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1. 비밀 협상

오늘의 쉼터 2015. 1. 1. 23:24

1. 비밀 협상  

 

 

밤 9시 반. 사무실에 잠간 정적이 감돌자 아래층 식당의 소음이 들
려 왔다. 술에 취한 남자들의 떠들석한 말소리에 주인 여자의 웃음
소리가 섞여 있다.
   30평 가량의 시무실에는 낡은 철제 책상 대여섯 개가 놓여 있었는
데 위쪽의 회의용 데이블에 둘러앉은사래들은 마치 아래층에서 들
려 오는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천장에 붙은 형
광둥 하나가 깜박이다가 다시 켜졌다.
   이동천이 테이블 좌우에 둘러앉은 박철규와주대흥,기무라의 얼
굴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꺼칠해진 얼굴에 셔츠 차림으로 앉아 있는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담배가 끼워져 있다.
   "사업체는 영업을 계속하게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수배자 신분
이야. 당분간은 조심해야 할 것이다. "
   그의 말소리가 방안의 정적을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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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자들은 온갖 수단을 써서 나를 잡아 테이프와 자료를 앗으려
고 할 것이다. "
   박철규가 입을 열었다.
   "이용덕 총장이 곧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러니 필사적이겠지요."
   이용덕이 대통령 후보가 되리라는 소문은 전부터 떠돌고 있었지만
이제는 여당에서 소문을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언론을 통해 먼저 두
드린 다음 내놓는 여당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당분간 일본으로 몸을 피하시는 것이 어떻73습니까? 여기보다는
안전할 것 같습니다만,"
   기무라의 말에 모두 머리를 들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말입니다. "
   그러자 이동천이 머리를 저었다.
   "여기 있겠다. 호의는 고맙지만, "
   그는 사래들을 둘러보았다.
   "그보다도 배장근이를 찾아야 한다. 포보비치에게 쫓기는 몸이 되
었지만 그놈도 멀리 떠나지는 않았을 거야."
   "배장근 일당은 모조리 제거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락할 길도
막막한데."
   박철규가 말하자 주대홍이 머리를 들었다.
   "힘들게 찾으러 댕길 필요 없어요. 나타나게 만들면 돼요."
   모두들 주대홍을 바라보았다.
   "포보비친가 뭔가 하는 놈을 우리가 없애 버리면 나타날 것 아닙
니까?"
16 밤의 대통령 제길즌 -및
    그러자 박철규가 그도 그렇군,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동천을 바라
보았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우린 아직 그들의 조직을 모른다.
누가 배장근의 뒤를 이었는지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야."
    이동천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이쪽도 깨어진 조직을 아직 정
비하지도 못한 상황이다. 3(뼜 가까운 간부급 부하들이 구속되어 있
는 데다가 사업체들은 대부분 개점휴업 상태인 것이다.
   "김달수란 놈일 거.5_."
   주대흥이 다시 말했다.
    "아니면 윤경산이든가.아예 이 참에 1놈들을 몽땅 없애 버립시
다. "
   윤경산이 르네상스 호텔의 특실에 들어선 것은 밤 10시였다. 소파
에 앉아보드카 잔을 들고 있던 포보비치가 그를 보자 턱으로 앞자리
를 가리켰다.
   "늦으셨군, 윤 동무."
   "한윤호를 만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
   윤경산은 탁자 위에 놓인 물잔을 들어 서너 모금을 마시고 내려놓
았다.
   "한윤호는 모험하지 않3a다고 약속했습니다. 배장근에게서 연락
이 오면 곧 우리에게 알려 주기로."
   "그자도 믿을 수 없어 ."
   포보비치가 그의 말을 잘랐다.
   "놈을 밤낮으로 감시해야 돼. 그리고 우리가 감시하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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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보여 져야 된단 말이오."
    "알고 있습니다, 포보비치 동지."
    "배장근은 150킬로그램으로 자금을 만들 거요. 그만한 물량이면
몇백 억은 되겠지."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동지."
   술잔을 내려놓은 포보비치가 윤경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 윤 동무. 마약을 꼭 찾아야만 돼요.
그렇지 못하면 우리 둘이 책임을 져야 돼,"
    "밀로쳬프 동지는 당장에라도 이곳으로 달려을 기세였소. 내가 말
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이곳에서 총을 빼어 들고 있을 거요."
    포보비치는 술방을 들어 빈잔에 술을 채웠다. 울산의 창고에 두었
던 마약 150킬로그램을 강탈당한 것은 두 명 모두에게 책임이 있었
다. 어쩌면 포보비치가 총책임자로서 책임이 더 무거울지도 모른다.
단숨에 보드카를 삼킨 포보비치가 충혈된 눈을 들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이용덕이 당선된다면 그것은 모두 우리
의 덕분이오. 이용덕은 우리를 무시하지 못하게 될 거요, 동무."
   그는 얼굴에 회미한 웃음을 띠었다.
   "김한영 대통령도 역사에 남을 업적을 기록하게 될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배장근이 같은 피라미 한마리 때문에 조직이 흔
들려서는 안된단 말이오. 그놈이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르니까 말이
오."
18 밤의 대통령 제구분 -트
    다음날 아침의 청와대. 김한영 대통령은 이용덕 총장, 김재선 수석
과 함께 조찬을 들고 있었다.
    비서관과 시중드는 사람들을 물리친 세 명만의 조찬 모임이었는데
극비 회동이었으므로 이용덕은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수석실의
직원들도 김재선의 대통령과의 만남을 모른다.
    정갈하고 단촐한 조찬은 대통령이 수저를 내려놓자 끝이 났다. 밥
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슬슬 대통령의 눈치를 보던 김재선과 이용덕
이 따라서 수저를 내려놓자 엽차잔을 든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평양으로 자레들 둘이 같이 가줘야겠어. 체르넨코는 자네들보다
먼저 들어가 있을 거야."
    김재선과 이용덕이 숨도 멈추고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나는 자레 둘 중 한 사람만 보내려고 했는데 북에서 둘 다 보내
달라고 하는군."
   엽차를 한모금 마신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김정일은 아마 무력부장 장철민과 함께 자레들을 만날 거야. 만
나게 되면 내 친서를 전하고 그쪽과 세부 계획을 세워 보도록 해."
   "세부 계획이라면."
   가볍게 헛기침을 한 이용덕이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각하께서 보내신 친서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까?"
   김재선이 힐끗 대통령의 눈치를 보았다. 아직 이용덕은 안드로포
프와의 회담 내용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대통령이 머리를 」1
덕였다.
   "자네는 아직 모르고 있을데니 내가 요점만 알려 주겠네. 첫째로
남북 간의 상호 불가침 조약이야. 이것은 양국 국가 원수가 조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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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것이지. 그 다음이 남북 교류이고."
   그렇게 되면 김한영 대통령은 거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 우익
보수 세력과 기득권층, 그리고 중산층은 모두 안정을 원했다. 그들에
게 북한의 침공은 최대의 위협이며 그로 인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잃
게 될 것이다.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김정일도 꾼임없이 체제에 대한불안을느끼고 있어.그들의 최
대의 적은 우리의 국군이 아니야.자본주의의 침투와 개방,그리고
불만 세력들이지. 그래서 우리는 김정일의 체제 유지를 도와 주기로
했어 ."
   "KEDO(한국 에너지 개발 기구)에 집행 위원회를 따로 설치하고
그 위원단에 북한측 위원을 몇 명 선임해서 그들에게 자금 집행을 맡
게 하는 거야."
   "물론 미국도 양해할 거야. 우리와 협상이 끝나면 북한은 미국에
특사를 파견해서 핵확산 금지 조약에 가입은 물론 매년 핵사찰을 받
도록 하Tf다고 했으니까."
   "0101, fl . "
   "미국이야 제돈 내는 것도 아니니까 상관할 것 없지. 그리고 핵사
찰을 받겠다는 데야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할 거야. 일본은 말할 것
도 없고."
"경수로 부대 시설까지 해서 50억 달러야. 그리고 내년부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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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대북 투자와 통상을 자유화시키게 돼. 남북 통상 협의회를 설치하
 도록 해서 창구를 일원화시켜서 말이야."
    "각하, 그렇다면 그것도 정부 차원의 조직입니까?"
    이용덕이 묻자 대통령이 머리를 저었다.
    "민간 단체야."
    "각하, 그렇다면."
    그러자 김재선이 나섰다.
    "이 총장, 민간 단체지만 양국 정부의 조율물 받는 것은 마찬가지
요.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
    그러자 대통령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김정일은 차기 대통령 후보인 이 총장에게 약속을 받고 싶었던
모양이야. 김 수석과 같이 만나자는 걸 보면."
    이용덕이 머리를 숙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김정일과의 협상 발표는 남북한 불가침 조약과 내년 3월
부터 실시되는 이산 가족 교류에 대한 내용으로만 해야겠지?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각하."
   "자네들이 다녀와서 1 1월 초에 내가 김정일과 조약을 맺고 이 총
장이 대선 후보로 곧장 지명되고 나서 다시 김정일과 만나 이산 가족
문제 둥 세부 사항을 합의한 후에 발표하면 자레는 대선을 쉽게 치를
수가 있을걸세 ."
   "f131. "
   이용덕은 목이 메이는 듯 말을 잇지 못하고 머리를 숙였다.
   "대한민국의 장래는 이제 자네들 두 사람에게 달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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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l , rrar."
   "이 총장 다음 순서는 김 수석이야.그것을 명심하도록."
   "예,각하."
   그러자 대통령은 만족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자리에
서 일어섰다. 짧은 조찬이었지만 어느 사이에 두 사람과 대찬민국의
미래가 결정된 것이다.
    낀월 중순이어서 한낮의 태양이 내리쪼이고 있었지만 기온은 쾌적
했다. 가로수는 노랗게 물들어 가기 시작혔고 거리를 지나는 행인들
은 이제 긴 소매의 가을 옷 치럼이 되어 있었다.
    열린 차창으로 들어오는 바깥 공기를 마시며 창 밖을 바라보던 양
유경이 머리를 돌렸다. 점심을 마치고 회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까짓 협박에 정부가 로리를 내리다니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얼
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었을덴데."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버지의 로비 내역을 폭로하겠다면서 제 살길을 찾다니, 이동천
도 교찰한 놈이에요."
   "당분간입니다, 회장님 ,"
   김양호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어지러운 상황이어서 조그만 잡음에도 신경을 곤두세우
고들 있지요. 대선이 끝나면 곧 정리가 될 겁니다. "
   "그 사이에 더 철저히 준비를 할 것 아녜요?"
   "회장님도 참."
   이제 김양호는 웃는 얼굴이 되었다.
22 밤의 대통령 제살1-및
   "정권의 위력을 모르시는군요. 제아무리 단단하게 준비를 해놓았
더라도 놈은 하루아침에 끝장이 낳니다. 더욱이 통치자를 적으로 하
는 밤의 조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
   "이 총장이 석 달 후면 대선 후보로 지명이 되고 내년 고뭘에는 대
통령이 됩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됩니다. "
   차는 한남대교를 넘어 강남대로로 진입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차가 밀리는 곳이다.
   "사이토 씨가 역삼동에 백화점과 호텔을 짓겠다는 말을 하던가
요?"
   창문을 올리면서 양유경이 묻자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들었습니다. 7천 평의 땅을 구입할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그 땅은 본래 아버지가 잡아 두셨던 곳 아녜요? 난 아버지한테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러셨던가요?뭔체 전국의 물좋은 땅은 모두 눈여겨보신 분이셔
서."
   "하지만 우리는 당장에 그 땅을 구입할 만한 자금이 없습니다. "
   맞는 말이었지만 양승일이 살아 있었다면 부실한 업체들을 정리해
서라도 계획한 일을 성사시켰을 것이다.
   양유경이 눈로리를 세우고는 김양호를 바라보았다.
   "사이토가 부회장님보다 먼저 나한테 상의했다는 걸 알아두세요.
부회장님은 사이토에게 그 말을 듣고도 열흘이 넘도록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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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자 김양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회장님 . 그것은‥‥‥‥
     "날 무시해 온 것이지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우리도 그 땅을 구입할 능력이 있어요. 회사땅을 담보로 하든지
 아니면 매각을 해서라도."
    얼굴을 굳힌 김양호에게 양유경이 말을 이었다.
    "내가 사이토와 몸을 섞는 이유는 알고 계실 것 아녜요?그렇다면
 이젠 날조금쯤은 존중해 주셔야 할덴데."
    "아가씨는 집념이 대단하시군요."
    김양호가 무심결인지 아가뛰란 말을 썼다. 그는 굳어진 얼굴에서
입술만을 비틀어 웃었다.
    "그러면 사이토가 우리 둘 사이를 교묘하게 조종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물론이죠."
   양유경도 따라 웃었다.
   "이제야 겨우 부회장님과 내가 거의 비슷한 힘이 되었거든요. 모
두 그 사람 덕분에요,"
   블루 클럽의 서향숙 마담은 클럽 안의 대기실로 들어서자마자 눈
을 둥그렇게 뜨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에그머니 이게 웬일이o 네가 다 나오구? 이 망할 년."
   그녀는 윤혜선에게 다가가 한쪽 귀를 잡아당겼다.
   "이년아,너 때문에 김 변호사,조사장,손닝 다끊겼다. "
24 밤의 대통령 제4부 -방
    "언니, 나 좀 봐요."
    대기실 안에는 서너 명의 아가씨들이 있었으므로 윤혜선은 서 마
담의 팔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에게게, 이년 좀 봐."
    그러면서도 서 마담은 그녀와 함께 빈 방으로 들어가 마주앉았다.
윤해선이 이동천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줄로 아는지라 이제는 눈
가에 웃음기가 그려져 있다.
    "너 이년,싸모님 되었다고 날 우습게 보면 죽을 줄 알아. 알았
니?"
   "언니, 농담할 때가 아녜요. 난 심각해."
   "하긴 심각하게 되었지, 너도. 우리도 정 부장이 잡혀 가고 난리가
났었어. 이젠 겨우 숨을 돌렸지만."
   서 마담은 담배를 꺼내 물고 길게 연기를 뱉어내었다.
   "나도 술장사 10년이 넘어서 간도 커질 만큼 커졌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다. 마치 간첩 잡는 것처럼 들이닥치더라니까 "
   "언니, 그런데 시징림은."
   사설이 길어질 것 같았으므로 윤혜선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사장님 소식 없어요?"
   "내가 어떻게 아니? 너도 모른다면서?"
   서 마담이 눈샙을 모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고생했다는 소리는 들었어. 그런데 무슨 일로 여기 왔어? 설
마 다시 나온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미쳤게요?사장님 소식 들으려고 온 건데."
   "사장님이 너한테도 연락 안했다면 나한테 왜 하겠어?내 맛을 봤
                                                  비밀 협상 25
  다면 모를까."
     "연락할 길도 없어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서 마담이 탁자 위로 바짝 몸을 숙였다.
     "무슨 일 있는 거냐?"
    "누가 찾아요."
    "경찰 말이냐?"
    "언니는 참, 경찰이라면 내가 이럴까?"
    윤혜선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눈을 흘겼다.
    "다른 사람이란 말예요. 러시아 마피아라고 하던데, 배장근이라
고. "
    "그 시림이라면 알아."
   서 마담의 말소리가 잔뜩 낮아졌다.
   "그 사람이 왜?"
   서 마담이라면 믿을 만해서 찾아온 참이었지만 윤췌선은 잠시 그
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침을 꼴칵 삼켰다. 그러나 어차피 뱉은 말이
었고 그녀로서는 이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덤 위의 잡초를 모두 쁩고 난 배장근은 손에 묻은 흙을 털면서
오세미를 바라보았다. 오세미는 무덤 앞의 잡초를 뜯고 있었는데 오
후의 헛살이 그녀의 등에 가득 덮여 있다. 골짜기를 스치고 가는 바
람이 앞쪽의 나뭇잎을 흔들자 빛 바랜 낙엽이 서너 점 흘날렸다. 그
러나 이쪽은 바람결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매운 풀 냄새와 습기에
가득차 있었으므로 그녀의 목에서는 땀이 번질거리고 있다.
26 밤의 대통령 제』부 -lE
     "이제 그만해. 이쪽 그늘로 와."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 나무 그늘로 가 앉은 배장근이 부르자 그
 녀는 잡초를 쥔 채 일어섰다. 가을 럿살에 빨갛게 익은 얼굴로 그녀
 는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산소에 오자고 했을 때부터 그녀는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지더니 함께 절을 하고 나서는 말소리도 크게
내지 않는다.
    "한번도 부모님을 죽인 조성표와 천기석을 잊어 본 적이 없어. 그
 놈들을 생각할 때마다 어떻게든 내가 힘을 길러야 한다고 다짐했는
fl , "
    배장근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내가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한 거야, 내 욕심 때문에, "
    "갚을 때가 와요, 당신한테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오세미가 말했다.
    "기운을 내야 돼요, 그때까지."
    골짜기 아래에서 회끗한 사람의 자태가 보이더니 곧 윤곽이 드러
났다. 아래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고대철이었다. 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처면서 이쪽으로 올라왔다.
   "사장님, 한 사장이 만나자고 하는데요.금방 연락을 받았습니다. "
   그의 앞에 선 고대철이 얼굴의 땀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내일 밤 10시에 다대포의 남해 호텔 로비에서 만나잡니다. "
   배장근이 머리를 끄덕였다. 장소와 시간은 그쪽에서 정하게 되어
있어서 그가 이러쿵저러쿵 할 수가 없다. 자리에서 일어선 배장근은
옷자락에 묻은 마른 풀잎을 털었다. 떠돌이 신세가 되어서 동가숙 서
가식 하고 있었으므로 오늘 밤에 묵을 곳도 아직 정해 놓지 않았다.
                                                  비밀 협』 27
   한 줄로 서서 숲길을 내려가는데 맨 뒤에서 따라오던 오세미가 입
을 열었다.
   "그것, 이동천 씨 만나고 나서 진행시켜도 늦지 않을덴데요."
   마약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배장근이 잠자코 걷자 그의 등을 향
해 그녀가 말을 이었다.
   "포보비치나 윤경산이 덫을 놓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마 그럴테지 ,"
   그러자 이제는 고대철이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배장근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잠자코 산길을 내려와 기다리
고 있는 승합차에 올랐다.
   오세미의 호출기가 울린 것은 그들이 탄 차가 부마 고속도로를 달
려가고 있을 때였다. 호출 번호를 찬찬히 바라보던 그녀가 머리를 들
었다.
   자가 네 개 찍힌 것을 보면 윤혜선의 연락이 성공한모양t1
요."
   그러자 차 안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모아졌다 윤혜선에게
두 번째 접촉했을 때 그녀는 호출 번호를 적어 주고 왔던 것이다. 배
장근이 끄덕이자 오세미는 핸드폰의 다이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쪽은 기다리고 있었던 듯 금방 사내가 전화를 받는다.
   "호출하신 분 찾는데요."
   "그렬다면 그쪽은 배장근 씨 부인 되시는."
   오세미가 힐끗 배장근을 바라보고는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28 밤의 대퉁령 제샬t -및
   "그래요. 오세미라고 합니다. "
   "아, 난 박철규라고 합니다. 이거 어렵게 연락이 되었습니다. "
   박철규라면 오세미도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긴
장을 풀지 않았다.
   "박 선생님, 어떻게 연락을 받으셨어요?"
   "어떻게 받다니요?그쪽에서 미스 윤한테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배장근이 오세미의 손에서 핸드폰을 받아 쥐었다.
   "여보세요. 나, 배장근이오."
   "아,배 사장.목소리 들으니 반갑구만."
   "박 상무님이 맞긴 맞군."
   배장근의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지금 어딥니까?"
   "배 사장은 지금 어디이?"
   그러다가 둘이는 짧게 웃었다. 양쪽 모두 도망자 신세가 되어 있
는 것이다.
   "이리 오게, 배 사장. 형님도 걱정하고 계시네."
   박철규의 목소리를 들으며 배장근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눈치빠른
배장근의 부하는 승합차의 속력을 줄이며 바깥 쪽으로 차를 운전하
고 있었다.
   이동 통신의 종합 상황실에 얀아 있던 김득기 형사는 의자에서 일
어나 전광판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이동천과 배장근의 간부급 부하
들이 소지한 핸드폰 번호는 모두 컴퓨터에 입력시켜 놓아서 통화시
에는 지역 이동 통신에서 경보음이 울리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비밀 협4 29
리고 지역 이동 통신의 화면을 체크하면 컴퓨터에 그려진 지도 위에
붉은 빛이 나타난다. 이것이 발신자의 위치이다.
   "부마 고속도로와 남구청 근처구만."
   김득기가 화면을 손가락 끝으로 짚으며 말했다.
   "양쪽이 거의 동시에 켜진 것을 보면 접촉하는군."
   그러면서 그는 귀에 대고 있던 경찰용 무전기에 양쪽의 위치를 소
리쳐 불러 주었다. 상황실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머리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배장근 쪽뜬부마 고속도로 상에 있고 이동천의 부하 놈은 남구
청 근처에 있어. 놈들은 움직이고 있단 말이야."
   그가 다시 소리치자 본부 상황실의 동료가짜증난 듯 물었다.
   "어디로 움직인다는 거of"
   "배장근은 마산 쪽으로. 아니, 멈추었어. 그리고 이동천의 부하는
광안동 쪽으로. 이런 젠장,꿀겼군."
   양쪽의 통화가 끊긴 것이다. 김득기는 무전기를 귀에서 례었다. 기
동대가 서둘러 그쪽으로 떠날 것이지만 그들이 다시 통화를 시도하
지 않는 한 잡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입맛을 다신 그는 자리
에 앉아 담배를 빼어 물었다.
   어쨌든 본부의 상황실은 난리가 나 있을 것이었다. 아니,본부뿐만
이 아니다. 이동천과 배장근의 접촉이 확인되었으니 야단날 놈들은
여런 있었다.
   백화점의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 있던 윤혜선은 옆에 서 있던 사래
가 어깨를 슬쩍 밀자 와락 이맛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허우대도 그
30 밤의 대통령 제삭1-및
 럴 듯하고 눈샙이 치켜올라간 얼굴도 밉상이 아니었지만 이런 식의
 접근은 질색이다.
    "6시얘 사파이어 호텔."
    사내가 앞쪽을 바라본 채 중얼거리듯 말했으므로 윤혜선은 코웃음
 을 쳤다. 에스컬레이터 위에는 뻬곡하게 사람들이 차 있었고 뒤쪽에
 서는 아이들의 떠들색한 목소리가 울려 오는 중이다.
    "이동천 사장님의 전갈입니다. "
    사내가 다시 말하자 윤혜선은 퍼뜩 머리를 들었다. 그러나 사내는
앞쪽을 바라본 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호텔 로비에 계시다가 6시 정각에 후문으로 나오세요."
    에스컬레이터가 2충의 바닥에 닿자 사래는 사람들이 들끓는 잡화
매장으로 꺾어지더니 곧 보이지 않았다. 윤혜선은 잡화 매장 입구에
서서 지잠과 액세서리를 둘러보는 시능을 하면서 주위를 힐끗거렸
다. 그러나 이쪽에 관심을 두는 듯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깨를 늘어뜨린 그녀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5시 10랄전이
었다. 그러자 집에 가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므
로 그녀는 와락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해운대에 있는사파이어 호텔에 도착한 것은 6시 15분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로비에 들어섰을 때는 6시 5분전이었다. 일본
인 관광객들로 붐비는 로비에서 누구를 찾는 듯 서성거리던 윤혜선
은 6시 정각이 되자 곧장 발을 몌어 호텔 후문으로 나왔다.
   그러자 후문 앞에는 잡동사니를 가득 벌여 놓고 바자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주춤거리자 옆을 스치고 지나던 남자가 짧게 말했
다.
                                                  비밀 협』 31
   "그룻 파는 가게 뒤의 횐색 소나타."
   윤혜선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텔의 후문
안팔으로 조성된 바자회장은 무슨 부인회 주최인 모양으로 제각기
떠들색하게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는데 성황을 이루었다.
   "저년이 오늘따라 촐랑거리는구만."
   이렇게 말한 것은 천기석의 부하 안병팔이다. 그는 손바닥으로 이
마의 땀을 털어내면서 옆에 선 부하를 바라보았다.
   "야, 바착 붙자.저 쌍년이 어디로 샐지 모른다. "
   해운대 경찰청의 강 형사는 임 형사와 함께 그들의 왼쪽에서 윤혜
선을 미행하고 있었다.
   "어이, 임 형사. 저 새끼들 하는 짓거리가 영 배알이 뒤틀리는데."
   강 형사가 턱으로 안병팔의 옆모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씨발놈들이 아주 우리 흠내를 내고 있어."
   "내버려둬. 본부에서도 알고 있는 일이니까."
   40대의 그들은 수사 경험도 많았지만 세상 물정에도 빤했다. 조성
표의 피라미들이 이동천을 찾으려고 눈을 뒤집고 다기는 이유도 알
았고 그것을 말리면 시끄러워진다는 것도 안다.
   "이봐, 저것들한테 맡기고 우리는 안에 들어가서 맥주나 한잔 하
rlf."
   강 형싸가 말하자 임 형사가 그를 돌아보면서 혀를 찼다.
   "왜?그러구서 저놈들한테 결과 보고를 들을까?"
   "그러면 어때? 계집 하나를 지금 몇 명이 쫓아다니는 거야?"
   그러고 보면 저쪽은 운전사와 로비에 있는 놈까지 네 명이고 이쪽
은 세 명이니 일곱이다. 그 말에 맥이 풀렸는지 임 형사가 멈춰 서서
32 밤의 대통령 제』부 -lfl
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윤혜선은 세일 50퍼센트라고 써진 그룻가게 앞으로 다가가고 있
었다. 그룻가게는 인도에까지 좌판을 벌여 놓고 일본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창 신나게 장사를 하는 참이었다
   윤혜선은 가게 바로 옆의 차도에 주차되어 있는 횐색 소나타를 보
았다. 그릇을 잠시 내려다보는 시능을 하던 그녀는 몸을 틀었다. 그
녀가 서너 발짝 뒤의 차로 다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것은 채
3초도 되지 쟈는 순간이었다.
   소나타는 요란한 타이어의 마찰음을 내면서 퉁겨 나가듯이 차도로
들어가더니 곧장 우회전을 하고는 대로로 들어가 금방 시야에서 사
라Td다.
   "이, 이런 빌어먹을!"
   미행을 조성표의 똘마니들에게 맡기고 맥주나 마시자던 강 형사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횐색 소나타. 넘버가 4575다!"
   다행히 번호판의 큰 숫자는 저었다. 임 형사가 주머니에서 무전기
를 꺼내 들었는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미 늦은 것이다.
이만큼 준비했다면 놈들이 금방 차를 바꾸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차도에까지 뛰쳐나갔던 조성표의 똘마니들이 얼굴이 시퍼렇게 되
어서 이제는 저회들끼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차를 가져와라, 연락
을 해라, 하고 악을 쓰는 통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허리를 펴고 그들
을 바라보았다.
                                                 비밀 협』 33
      윤혜선이 동래의 2충 저택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
  쯤 후였다. 주택가에 자리잡은 2층 양옥집이었는데 좌우에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으므로 좌우라서 몇 번째 집이라고 해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철문이 열리고 차가 들어서자 이쪽 저쪽에 서 있던 사래들이 일제
  히 차 안으로 시선을 주었다. 모두 낮선 얼굴이었다. 그러자 한 사래
  가 다가와 차 문을 열었다.
     "나오시죠."
     차에서 내린 그녀는 말없이 앞장서 걷는 사래의 뒤를 따랐다. 양
 옥집은 겉에서 보기보다 컸다. 마당이 5e평은 되었고 건평은 1,2충
 합해 백 평이 넘어 보이는 적벽돌 양옥이었다. 아래층의 응접실로 안
 내된 윤혜선이 소파에 앉아 있는데 곧 방문이 열렸다.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박철규였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
    박철규는 갑자기 깍듯한 존대말을 깼다. 엉거주춤 일어선 윤혜선
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무슨 일?"
   그는 이를 드러내며 운었다.
   "자, 자리에 앉으시죠. 마음 편하게 하시고."
   마주앉은 윤혜선을 향해 박철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 윤은 지금 모든 조직의 감시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경찰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오."
34 밤의 패통령 제4부 -르
   "그것은 물론 미스 윤이 우리 사장님과 가까운 사이이기 때문이지
요. 놈들의 목표는 사장님입니다. "
   밖에서 철문이 삐걱이며 열리는 소리가 났고 곧 자동차가 들어오
는 소리도 들렸다. 박철규가 힐끗 그쪽으로 시선을 주더니 하던 말을
이었다.
   "우린 미스 윤을 보호해 드리려는 겁니다. 그대로 있으셨다가는
언제 어느 조직에게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어 있어서요."
   "그럼 전 어떻게 해요?"
   "사장님과 같이 계시는 것이 제일 안전한 방법입니다. "
    "무슨 일이 있습니까? 있다면 말씀하시지요. 내가 모두 알아서 처
리 하겠습니다. "
    윤혜선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아뇨, 없어요. 하지만 그것은 사장님의 말씀인가요? 아니면‥‥‥‥
    "물론 사장님의 지시였숱니다. 이것은 내가 마음대로 할 일이 아
닙니다. "
   머리를 』1덕인 윤혜선이 어깨를 늘어뜨리자 박철규가 자리에서 일
어섰다.
   "회의가 있어서 난 올라가 보TE습니다. 그동안 방에 들어가 쉬시
지요. "
   2충의 응접실에 모인 사내들은 모두 다섯 명으로 중앙에 앉은 이
동천의 좌우로 각각 박철규와 주대홍, 배장근과 기무라가 갈라 앉아
있었다.
                                                    비밀 협』 35
   배장근은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데다가 따지고 보면
남이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상체를 반듯이 세우고는 앞에 앉은 박
철규 뒤쪽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거북한 태도였다.
   벽시계가 밤 9시 5분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동안 룅묵이 흐른
후에 이동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림 배장근의 결심을 먼저 듣는 것이 낫겠군."
   배장근이 이동천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모시고 일하겠습니다. "
   "이렇게 오갈 데 없게 되어서 찾아든 것이 부끄럽습니다. "
   "네가 마피아에 있었다면 어차피 나중에는 내 타도 대상이 되었을
거야."
   이동천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언젠가는 네가 나에게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어,"
   "받아들이겠다. "
   그러자 박철규가 허리를 펴고 배장근을 바라보았다.
   "배 사장, 축하하네."
   "고맙습니다, 형님 "
   배장근이 스스럼없이 형님이라고 부르자 박철규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나도 자네가 와서 든든해, "
   "나도 형님을 보니까 좋소."
   주대흥이 나섰다.
36 밤의 대통령 제4부 -llf
   "솔직히 그 공산당 놈들을 데리고 있는 형님이 마음에 들지 않았
는데 이젠 잘 되었어."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동천이 입을 열었다.
   "난 조만간에 부산 일을 수습하고 서울로 돌아갈 작정이다. 그렇
다면 부산의 조직은 네가 맡아야 된다. "
   "우리는 네가 필요했어.그리고 너도 이제 대의명분이 갖추어진
셈이니 더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
   어쪘든 한국땅애 러시아 마피아의 기반을 굳힌 것은 배장근이다.
배장근이 잠자코 머리를 숙였다. 그 마피아에 배신당한 참에 이동천
은 조직과 함께 대의명분까지 넘겨 주려는 것이다.
    그 시간에 조성표는 천기석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제
는 룸살롱이나 클럽을 찾지 않고 아파트에 들어앉힌 세컨드의 집에
서 마실 때가 많았는데 그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로얄 살루트를 너
더댓 잔 마시고 난 조성표의 얼굴은 붉게 달아을라 있었다.
   "이동천의 정부를 놓친 것은 분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년을
미끼로 한다고 해도 잡힐 놈이 아니야."
   조성표가 술잔을 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놈이 어떤 조건을 내었는지가 궁금하단 말이야.
세무 감사가 갑자기 보류가 되고 놈의 영업장의 감시가 풀어진 것을
보면 냄새가 나."
   "곧 안 잡힌 놈들의 기소 중지도 풀린다는 소문이 있습니다,사장
님."
                                                  비밀 협상 37
                                                                                길'
   "나도 들었어."
   갑자기 술맛이 달아난 듯 조성표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놈이 로비를 했을 리는 없어.로비를 받아들일 사람도 없고."
   그러나 부산 지검의 김성길 지검장이나 안경호 부장은 이동천의
이야기만 나오면 질색을 하고 상대를 해주지 않른다.
   천기석이 헛기침을 하고는 상체를 세웠다.
   "하지만 이동천은 당분간 죽어 지내야 될 접니다. 언론에서 그렇
게 터뜨려 놓았으니 쉽게 풀려나지 못할 점니다. "
   "그리고 배장근이와 합류한다고 해도 문제가 안됩니다. 그뻔 마피
아가 놈들을 칠데니까요."
   "일년 전만 해도 부산은 내 손아귀에 들어 있었어."
   조성표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으므로 천기석은 긴장으로 몸을
굳혔다.
   "그것이 배장근의 러시아마피아로 지역이 갈라지더니 곧이동천
이 아이즈 고데츠와 손을 잡고 내 몫을 뜯어 나갔고 이제 야쿠자야."
   "내가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
   "그러신 건 아닙니다, 사장님. 시대의 조류가 그렇게 된 려니다. "
   "빌어먹을. 그 말은 내가 조류를 타지 못했단 말과 다름없다. "
   조성표가 눈을 부릅뜨고 천기석을 노려보았다.
   "내가 부산의 제떼력으로 만족할 놈 같뜨 내가 그까짓 조그만
상처로 주저앉을 놈 같으냔 말이다. "
   "사장님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으셨숨니다. 아이즈가 분가해 간
38 밤의 대통령 제』력-르
것은 아예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다고 치부하시면 됩니다. "
   "어쪘든 놈들을 싸잡아서 없앨 것이다. 이동천과 배장근을. 그래
야 내가 마음놓고 서울로 올라갈 수 있을테니까."
    다음날 새벽. 천기석은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었다. 침대에서 상반
신을 일으킨 그가 찌푸린 얼굴로 전화기를 든 것은 새벽 5시 10랄이
었다.
    "여보세요."
    "천 실장이시오?"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그는 완전히 잠에서 깨었다.
    "그런데요. 댁은 누구시오?"
   "난 한윤호요."
   "아, 한 사장."
   천기석은 전화기를 들고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한윤호와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마약 중개상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지난번 사건
으로 전차섭이 총에 맞아죽고 이쪽은 빈손이 되었는데 아마 배장근
이 독식했을 것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오? 이런 시간에."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천 실장. 급한데요."
   한윤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두 시간 후인 아침 1시에 동래 구청 옆 국선 호텔 615호실에서
뵙시다. "
"호텔 후문의 지하 차고로 들어가셔서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면 눈
                                                   비밀 협상 39
을 피할 수가 있을 겁니다,천 실장."
   "이봐요, 도대체 누구 눈을 피한다는 거요? 난, 당신 일에 끼여들
기 싫은데 "
   "경찰의 감시를 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오, 천 실장. 그만하면 감
이 잡히실텐데요."
   그로부터 정확히 1시간 50랄 후에 국선 호텔 615실에 천기석과
한윤호가 마주인o,1 있었다. 천기석은 단정한 옷차림에 얼굴도 반지
르르했는데 한윤호는 노타이 셔츠에 수염이 꺼칠했다.
   "그래, 무슨 일이오?"
   인사를 마치자 천기석이 대뜸 용건을 물었다.
   "당신 괜히 우릴 끌고 들어갔다가는 끝장날 줄 알아."
   "마약 150킬로가 부산에 있소."
   한윤호의 말에 천기석이 입을 다물었다.
   "오늘 밤 10서에 우선 1차분 30킬로그램을 30억에 바꾸기로 했습
니다. "
   "누구하고 말이오?"
   "배장근이."
   "배장근이 어떻게?"
   "그자는 러시아에서 넘어온 마약을 가로챈 모양이오."
   한윤호를 노려보던 천기석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마피아 놈들이 그령게 배장근을 찾아헤매는군."
   "마피아들은 나에게도 협박을 해왔소. 배장근이가 연락해 오면 즉
시 알려 달라고."
40 밤의 대통령 제긱부 -템
    "알려 주었소?"
    "알려 주었다면 내가 천 실장을 이렇게 만나겠소?"
    "허기사."
    천기석이 다시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당신은 그것을 가로채자는 말이로군. 그래서 나누자는 속셈이
야. "
    "어차피 뻣고 』기는 게임이 되었소.배장근이도 물건의 임자가
아니오."
   "내가, 아니, 우리가 가로챈 것을 포보비치가 알면 곤란해질텐데."
   "알 리가 없지. 그뻔 배장근이도 없어진 후일테니 배장근이와 함
께 150킬로그램은 사라진 것이 될 젓이오."
   "150킬로라니, 엄청난 물량이군."
   "마피아는 광대한 경작지를 갖고 있는 데다가 이곳 저곳에서 닥치
는 대로 끌어모았지. 아마 몇 톤은 모아 두었을 거요."
   "다른 건 몰라도 나는 마약에 관한 정보는 누구보다 빠릅니다. "
   천기석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한 사장, 당신의 조건은 무어요?"
   "물량의 반. 하지만 당신은 어차피 마약을 처분해야 할테니 30킬
로그램은 내가 갖고 당신에게 15억을 드리면 되겠지요."
   "어쩐지 마약값이 싸더라니."
   "정보까지 제공해서 15억을 챙기게 해드리는 장사요. 싫다고 해도
내가 손해 볼 건 아무것도 없소."
   "당신, 이것으로 중개상을 그만둘 작정이군."
                                                  비밀 협』 41
"그건 당신이 알 바가 아니오."
   차가 한강대교를 넘어가자 안기부장 박현식이 앞자리에 앉은 민영
택을 바라보았다.
   "아마 정무 수석실의 비서관 몇 명은 내용을 알고 있을 거야. 김재
선이 혼자서는 할 수 없을테니까."
   "그렇숩니다. 하지만‥‥‥‥
   말을 멈추고 상체를 뒤쪽으로돌린 민영택의 얼굴은 찌푸려져 있
었다.
   "하지만 뭐야?"
   "비서관두 명이 청와대에서 거의 숙식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아
냈습니다만 더 이상은."
   "철저히 비밀로 감추고 있군 "
   "그래야 터뜨릴 때의 효과가 크니까요."
   "신문기자들의 소문은 어때?"
   "11월 초에 대선 후보로 이용덕 총장이 선출된다는 소문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습니다. "
   "그건 놀랄 일이 아니야. 언론으로 전부터 슬슬 흘려 놓아서 국민
학생도 알고 있는 일이지."
   "국민당의 김일중 후보가 :퍼센트 표차로 당선될 것이라는 소문
도."
   "그건 여권에서 만들어낸 것이고, 실제로는 20퍼센트 이상이야."
   한동안 눈을 껍벅이며 창 쪽을 바라보던 민영택이 시선을 들었다.
   "대통령이 김일중 대표와모종의 합의를 하고 선거 전에 양당통
42 밤의 대통령 제4부 -르
합을 한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대통령 후보는 김일중, 당대표에는 이
용덕, 총리에 김재선, 이렇게."
   그러자 박현식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렇다면 제3당인 자유당의 김영필 총재를 잡아야지."
   웃음을 멈춘 그가 머리를 저었다.
   "불가능한 일이야, 지금의 대통령 성격으로는.1는 어떻게든 자
신의 손으로 작품을 만들어내려고 할 거야. 그는 이제 옛날 제3당의
당수였던 사람이 아냐.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최고 통치권자인 대
통령이란 말이야."
   입맛을 다신 그는 한동안 창 밖의 아침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마
와 눈가에 짙은 주름이 패었고 턱 밑의 피부가 늘어져 있었지만 아직
도 곧은 허리에 어깨가 넓다.
   "분명히 대통령은 비밀 작업을 추진하고 있어. 그리고 그것은 안
드로포프가 청와대에 다녀간 후부터 시작이 되었다. "
   그가 혼자소리처럼 말했다.
   "부산에 있는 러시아 마피아 놈들이 찰개를 치고 다니는 것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대가 없이 그놈들에게 체류증을 발급해 주고 검경
에게 잘 보호하라는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내릴 리가 없어."
   "이동천이 배장근을 끌어들였으니 러시아 마피아의 조직과 상황
에 대해서는 이제 우리도 환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부장님, "
   민영택이 자연스럽게 말머리를 바꾸었다.
   "그자 덕분에 이용덕과 김재선으로까지 이어지는 부패의 고리를
알 수 있었습니다. "
   운전사는 차의 속도를 늦추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야기가 길어질
                                                  비밀 협』 43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운전사도 박현식이 군에서부터 데리고 있던 사
내였다.
   "그리고 이제서야 안홍건 차장이 그자들과 한통속이라는 증거가
잡혔지 않습니까?"
   "안 차장이 기를 쓰고 이동천을 잡으려고 하고 있어. 거의 매일 부
산와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 "
   박현식의 말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부산의 요원으로부터 안흥건
의 행동을 보고받고 있는 것이다.
   "어쩠든 저는 지금 부산으로 내려가겠습니다. "
   민영택의 말에 박현식이 머리를 」1덕였다.
   "도대체 청와대는 무얼 하고 있는지."
   혼자말처럼 그가 말했으므로 민영택은 잠자코 머리를 돌렸다.
   그 시간에 이갑종 비서관은 정무 수석실에 들어서고 있었다. 김재
선은 방금 출근한 참이어서 저고리를 옷걸이에 걸고 있다가 그를 보
고는 눈으로 알은 체를 했다.
   그들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서류는 모두 끝냈습니다, 수석님 ."
   결재 화일에 끼워 넣은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이갑종이 말
했다.
   "내년 3월부터 방북할 이산 가족의 숫자란만 공란으로 해놓았습
니다. "
   "그것은 이 총장의 몫으로 남겨 두어야 할테니까 이번에 결정하지
않아:I돼 "
44 밤의 대통령 제긱부 -트
   서류를 훌어보며 김재선이 말했다.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각하와 김정일의 불가침 조약과 남북
교류의 원칙에 관한 사항이니까."
   이윽고 그는 서류를 덮었다.
   "이만하면 뤘어. 수고했어, 이 비서관."
   "아닙니다. 저야 시키시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
   "각하의 결재가 나면 곧장 모스크바로 날아가야 할테니까 준비하
고 있어야 돼."
   "예. 그런데 몇 명이 갑니까?"
   "이건 극비 업무니까 자레와 최 비서관, 그리고 경호실 요원 몇 명
이 나와 함께 가게 되었어,"
   "당에서는 이 총장 혼잡니까?"
   "그 사람 흔자야. 당에서 빼가면 정보가 터질 위험성이 많아. 나중
에 대선 후보로 결정되고 나서 무더기로 끌고 가면 돼 "
   그러고서 김재선이 풀색 웃었다.
   "이 총장은 대통령 자리를 거저 먹은 거야.모두 각하의 덕분이
fl . "
   "저는 수석님께서 당연히 각하의 뒤를 이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
니다만."
   "이 사람, 아부하지 말어."
   "진심입니다. 이 총장은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요즘에는 양승일
에게서 거액의 로비 자금을 받았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
   "그건 야당놈들이 만돌어낸 루머야. 여론이 안 좋다고 이 총장을
경질한다는 것은 우리 한민당 전체와 각하에게 오물을 뒤집어씌우는
                                                  비밀 협』 45
모양이 돼."
   김재선의 얼굴이 굳어졌으므로 이잠종은 허리를 세웠다.
   "지금은 그 따위 소문을 무시하고 밀고 나가야 돼. 각하의 지시대
로만 하면 틀림이 없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던 이잠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수석님, 그럼 차차기를 바라보시는 겁니까?"
   40대 초반의 이갑종은 법관 출신이었지만 일젝이 안기부로 차출되
었다가 청와대로 옮겨온 지 3년째였다. 따라서 그는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자였고 머리 회전이 빠르면서 결단력이 있는 성격이었
다. 그는 김재선의 두뇌이자 손발 노룻을 하는 심복 중의 심복이다.
   잠시 이갑종을 바라보던 김재선이 머리를 』1덕였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각하께서 이 총장 다음 차례라고
말씀하시니 그런 줄 알아야지."
   이갑종이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각하께서 어떻게 차차기를 보장하신단 말입니까?"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것은 차기뿐입니다. 더욱이‥‥‥‥
   그는 말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이 총장은 어떻게든 당선이 되겠지요. 이보다 큰 선거용 호재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3월부터 이산 가족 교류가 삐걱거리고, 경수로
지원금을 북한이 제멋대로 쓰는 것이 노출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진
단 말입니까?"
"대통령이 된 이 총장이 수석님을 감싸 줄까요?"
46 밤의 대통령 제갈1-lH
    "이봐, 어차피 같은 배를 탄 입장이야. 나 혼자만 밀어뜨릴 수는
 없어 ."
    그라자 이잠종이 머리를 저었다.
    "수석님은 회생양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국민들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있을데니까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각하께선 차기 대통령
후보와 그 회생양을 같이 모스크바로 보내시는 겁니다. "
   김재선이 혀를 차면서 머리를 돌렸으나 이잠종은 말을 이었다.
   "제 인생도 수석님께 달려 있는 상황이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
가 서류를 작성했고 모스크바까지 모시고 가는 입장이니까요."
   "수석님,각하를 위해서라도 수석님이 다시 생각을 하셔야 합니
다. 수석님의 이런 충성심을 이 총장이 갖고 있다고 믿으십니까? 대
통령이 되고 나서 문제가 터졌을 때 각하를 끌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수석님은 그러지 않으실 분이지요. 제가 그것을 압니다. "
   "이봐, 그만해라."
   서류를 집어 든 김재선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이갑종도 서둘러 일
어섰다. 그는 이제 할말은 거의 했다는 듯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택시에서 내린 김달수가 막 회오리 클럽의 계단으로 들어서려는데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건드렸다. 머리를 돌려 보니 낯선 사내였는데
경찰같이 보였다.
   "당신 누구야?"
                                                  비밀 협』 41
     이제는 전처럼 가슴이 내려앉지는 않았지만 놀란 반동으로 눈을
  치켜 떴다. 저녁 6시경이어서 길에는 행인이 많았다.
     "잠간만 저쪽으로 가실까? 난 안기부 수사관인데 댁은 김달수 씨
 맞지요?"
     사래가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어 펼쳤다가 다시 넣었다.
     "아니, 안기부에서 왜?"
     김달수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그에게 한국에서 제일 무서운
 조직이 있다면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안전기획부이다. 그곳이 공산당
 을 잡아들이는 단체이고 간첩을 잡는 곳이라고 북한에까지 알려진
 때문이다.
    "잠간이면 돼요. 곧 보내 드릴테니까."
    3☞대의 Al래는 이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누군가 연락을 했
는지 서너 명의 부하들이 우르르 계단을 올라왔다.
    "형님, 윌니까?"
   "안기부야."
   그러자 사내가 부하들을 쓱 훌어보더니 턱으로 계단 쪽을 가리켰
다.
   "당신들은 내려가 있어. 별일 아니니까.
   "아니, 도대체 왜."
   "여보, 우리는 체류증 있어."
   어쩌구 하던 부하들이 김달수의 눈짓에 주춤거리며 입을 닫았다.
  "자, 갑시다. "
  사내가 김달수의 팔을 다시 끌었다.
  "어디로 가는 거요?"
48 밤의 패통령 제』력 -트
     "한 시간이면 돼. 이제 그만 따지라구."
    길가에는 검정색 승용차 한 대가 주차 금지 구역에 세워져 있었는
 데 교통 경찰이 차 옆에 서 있다가 다가서는 사내를 향해 경례를 을
 려붙였다. 그러자 김달수는 어깨의 힘을 고는 사내의 옆자리에 을
 랐다.
    사내가 1를 데려간 곳은 회오리에서 30락 정도의 거리에 있는 왜
큰 빌딩이었다. 사래와 함께 1층의 어느 방문 앞에 선 김달수는 주위
를 둘러보았다. 문패도 없는 문들이 모두 닫혀 있었고 인적도 없다.
    "여기가 어디요?"
    "들어가 봐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김달수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방문을 열었다.
   "여어,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이쪽을 향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것은 배장근이다. 그리
고 창가에 서 있다가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이 양재동이었다.
   "자, 놀라지 말고. 여기 앉아라."
   배장근이 앞쪽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널 만나려고 안기부 직원에게 부탁했다. 의심받지 않게 말이야."
   "형님, 도대체 이게‥‥‥‥
   "꿴일이냐고 묻는 거냐?날 못 볼 줄 알았단 말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방은 20평 정도의 정사긱떵 구조였는데 책상 두 개와 소파 한 조
의 단출한 살림이어서 져어 보였다. 양재동이 1들 앞에 오렌지 주스
깡통을 내려놓고 다시 창가로 돌아갔다.
   "불안하게 생각할 것 없다. 곧 돌려보내 줄 것이고 넌 안기부 요원
                                                  비밀 협4 49
한테서 조사를 받고 나왔다면 될테니까."
   배장근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에게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겠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
면 말이야."
    굳어진 얼굴을 한 채 김달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제 그는 윤경
산의 다음 서열이 되어 있었고 포보비치의 신임도 두터워서 조직 안
의 위치가 안정되어 가는 상황이다. 더욱이 그는 지난번 배장근의 잔
당을 잡을 적에 적극적으로 윤경산을 도와 주었었다.
   "어때? 러시아 마피아를 떠나 나와 함께 일하지 않을테냐?"
   그러자 김달수가 머리를 저었다.
   "부모님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럴 수는 없습네다, 형
님."
   "넌 안기부 요원이 내 일을 도와 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
어?"
"내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던 모양히구만."
"그건 아닙네다, 형님."
배장근이 표정 없는 얼굴로 김달수를 바라보았다.
"윤경산이 북한에 있는 네 부모님을 러시아로 옳겨 준다더냐?"
   "만일 네가 죽었어도 윤경산이 약속을 지킬까? 포보비치, 밀로체
프도 말이다. "
"야,이 개새끼야.의리도,신의도 없는똥같은 인민군졸병 새끼
50 밤의 대통령 제4력 -llf
같으니. 부모 핑계를 대지 말어, 이 새끼야."
   그러자 창가에 서 있던 양재동이 허리에 끼웠던 권총을 불쑥 들
었다. 소음기가 끼워진 길다란 총구가 김달수좌 가슴을 겨누고 있다.
   "널 죽이고는 네가 나하고 합류했다는 소문을 내겠다. 넌 네 죄값
을 받아야 돼."
   배장근이 손가락으로 김달수의 얼굴을 가리켰다.
   "야,이 새끼야.그렇게 효성이 지극한 놈이 부모를 두고 도망쳐
나왔단 말이냐?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말이야."
   배장근이 양재동을 바라보았다.
   "쏴 쥑여라."
   "잠간만요, 형님 ."
   하얗게 얼굴이 굳어진 김달수가손바닥으로총구를 가로막는 시능
을 하면서 소리쳤다.
   "잠간만 제 말씀 좀 들어 보시라우요."
   윤경산이 김달수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쯤이 지난
오후 8시경이었다. 부하들로부터 김달수가 안기부 요원에게 끌려갔
다는 보고를 받고는 포보비치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중이었다.
   "이봐, 거기 어디이?"
   윤경산이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안기부라면 ÷t도 어쩐지 꺼림칙
한 기관이다.
   "나,지금 안기부 요원과 같이 있습네다. "
   늘어진 목소리에 김달수가 말했다.
   "그런데 답답한 일이 생겼시요, 사장님."
                                                  비밀 협』 51
   "답답한 일이라니?"
   굳어진 얼굴로 윤경산이 물었다. 앞쪽 의자에 앉은 포보비치가 눈
을 치켜 뜨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기부는 우리가 마약 150킬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겁네다. 이런
답답한 일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윤경산이 포보비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버럭 소리를 쳤다.
   "생사람 잡고 있구만, 그 사람들. 우리가 무슨. 그것은‥‥‥‥
   그러다가 윤경산이 송화기를 틀어막고는 재빠르게 러시아어로 포
보비치에게 통역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묻는다.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했어?"
   "우리는 그런 것 없다고 했숩네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오늘 밤에
마약이 거래된다는 정보가 있답네다. "
"나한테 중개상을 대라고 하는데 정말 답답합네다. "
   "사장님,잠간만. 이 사람들이 바러 달라는데요."
   그러고는 미처 윤경산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들렸
71.
   "거기 윤 사장이시오?"
   "예, 내가."
   "난 안기부 수사관 이경필이오. 초면에 실례가 많은데, 우리가 증
거도 없이 이러는 것이 아니오. 검찰이나 경찰에 알려서 처리할 수도
있는 일을 왜 우리가 나섰겠소? 당신은 그것을 알아야 돼요."
52 밤의 대통령 제4부 -및
    "나는 도무지."
    "이봐요, 시미치 몌면 안된다니까 그러네."
    수사관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우린 이 일을 정책적으로 처리하려는 거요.검경이나마약 단속
국이 알기 전에 덮어 버리려고 이러는 거란 말이오.한국과 러시아
정부와의 관계가 이것으로 깨어질 수가 있고 그렇게 되면 당신들 모
두는 무사하지 못해."
   "잠간만 기다리시오."
   얼굴이 뻣뻣하게 된 윤경산이 다시 송화기를 막은 채 포보비치를
바라보았다. 허둥대는 그의 설명을 듣고 난 포보비치가 한동안 벽을
쏘아보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배장근이가 들여왔고 그놈이 가지고 튀었다고 하시오,윤 동무 "
   서둘러 전화기를 입에 댄 윤경산이 그대로 말하자 수사관이 버럭
소리를 쳤다.
   "이봐요, 배장근이는 어디 있어? 없는 사람에게 뒤집어씌우지 말
라니간?"
   "정말입네다, 수사관님."
   윤경산이 손바닥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우리도 그놈을 찾고 있습네다. "
   잠시 후에 전화기를 내려놓은 윤경산이 포보비치를 바라보았다.
   "배장근이 이놈이 한윤호 놈과 마약거래를 시작하려는 모양히오."
   "한윤호는 우리에게 역시 비밀로 했군."
   "오늘 밤에 거래를 한답니다. 이건 우리가 오히려 정보를 얻었습
                                                 비밀 협』 53
니다. "
    다대포의 남해 호텔은 지은 지 30년이 넘는 5층 건물이어서 시설
 이 장급 여관보다도 낫지 않았다. 더욱이 주변에 새롭게 늘어선 호텔
 과 여관들에 가려 여름철의 성수기를 빼면 손님도 드물었다. 그러나
 오래 전에 목을 잡아 지은 곳이어서 바다 쪽으로 돌출한 언덕 위에
 세워진 호텔의 불빛이 한때는 어선의 둥대 노릇을 했던 적도 있다고
 했다.
    밤 9시 30분경이 되자 호텔 주위의 포장마차는 환하게 불을 밝히
 고 영업에 활기를 띠었다. 10월 중순이어서 밤공기가 서늘한 덕에
 바닷가로 마실 나오는 남녀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해 호텔의 정문이 바라보이는 억순네의 포장마차에도 여자 둘에
남자 넷의 손님이 들어 있었으므로 초저녁 장사로는 제법이었다. 더
욱이 그들은 잔뜩 안주를 주문한 알짜배기 손님이었다.
    이마에 땀을 흘리며 꼼장어를 굽는 주인 정씨는 이들이 모두 가게
의 아가씨들과 종업원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가끔 그런 손님이 많
은 데다 이젠 척 보면 사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사내들은 말수가 적은 데다 긴장해 있었는데 그 중 둘은 자주 밖
을 힐끗거렸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내들 중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잠바 차림이 불쑥 입을 열었다.
   "야, 온다. "
   무슨 말인지 머리를 돌린 정씨의 눈에 그제야 잠바 차림의 귀에
꽃혀 있는 리시버가 보였다.
54 밤의 대통령 제4부 -트
    한윤호가 남해 호텔 앞에서 택시를 내렸을 때는 밤 9시 55분이었
다. 그는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는 현관 앞에 서서 잠시 주위
를 둘러보았다. 젊은 남녀 한 쌍이 그치 옆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와 시선을 마주치는 사람은 없다.
   이윽고 한윤호는 몸을 돌려 호델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는 스무
평 정도의 크기였는데 안쪽 프런트에 직원 한 명이 서 있을 뿐 비어
있었다. 그는 구석에 놓인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돈을 주고 물건을 받기로 한 것이다.
   벽에 걸린 시계가 정각 10시를 가리켰을 때 프런트에 있는 전화벨
이 울렸다. 직원이 전화를 받더니 한윤호를 바라보았다.
   "한 사장님이십니까?"
   그에게로 다가간 한윤호는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한 사장, 빈손으로 오던데 어떻게 된 일이.B_?"
   배장근의 목소리였다.
   "아니, 그럼 내가 물건을 거저 가져갈 줄 알았습니까? 돈은 방에
있어요."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 계시오? 만납시다. "
   "어디에서 말이오?"
   "205호실, 내가 방에서 기다리3a소."
   전화기를 건네준 한윤호는 몸을 돌려 계단으로 다가갔다. 남해 호
텔은 엘리베이터가 없다.
10시 5분,호텔 앞으로 택시 한 대가 다가오자 억순네 포장마차에
                                                 비밀 협』 55
있던 장두식은 바짝몸을 굳혔다. 이미 백 미터쯤 떨어진 사거리의
입구에서 택시에 탄 사래들이 배장근과 그의 부하 같다는 무전을 받
은 참이다. 택시가 멈추고 사내 두 명이 제각기 가방을 들고 내렸는
데 틀림없는 배장근이었다.
    장두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천기석의 심복이다.
    "자,가자."
    배장근은 부하 한 명과 둘이었다. 그리고 남해 호텔은 아침부터
이쪽에 의해 거의 점거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놈은 이제 호랑이 굴로
돌어가게 되었다.
   그들이 계산도 하지 않고 나가자 정씨가 남아 있는 여자들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여자들은 잠자코 안주만 먹고 있을 뿐 상관햐지 않는
눈치였다.
   "저것 봐라."
   하고 장두식의 됫모습을 향해 씹어 뱉듯이 말한 것은 윤경산의 심
복인 조형근이다. 그는 억순네와는 7,8개 떨어져 있는 포장마차에
어설프게 앉아 있었다. 배장근이 오늘 마약 거래를 한다는 정보를 얻
고 한윤호를 철저히 미행한 소득이 있는 것이다.
   "저놈들은 배장근이 데려온 놈들인 모양이군."
   주위에 둘러앉은 부하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조형근이 자리
에서 일어섰다.
   "자,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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