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33장 개척자 [5]
(687) 33장 개척자-9
이맛살을 찌푸린 김광도가 백진철을 보았다.
로스토프는 한국말을 몰랐지만 분위기는 파악한 것 같다.
그때 김광도가 물었다.
“너, 정말이냐?”
“뭐가 말입니까?”
“네 동료가 수백 명이라는 말.”
“한랜드에 북한군 탈영병이 그 정도 됩니다.”
“다 네 동료야?”
“아닙니다.”
“동토에 하룻밤에 열서너 명이 묻혀?”
“소문이 그렇습니다.”
“그놈이 은행하고 사우나, 식당에 가는 건 어떻게 알았어?”
“제 동료를 시켜 미행했지요.”
김광도가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긴 숨을 뱉었다.
조금 전에 조상규와 최은영은 약정서를 찢어버리고 5만 달러를 가져간 것이다.
그때 백진철이 말했다.
“형님이 말씀하신 여자들을 준비했는데 언제 보시겠습니까?”
“여자들을?”
“예, 숙소에 아는 여자가 있어서 부탁했지요.”
“아니, 그게…….”
치마만 두르면 되느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문 김광도가 그때야 백진철에게 인사를 했다.
“네 덕분에 내가 살았다.”
“형님 덕분에 제가 살고 있습니다.”
백진철이 바로 말을 받는다.
그날 저녁 공사를 마치고 김광도와 백진철은 근로자 숙소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이곳도 컨테이너 2개를 붙인 식당이었는데 손님 대부분이 북한 출신이었다.
앞장선 백진철이 칸막이가 되어있는 구석 쪽 문을 젖히고 들어섰으므로 김광도도 뒤를 따랐다.
한 평도 안 되는 방에는 식탁 하나만 놓여 있는데 여자 하나가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낡은 방한 코트를 입었지만 갸름한 얼굴형의 미인이다.
“장 동무, 인사하시오. 김 사장님이시오.”
백진철이 소개하자 여자가 머리를 숙였다.
“장현주라고 합니다.”
목소리가 맑고 울림이 있다.
인사를 마친 셋이 자리에 앉자 종업원이 들어와 주문을 받아갔다.
하나밖에 없는 방 손님은 100달러 이상 주문을 해야 한다고 해서 술과 안주까지 200달러어치를 시켰다. 종업원이 나갔을 때 백진철이 말했다.
“장 동무도 탈북자지요. 평양에서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중국땅도 잡힐 가능성이 많으니까요.”
“무슨 큰일을 저지르셨군.”
김광도가 웃으며 말을 받았지만 둘의 반응이 서먹했으므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탈북자에게 중국보다는 러시아가, 러시아에서는 한랜드가 더 안전한 땅이 될 것이다.
한랜드에서는 아직 밀입국자 제재를 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밀입국자를 위해 숙소를 지어주고 취업 제한도 없다.
그때 장현주가 김광도를 보았다.
“전 평양백화점에서 근무했는데 공금을 횡령하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김광도의 시선을 받은 장현주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거금 4300달러였죠. 그 돈으로 동생하고 어머니는 남조선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저는 기회를 놓쳐서 다급한 김에 이곳으로 도망쳐 온 것입니다.”
“잘하셨어요.”
김광도가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내 말은 한랜드로 잘 오신 거란 말씀이오. 그럼 장현주 씨가 내 가게 여자들을 모아 주시겠습니까?”
“네, 하겠습니다.”
장현주가 똑바로 김광도를 보았다.
“여기서 다시 남조선으로 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이곳에서 기반을 굳히겠습니다.”
결연한 표정이다.
(688) 33장 개척자-10
“너 약 먹었어?”
백진철이 묻자 곽태일이 머리만 저었다.
그러나 눈동자는 흐렸고 어깨가 늘어져 있다.
둘은 룸살롱 공사 현장 구석에 마주 보고 서 있다.
오후 5시쯤, 공사는 인테리어 작업이 내일 끝날 테니 사흘 후에 개업할 예정이다.
주위를 둘러본 백진철이 바짝 다가섰다.
방금 마약을 먹었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런데 왜 이래? 이 자식, 바른대로 말 안 해?”
“나 200달러만 빌려 줘. 아니, 150달러.”
곽태일이 갑자기 백진철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그러더니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100달러도 좋아. 제발, 형님…….”
“이 새끼, 약 중독이구먼.”
소매를 뿌리친 백진철이 곽태일의 목을 움켜쥐었다.
눈을 부릅뜨고 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곽태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이 개새끼, 차라리 죽어라.”
곽태일은 백진철이 한시티에서 만난 유일한 9군단 국경경비대 출신이다.
나이도 두 살 어리고 계급도 아래여서 동생처럼 대했고 이곳 공사장에도 데려와 일을 시킨 것이다.
이윽고 백진철이 손을 풀자 곽태일이 컨테이너 벽에 등을 붙이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곽태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백진철이 쪼그리고 앉아 곽태일의 어깨를 두 손으로 밀었다.
“너, 언제부터 약 먹었어?”
“한 달 전쯤…….”
“그럼 돈을 모은다는 것, 거짓말이지?”
“못 끊었어.”
“누구한테 샀어?”
“숙소에서…….”
“숙소 누구?”
“고려산업 직원들.”
“조형채, 정기필 부하들 말이냐?”
백진철이 곽태일의 어깨를 거칠게 밀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곽태일이 머리를 컨테이너에 부딪쳤지만 멍한 표정으로 백진철을 올려다보았다.
조형채와 정기필은 북한 밀입국자 사이에서 터줏대감으로 알려진 사내들이다.
그중 조형채가 사장으로 불리면서 휘하에 수십 명을 거느리고 인력공급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인력공급 업체가 수십 개 난립하고 있지만 조형채의 고려산업이 가장 인원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
잠시 후에 끝쪽 컨테이너 방 안에서 백진철은 김광도와 마주 보고 서 있다.
백진철의 말을 들은 김광도가 입맛을 다셨다.
“야단났다. 임금 받아서 마약으로 써버리면 어떻게 산단 말이냐?”
말은 그랬지만 김광도는 시큰둥한 표정이다.
상황이 피부에 아직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백진철이 김광도를 보았다.
“형님, 곽태일이 이번 룸살롱에 취업하면 약 판매를 맡기겠다고 했답니다.”
김광도가 긴장했고 백진철의 말이 이어졌다.
“곽태일을 일 못하게 하면 그놈들이 가게를 가만 놔두겠습니까? 다른 놈을 시키겠지요.”
“…….”
“조형채는 마약을 북한에서 공급받는다고 합니다.
안에 들어가 군인 호위를 받으면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
“이미 숙소의 북한 노동자 2할이 중독자가 되었고 곧 러시아, 중국에서도 마약이 들어와
시장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거 야단났군.”
이맛살을 찌푸린 김광도가 긴 숨을 뱉었다.
“하나를 피하면 더 큰 파도가 덮쳐 오는 꼴이구나.”
백진철의 시선을 받은 김광도가 어깨를 추켜올렸다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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