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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껌같은 사랑-2

오늘의 쉼터 2015. 3. 1. 12:07
(108) 껌같은 사랑-2
 

 

 
 
‘잡았다. 쥐새끼!’

남자는 멀쩡하게 생긴 젊은 양복쟁이다. 창피한지 유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이거 놓고 좀 얘기해요. 아이, 창피스럽게.”

“같이 갑시다.”

“좀 봐줘요. 그냥 잠깐 장난으로 한 건데….”

“장난? 이게 얼마짜리 장난감인 줄 알기나 알아? 3000만원 준비됐냐?”

딱딱한 바지춤이 금세 시들어 갔다.
 
유미는 그의 혁대를 움켜잡았다.
 
유미의 다른 손에 잡힌 남자의 손이 빠져나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상황을 눈치챈 승객들 사이에서 낄낄, 큭큭 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만큼 지하철은 만원 지옥철이었다.

지하철 문이 열렸다.
 
이때다 싶은지 남자는 유미의 어깨를 팔꿈치로 찍고는 튀어 나갔다.
 
눈에 불이 번쩍 날 정도로 가격을 당한 유미도 너무 화가 나서 뒤쫓아 내렸다.
 
하지만 남자는 이미 줄행랑을 쳐 버렸다.
 
오른쪽 어깨를 감싸 쥐고 비틀비틀 걷자니 화가 나서 미칠 거 같았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다.
 
내 손으로 잡은 치한만 열 명도 넘는데….
 
하이힐로 발등을 찍은 놈도 셋은 되고. 이렇게 당하다니.
 
그리고 아무리 만원이라지만 승객들은 도대체 뭐야?
 
이제는 점점 남의 일에, 그것도 여자를 구하는 기사도 정신 같은 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잠시 승강장의 빈 의자 하나가 눈에 띄어 앉았다.
 
참 재수 없는 날이다.
 
어깨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윤동진이었다.
 
사흘 만의 통화였다.

“뭐해요?”

“지하철역인데 치한한테 당해서 정신 놓고 있네요.”

“왜 차를 타지 지하철을 탔어요? 치한한테 당하다니? 괜찮아요?”

“어깨가 너무 아파요.”

“어깨? 부위가 좀 색다르네요.”

“농담하지 말아요. 다 잡은 놈이었는데 놓쳤어요. 약 올라 죽겠어.”

“치한을 잡았다고?”

유미는 화가 나서 좀 전의 상황을 윤동진에게 설명했다.

“유미씨, 아무리 그래도 여자가 참 어떻게….
 
하여간 당신은 참 용감해. 그리고 겁도 없고.”

“뭐든 손안에 든 걸 놓친 건 처음이야.
 
그 수갑이 있었으면 그놈 손에 바로 채우는 건데.
 
아이, 약 올라. 나도 이제 늙었나 봐요.”

“하하. 그 나이에 치한이라도 붙는 걸 축복이라 여겨야 되는 거 아닌가? 아, 미안.”

“헐, 겨우 그 정도인 여자가 애인이세요?
 
그나저나 오늘 스케줄 장난 아닌데, 움직이는 게 힘드네.”

“거기 그대로 있어요.
 
이 흑기사가 바빠서 가진 못하고 흑기사의 기사를 보낼 테니.
 
무슨 역이라 했죠?”

“그만둬요. 괜찮아요.
 
괜히 기사가 눈치채면 그것도 신경 쓰이죠. 아직은….”

유미는 윤조미술관의 일개 큐레이터인 자신과 그의 입장을 아직은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화를 끊고 나자 문자가 들어왔다.
 
‘훼어 마이 러브?
 
오 나의 라라.
 
눈도 허벌나게 오는데.
 
‘닥터 지박어’는 눈 속에서 라라를 찾아 헤매고 있다. 전화 좀 줘.’

인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규가 정말 반갑다.
 
그와는 요즘 적조했다.
 
유미는 인규에게 바로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했다.
 
마침 인규는 근처를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자기 지금 너무 힘들겠구나.
 
걱정 마. 너의 곁엔 내가 있잖아.
 
언제나 항상 영원히. 오늘 하루는 내가 너의 기사가 되어 줄 테니.
 
강의도 있다면 가방도 무거울 텐데. 가방모찌도 돼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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