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41) 칼과 칼집-6

오늘의 쉼터 2015. 2. 1. 17:06

(41) 칼과 칼집-6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조찬 강의부터 시작된 유미의 하루 스케줄이 김 교수와의 저녁식사로 마침표를 찍었다.

 

오후에 잠깐 틈이 났지만, 백화점으로 달려가 넥타이를 샀다.

 

삼청동의 한식집으로 가는 길에서 유미는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가로수를 보았다.

 

노란 잎을 흩날리고 있는 신라금관 같은 나무를 보고 있자니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가을이 성큼 가고 있었다.

 

가을 단풍이 우거진 숲으로 드라이브 한번 못 가 본 지 몇 년째다.

 

도시의 명멸하는 불빛 속에서만 부유하고 있는 삶이라니.

 

유미는 감사의 표시로 김 교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최고위 과정을 맡아 수업을 한 지도 2주가 지나고 있다.

 

어쨌거나 그 스스로가 공치사를 할 때는, 어떤 식으로든 섭섭하지 않게 해야 한다.

 

내키지 않는 일일수록 후딱 해치우는 게 수다.

 

알 듯 말 듯한 노회한 김 교수의 의중을 간파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럴수록 예를 다해야만 한다.

 

저녁식사와 넥타이 선에서 고마움을 전할 수 있는 관계는 그나마 다행이다.

 

아니 그 선에서 모든 관계를 정리해야 편하다.

 

돈으로 해결되는 관계야말로 가장 쉬운 처세다.

 

“아니, 정말 이럴 필요 없는데….”

 

10년은 젊어 보일 금색 헤르메스 넥타이를 보며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의 얼굴은 기쁨과 약간의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제게 배려해 주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교수님 품위에 맞는 젊은 감각의 선물을 사려니 너무 힘들었어요.”

 

“뭐하러 그렇게 힘들여요?

 

가끔 이렇게 만나면 되지. 오 선생 얼굴이 선물인데….”

 

이럴 줄 알았다.

 

그럴 수야 없지. 내가 얼굴 내밀 데가 얼마나 많은데…

 

얼굴 보면 뭣도 보고 싶다고 할 노인네.

 

“어머, 교수님. 제 얼굴은 뭐 공짜처럼 말하시네요. 얼마나 비싼데….”

 

토라지는 척 말하자 김 교수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쿠, 미안. 오 선생은 얼굴도 이쁜데 참 예절도 발라. 그 얘길 하고 싶은 거였는데.”

 

나이 든 남자는 섭섭함을 잘 탄다.

 

“예, 알아요. 그렇게 봐 주시니 제가 더 감사해요, 교수님.”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걸으며 방심하고 있는데 김 교수가 갑자기 물었다.

 

“근데 왜 아직 혼자요. 애인 있어요?”

 

“그건 교수님이 더 잘 아실 거 같은데요.

 

이번 강좌의 강사로 저를 택하셨다면….”

 

유미는 묘한 여운을 남기면서도 공손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세상을 살다 보니 쓸데없는 인연은 없었다.

 

차포(車包) 떼고 하는 장기는 얼마나 막막한가. 졸(卒)이라도 버릴 게 없는 게 세상사다.

 

화투패도 많을수록 든든하다.

 

그런데 아파트에 도착하여 집으로 들어오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그림자가 휙, 지나치는 느낌이라고 할까?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 고개를 숙여 우편함을 열 때였다.

 

우편물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승강기가 상승하면서 현기증이 났다.

 

너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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