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떠거운 눈물-12
동진이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감싸 쥐고 한 손으로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 검은 물건은 비디오테이프였다.
이게 뭐냐는 눈빛으로 동진이 윤 회장을 바라보았다.
윤 회장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내 이렇게까지 그 애를 까발리고 싶진 않았다.
이래도 정신을 못 차리겠니? 너 그 애의 과거를 알기나 하는 거냐?”
유미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유미의 과거를 캐고 싶지도 않았던 동진이었다.
설사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유미와 동진만 알고 있는 과거라면 덮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아예 그쪽으로는 일부러 관심을 껐었는데….
“내 입으로 담기도 싫다만, 걔가 과거에 그런 포르노를 찍었더라.
더 이상 나도 얘기하기 싫다. 물론 그 애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있었겠지.
그 애는 영리하고 또 바탕이 그리 천박한 애는 아닌 거 같으니
과거를 꽁꽁 숨기고 우아하게 살아가겠지.
그러나 이 YB 그룹의 며느리가 그런 여자라는 걸 세상이 알게 되는 날에는
나는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거다.
그러니 현명하게 생각하고 처신해라.
네가 나와 부자지간의 연을 끊고 세상과 절연하고
그 애랑 무인도에 숨어들어가 살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동진이 고개를 푹 꺾었다.
이번에는 윤 회장이 휴지를 내밀었다.
“얼굴에 피가 나는구나. 닦고 들어가 봐라.”
동진이 휴지를 건네받아 비디오테이프의 모서리에 찍힌 얼굴을 닦았다.
아픈 줄도 모르고 정신이 멍했다.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윤 회장의 얼굴도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다.
후련함보다는 후회의 빛도 도는 얼굴이었다.
그가 다시 파이프를 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동진이 일어나 나가려고 하는데 윤 회장이 불렀다.
“그 비디오테이프는 놔두고 가거라.”
동진은 손에 그것을 쥔 줄도 몰랐다.
그것을 내려놓고 좀비처럼 일어나 허청거리며 제 방으로 올라왔다.
피로가 몰려왔다.
방으로 와서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울을 보니 오른쪽 뺨이 긁혀서 부어올라 있었다.
동진은 옷을 벗었다.
강하게 보이고자 오랫동안 운동과 스포츠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근육이 거울에 보였다.
남성적인 매력이 넘치는 몸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몸이다.
유미가 사랑하는 식스팩 복근과 어젯밤에 애리가 쓰다듬던 가슴 근육을 그는 쓸어 보았다.
갑자기 그는 그 몸에 자해의 충동을 느꼈다.
아니 누군가를 향한 살해의 욕망인지도 모른다.
그 대상이 유미이기도, 또한 아버지이기도 한 것 같았다.
동진은 두 주먹으로 거울을 내리쳤다.
그리고 거울에 머리를 짓찧었다.
거울의 유리조각이 떨어졌다.
깨진 거울에는 얼굴과 손에 피가 흐르는 남자가 보였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어찌해 볼 수 없는 분노가 동진의 몸을 폭발시켰다.
누군가 그 손에 수갑을 채우고 밧줄로 묶어주지 않으면 미쳐 날뛸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무언가 이제는 제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다는 절망감과 무력감이 그를 강타했다.
그는 샤워꼭지를 끝까지 틀어서 그 밑에 피 흘리는 몸으로 섰다.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물이 그의 몸에 내리 쏟아졌다.
뜨거운 물이 머리와 얼굴로 쏟아지자 상처가 마침내 쓰라리고 아프게 느껴졌다.
동진은 눈을 감고 고통을 참으며 미동도 없이 샤워기 아래에서 폭포 같은 뜨거운 물줄기를 맞았다.
그 물줄기 속으로 핏물과 함께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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