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321> 무정부주의자-1

오늘의 쉼터 2015. 4. 6. 17:14

<321> 무정부주의자-1

 

 

 

 

유미는 조도를 낮춘 거실에서 스카치위스키를 두 잔째 스트레이트로 마시고 있다.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순간 가슴이 설렌다기보다는 쿵쾅거렸다.

 

유미는 오른손으로 심장 부위를 지그시 눌렀다.

 

드디어 왔다!

 

유미는 현관의 거울을 보았다.

 

얇은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스모키 화장을 짙게 한 얼굴은 인정사정없이 싸늘하고 도도해보였다.

현관문을 열자 윤동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오랜만이야. 좀 늦어서 미안.”

집안으로 들어온 동진에게 유미는 무표정한 차가운 시선을 꽂았다.

 

그에게서 살짝 술 냄새가 풍겼다.

 

제정신으로는 나를 보기가 머쓱했겠지.

유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동진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렸다.

 

바람이 휙 지나고 동진의 고개가 한쪽으로 확 꺾이는 걸 보니 제대로 날렸다.

 

동진이 뺨을 감싸 쥐고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내리깔고 잠깐 침묵을 지켰다.

 

유미가 톡 쏘며 말했다.

“그래, 오랜만이야. 이렇게까지 환영 안 할라 그랬는데…

 

애무가 맘에 들어? 동진씨 이런 거 좋아하잖아.”

유미가 앞서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들어와요. 용건 있으니 온 거 아니야?”

동진이 맞은편에 앉았다.

 

사진 건에 관해 메일을 보낸 후 동진에게서 입질이 온 것은 오늘 오전이었다.

 

그는 간단히 답 메일을 보냈다.

 

‘퇴근 후 밤에 집으로 잠깐 들를게. 집에서 기다려줘. 만나서 얘기하자.’

 

그러나 오늘 퇴근 전에, 무늬는 권고사직이지만,

 

이달 말 기한으로 해고 통보를 갑자기 받았다.

 

한준수가 비밀프로젝트라고 말한 것이 이것이었나?

 

박용준도 계속 근무하는데 나만 해고하다니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그걸 윤동진이 결재했을 텐데…. 

 

유미는 위스키를 한 잔 더 마시며 동진의 잔에도 따랐다.

“내 앞의 갈림길에 두 개의 이정표가 서 있어.

 

하나는 믿음, 하나는 의혹. 나, 어느 길을 택해야 돼?”

유미는 수익의 문자를 써먹었다.

 

동진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한데….”

“그런 대답 말고. 둘 중에 답을 말하라니까.

 

아님 다른 경로를 탐색 중이라든지. 성능 좋은 내비게이션처럼.”

“어쩔 수가 없잖아.”

“우유부단하고 머리 나쁜 남자한테 그런 걸 요구한 게 잘못이지.

 

자, 그럼 OX로 대답해. 결혼? 복수? 어떤 걸 당하고 싶어?”

“유미,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나 동진씨를 믿었는데…

 

나 갖고 노니까 재미있어? 날 참 비참하게 만들어.”

“그러니까 내가 전에 말한….”

“흥! 그래, 정부? 근데 나 무정부주의자다, 어쩔래?”

동진이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었다.

“무정부주의자….”

동진이 잠깐 실소를 머금었다.

“비웃어? 내 사전에 정부라는 단어는 없어.

 

나, 사랑 갖고 별로 딜하고 싶지 않아.

 

날 야비한 비즈니스우먼으로 만들고 싶은 거야?”

“사랑 갖고 딜하는 거 아니야, 나도. 그동안 너무 괴로웠어.”

“비겁하긴. 내 주제가가 사랑밖에 난 몰라야. 몰랐어?

 

아님 말고. 어쨌든 도 아니면 모야.”

유미가 테이블 서랍에서 다용도 접이식 스위스칼이라 불리는 빅토리녹스를 꺼냈다.

 

동진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유미가 칼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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