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좁은문-1
개관일이 다가오자 유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고민이나 불안에 떨고 있을 틈이 없었다.
모든 고뇌와 우울을 다스리는 약은 바로 일이다.
홍보자료를 배포한 신문기자들에게서 인터뷰 요청이 밀려왔다.
박 PD의 도움과 소개로 TV 문화채널에도 출연하게 되었다.
물론 그들의 주된 토픽은 YB그룹이라는 재벌가의 미술관 사업이었지만
그것을 화려하게 부활시킨 주인공이 오유미라는 아름다운 큐레이터라는 데도 초점이 맞춰졌다.
유미가 이미 온라인상에서 연애 블로거로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으며
소위 연애학의 인기 강사라는 전력에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다.
예를 들면 이런 기사 제목도 있다.
‘사랑의 전도사, 미술관과 사랑에 빠지다.’
‘아름다운! 그림 보여 주는 여자.’
‘그림, 섹시할수록 더 잘 보인다.’
김 교수 또한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미술잡지 편집자나 평론가들을 동원해서
홍보에 도움을 주었다.
그 수많은 사람들과 명함을 주고받고 전화 통화를 하거나 또 만나면서 유미는
자칫 자신이 연예인이나 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사이버 세상과 달리 현실 세계의 실세들과 만나면서 그들의 인도로 더 커다란
관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은 것이다.
이건 엄연한 현실 속 인맥의 세계다.
어쨌든 그들은 무언가 더 큰 세력을 약속해 주는 안전한 사다리였다.
그러나 그 사다리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천국의 문이라도 있는 걸까?
더 넓은 인맥의 세계는 물고기가 놀 수 있는 보다 더 큰물이다.
그러나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 그곳으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며칠간 기자들과 홍보 관리차 폭탄주 세례를 받고 나니
갑자기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재개관 날이 다음 날인데 유미는 피부 관리 한번 제대로 받을 틈 없이 피로에 찌들었다.
원래 피부 미인은 잠과 게으름과 돈이 만드는 건데, 돈과 시간은 참 묘한 함수관계다.
타고난 특수 신분이 아닌 한, 돈과 시간을 다 갖기는 힘들다.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는 것이다.
모든 준비를 체크하고 퇴근한 저녁,
초청한 외국 화가들의 환영 리셉션 만찬이 호텔에서 기다리고 있다.
윤동진이 윤 회장을 대신하여 그들을 만찬에 초대한 것이다.
유미도 공식적으로는 윤동진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사적인 관계가 지지부진했지만, 이렇게 공식적으로 만나니
그와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새삼 실감났다.
그야말로 주인 나리와 하녀와의 관계.
사다리의 맨 밑바닥을 박박 기면서 사다리를 한참 올려다보는 꼴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는 유미를 그저 일개 수석 큐레이터로 소개했다.
그리고 유미의 노고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게 좀 섭섭했다. 만찬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윤동진에게서 문자가 왔다.
‘고생 많았어. 그동안 며칠 중국에 출장 갔다가 미술관 오픈 맞추려고 어제 돌아왔어.
윤조미술관이 당신의 아름다운 작품이 되길 바랄게. 내일 기대할게.’
유미는 답을 보냈다.
‘알아주니 고마워요. 작품은 만든 사람의 몫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몫이에요.
무엇보다 당신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요.’
답이 왔다.
‘나보다는 아버지 마음에 들어야지. 그게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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