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내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봐-15
조두식을 서울역에 내려 주고 유미는 용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행을 하라고 해 놓고 차를 타고 내빼면 어떡해요?”
“음, 그렇게 됐어. 그 남자 얼굴 봐 뒀지?”
“얼굴이고 뭐고 모자에 안경에 뭐 보이는 게 있어요? 겨우 코빼기만 봤는데….”
“알았어. 이제 집에 가 봐. 고마워.”
“쳇. 알았어요.”
용준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유미는 조두식과의 만남에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이 아쉽긴 했다.
조두식은 예상대로 유들유들하게 나왔다.
속내를 말할 듯하다가 선문답 같은 말로 교묘하게 핵심을 피했다.
의붓아버지라는 인연으로 그와 함께 살았던 세월도 있었지만,
그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언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는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형사의 느낌이랄까.
엄마의 삶에, 그리고 유미의 삶의 이면에서 그는 어두운 그림자를 언뜻언뜻 드러내곤 했다.
그가 말한 대로 안테나,
아니 특유의 후각으로 어디선가 하이에나처럼 슬쩍 나타나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를 만나 이 정도라도 거래를 터놓는 것이 낫다고 유미는 애써 생각했다.
집 근처에 다다르자 유미는 오랜만에 전에 단골로 들르던 ‘블루문’이란 바에
가서 칵테일이나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티니를 한잔 시켜 마시고 나니 온몸의 긴장이 조금 풀렸다.
실내에 파아노 선율을 실은 재즈곡이 촉촉하게 퍼지고 있었다.
다이앤 리브스의 ‘미스티(Misty)’란 곡이다.
그 곡을 듣고 있자니 뼈가 저리게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다. 눈앞이 부옇게 안개가 어린 듯 헤쳐 나가야 할 길이
잘 보이지 않는 느낌. 게다가 그 길을 홀로 가야만 하는 고독함이 취기와 더불어 엄습했다.
누구에게도 이런 외로움을 호소할 수 없다.
오죽하면 조두식을 만나서도 마음 약한 모습을 보였겠는가.
윤동진의 사랑도 왠지 향기 없는 꽃처럼 여겨졌다.
자신이 원하는 게 정말 무언가 유미는 생각해 보았다.
돈? 명예? 사실 돈이라는 게 실감할 수 있는 범위 이상의 숫자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명예? 누구를 위한 명예일까?
유미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도 자신만의 고독을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마티니를 한 잔 더 주문해서 마셨다.
때맞춰 감미로운 다이앤 리브스의 목소리가 ‘솔리튜드(Solitude)’를 부르고 있다.
감상에 젖은 유미는 눈시울이 순간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갑자기 눈앞이 부예졌다.
겨우 눈을 깜박거려 눈물을 막았다.
울면 안 돼, 오유미.
취기와 감상 때문일까.
유미는 참아 왔던 감정이 터져 나오려는 걸 느꼈다.
윤동진의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예상대로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미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뭐가 두려운 거예요? 사랑한다면서.
왜 당신을 사랑할수록 더 외로워지는 건지 말해 봐요.
이 문자에 답이 없으면 나도 앞으로 전화받지 않겠어요.’
잠시 후에 휴대폰이 울렸다.
윤동진이었다.
그도 술이 취한 음성이었다.
“어디?”
“집 앞에 블루문이란 바에 있어요.”
“잠깐 볼까.”
“집으로 올래요?”
“아니, 30분 후에 그리로 갈게.”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유미는 마티니를 한 잔 더 시켰다.
취기를 핑계로라도 치기 어린 말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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