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178)내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봐-10

오늘의 쉼터 2015. 3. 29. 23:24

(178)내가 누구인지 알아맞혀 봐-10

 

 

 

 

 

잘 차려진 한정식을 한 상 받고, 둘이서 막걸리로 건배까지 하고 나자 그가 물었다.

“혹시 그림은 안 그리십니까?”

“그렸죠, 예전에는요. 아니 시간이 허락하면 지금도 그리고 싶어요.

 

그게 제 본분이란 생각이 들거든요.”

“자화상 이런 거를 그리세요. 누드자화상 이런 거… 아름다우시니까.”

그가 또 사과향 미소를 날렸다.

 

그럼 그렇지. 이제야 이 남자 속이 좀 엿보인다.

 

하지만 혹시 보험 하나 들라고 립서비스 하는 건 아니겠지.

“자화상 그리는 거 쉽지 않아요. 웬만하면 모델이 있어야죠.

 

고흐니 이런 사람들은 모델료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자신을 그린 거죠.”

“제가 필요하면 무료로 모델도 설 수 있는데.”

“꽤 자신이 있으신가 보네요.”

“예,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저도 ‘한몸’ 하거든요. 보여드릴 기회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여기 홍어가 제대로네요. 그냥 뻥뻥 뚫리네요.”

유미는 코가 뻥 뚫리는 삭힌 홍어를 집으며, 일부러 ‘뻥뻥’에 힘을 주어 말하며 웃었다.

“아, 뻥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오늘밤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어요.”

막걸리 한 잔에 그가 후끈 달아오른 듯 항변했다.

 

식사를 다 마칠 무렵이 되자 그가 말했다.

“미술관 재개관이 언제예요? 오유미씨가 그림 하나 찜해주세요.

 

저도 큰 거 한 장 정도는 기본이니까요.”

처음 본 남자가 뻥을 치든 말든 유미는 상냥하게 말했다.

“아 그러세요? 그럼 그러죠.”

“제게도 연락처를 하나 주시죠.

 

아니 그러지 말고 나가서 술 한잔 더 하실래요? 와인 좋아하세요?”

 

 

“아, 차를 가져왔어요. 그리고 집에 들어가 봐야 해요.

 

그리고 조만간 제가 꼭 연락을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남자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헤어지기 전에 유미가 물었다.

“실례지만 연식이 어떻게 되세요?”

“쌍칠년 산입니다. 러키세븐이 두 개나 되는. 만으로는 삼땡. 저보다 서너 살 어릴 거 같은데….”

이 남자야말로 유미보다 서너 살 어리다.

 

유미는 말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그와 작별했다.

 

차를 세워둔 공용주차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그가 뒤따라오며 유미를 불러 세웠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향과 향로가 들려 있었다.

 

그걸 건네며 그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기념으로 향로를 하나 샀어요. 저도 똑같은 걸 샀어요.

 

마음이 어지러울 때 향을 피우면 가라앉더라고요.

 

오늘 집에 가서 향을 피우고 싶어요.

 

오늘밤, 왠지 설렘으로 마음이 들뜰 거 같아서요.”

그 짧은 시간에 이걸 사서 뛰어와 전하다니.

 

그의 순발력과 다정다감함에 잠깐 뭉클했다.

“어머나, 세상에….”

“유미씨도 향을 피우고 있다고 생각하면 저 행복할 거 같아요.”

“어쨌든 고마워요. 저도 집에 가서 피워볼게요.”

유미가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의 웃는 얼굴이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는 그대로 선 채 유미를 향해 예의 살인미소를 풀풀 날리며 서 있었다.

 

고즈넉하게 여름저녁이 저물어가는 시각이어서일까.

 

그의 미소가 환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마치 하얀 사과꽃이 가득한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