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212)좁은문-5

오늘의 쉼터 2015. 4. 2. 00:18

(212)좁은문-5

 

 

 

 

 그는 윤 회장이었다.

 

윤 회장과 맞닥뜨린 유미는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갑자기 할 말이 막혔다.

 

그동안의 분노와 억울함 같은 게 가슴속에 꽉 막혀 있었나 보다.

 

더군다나 좀 전에 강애리를 만나고부터는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눈치로 때려잡건대, 윤 회장이 강애리를 며느리로, 더 나아가서는

 

윤조미술관의 경영자로 점찍고 있는 거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미를 본 윤 회장의 얼굴빛도 유미 못지않게 복잡해 보였다.

 

유미가 뒤돌아서는 윤 회장을 향해 말을 걸었다.

“회장님, 부탁이 있어요.”

“뭔가?”

“제가 한번 따로 뵙도록 허락해 주세요.”

“따로?”

“예, 회장님 뜻은 전에 한번 전해 들었습니다만.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윤 회장이 잠시 아무 말 없이 유미를 바라보았다.

“한준수 비서실장님께 먼저 예약을 해 놓을까요?”

윤 회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그럼 윤 이사님을 통해서 연락을 드릴까요?”

“나를 따로 만난다? 말이라면 전화로 해도 되잖나?”

“꼭 뵙고 싶어요.”

윤 회장이 수전노 같은 괴팍한 눈빛으로 유미를 바라보았다.

“명함 내놔 봐.”

유미는 얼른 명함을 내밀었다. 그러자 윤 회장도 개인 명함을 꺼냈다.

“이거 내 개인 전화야. 한 열흘 후에나 해. 근무 시간 피해서.”

“감사합니다, 회장님.”

머리를 조아려 인사하는 사이에 윤 회장이 사라졌다.

어떻게 개관식 행사가 끝났는지 유미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차장의 자동차 안이었다.

 

정신이 멍했다. 차 안에 한 10분은 멍하게 앉아 있었나 보다.

 

아직도 그 잔상이 어른거렸다.

 

화장실에서 강애리의 통화를 엿듣다 만난 그녀의 근심 걱정 없는 환한 얼굴과

 

화장실을 나서다 잠깐 우연히 만나 약속 예약을 했던 윤 회장의 표정과 행사장에서

 

딴사람처럼 느껴지던 윤동진의 굳은 표정…. 이 모두가 허망한 꿈인가.

 

마치 휘황한 무대에서 내려온 프리마돈나처럼 텅 빈 주차장에 혼자 남은 유미는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밝은 조명과 갈채 속의 화려한 꿈에서 깨어 초라한 암막 뒤의 무대 뒤처럼 갑자기 닥친

 

현실감이 갑갑했다.

 

강애리의 통화내용처럼 윤동진은 강애리와 함께 오늘 밤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강애리와의 정략결혼에 놀아나고 있는 윤동진에게 유미는 아무것도 아니었단 말인가.

 

그동안 윤동진과의 시간들, 특히 유미만이 알고 있는 그의 몸과 취향에 맞춰 함께했던,

 

두 사람만의 모험의 시간이 떠올랐다.

가슴속에서 미묘한 열기가 훅 뻗쳐 왔다.

 

약이 올랐다.

 

윤동진이 옆에 있다면 지난번에 맞았던 뺨 두 대를 이자 듬뿍 쳐서 되돌려 주고 싶다.

 

아니면 약이 바짝 오른 손톱으로 얼굴을 걸레로 만들어 주고 싶다.

그때 누군가가 밖에서 차창을 톡톡 두드렸다.

 

차 문을 내리고 보니 고수익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밤에 핀 흰 사과꽃처럼 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어머, 웬일이세요?”

“우연히 다시 왔다가…라고 한다면 촌스럽죠?

 

필연적으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줄기차게 기다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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