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66) 첫사랑-3

오늘의 쉼터 2015. 2. 12. 01:24

(66) 첫사랑-3

 

 

 

 

 

윤동진이 귀국하기로 한 날이지만 유미는 작정하고 고향으로 가는 KTX를 탔다.
 
윤동진을 살짝 감질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럴수록 스라소니는 맹렬하게 달려들 테니까.
 
유미의 고향은 부산이다.
 
유미가 떠나온 시절보다 훨씬 더 교통이 좋아지고 가까워졌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더욱 더 멀어졌다.

이모의 횟집 ‘갈매기식당’은 여전히 자갈치시장에 있었다.
 
유미가 태어나기 전부터 문을 열었다니 40년은 된 식당이다.
 
예전부터 시장 안에서 제법 큰 식당이었다.
 
게다가 엄마보다 열 살 위인 이모의 수완으로 한때 식당은 제법 호기를 누렸다.
 
엄마는 이모를 도와서 이곳에서 일하며 유미를 키웠다.
 
오랜만에 ‘갈매기식당’의 간판과 훅 달려드는 비린내를 맡으니
 
엄마와 지내던 옛날이 갑자기 다가왔다.

엄마…! 엄마는 젊고 예뻤다.
 
외갓집 식구들은 전쟁 통에 북쪽에서 피란을 내려왔는데,
 
피란길에서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 폭격을 맞고 죽었다고 한다.
 
외할머니와 이모, 그리고 어린 이모의 등에 업혔던 갓난아기였던 엄마만
 
살아남아 부산에 정착했다.
 
외할머니는 자갈치시장에서 생선광주리를 이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세 모녀의 신산하고 가난한 삶은 이모가 결혼하면서 식당을 개업하게 되자 안정을 찾아갔다.
 
갓 스물을 넘긴 엄마의 미모가 워낙 빼어나서 손님이 많았다.
 
하지만 여고를 졸업하고 식당일을 돕던 엄마의 꿈은 서울로 올라가 여대생이 되는 거였다.
 
엄마의 꿈은 음악선생님이었다.
 
소녀시절부터 엄마는 성당의 성가대원이었다.
 
성가를 부르는 아름다운 처녀를 보기 위해서 시장 근처의 성당은 청년들로 붐볐다고 한다.
 
흰 레이스 미사보를 쓰고 성가를 부르는 엄마의 모습이야말로 성처녀의 모습이었다고
 
언젠가 이모가 말했다.
 
그러나 아름답고 순결한 엄마의 모습은 거기까지.
 
유미가 기억하는 엄마는 모순덩어리였다.
 
엄마도 유미처럼 어린 나이에 미혼모로서 유미를 낳았다.
 
그러나 첫단추를 잘못 끼운 두 모녀의 삶은 달랐다.
 
유미의 삶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엄마로부터 도망쳐온 삶이었다.
 
엄마는 욕망을 증오했다.
 
자신의 욕망은 그렇다 쳐도 자연스레 성숙해가는 딸의 욕망마저도 뿌리를 뽑으려 했다.
 
유미는 눈먼 강아지처럼 키워졌다.
 
그러나 엄마의 전철을 밟는 것도 운명이었을까?
 
정효수와의 단 한번의 관계로 아이를 가졌을 때 엄마는
 
그 집에 쳐들어가다시피 해서 결혼 승낙을 받았다.
 
유미가 기억하기 싫은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 중의 하나다.
 
아이의 씨가 분명하면 무조건 결혼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유미는 아버지를 모른다.
 
엄마는 거기에 대해 평생 입을 다물었다.
 
큰이모의 말로는 스물한 살 되던 어느 날,
 
엄마는 닷새 동안 자의든 타의든 세 명의 남자와 섹스를 했다고 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함구했지만,
 
셋 중의 한 사람은 유미가 증오하는 인간이다.
 
엄마에게 남편 행세를 하려들고 자신이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남자.
 
어린 시절, 몇 번이나 그가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랐던 남자.
 
나머지 두 남자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유미는 어릴 때부터 상상 속의 아버지를 그려왔다.
 
상상 속의 아버지는 멋졌다.
 
상상은 자유니까.

그리고 이곳은 유미의 첫사랑이 있는 곳이다.
 
희고 곱상하게 생긴 해사한 얼굴의 소년.
 
처음으로 금기를 깨는 듯한 두려움과 긴장으로 온몸의 솜털이 정전기를 일으키던 그 시절.
 
유미는 기억 속의 그를 현실로 불러낸다.
 
열여섯 살 때처럼 가만히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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