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생은 다른 곳에-9
다니엘과 저녁 약속이 잡혀 있어서 유미는 몇 군데 방을 보러 가려는 약속을 취소했다.
게다가 외젠 리라는 사진작가가 살고 있는 이브리의 아파트 관리인에게 전화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취소했다.
뭔가 큰일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복잡하거나 의문스러운 일로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았다.
유미의 머릿속에는 서랍이 많다.
그런 일들은 당분간 가장 맨 밑의 서랍에 잠가 두고 싶다.
대신에 지혜의 서랍을 열고 싶었다.
10년 전 이곳에 왔을 때의 막막함과 외로움을 분방한 섹스로 풀었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절제의 미덕이란 스스로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대신에 유미는 요즘 미술계의 추이와 판도를 익히려고 미술관과 박물관, 화랑 등을 관람하고
분석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유미는 오랜만에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코트 속에 어제 샀던 검은색 미니 드레스를 입었다.
화장은 너무 야하지 않게 조심했다.
여자의 화장술은 하나의 전략이다.
경우에 따라 강도를 조절해야 한다.
처음부터 너무 진하게 표현하면 그다음부터는 화장발이 잘 안 먹힌다.
처음에 너무 매운 음식을 먹어 버리면 그다음 음식은 거의 맛을 느끼지 못하듯이.
심플한 디자인이지만 은근히 섹시한 드레스에 걸맞게 화장은 차분하지만
여성스러운 모습을 연출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과 함께하는 저녁식사에 빼놓을 수 없는 와인 때문에
입술은 레드 컬러로 붉게 칠했다.
흐린 입술은 와인 때문에 곧잘 밉게 변색되기 때문이다.
거울에서 유미는 입술을 쪼옥 내밀고 허공에 키스를 하며 화장을 마쳤다.
다니엘이 예약한 레스토랑은 리볼리가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다니엘은 겨자색 캐시미어 스웨터 위에 체크 콤비 재킷과 매치한 편안한 블루진을 입고 나왔다.
그래도 한눈에 고가의 옷이라는 게 느껴졌다.
“여기 음식이 맛있어요. 미슐랭에서 별 두 개를 얻은 식당이죠.
요리사가 유명하고 재능 있는 젊은 친구입니다.”
메뉴판을 들고 고르려니 음식값도 비쌌지만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이럴 때는 아는 척하지 말고 겸손해야 한다.
“프랑스 음식은 너무 무궁무진해서 외국인은 잘 모르겠어요.
다니엘의 미각을 믿습니다. 다니엘이 골라 주세요.”
“아, 여기 송아지 요리가 정말 끝내줘요. 그리고 디저트가 정말 환상적입니다.”
다니엘은 요리에 대해 신이 나서 한참 떠들더니 코스 요리를 추천해 주었다.
식전주로 시킨 샴페인부터 맛이 각별했다. 다니엘이 물었다.
“위베르한테 얘기 들었어요.
한국의 재벌 그룹 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일하신다고요?
작년에 개관전 때 위베르도 초청되었다고 하던데 굉장했다고 하더군요.”
“예. 지금은 재충전을 위해 잠시 휴가 중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요즘은 제가 화랑을 차려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호오, 그래요? 그래서 그림 매매에 관심이….”
다니엘이 유미를 유심히 보았다. 유미의 재력을 가늠해 보는 눈빛일까?
“어쨌든 제가 그림을 사거나 재벌회사에서 사거나….
여러 루트를 통해 좀 구입을 해야 할 거 같아요. 도움 부탁드립니다.”
“관심있는 작가라도?”
“앤디 워홀 같은 팝아트 작가나 미셸 바스키아 같은 낙서화가 쪽도 관심있고요.
또 요즘 잘나가는 데미안 허스트나 제프 쿤스도 괜찮고….”
“그럼 우리 아들을 소개해 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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