내지 못한다.
업소가 26개나 되어서 이틀에 한 번꼴로 들르게 되었다.
고기수가 손목시계를 보고는 안쪽을 힐끗거렸다. 갈 시간이 된 것이다.
그때였다.
손님들을 헤치고 종업원이 달려왔는데 다급한 눈이다.
그것을 본 안영호가 이맛살을 찌푸렸고 군 출신 고기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넘어질 듯이 앞에 선 종업원이 소리쳤다.
“큰일 났습니다! 부회장님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기수는 화장실 쪽으로 달려갔고 안영호도 뒤를 따른다.
화장실 앞으로 달려간 고기수는 이미 사람들이 밖에 몰려서 있는 것을 보았다.
종업원 하나가 필사적인 얼굴로 문 앞에 지켜 서 있다가 달려온 고기수를 보자 비켜섰다.
뛰어든 고기수는 바닥에 누워있는 백진철을 보았다.
“윽.”
고기수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백진철의 이마에 아이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치켜뜬 백진철은 이미 생명체가 아니다.
군 출신의 고기수는 백진철이 뒤에서 총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총탄이 이마로 빠져나오면서 큰 구멍을 낸 것이다.
소변을 보는데 뒤에서 쏘았다.
머리를 든 고기수가 소리쳤다.
“내무부에 신고해!”
문 앞에서 얼쩡거리는 종업원에게 다시 소리쳤다.
“화장실 출입을 막아라!”
고기수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쥐었다.
이제 김광도에게 보고를 하려는 것이다.
한강회 부회장이 암살을 당한 상황이다.
손이 떨렸으므로 고기수는 심호흡부터 하고 나서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 울렸을 때 김광도가 밝은 목소리로 응답했다.
“여보세요.”
“회장님, 부회장이 총에 맞았습니다.”
문을 닫은 화장실 안에서 피 냄새가 맡아졌다.
{740) 35장 한랜드-21
한랜드 내무부장 안종관은 신의주 개발부터 참여한 안보, 내정(內政) 전문가다.
오전 10시 반, 한랜드 행정청의 장관실에 앉아있는 안종관의 표정은 어둡다.
“용의자는 많습니다.”
안종관이 서류를 펼치면서 말했다.
“백진철은 김광도의 최측근으로 한국조폭의 적이었지요.
또한 중국이나 러시아 쪽에서도 위험한 상대였습니다.”
서동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누구든 김광도를 직접 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것은 한랜드에 대한 도전이 될 테니까.
김광도의 오른팔이며 북한 세력을 이끌고 있는 백진철을 제거해서
조직에 치명상을 입히는 방법을 택했다.
안종관이 말을 이었다.
“요즘 강력사건이 많아졌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인 거주 지역에서 살인사건이 자주 일어나고 마약 사범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서류에서 시선을 뗀 안종관이 서동수를 보았다.
“마약에 손을 대지 않는 조직은 김광도 조직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마약은 지난번 북한산을 근절시켰어도 다시 번지고 있다.
러시아 조직도 겉으로는 거래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여러 번 하부 조직원이 마약 거래를 하다가 적발되었다.
중국인 집단 거주지인 펭귄촌은 아편촌이라고도 불릴 정도였다.
추위와 일에 지친 중국인들이 집에 들어가면 아편을 맞고 쉰다고들 했다.
서동수가 머리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한강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김 사장이 사건이 일어난 후에 부회장으로 보좌역이었던 조창복을 임명했습니다.”
안종관이 다시 서류를 보았다.
“조창복은 지난 달에 밀입국했는데 북한군 대좌 출신입니다.
탈북해서 중국에 2년쯤 살다가 가족과 함께 한랜드로 이주했습니다.”
“거물급이군.”
“50세로 나이도 지긋합니다. 백진철이 김광도에게 보좌역으로 추천했습니다.”
한강회는 김광도의 사업뿐만 아니라 한랜드의 질서 확립에 필요한 조직인 것이다.
안종관이 사무실을 나갔을 때 서동수가 휴대폰을 들고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더니 곧 김광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장관님.”
“응, 난데. 지금 어딘가?”
“예, 어젯밤에 일이 좀 있어서요….”
“알고 있어. 그것 때문에 전화한 거야.”
“예, 장관님.”
“보고 받았는데, 자네도 조심해야 돼.”
“감사합니다, 장관님.”
“자네 기반이 굳어져야지 한랜드가 건강하게 발전하네.”
“명심하겠습니다.”
“곧 조사 결과가 나오겠지만 새로 임명한 부회장, 한랜드에 적합한 인물인가?”
“저기….”
헛기침을 한 김광도가 말했다.
“조창복 씨는 북한군 대좌 출신으로 반란모의 혐의를 받자
가족과 함께 탈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그런데 저한테 그러더군요.
국경 경비대에서 마약 밀매 사업을 하다가 발각이 되어서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
“정직했고 통솔력도 있어 보이는데다 마약관계 사업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부회장을 맡겼습니다.”
“잘 했어.”
마침내 숨을 들이켠 서동수가 말했다.
“그렇게 사람을 포용하는 거야. 결함 없는 사람은 없어. 그리고 마침 적소에 적재를 고용했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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