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파멸 혹은 연민-4
설마! 샛눈을 뜨고 바라보던 유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가 서랍 안에서 누런 서류봉투를 꺼내는 게 아닌가!
그가 그 봉투에서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들고 기계에 넣었다.
그 비디오는 지난번에 정희의 조수인 척하고 여기 와서 천신만고 끝에 몰래 바꿔치기한
그 테이프 아닌가.
유미가 젊은 시절 한때, 굶지 않기 위해 포르노를 찍었던 그 비디오테이프.
윤 회장이 암막 커튼을 내리고 리모컨을 들고 유미의 옆에 와서 앉았다.
주위가 단숨에 어두워졌다.
“이게 꽤 볼 만할 거야.”
유미는 식은땀이 났다.
그 테이프를 틀면 만화영화 ‘들장미소녀 캔디’가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비디오테이프와 바꿔치기하면서 유미는 자신이 어릴 때부터 즐겨 보던 만화영화를
복사한 테이프를 넣었던 것이다.
윤 회장이 리모컨으로 비디오를 켰다.
유미는 가슴이 뛰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캔디의 주제가가 곧 울려 퍼질 것이다.
그러면 윤 회장은 자신이 보관했던 오유미의 포르노 테이프를 도난당한 사실을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옆에 앉은 신원불명의 김지영이라는 맹인 안마사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아아, 이건 또 뭐지?
유미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숨이 가빠졌다.
윤 회장이 유미의 옆모습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왜 떨리나? 너무 긴장하지 마.”
윤 회장이 유미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유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은 유미의 귓속으로 여자의 교성이 잔뜩 흘러들었다.
뭐야? 캔디가 아니잖아!
아아, 다른 포르노 비디오인가 보다.
괜히 쫄았네. 그런 거라면 화면처럼 해 달래도 해줄 수 있어.
유미는 살짝 눈을 떴다.
그런데, 오 마이 갓!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화면에 나오는 여자는 분명히 유미였던 것이다!
십 여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분명히 앳된 유미의 모습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젊은 유미가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다.
남자의 번들거리는 눈이 점점 클로즈업된다.
카메라는 발끝부터 유미의 몸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 올라간다.
저게 왜 아직 저기 있는 거지?
유미는 저도 모르게 번쩍 눈을 뜨며 몸을 솟구쳤다.
윤 회장의 악력이 순간, 손목에 느껴졌다.
한순간, 유미의 머리에 해일 같은 혼란이 밀려왔다.
그런데 갑자기 비디오 화면이 꺼졌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죽음처럼 답답한 어둠이었다.
그때 갑자기 윤 회장이 리모컨으로 방안의 전등불을 켰다.
눈이 부셔서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유미를 보고
윤 회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떠라.”
“……?!”
“연기가 일품이구나. 배우를 하지 그랬니?”
“회장님, 저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고예.”
유미는 끝까지 김지영처럼 굴려고 했다.
“안경도 벗어.”
윤 회장의 그 말에 유미가 떨치고 일어서려 했다.
여전히 윤 회장은 유미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이거 놓으세요!”
“앉아라.”
유미는 선글라스를 벗고 윤 회장을 노려보았다.
“이게 왜 아직 여기 있는지 묻고 싶겠지?”
“그래요.”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 아니다.
난 항상 원본이 있으면 카피를 또 한 부 갖고 있거든.
사람 빼고는. 물론 사람도 그럴 수 있다면 카피를 떠 놓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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