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 위험한 약속-4
“그는 제게 관심이 있지요.
제가 그의 구미에 맞는 능력 있는 딜러니까요.
데미안 또한 마케팅의 귀재이고요.
데미안은 화랑에 예전에 싸게 주었던 작품을 회수해서 몇 배나 부풀려서 비싸게 팔기도 한답니다.
작품을 작가에게서 사는 건 그걸 훔치는 행위고 돈으로 사과를 하는 거라고 그는 종종 말하죠.
비싼 돈 주고 작품을 사게 되면, 그는 마지못해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그대의 사과를 받아들이노라.”
“오만하네요.”
“그러니 저와 함께 가야죠. 하긴 그럴 만도 하죠.
삶과 죽음을 환기시키는 데 데미안만큼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작품이 어디 있습니까?
그 독창성과 창의력은 독보적이지 않습니까?”
데미안 허스트는 동물의 사체를 포르말린에 넣어 영원한 죽음을 보여 준다.
“왜 그런 기괴한 죽음을 보여 줄까요?”
“글쎄요. 삶의 숭고함과 희망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게 아닐까요?”
“죽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데도요?
그게 예술이란 이름으로 관대하게 받아들여지고 열광하는 게 우스워요.”
작품에서 보여 주는 ‘주검’을 감상하는 것과 실제로 누군가를 죽여
그 ‘죽음’을 보는 것은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 걸까.
삶의 숭고함과 희망과의 사이에서….
유미는 가끔 이유진의 ‘주검’을 꿈에서 본다. 포르말린 용액이 아니라
이유진의 주검은 유미의 무의식의 바다에 수장되어 있다.
“참, 밤도 늦었으니 예약한 객실로 올라가시죠.”
에릭의 말에 유미는 이유진의 생각에서 되돌아왔다.
시간은 열한시가 다 되었다. 왠지 아쉬웠다.
“다음엔 제 집으로 모실게요. 그림도 보여 드리고.”
집으로?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유부남 아닌가?
“에릭, 실례지만 결혼하셨나요…?”
“아뇨.”
에릭이 싱긋, 웃었다.
이거, 작업 들어오는 건가?
자타가 공인하는 능력남이라면서, 이 남자 너무 쉬운 남자 아냐?
“데미안에겐 제가 좀 알아보죠. 워낙 까다로운 친구긴 하지만 잘되겠죠.”
에릭은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인 듯했다.
소심하고 소극적인 아버지와는 딴판이다.
객실 앞까지 유미를 안내해 준 에릭이 말했다.
“그럼 편히 쉬세요. 굿나잇.”
“고마워요. 굿나잇.”
그가 작별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유미도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 서운함은 또 뭐지?
그때 에릭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어쩌면 조만간에 파리에 들를지 모르겠어요. 연락 드릴게요.”
객실로 들어온 유미는 온통 투명하고 하얀 커튼이 쳐진 내부의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한동안 서 있었다.
아쉬움은 있지만,
첫 만남치고 나쁘지 않다.
다니엘의 아들 에릭의 좋은 인상이 유미의 마음에 여운으로 남았다.
사업 파트너로서뿐 아니라 남자로서도 묘하게 끌리는 걸 느낀다.
미술품 거상 집안의 외아들로서 세계 미술 시장의 판도를 움직이는 능력 있는 남자.
게다가 싱글. 더군다나 매너 좋고 긍정적인 성격의 훈남.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쪼잔한 한국 남자는 내수용으로 놔두고
이제부턴 오유미, 세계화에 힘쓰자.
뭐 이런 기특한 결심을 하면서 유미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유미는 밤새도록 이유진의 무덤에서
그의 해골을 찾아내 한 땀 한 땀 다이아몬드를 박는 끔찍한 악몽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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