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파멸 혹은 연민-1
유미는 목욕을 정성들여 하고 난 뒤 손목과 귓불에 향수를 뿌렸다.
혹시 몰라서 가슴골과 배꼽 밑에도 독(毒)이라는 뜻의 ‘쁘와종’이란 향수 원액을 한 방울씩
찍어 발랐다.
은밀한 곳에서 농염한 향기가 풍겨왔다.
그리고 나서 수수하게 옷을 입고 단발머리 가발을 썼다.
평소에 화장을 좀 짙게 하는 편인데 오늘은 화장을 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화장이 분장이다.
신혼여행 가서 욕실에서 나온 여자를 보고 새신랑이 누구세요?
하고 묻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러나 화장을 하지 않은 유미의 얼굴은 오히려 더 풋풋하고 젊어 보인다.
유미는 조막만 한 얼굴의 반을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를 썼다.
이제 과녁은 바뀌었다.
어차피 멈출 수 없는 질주였다.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다면 목적지를 바꿀 수밖에.
이 욕망의 질주에 어쩌면 사랑은 장애물일 뿐이었는지 모른다.
보란 듯이 사랑을 짓밟고 뭉개고 질주할 것이다.
동진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는 이미 유미에게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게 만들었다.
그래, 이제는 내 눈에 뵈는 게 없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유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정희가 그녀에게 몇 가지 정보를 주었다.
“회장님은 ‘크리스찬 디올의 쁘와종’향수를 좋아하셔.
첫날이니까 뭐 많은 걸 요구하시진 않을 거야.
네가 아직 안마시술을 제대로 익힌 것도 아니니까.
그냥 너한테 끌리시는 거니까 자연스럽게 해.
하자는 대로 해드리면 돼. 다만 한 가지 좀 참아야 하는 게 있는데…
기분이 좋으시면 사람을 꼬집는 버릇이 있어. 뭐 참을 만은 해.
그러다 잠드시지. 투정부리다 잠드는 아기 같은 분이야.”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유미는 성북동으로 차를 운전해가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윤동진의 옆자리를 강렬하게 원했다.
하지만 인생의 길은 예측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름길, 샛길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궁하면 통한다더니.
윤 회장과 독대하기로 마음먹고 나선 오늘,
유미는 어떤 식으로 윤 회장을 장악할지 결정이 서지 않았다.
그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가 잠들면 휴대폰으로 사진을 몰래 찍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후에 회유를 하든 공갈을 하든 칼자루는 내가 쥐어야 한다.
남자의 ‘칼’을 내 손에 쥐면 결국 칼자루는 내가 쥐는 것.
여태 남자를 요리하면서 칼자루를 놓친 적은 없지 않은가.
누가 뭐래도 난 프로 칼잡이인데.
유미는 성북동 윤 회장의 집 앞이 아닌 한 블록 전의 골목에 차를 주차하고
차에서 맹인용 지팡이를 꺼내 걸었다.
누가 보아도 맹인의 걸음걸이였다.
윤동진은 집에 없겠지.
윤 회장이 안마사를 부르는 토요일은 집에 아무도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벨을 누르자 집안에서 처음 보는 남자가 내려왔다.
기사인가?
집사인가?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이 모시고 오시랍니다.”
그는 유미를 에스코트해서 실내로 들어가는 중에 노골적인 시선으로
유미를 아래위로 훑으며 쳐다보았다.
남자는 유미를 서재로 안내했다.
“회장님이 나오실 겁니다. 여기에서 잠시 기다리고 계십시오.”
남자가 문을 열고 나갔다.
집안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더니 저 남자는 누구야?
유미는 서재의 소파에 앉아 기다리다 지루해서 책상 위의 사진액자를 보았다.
윤 회장과 함께 찍은 여인의 사진이 보였다.
저 여자가 동진의 어머니, 윤조미술관의 설립자이자 초대관장인 조민숙 여사겠지.
현모양처형으로 조신하게 생겼다.
그냥 옛날 흑백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그래서 그런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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