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마지막 눈물-11
편지는 올봄에 쓰여진 것이었다.
‘나의 딸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많이 망설이고 있단다.
지완이에게 물으니 네가 기약 없이 프랑스로 건너갔다고 하더구나.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깝구나.
나는 이제 내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만약 살아서 너를 만난다면 마지막으로 ‘내 딸 유미야’라고 부르며 꼭 안아 주고 싶구나.
만약 네가 나를 만나러 왔을 때 내가 이 땅에 없다면 대신 이 편지를 전해 주며 용서를 빌고 싶구나.
한평생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아비를 아비라 못 부르고 딸을 딸로 부르지 못한 세월의 한을 다 얘기할 수는 없지만
나를 용서하거라.
네 엄마와 너의 존재를 그늘에 숨겨 두고 한평생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네가 지완이와 같은 서울의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를 처음으로 보던 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입학식 날,
자의 반 타의 반 이상한 방식으로 만나긴 했지만 네게 고백을 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어느 날 지완이가 친한 친구라며 집으로 너를 데려왔을 때의 놀라움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구나. 빛의 세계에 살고 있는 딸 지완과
어둠의 세계에 살고 있는 딸 유미. 나는 그저 조마조마하게 네 인생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네가 불행한 결혼생활에서 곧 벗어나는 듯하더니 더 큰 구렁텅이로 빠졌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너를 그 어둠의 세계에서 건져 내고 싶었던 건 나의 아픈 양심이었다.
어쨌거나 네가 프랑스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한국에 돌아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난 흐뭇했었다.
가끔 널 보면서 처음으로 아비로서의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곧 또 다른 고뇌에 빠지게 되었다. 한동안 너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유미는 여기까지 읽고 숨이 콱 막혔다.
아! 이럴 수가… 그러니까 유 의원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미는 계속 읽었다.
‘네가 프랑스에서 계획적으로 황인규를 유혹한 정황을 포착한 정보를 받았을 때였다.
지금에야 지완이와 황인규의 인연이 끝난 상황이라 다행이지만 말이다.
어찌 생각하면 너를 지완이처럼 딸로 대하지 못한 나에 대한 하늘의 복수이자
운명적인 재앙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유 의원은 황인규와 나의 관계를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아마도 얼마 전에 황인규가 자살했다는 건 모르고 있을 것이다.
지완이 말 못하는 아픈 아버지에게 그걸 이야기했을 리가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유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미는 편지를 마저 읽었다.
‘짐승도 제 새끼를 보호하는 법인데, 당시 맞물린 나의 정치적인 문제로 보나,
신조로 보나 나는 너의 탄생을 감추고 살 수밖에 없었다.
인간으로서, 아니 출세가도에 서 있는 남자로서의 사회생활,
그것도 1970년대에 정치적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데는 힘없는 한 여자와 어린 생명은
도움은커녕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핑계도 면죄부가 될 수는 없겠지.
너의 탄생에 끼어든 복잡한 상황은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 생각된다.
내가 저지른 모종의 죄를 이제 깊이 후회한다.
너에게 그걸 모두 얘기해 주고 떠나가야 하건만….
만약 내가 죽은 후 진실을 꼭 알고 싶다면 윤규섭을 만나거라.
그가 한 일이 이렇게 한평생 비밀의 덫에서 빠져나오게 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다니.
조두식 또한 진실의 한 줄기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유미는 가슴이 뛰었다.
이제 서서히 진실의 오솔길이 숲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무언가 어떤 음모가 거미줄처럼 엮어져 애초부터 유미의 인생을 옭아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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