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 뻐꾸기는 둥지를 짓지 않는다-12
조두식의 자살 미수 사건 이후,
매스컴에서는 YB그룹의 불법 비자금 사건과 탈세 혐의 등이 연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질풍노도와 같은 현실 속에서도 로즈갤러리는 별 탈 없이 순풍에 돛을 단 듯 순항하고 있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려고 했던 돈이 어떤 시스템을 갖추자 힘들이지 않고도 굴러들어왔다.
화랑은 대표인 우승주와 똘똘한 큐레이터, 그리고 유미와 고객 관리를 하면서 나름대로
수익을 올리는 고수익, 아니 고재형, 프랑스의 다니엘화랑과 에릭의 경매회사,
그리고 현지에서 유미 대신 일을 봐주는 박용준의 충성심, 그런 것들이 하모니를 이루어
점점 내실을 탄탄하게 만들어 갔다.
불경기인 미술시장에서 그렇게 입지를 굳히는 것에 유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불행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면 유미는 또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수많은 난관과 장애를 헤치고 나와 바라본 세상은 이상하게도 한참 악을 쓰며 울다
지친 아이의 눈에 들어온 노을 진 하늘처럼 처연했다.
유미는 작년에 윤 회장에게 쫓겨 프랑스로 가기 전에 보았던 강화 바다의 노을이 떠올랐다.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 일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전화가 걸려 왔다.
다니엘이었다.
요즘 한동안 힘든 일을 겪는 동안 유미는 다니엘에게 소홀했다.
다니엘이 기운 없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즈. 보고 싶소.”
“다니엘, 제가 그동안 너무 바빠서….”
“그랬겠지. 하지만 이곳으로 빨리 좀 와 주면 좋겠어.”
“아, 벌써 계약 갱신 기간이 되었나…? 다니엘, 미안해요.
난 아직 결혼은 자신이 없…”
유미가 넘겨짚고 말하자 다니엘이 말을 끊었다.
“나도 결혼은 자신이 없어. 다만 내가 지난번에 말한 약속을 지키고 싶어.”
약속? 약속이 뭐였더라? 결혼 약속 말고…?
“내가 떠나기 전에 로즈를 보고 싶어.”
“어머, 어디 가세요?”
“그래.”
“함께 가요. 지금 난 노을이 보고 싶은데, 우리 제주에서 바라보던 일몰 기억나요?”
“일몰이라… 해가 넘어가는 건 정말 순식간이야. 내가 좀 아파. 보고 싶어. 빨리 와.”
전화가 끊겼다.
전화를 했지만 통화는 다시 연결되지 않았다.
유미는 에릭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니엘에게 무슨 일이 있어요?”
“으음… 그게 아버지가 췌장암 말기예요.
요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병원에 계시는데 상태가 좀….”
“왜 내게 알리지 않았어요!”
유미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혹시라도 상속을 뺏기는 일이 있을까 봐 에릭이 연락하지 않았을까.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요. 아버지가 알리지 말라고 명령했어요.”
전화를 끊고 유미는 곧바로 다음 날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그래서일까? 두 달 전에 서울에 왔을 때 그는 몹시도 힘겹고 피로해 보였었다.
유미는 마지막으로 그가 지키려 하는 약속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좀 전의 다니엘의 슬프고 기운 없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일몰이라… 해가 넘어가는 건 정말 순식간이야.
유미는 그 말이 무슨 주술이라도 되는 듯이 시계를 보고는 차에 올라탔다.
강화도로 달렸다.
해가 꼴딱 숨이 넘어가기 전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싶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처럼 유미는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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