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27장 지도자 [10]
(572) 26장 지도자 <19>
이번에는 김동일의 전용 헬기 편으로 서울로 내려왔다.
주석궁과 청와대를 제 별장처럼 왔다 갔다 하는 인간은 서동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전 10시 반, 청와대 헬기장에 착륙한 구소련제 헬기에서 신의주 장관 서동수가 내린다.
비서실장 양용식이 마중 나왔다가 헬기를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청와대에 김 위원장 헬기가 착륙하다니, 봄날이 오기는 오는 것 같습니다.”
양용식의 시선이 서동수 옆에 선 전영주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영주가 누군지 최고급 정보를 쥐고 있는 양용식이 모를 리가 없지만 예의를 지켜야 한다.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양용식과 서동수는 곧장 차에 올라 집무실로 달린다.
아침에 양용식에게 급한 전갈이 있다면서 대통령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대통령은 일정을 미루고 서동수를 기다리고 있다.
양용식은 내용을 묻지 않았고 차 안에서도 입을 다물고 있다.
이윽고 10분쯤 후에 서동수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대통령 한대성과 양용식까지 셋이 독대를 한다.
한대성은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임제 개헌 합의를 김동일에게 알리러 갔다가 바로 면담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서동수가 권한 음료수에 손도 대지 않고 입을 열었다.
“대통령께서 연임하시는 것은 북한 측도 이의가 있을 리가 없지요.
김 위원장은 잘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한대성이 머리만 끄덕였고 서동수가 말을 이었다.
“대일관계 때문입니다.”
그러고는 서동수가 김동일한테서 들은 일본과의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 호흡을 조정했다.
“오늘 오후에 북한은 일본 측에 성명을 발표할 것입니다.”
한대성의 눈빛이 강해졌고 양용식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본론인 것이다.
“일본정부에 한국령인 대마도를 반환하라는 성명을 발표할 것입니다.
그것이 당장은 한국령이 되겠지만 곧 남북한 연방령이 될 테니까요.”
“대, 대마도를…….”
놀란 양용식이 먼저 말을 꺼냈다가 헛기침을 하고 한대성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그때 한대성이 서동수를 보았다.
“일본의 각개격파. 아니, 남북한 이간질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지시군.
우리로선 고마운 일이지요.”
“그래서 한국 측도 호흡을 맞출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서동수가 말하자 한대성이 커다랗게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덧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
“당연하지요. 완벽하게 남북 공조를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관계 장관 회의를…….”
양용식이 반쯤 엉덩이를 들면서 한대성을 보았는데 노련하고 차분했던 그가
이렇게 덤벙거리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이런 허점은 인간적으로 보인다.
한대성이 머리를 끄덕이자 양용식이 완전히 일어나면서 말했다.
“북한 측과도 조율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누구한테 연락을 하면 될까요?”
“통일전선부장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서동수가 말하자 교통정리는 한대성이 했다.
“그럼 통일부 장관이 연락하도록 하세요.”
“예, 대통령님.”
기운차게 대답한 양용식이 서둘러 집무실을 나갔을 때 한대성이 길게 숨을 뱉었다.
감동한 표정이다.
“김 위원장이 그렇게까지 해주다니. 고맙군요.”
(573) 26장 지도자 <20>
오후 2시 55분. 서울역 대합실의 대형 TV 앞에 수백 명의 시민이 모여 있다.
3시에 북한의 성명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여러 번 예고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북한 TV 방송의 발표는 나중에야 한국에서 녹화했다가 틀어 줬지만
지금은 생방송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다 무슨 내용인지를 말해 주지 않아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역시 이번에도 증권가 찌라시는 김동일 위원장의 유고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김동일이 한국에서 약속한 100억 불을 못 받자 신의주를 동결시킨다는 찌라시도 나왔다.
서동수가 초대실에서 복상사했다는 찌라시가 나왔다가 금방 사라졌는데
퍼 나르는 놈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3시 정각이 되자 광고도 없이 TV 화면에 북한 여자 아나운서가 나왔다.
그 아줌마다.
국제시장 시절의 파마머리, 붕어빵을 파는 아줌마의 얼굴,
오늘은 피로 물들인 것 같은 치마를 입고 앉았다.
뒤쪽 배경은 백두산 천지 그림,
아줌마가 눈을 치켜뜨고 대합실의 한국인들을 보았으므로 모두 숨을 죽였다.
저 입으로 무자비하게 쏟아내는 대남 비방을 모두 들어왔기 때문이다.
도대체 위아래도 없지, 이쪽을 노려보면서 반말을 떡떡 갈기는 그 배짱, 그 오만,
그 싸가지를 당해 본 한국 시청자들은 모두 진저리를 냈던 그 주인공이다.
그때 아줌마가 소리치듯 말했다.
“일본 총리 아베에게 경고하안다.”
뜬금없었기 때문에 이곳저곳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가 조용해졌고 아줌마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대마도는 조선령이었으며 지금은 남조선령이 되어야 맞다.
일본 정부는 대마도를 즉시 남조선에 반환하여야 할 거어시다.”
한 마디 한 마디가 힘이 차 있었으며 그렇게 분명할 수가 없다.
남조선의 어느 아줌마도 이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라고 대부분의 시청자는 믿는다.
다시 아줌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모든 국제기구에 대마도의 남조선 반환 청구 소송을 낼 것이며,
남조선과 함께 대마도 반환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는 바이다.”
그때 이곳저곳에서 박수 소리가 터졌는데 그것이 금방 전체 시청자에게로 번졌다.
대합실이 박수 소리로 덮여 안내 방송 소리도 묻혔다.
그때 화면이 바뀌더니 한국의 여자 아나운서가 나왔다.
눈이 번쩍 띄는 미모에 허벅지까지 드러난 몸매가 다른 때 같으면 감동을 주었겠지만
대합실 시청자들에게는 조화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의식했는지 아나운서가 기죽은 표정으로 말했다.
“곧 통일부 장관의 성명서 발표가 있겠습니다.”
서동수는 안가의 응접실에서 TV를 보고 있다.
좌우에는 안종관과 전영주가 앉아 있었는데 막 통일부 장관 윤병준이 화면에 나왔다.
윤병준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마도는 건국된 후부터 한국 정부가 줄기차게 일본 정부에 반환을 요구했던 한국 영토입니다.”
윤병준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들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마도 반환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한일병합 후 일본은 대마도가 한국령이라는 자료를 지우려고 기를 썼지만
아직도 수많은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점점 열기를 띠는 윤병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서동수가 머리를 돌려 안종관에게 물었다.
“이제, 남북한이 연합하면 대마도 수복은 가능하겠지요?”
(574) 26장 지도자 <21>
“인기가 하늘로 치솟는군요.”
민족당 정책위의장 백기현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오후 8시, 여의도의 한식당 안이다.
본래 일식당을 예약해 놓았다가 오후의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부랴부랴 식당까지 바꾼 상황이다.
정치인은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주잔을 든 백기현이 한 모금을 삼키고는 앞에 앉은 민족당 대표 오경복을 보았다.
“이번 대마도 사건은 신의 한 수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경복이 시선을 들었다가 내리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5선 의원인 오경복은 이번에 민족당 대선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대통령 연임 개헌이 대두되면서 날벼락을 맞았다.
사분오열이 되어 있던 민족당 의원 대부분이 개헌 찬성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대세’다.
이것은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가 없으면 그대로 진행된다.
거기에 오늘 오후 3시의 대마도 반환 성명이 ‘대세’를 철벽같이 만들어 버렸다.
오경복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맞아, 신의 한 수야. 한대성과 김동일이 함께 놓은 신의 수지.”
“중간에서 서동수가 심부름을 했다고 합니다.”
서동수가 헬기로 청와대에 내린 것도 언론에 보도가 된 것이다.
서동수와 악연이 있는 백기현이 입맛을 다셨다.
“서동수가 한대성 이후의 연방 대통령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김동일은 제쳐 두고 말이지요.”
“…….”
“이 분위기로 가면 서동수가 신의주를 기반으로 북한 지배층을 장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
“지금도 신의주의 반란세력을 끌어안고 있는 데다 북한 군부하고도 관계가 좋지요.
그리고 그놈은 처세의 달인입니다. 돈 먹고 매수하는 데는 귀신이죠.”
“…….”
“김동일은 허수아비가 되는 거죠. 지금도 서동수가 김동일을 갖고 놀고 있을 겁니다.”
“글쎄.”
술잔을 내려놓은 오경복이 긴 숨을 뱉었다.
오경복은 62세,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에 공무원으로 15년을 보낸 경력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서동수는 정치에 뜻이 없는 것 같아.
신의주 장관을 끝으로 다시 기업가로 돌아갈 것 같네.”
오경복이 제 잔에 술을 채우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서동수를 보면 기운이 빠져.
그자의 행동을 보면 정치를 경멸하고 있는 것 같아.
아마 우리가 그 경멸 대상이 되어 있을 거야.”
“그놈이 말입니까?”
“당연하지.”
한 모금에 소주를 삼킨 오경복이 말을 이었다.
“난 그자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를 가끔 생각해 보았어.”
“무슨 말씀을…….”
“재미있거든.”
눈을 가늘게 뜬 오경복이 초점이 먼 시선으로 앞쪽 벽을 보았다
“그자는 아마 일을 다 총리나 장관한테 맡기고 오입질이나 하러 다닐 거야.”
“나라가 개판 되는 거죠.”
백기현이 얼른 말을 받았지만 오경복은 머리를 저었다.
“잘될 거네. 서동수의 인기는 높을 거고.”
“오입질이나 하는데도요?”
“측근들이 충성을 바칠 거고.”
한 모금 소주를 삼킨 오경복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목표는 신바람이고 감동이야. 서동수는 그걸 만들 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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