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유혹

(42) 칼과 칼집-7

오늘의 쉼터 2015. 2. 1. 17:09

(42) 칼과 칼집-7

 


 

 

 

 

피곤할수록 더 외롭다.

 

외로울수록 더 서글프다.

 

유미는 어두운 집안으로 들어서자 온 집안에 불을 켰다.

 

우편물을 탁자에 팽개치고 소파에 널브러진다.

 

전투에서 돌아와 갑옷을 벗은 여린 살을 누군가가 보듬어 주었으면 좋겠다.

 

유미는 일어나서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오디오에 음악을 걸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OST의 피아노곡이 잔잔히 흘러나왔다.

 

유미는 커다란 와인 잔에 와인을 풍성하게 따랐다.

 

며칠 전에 인규가 가져온 것이다. 샤토 마고의 세컨드 와인 빠삐용 루즈.

 

빠삐용 루즈는 ‘빨간 나비’라는 뜻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 사이’란 소설에서 여주인공이 목욕하면서 마시는 와인.

 

전에 그걸 읽고 인규에게 말했는데 마침 그가 구해온 것이다.

 

와인은 무르익은 흑자줏빛이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입안에서 굴려 본다.

 

부드럽고 농염한 향미가 느껴진다.

 

유미는 옷을 벗었다.

 

와인 잔을 들고 욕조에 들어간다.

 

반신욕 테이블을 욕조에 덮고 나서 그 위에 와인 잔을 올려놓는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 나른한 몸을 욕조에 누인다.

 

유미는 와인을 또 한 모금 마시며 여주인공 아오이처럼 눈을 감는다.

 

냉정과 열정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쨌든 그 두 가지를 잘 배합해야 멋진 연애의 칵테일이 되는 건 분명하다.

 

여주인공 아오이는 일과가 끝나면 귀가하여 와인을 마시며 목욕을 즐기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긴다.

 

그의 지극한 동거남은 와인을 마시고 있는

 

그녀를 위해 어깨와 목을 다정하게 마사지해 준다.

 

지난번에 인규가 왔을 때,

 

그 얘기를 해 주자 인규가 재연해 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닌가 보았다.

 

마사지를 한다고 설치던 인규가 유미가 입에 대고 있던 와인 잔을 건드려 쏟아 버렸다.

 

덕분에 유미의 입 주위에 검붉은 와인이 쏟아져 흘러내렸다.

 

유미가 눈을 흘겼다.

 

“ㅋㅋㅋ…. 야, 너 월하의 공동묘지 찍는 거 같다.”

 

장난꾸러기 같은 인규가 유미의 입술에 키스하며 목을 물어뜯는 시늉을 했다.

 

“크아아! 나는 드라큘라 백작이다.”

 

가슴골로 흘러내리는 와인이 꼭 피처럼 보였다.

 

피를 보면 인간은 묘하게 흥분한다.

 

그날 ‘빨간 나비’라는 레드와인 덕에 인규는 몹시 즐거워했다.

 

인규는 욕망에 솔직하며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는 지완의 앞에서와는 달리 자기 본연의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 유미를 사랑한다고 했다.

 

외설스럽고 음탕한 자신의 기질을 유미가 아닌 다른 여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 했다.

 

유미 또한 그런 점에서 통쾌한 기분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따스함이나 편안함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하지만 인규는 유미에게서 편안함 이상의 안도감을 느꼈다.

 

자물통에 꼭 맞는 열쇠를 찾은 사람처럼.

 

두 사람이 정말로 잘 맞는 짝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렇게 잘 맞을 수가 있냐. 이건 신이 내린 맞춤형 성기야.”

 

그러면 유미가 응수했다.

 

“정말이야. 어쩌면 세상에! 칼과 칼집처럼 꼭 들어맞아.”

 

과연 그럴까?

 

잘 맞는다는 건, 칼보다는 칼집의 문제 아닐까.

 

칼집 나름이지. 칼과 칼집이라…

 

자신이 생각해도 멋진 비유다.

 

서서히 취기가 올라왔다.

 

칼이 그리운 밤이다.

 

잠깐 요리사처럼 몇 개의 칼을 떠올려 본다.

 

그때 현관의 벨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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