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391) 키다리 오빠-12

오늘의 쉼터 2015. 4. 8. 17:29

(391) 키다리 오빠-12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힐링센터니 차크라니 동양의 신비주의니,

 

히피, 성적 해방, 선(禪), 프리섹스, 마사지, 그런 단어들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두 남자는 저녁식사 후에 클럽에 가서 한잔하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발레리는 흔쾌히 수락했다. 유미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신에 엉뚱한 질문을 했다.

“해변은 여기에서 먼가요?”

몇 모금 마신 맥주가 더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걸어서 한 10분쯤 가야 하는데요. 거긴 내일 가세요.”

에르베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우리가 내일 판타스틱한 곳으로 가이드를 할 테니….”

발레리는 에르베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유미는 일어났다.

“발레리, 좀 피곤해서 먼저 텐트로 가 있을게.”

유미가 방갈로를 나오자 시몽도 눈치껏 따라나왔다.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요?”

시몽이 예절바르게 물었다. 그러나 유미는 그를 따돌렸다.

“피곤해서 좀 쉴래요.”

시몽은 군더더기 없이 작별인사를 하고 MP3 이어폰을 꽂더니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와 달리 초저녁의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캠핑장 안에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프랑스인들만 있는 게 아니라 북구인들과 독일인들도 많은지 그들의 언어들이 떠다녔다.

 

그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유미를 보았다.

이상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발가벗고 태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그러나 지금 유미는 발가벗은 사람들 틈에서 이상한 부자유스러움을 느낀다.

 

불평등을 느낀다.

 

발레리는 인간의 몸이 표현하는 보디랭귀지는 세계공용의 언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미는 지금 자신이 벙어리, 그저 마네킹처럼 무력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언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자신의 몸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유럽인인 그들만의 세계에 뛰어든, 머리빛과 눈빛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크지 않은 동양의 여자는, 말하자면 그들에겐 해독이 어려운 외국어였다.

 

동양여자는커녕 동양남자조차도 눈에 띄지 않는 이곳에 저 여자는 왜 왔을까,

 

대략 난감한 표정들을 지었다.

 

옷을 입은 세계에서는, 즉 문명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인간의 랭귀지야말로 평등의 도구였다.

 

누구나 자신을 변호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거짓말도 할 수 있다.

 

그런 선택권이 있는 한 평등하다.

 

그러나 알몸인 몸뚱어리만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원시적인 상황에서는

 

동물적인 서열이 있다.

 

사자의 영역에 들어온 얼룩말처럼 더 소외감과 위험을 느끼게 된다.

 

심리적인 부담으로 주눅이 든 유미는 텐트에 들어와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왜 무모하게 이곳에 왔는지 후회가 되었다.

 

어쩌면 이유진에 대한 저항심리가 밑바닥에 깔려있을 것이다.

 

프로그램 브로셔를 보니 시창작이나 노래교실, 동양철학 같은

 

고도의 언어를 요구하는 강좌나 스포츠가 대부분이었다.

 

언어가 딸리는 유미가 할 수 있는 것은 요가나 스트레칭 정도였다. 

 

성적인 모험이나 욕망은 오히려 옷을 입은 세계에서 더 솟아나는 거 아닐까.

 

오히려 이런 나체촌에서는 인간의 성적인 욕구는 초연해질 것이다.

 

유미는 낯선 환경이 끔찍해서 당장에라도 파리에 올라가고 싶었다.

유미는 한참을 망설이다 유진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나 유미.”

“어, 어디니?”

“응, 캠프촌이야.”

“너 결국…그래서, 재미있니?”

“나 적응이 안 돼서 텐트 안에 있어.

 

동양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래서 쪽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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