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칼과 칼집-8
10시가 넘었는데 누구일까? 도어뷰에 나타난 인물은 뜻하지 않게 박용준이었다.
“어머, 박용준씨! 웬일이에요?”
“잠깐 뭘 전해줄 게 있어서요. 잠깐이면 돼요.”
유미는 목욕 가운을 걸치고 현관을 열고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밖에는 그새 비가 내렸었는지 용준의 머리가 살짝 젖어 있고 안경에 김이 서려 있다.
알코올 냄새도 풍겼다. 밖은 가을비 때문에 기온도 뚝 떨어져 있었다.
“우리 집을 어떻게 알았어요?”
“실은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유미는 못 들은 척 용건을 물었다.
“전할 게 뭔데요?”
“제가 지난번에 리포트를 못 냈잖아요.”
용준은 리포트를 건넸다.
유미가 그걸 받아들자 용준이 한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유미가 주춤하자 그가 등 뒤에 가리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흑장미 다발이었다.
“교수님을 닮은 꽃이라 샀어요.”
잠깐 유미는 어째야 할지 망설였다.
젖은 머리에 목욕 가운만 걸친 몸이 추위로 떨려왔다.
부옇게 김이 서린 안경 너머의 용준의 눈이 유미의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유미는 목욕 가운의 앞섶을 움켜쥐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때 못 낸 리포트를 낸답시고 열시도 넘은 시각에,
그것도 사전 연락도 없이 왔으니 감점 이유가 충분해요.
꽃은 받지 않겠어요.
그리고 이 꽃 배달은 동네가 잘못된 거 같네요.
집에 가다가 들러 친한 동네 아주머니께 드려야 할 거 같은데요?”
친한 동네 아주머니라면 지완을 겨냥한 비아냥거림이다.
용준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어쨌거나 리포트는 잘 받을게요. 그럼 시간도 늦고…잘가요.”
유미가 현관문을 닫았다.
용준이 뭐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집안으로 들어온 유미는 우편물이 쌓인 탁자 위에 용준의 리포트를 던지고 소파에 앉았다.
제자와 스캔들이 나서 대학에 퍼지면 안 된다.
좀 야박하긴 하지만, 아무리 배고프더라도 똥인지 된장인지 가려먹어야 한다.
리포트는 핑계다.
한눈에도 엉성했다.
밑에 깔린 우편물을 대충 정리하고 잘 생각이었다.
이상한 우편물이 보였다.
우편물이라기보다는 봉해진 흰 봉투였다.
발신인도 수신인도 적혀 있지 않았다.
무작위로 보내는 광고물인가?
봉투를 열어 보았다.
컴퓨터로 출력된 간단한 편지가 나왔다.
‘오유미씨, 나는 당신의 과거를 알고 있습니다.’
장난편지라 치부하기엔 유미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누굴까?
언젠가 들은 뉴스가 생각났다.
“나는 당신의 불륜을 알고 있습니다.
내 입을 막으려면 아래의 계좌로 입금하시오”
라는 익명의 메일.
그걸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불안하여 입금했다고 한다.
그런 종류의 편지인 걸까?
‘나의 과거를 알고 있다? 그래서 뭐 어쩌라구!’
유미는 그 편지를 찢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만약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
유미에게 내미는 도전장이나 협박장이라면?
유미의 뇌리에 수많은 남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찢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찢어버린다고 과거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분명히 켕기는 과거가 있지.
그러나 이미 다 지난 일이야.
그럴 리 없어!
유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술이 확 깼다.
'소설방 > 유혹' 카테고리의 다른 글
(45) 칼과 칼집-10 (0) | 2015.02.01 |
---|---|
(44) 칼과 칼집-9 (0) | 2015.02.01 |
(42) 칼과 칼집-7 (0) | 2015.02.01 |
(41) 칼과 칼집-6 (0) | 2015.02.01 |
(40) 칼과 칼집-5 (0) | 2015.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