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에필로그-2 (종결)
‘뻐꾸기둥지’의 아기들이 말을 배울 때면, 아기들은 모두 고재형을 ‘아빠’라 불렀다.
아기들에게 유미는 또 다른 ‘엄마’일 뿐이었다.
화랑 일에 매력을 못 느끼던 그는 유미가 ‘뻐꾸기둥지’로 내려오자
함께 내려와 시설의 일을 도왔다.
사람들은 그가 유미의 남편이라고 오해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재형의 청혼을 유미는 3년째 보류하고 있다.
어제 파티에서 우연히 윤동진, 박용준, 고재형, 정효 스님, 이유진이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그들과 샴페인을 터트리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나만 골라 평생을 산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지루할까. 기둥이야 많을수록 든든하지.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유미는 ‘뻐꾸기둥지’의 사무실에서 오랜만에 일기장을 꺼내 일기를 적는다.
‘짐승은 발정하지만 인간은 유혹한다.
그러니 유혹하는 인간은 인간적이다.
너무도 인간적이다.
그는 삶을, 인생을 아는 사람이기에. 삶은,
삶은 달걀이 아니라 달걀을 만들기 위한 애처로운 몸짓이기에.
내게 유혹은 또 다른 삶의 의지이자 에너지다.
내가 이곳의 힘없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두 돌배기 여자아기가 뒤뚱뒤뚱 걸어와 유미의 무릎에 올라앉으려 한다.
유미가 그 아이를 안아 올리자 아이가 유미가 쥐고 있던 볼펜을 빼앗아 일기장에
휘휘 낙서를 하기 시작한다.
“엄마한테 가.”
“함미, 함미 좋아.”
아이가 고개를 흔들자 유미는 아이의 머리꼭지에 뽀뽀를 한다.
유미에게 유일하게 ‘함미’라 부르는 아이.
“보람아! 할머니 방해하지 말고 이리 와.”
사촌 수민이 들어와서 재촉한다.
아이들을 끔찍이 좋아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는 수민 또한 ‘뻐꾸기둥지’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
유미가 이 시설 운영에 애착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설희 때문이다.
이런 것도 모전여전일까?
팔자도 세습되는 걸까?
설희는 대학에 낙방하고 재수를 하던 중에 임신을 하게 됐다.
지금 아이의 아빠는 군에 가 있지만, 설희는 아이 아빠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
설희는 ‘뻐꾸기둥지’에서 보람이를 돌보며 대학에 입학해 공부하고 있다.
이 집의 아기들의 엄마 노릇도 하면서 한 아이의 할머니이기도 한
인생이 자신이 생각해도 우습다.
아직 거울을 보면 3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외모지만,
그 몸뚱이 안에 화석처럼 온갖 상처와 영광이 새겨졌을 자신의 인생이
유미는 애틋하고 대견하다.
바다의 수면이 저물녘의 햇빛 속에 은사(銀絲)로 짠 무대의상처럼 반짝인다.
갈매기 두 마리가 날지 않는다면 너무도 그림 같은 정경이다.
‘갈매기식당’의 초라하고 외롭던 여자아이가 참으로 먼 곳을 돌아
이제 고향으로 돌아왔구나. 모든 탄생에는 의미가 있겠지만
어제 아름다운 생일을 보낸 유미는 새삼 자신을 낳아 준 엄마가 고마웠다.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유미씨, 오늘 저녁약속 잊지 않았지?”
새로운 유혹자의 흥분을 억누르며 내는 저음의 목소리.
유미의 얼굴에 홍조가 노을처럼 번진다.
장미꽃잎이 벌어지듯 유미는 살포시 입술을 벌려 미소를 짓는다.
사랑은 항상 달콤하진 않지만, 사랑의 예감은 언제나 설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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