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35장 한랜드 [9]
{736) 35장 한랜드-17
집으로 들어선 김광도가 주춤 멈춰 섰다.
저절로 숨이 들이켜졌고 몸이 굳어졌다.
주방에 장현주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 5시 반,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참이다.
고기 냄새가 맡아졌다. 갈비를 굽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장현주가 말했다.
“식사 차려 드릴게요. 씻고 오세요.”
10년쯤 같이 산 것처럼 말했지만 시선은 내려졌다.
손에 젓가락을 들고 있는 것도 어색하다.
그때야 어깨를 늘어뜨린 김광도가 다가가 세 걸음쯤 앞에 섰다.
그날 밤, 김광도는 장현주를 부산호텔 앞에 내려주고 돌아왔다.
돈이 없을 것 같아서 5000달러를 주었더니 장현주는 아무 말 없이 받았다.
그것이 일주일 전이다.
“뭐, 부담 느낄 것 없는데….”
김광도가 조금 으스대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깨가 치켜졌다가 내려갔고 배가 내밀어졌다.
“그때 내가 말했던 것처럼 다 끝났으니까 도장 찍어줄 용의도 있고.”
오늘 낮에 부산호텔 108호실로 노숙자 차림의 가족 넷이 들어섰다.
바로 장현주의 가족이 북한에서 온 것이다.
방한복을 준비하지 못해서 경비대에서 구해준 낡은 방한복을 똑같이 입은 넷이
방 안으로 들어간 후에 울음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들렸다.
장현주의 어머니, 오빠, 올케, 그리고 조카다.
그때 몸을 돌린 장현주가 가스레인지 불을 끄더니 다시 김광도를 보았다.
이제는 조금 차분해졌고 눈동자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 식구 넷을 어떻게 하죠? 당분간 이곳에서 살게 하면 안 될까요?”
그러고 보니 부산호텔은 1급이다.
하루 숙박비가 250달러다.
눈만 치켜뜬 김광도에게 장현주가 말을 이었다.
“우리 둘은 실크로드 방에서 자고요. 괜찮겠죠?”
“그럼 섹스는 어떻게 하고?”
정색한 김광도가 묻자 장현주가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이번에 가게 증축 작업을 할 때 40피트 하나만 더 놓죠. 지금 숙소는 사무실로 쓰고요.”
“그럼 오늘 밤이 이 집에서 마지막 섹스가 될 건가?”
머리를 기울였던 김광도가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선 안 했구먼.”
“고마워요.”
“아직 해주지도 않았는데 뭘.”
“나, 잘할게요.”
“당신 몸은 괜찮았어, 나하고 궁합도 맞고.”
“오빠도 좀 취직시켜 주세요.”
“오늘 밤 세 번만 해주면 고려해보지.”
“네 번도 좋아요.”
마침내 끌려든 장현주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역시 남조선 남자들은 속물이야.”
“임기응변이 탁월하지.”
“호텔에서 생각 많이 했어요.”
“나하고 섹스 생각?”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지금 해요.”
정색한 장현주가 한걸음 다가와 섰다.
“밥 먹기 전에 해요?”
“좋지.”
다가선 김광도가 장현주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그때 장현주가 김광도의 목에 팔을 감으면서 말했다.
“키스부터.”
김광도가 머리를 숙였을 때 하반신을 딱 붙인 장현주가 속삭였다.
“애무 오래 해줘요. 그냥 막 넣지만 말고.”
“이 여자, 선수로군.”
그러나 김광도는 안다. 장현주는 말만 선수다.
{737) 35장 한랜드-18
“하 동무가 내 애인인 줄 아시지요?”
불쑥 서동수가 물었으므로 박영진이 정색했다.
커피잔을 내려놓던 하성숙이 하마터면 커피를 엎지를 뻔하더니 비틀거리며 비켜섰다.
오전 9시 반, 초대소의 응접실에 서동수와 박영진이 마주 앉아 있다.
박영진이 서동수를 공항으로 배웅하려고 나온 것이다.
박영진이 고개를 돌려 옆에 선 하성숙을 보았다.
하성숙은 이미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젯밤에 둘은 애욕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하성숙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수없이 터졌다.
애정의 감정이 적더라도 열성을 다해 주는 몸은 감동을 준다.
이윽고 박영진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예, 압니다. 장관 동지.”
“하 동무를 한랜드로 보내 주시지요.”
서동수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박영진을 보았다.
“하 동무 가족하고 같이 말씀입니다.”
“그러지요.”
박영진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흘 안에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손목시계를 본 서동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하성숙을 보았다.
“그럼 열흘 후에 한랜드에서 보자.”
목이 메인 하성숙은 머리만 숙이고는 입을 열지 못했다.
머리를 든 하성숙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밖으로 나온 서동수는 다시 박영진과 승용차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공항으로 향했다.
“장관 동지, 어젯밤에 위원장 동지께서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차가 초대소 정문을 나왔을 때 박영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다 말씀드리라고 위원장 동지께서 지시하셨습니다.”
“…….”
“2년 후의 연방대통령 선거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지요.
우리는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
박영진이 길게 숨을 뱉었다.
60대 후반의 박영진은 김동일의 최측근이다.
호위총국 사령관이며 국방위 부위원장, 이제 차수다.
북한의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김동일의 각별한 신임 덕분이다.
박영진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남조선 내부의 반(反)정부 세력들과 연대해 연방대통령 선거를 치를 작정이었지요.
그런데 장관께서 후보가 되시는 바람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
“조심하셔야 됩니다.
북조선 내부의 강경파, 과잉 충성자들이 장관님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제야 서동수는 공항으로 향하는 차량 대열에 경호차가 수십 대 따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서동수가 입맛을 다시고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
“한랜드에도 신(新)공산당 조직이 뿌리를 내리려다가 이번에 좌절됐지요.
당분간 막을 작정입니다.”
“당분간이라고 하셨습니까?”
박영진이 묻자 서동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랜드 기반이 굳어지면 놔둘 겁니다.
국가 전복 세력만 아니라면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
“어차피 연방은 한국당과 공산당 양당 체제로 운영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 체제와 비슷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박영진도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하긴 다 포용해야겠지요.”
박영진이 머리를 돌려 서동수를 보았다.
“그러고 보면 장관께서 적임이십니다.”
박영진은 그 이유는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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