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 갈림길-8
아침에 눈을 뜨니 수익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문자가 와 있었다.
‘곤하게 자고 있어서 안 깨웠어.
그동안 자기 일 봐주느라 너무 내 일에 소홀했어.
오늘부터 다시 정진하려고 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믿음과 의심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타인에 대한
인식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지.
물론 둘 다 관심의 증거고.
진정으로 타인을 만나기 위해 믿음과 의심 둘 중의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는
각자의 몫이겠지.’
어쭈! 일요일 이른 아침부터 웬 달라이라마 같은 말씀?
문자가 찍힌 시각은 새벽 6시반 무렵이었다.
그럼 수익이 그 시간 이전에 나갔다는 거임?
유미는 손가락을 재게 놀려 문자를 쳤다.
‘뭐야? 꽃보살님 놔두고 새벽예불이라도 드리러 간 거야?’
그러나 수익에게선 답이 없었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언제부턴가 수익이 전화를 잘 안 받았던 것이다.
그건 갑자기 그가 100일 기도를 한다고 한 이후부터였다.
그나마 이번에 곽 사장 일로 연결이 잘 되었던 게 다행이었다.
묘한 남자. 도대체 어디로, 왜, 몸을 사리는 걸까?
그러다 수익의 문자를 다시 읽어 보았다.
믿음과 의심.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는 각자의 몫?
아아, 수익은 내가 자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구나.
그래서 삐쳤나? 겉으로는 쿨한 척해도…. 이 사람, 정말 점쟁이 아냐?
믿음과 의심, 두 가지 길에서 어느 길을 택해야 진정한 그를 만날 것인가.
물론 믿음을 택하는 게 정답이겠지.
그러나 이미 상대가 나에 대해 자기를 믿지 못하는구나 하고 의심하고 있는데,
내가 그에게 무슨 패를 내밀어야 하지?
아아, 포커보다 더 어렵구나.
이건 뭐 러시안룰렛보다 더 위험하구나.
아아, 내가 갈림길에 섰다는 걸 알겠구나.
유미는 모텔을 나와 시내에서 해장국 한 그릇을 사먹고 집으로 들어갔다.
눈이 잔뜩 올 거 같은 일요일 오후를 무료하게 보내니 왠지 더 외로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책상다리처럼 최소 4명은 되었던 애인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다리가 삐거덕대기 시작하는 거 같다.
황인규, 박용준, 윤동진, 그리고 믿었던 고수익까지 왜 이렇게 부실한 거야?
아아, 이제 나, 떠받드는 책상다리 없으면 쟁반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려고 유미는 집 근처 새로 생긴 사우나에 가서 목욕이나 하리라 생각했다.
핸드백을 열어 지갑을 꺼내려는데 종잇조각이 툭 떨어진다.
어젯밤 수익의 주민등록번호를 보고 급히 베껴놓은 종이였다.
유미는 그걸 쳐다보다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잠에서 깬 듯한 용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자?”
“아, 예. 날도 꾸리꾸리하고 해서 늦은 점심으로 라면 끓여 소주 몇 잔 했더니…
근데 황금 같은 일요일 날 웬일이세요?”
“황금은 무슨.”
“오늘 첫눈 올 거라는데 혹시? 설마?”
“뭘 혹시 설마?”
“저랑 첫눈 오는 날 데이트?”
“꿈속에서나 해.”
“에이, 그럼 다시 잘게요.”
“아, 잠깐 용준! 이거 좀 알아봐 줘. 지금 받아 적어.”
“뭔데요?”
“주민등록번호야. 칠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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