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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 세상의 기원-2

오늘의 쉼터 2015. 4. 6. 23:37

(351) 세상의 기원-2

 

 

 

 

유미의 분석과 지적에 어깨를 으쓱하며 환하게 웃기만 하던 유진.

“봐, 찔리지?”

“누가 찔린대? 너가 너무 날카롭게 분석하니까 감탄해서 그러지. 어이구, 우리 똑순이!”

유진이 팔을 벌려 유미를 안았다.

“난 말이지. 자위용으로만 안 쓸 거야. 너를 오브제로 예술을 할 거야.”

그때 유진의 품에서 맡았던 그의 땀냄새까지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유미는 침대에서 일어나 드립 커피를 한 잔 만들어 마시면서 방을 둘러본다.

이곳은 프랑스 파리. 모든 걸 끊고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않고 홀로 떠나온 지 한 달째.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딸 설희만 만나고 떠나왔다.

 

이제 곧 고3이 되는 딸에게 엄마 구실을 제대로 못한 유미지만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이제부터 정신만 차리고 공부 열심히 하면,

 

엄마가 너의 장래를 위해서 얼마든지 경제적으로 도와줄게.

 

딸에게 이렇게라도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딸이 성인이 되어 자신을 이해해 줄 날이 있으리라는 건 유미의 몇 안 되는

 

행복한 상상 중의 하나였다.

 

블로그도 폐쇄하고 쓰던 휴대폰도 없애고 서울을 떠나 유미는

 

이곳 파리의 한 아파트 꼭대기 층에 잠시 둥지를 틀었다.

이 방은 10년 전에는 유진의 방이었다. 사실 이 방을 찾아 들어올 생각은 없었다.

 

호텔에서 일주일 머무르며 방을 구했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파리 시내의 호텔비는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결국 예전의 친구 폴에게 전화를 걸었다.

 

폴은 파리 시내에서 몇 개의 스튜디오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임대를 놓고 있었다.

“유미, 얼마나 있을 건데?”

“그게…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일단 좀 쉬고 상황 봐서 정하려구요.”

“그럼, 곤란해. 여긴 1년 미만짜리 단기임대는 나와 있는 게 거의 없어.

 

게다가 이곳에서 확실히 월급 받는 사람 아니면 예전보다 방 얻기 아주 힘들어.”

“그러니까 폴에게 얘기하는 거죠.”

“아, 유미가 어떻게 생각할까 몰라 얘기 안했는데,

 

예전에 이유진이 쓰던 방이 잠깐 비어 있어.

 

세입자가 사정이 있어서 한 달 늦게 들어오게 돼 있어서.

 

거기 있으면서 방을 알아 봐. 나도 알아봐 줄게. 어때?”

“글쎄요….”

“뭐 거의 10년 전 일이잖아.

 

방은 그 사이에 가구도 바꾸고 수리도 하고 해서 옛날 생각은 별로 안 날거야.”

유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좋아요.”

안 그래도 한 번 와보고 싶긴 했다.

 

한 달씩 살기에는 기분이 썩 내키는 곳은 아니지만,

 

방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니, 일단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호텔에서 이곳에 들어온 지 보름 정도 되었다.

 

폴의 말대로 실내 인테리어와 가구를 바꿔서 예전 기분은 별로 나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에 파리에 처음 살 때 같은 설렘이 느껴져서 좋았다.

 

유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예전에 유진의 유품이 든 가방이 있었다는 욕실의 장도 바뀌어 있었다.

 

물론 가방도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그런 꿈을 꾸다니….

 

그런데 이제 이 방을 떠나야 하는 걸까? 

 

창을 열면 파리의 회색빛 지붕과 주황색 굴뚝들이 보이고 저 멀리 에펠탑이 보였다.

 

예전엔 이곳에 있으면 ‘파리의 지붕밑’이란 오래된 흑백영화와 노래가 생각났다.

 

그리고 눈 아래의 수많은 지붕들을 바라보며 저물녘에 둥지로 돌아온 새처럼

 

안심이 되고 아늑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따스하고 행복한 기억도 이 방은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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