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503) 뻐꾸기는 둥지를 짓지 않는다-9

오늘의 쉼터 2015. 4. 22. 17:40

(503) 뻐꾸기는 둥지를 짓지 않는다-9

 

 

 

 

 

서울로 돌아오자 유미는 곁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수익을 돌려보냈다.

 

예전 같으면 이 고통과 외로움을 섹스의 쾌락으로 잠시라도 잊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홀로 있는 고적함과 외로움이 서늘한 두려움을 안겨주었지만,

 

유미는 엄마의 일기장을 다시 읽었다.

 

엄마의 일기장은 많은 것을 알려주었지만, 엄마 또한 모르고 있는 것도 있었다.

 

두꺼운 일기장에 기록한 엄마의 글 중에 잊히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유미는 엄마를 이해하려고 엄마의 심정이 되어 그 부분들을 다시 읽었다.  

 

 


‘1972년 12월 19일

겉으로는 윤 사장과 유 의원이 형님, 아우하는 사이지만

 

나는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미워하는지 안다.

 

특히 윤 사장이… 나 또한 윤 사장이 밉다.

 

유 의원이 나를 좋아하는 눈치를 채고는 내게 그 짓을 한 나쁜 인간.

 

그는 유 의원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나를 먼저 가져 버리고 싶었다고 했다.

 

윤규섭은 유병수에게 뺏기고는 못 산다고 했다.

 

지고는 못 산다고도 했다.

 

나는 유 의원과 아무 육체적인 관계가 없다고 윤규섭에게는 거짓말을 했지만

 

엄연히 내 첫사랑은 유병수다.

 

어쩌다 나는 이렇게 두 남자 사이에 낀 이상한 신세가 되었을까.’


‘1973년 1월 8일

이상하다.

 

한동안 유 의원이나 윤 사장이나 너무나 조용하다.

 

곧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된다고 한다.

 

그는 바쁘다며 더 이상 나를 만나주지도 않는다.

 

유 의원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윤 사장도 사무실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속은 걸까? 아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는다면?

 

아아, 끔찍해. 내 꿈은? 내 미래는?

 

내가 두 사람의 성의 노리개밖에 안 되는 걸까?

 

그래도 나를 이렇게 쓰레기 취급하면 안 되지.

 

그러면 이 오인숙이가 가만 있지 않지.’


 

‘1973년 1월 11일

임신을 했다고 하자 유 의원이 내게 말했다.

 

나를 운명의 여자로 알고 사랑하지만 조금만 참아달라고.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고.

 

당선이 지금은 절대의 목표라고. 사랑하는 남자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고.

 

나를 버리지 않겠다고. 아이는 좋은 타이밍에 또 가질 수 있다며.

 

그는 물기 있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1973년 1월 13일

윤규섭은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하자 금고를 열어 노가다 일당을 줄 돈 중에서

 

몇푼 집어서 건네며 아이를 떼고 오라고 했다.

 

그는 내게 아이까지 만들며 복잡하게 얽히기 싫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자기가 원한 건 사랑이 아니라고. 미친 년, 정신 차리라고.’
 

 

‘1973년 1월 17일

아아, 죽고 싶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산다면 평생 이 날을 죽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1973년 3월 5일

내가 이곳에 끌려온 지 한 달이 넘어간다.

 

깡패 양아치 같은 그 놈이 나를 밤길에서 강간하고는 이곳에 가두고

 

주야장천 그 짓만 한 게 내 몸은 이제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내가 저항을 할 때마다 겁을 준다.

 

술집에 팔아넘겨 평생 바깥에 못 나오게 하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고.

 

너는 이제 여자로서 인생 종쳤으니 대신 자기를 남편으로 모시고 살라고 한다.

 

난 고향 부산에 데려다 주면 그러겠다고 말했다.

 

고향에 갈 수 있다면, 이 말종 같은 인간 조두식과 살면 또 어떠랴.

 

아아, 모르겠다. 그냥 죽어버렸으면….’


 

이 무렵의 일기에서 조두식이 처음 언급되었다.

 

하지만 이미 그와의 악연은 1973년 1월 17일날 시작되었다.

 

엄마의 인생에서 그해 1월은 잔인한 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