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2) 뻐꾸기는 둥지를 짓지 않는다-8
새벽 예불을 마치고 아침 공양이 끝나고 유미는 요사채로 돌아왔다.
넋을 놓고 멍하니 장지문에 어리는 소나무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정효 스님이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정효의 방에 들어가자 그는 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짐은 다 쌌니?”
“짐이라고 할 게 뭐 있어?”
“그래. 인생이 공수래 공수거이긴 하지만….”
“인간 세상이 무서워.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넌 아무래도 여기에서도 못살 걸.
모든 게 다 업보라 생각하고 세상에서 풀어라.”
정효가 유미의 잔에 찻물을 따라주며 애틋한 시선을 거두었다.
유미가 정효가 머무는 작은 절에 온 지도 보름이 되었다.
끔찍한 일을 겪고 심신은 공황상태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허무하고 모든 인간관계가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차서
하루하루를 사는 게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웠다.
“그 사람을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어.”
유미가 겨우 짜내듯 말을 꺼냈다.
“나무 관세음보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지? 인간이 그렇게 사악할 수 있는 거야?”
“너 또한 그 나무의 뿌리에서 이어져 온 가지이니 원망하지 말아라.”
“내가 겨우 그런 뿌리에서 나온 가지라니.
내 존재가, 내 인생이 정말 역겨워.
인간이 아니라 내 몸에도 더러운 짐승의 피가 흐르는 거 같아. 내 몸뚱이도 싫어.”
“그렇게 자책하지 마라. 다 불쌍한 존재다. 연민지심을 가져라.”
“설사 자신도 모르게 그랬다손 쳐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지지 않겠니?
또한 부처님의 가피로 네 마음이 곧 평안해질 거다.
참 너를 데려가겠다고 좀 전에 산문(山門) 밖에 차가 도착해 있다.”
“누구?”
“재형이, 고재형.”
“고재형?”
“사람 인연도 참! 그 친구 내가 계를 받을 때 함께 절에서 공부했던 친군데
결국 오래지 않아 속세로 바로 나가 버렸지. 머리도 비상하고 특별한 인물이었는데.
작년에 날 한 번 찾아왔더라고. 너랑 좀 안다며.”
“그럼….”
유미가 그제서야 알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두식이 알고 있는 건 고재형이었던가 보다.
유미가 간단한 짐을 꾸려 정효와 작별하고 산문을 나오자
절 밑의 작은 주차장에서 고수익이 차의 보닛에 비스듬히 기대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웃고 있는 그의 어깨에 붉은 단풍잎이 떨어져 있었다.
“웬일이야?”
“정효 스님이 연락했더라고. 절간에서 오히려 시름이 깊어가니 데려가라고.
아닌게 아니라 얼굴이 많이 상했네.”
“고수익이 아니라 고재형이 본명이야? 양파 같은 인간이라 하더니 어디까지가 진짜야?”
“일단 타셔.”
수익이 유미의 짐을 받아 들고 차 문을 열어주며 웃었다.
유미가 차에 오르자 고수익, 아니 고재형이 차를 출발시켰다.
뒤를 돌아보니 정효 스님이 일주문 밖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모습이 멀어지면서 차는 사하촌을 지나 국도로 들어섰다.
어쨌든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다.
“고수익은 도대체 누구야?”
유미가 물었다.
“뭐 예명 같은 거라 해 두지. 특히 오유미와 작업할 때 썼던…
이름이야 뭐 중요해. 나라는 놈의 실체가 중요하지.”
“그럼, 너의 실체는?”
“이제부터는 오유미의 진실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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