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생은 다른 곳에-11
“오늘 밤에요? 오! 너무 늦었어요.”
유미는 단호하게 도리질을 쳤다.
이럴 때일수록 값싼 여자로 보이면 안 된다.
‘밀당’ 한번 안 해 보고 넘어갈 수야 없지 않은가.
무릇 연애와 협상에서 밀고 당기기는 어장관리의 기본인데.
“아, 숙녀분에게 결례했다면 죄송합니다.”
“편한 낮 시간에 연락 주시면 한번 구경 가죠.”
“아니 언제든 편하실 때 짐을 옮기십시오. 가정부에게 준비하라 일러 놓겠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다니엘처럼 좋은 분을 만나니 이렇게 좋은 일만 생기는군요.
우리 뭔가 잘될 거 같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제가 쏩니다.”
“그러시죠. 집세 대신 제가 한번 정도는 얻어먹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미는 풍선처럼 기분이 붕 떴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의 답답한 일들이 체증 내려가듯 쑥 내려가는 거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긴장이 풀린 탓인지 식사 단계마다 바꾼 술 때문인지 갑자기 취기가 몰려왔다.
풀코스 식사를 마치자 11시가 다 되어 있었다.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는데 다리가 휘리릭, 풀렸다.
유미가 휘청거리자 다니엘이 한쪽 팔을 잡고 부축해 줬다.
“취하신 거 같은데 집까지 모셔다 드리죠.”
다니엘이 택시를 불러 유미를 태우고 옆에 앉았다.
유미는 택시에 타자마자 기사에게 집주소를 대줬다.
그러고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술이 너무 취하면 잠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유미의 체질이었다.
그런 게 크게 나쁠 것은 없었다.
원한다면 술은 그야말로 새로운 장소에서 눈을 뜨게 해주는 마술이기 때문이다.
유미는 창밖의 새소리에 잠이 깼다.
동트기 전에 첫울음을 우는 새들의 지저귐을 귓전으로 들으며 좀 이상하다 싶은 느낌에 눈을 떴다.
새벽의 미명 속에서도 눈에 보이는 풍경이 확연히 달랐다.
유미는 우선 자신의 몸부터 들여다보았다.
외투만 벗겨져 있을 뿐 검은색 미니드레스는 입고 있었다.
미니드레스가 올라가서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 있긴 했지만 구두마저 신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새소리가 크게 들리는 걸 보니 근처에 공원이 가까운가 보다.
스탠드 등을 켜니 루이 15세풍의 화려한 양식의 고가구로 장식된 방의 침대에 유미가 누워 있었다.
몽롱한 머릿속이 문득 환해졌다.
아하, 다니엘의 집 침실인가 보다.
그러나 다니엘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유미는 어제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집주소를 알려 주자마자 거의 떡실신한 걸 기억해냈다.
아니 떡실신한 것처럼 보이려고 했는데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 같다.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예상보다 빨리 집구경을 하게 된 셈이다.
법률용어로 ‘미필적 고의’라는 게 있다.
뭐 그런 것과 비슷한 심리였을 거다.
잠시 후 날이 희붐하게 밝아 왔다.
유미는 방을 나서 보았다. 방문을 열자 거실이 나왔고 몇 개의 방문이 보였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호화롭게 인테리어와 가구로 장식된 복층 아파트였다.
2층 벽에는 액자부터 화려한 복고풍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사냥을 즐기는지 박제된 뿔 달린 사슴머리가 천장 가까이 몇 군데 장식되어 있었다.
아파트지만 마치 고성(古城)의 실내를 방불케 했다.
유미가 잤던 침실 말고 다른 방들은 문이 잠겨 있었다.
아래층은 다니엘의 거처인 거 같았다.
유미는 구두를 벗고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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