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항복의 조건
(1)
방으로 들어선 강동진 대장은 곧장 임병섭에게로 다가가더니
소리치듯 물었다.
"파리에선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요?"
임병섭이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협상을 하고 있어요."
"인질 협상이 아니지요?"
"아닙니다. "
그러자 그들은 서로 마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안기부
장의 집무실이 있는 남산의 지하 벙커 안이었고 한일 연함군사령관
강동진이 찾아온 것이다. 아침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으나 벙커
안은 전등을 켜놓고 있다.
"일본측에게서 들으신 모양이군요, 사령관은."
이윽고 임병섭이 입을 열었다. 그가 손으로 벽 쪽에 놓인 소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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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켜 보이고는 자리에 앉자 강동진도 앞자리에 앉았다.
"각하께서는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시겠다는 의도인 겁니
다. 나로서도 충고해 드릴 명분이 없었습니다. "
임병섭의 말에 강동진이 다시 언성을 높였다.
"그런 조건으로 말이오? 그게 항복의 조건이지 어디 동등한 관계
의 협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각하는 북한이 그런 조건이라도 내놓은 것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
셨던 모양이오."
"그것은 굴복한 거요. 이미 패배를 시인한 태도란 말입니다. 우리
군은 그 협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그래서 비밀로 한 겁니다. 회담이 결렬될 경우를 생각해서."
"내가 알기로는 놈들의 조건을 거의 수용하려는 것 같던데 무슨."
"아직, 내일 다시 회담을 계속하기로 했어요. 한국 시간으로 내일
새벽 1시에 "
"내일이면 』월 9일이오, 임 부장."
"합의가 이루어지면 날짜는 의미가 없어요. 우리는 B월 10일에 너
얽매여 있습니다. "
"놈들은 더이상 기다리지 않아요. 미국은 이제 등을 돌렸고 시간
무
이 지날수록 이쪽이 뭉쳐지고 있다는 걸 압니다. "
"하루만 더 기다려 봅시다, 사령관."
"각하를 만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이런 회담은 있을 수가 없어요. "
그러자 임병섭이 머리를 저었다.
"말리지는 않겠지만 각하는 듣지 않으실 거요.
그리고 이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치라고 지시하셨어요.
만일 이 내용이 군과 국민들에게 알려진다면 끝장입니다. "
"잘 아시는군. 폭동이 일어날 거요. 나로서도 군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
"그러면 좋아할 사람이 누구겠소?"
그 시간의 청와대.
이영만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일본의 하시모토 수상에게서 온 전화
를 받고 있었다.
대통령의 일본어는 능숙해서 오가는 대화는 일본어 였다.
"수상 각하, 우리만 먼저 군대를 뒤로 물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대통령이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것 외의 조건은 검토해 볼 수 있지요.
보상금이라든가 나머지 조건은 말입니다.
어쨌든 나는 그 자들이 우리에게 협상의 조건을 제시하였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
"대통령 각하,우리의 의견을 말씀 드린다면 그 자들에게는 협상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해서 자신들의
성의만 과시하고 한국의 국론을 분열시키려는 계략으로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
"그리고 대통령 각하, 미국은 이제 중재자가 아닙니다. 클린트는
요즘 급격히 악화된 반한 여론을 계산에 넣고 있습니다. 그들에겐 오
히려 북한측의 기도가 국익에 바람직한 것입니다. "
292 밤의 대통령 제3부 -ll
"내일 아침에 결정이 됩니다, 수상 각하.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군대는 양국군이 동시에 물러나는 조건으로 합의할 것이고 그것이
결정되면 회담 내용을 국민에게 공개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조건은 수용하는 방향으로 합의하73습니다. "
대통령이 다짐하듯 말했으므로 하시모토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부는 정식 대표단을 파견해야겠지요."
"이게 뭐야?"
『중앙일보』의 외신부 이기팔 기자가 팩스 용지를 바라보며 소리
치자 주위에 있던 동료들이 모여들었다.
"아니, 이것, 파리의 회담 내용 아냐?"
『중앙일보』 워싱턴 지사에서 팩스로 보내온 것인데 한글로 되어
있어서 모여든 사내들은 금방 읽어 내려갔다.
"이런, 개같은."
누군가가 소리쳤고 여러 개의 손이 뻗어 나와 팩스 용지를 잡아
채다가 귀퉁이가 겨 나갔다.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계엄령 선포 이후로 엄격한보도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언
론 매체들은 정부의 시책에 적극 호응하고 있다. 전쟁 이외의 선택이
없다는 것에 그들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으므로 국론 통일과 애국심,
북한에 대한 적개심 고취에 각 언론사는 스스로 방법을 개발하여 국
민을 단결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놀랄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국민은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항복의 조건 293
각오가 다져지고 있었던 것이다.
편집 국장 안현식이 들어섰을 때 외신부 안에는 다른 부서의 대부
분의 기자들까지 들어차 있어서 그는 겨우 사람들을 헤치고 이기팔
에게로 다가갔다.
수십 명이 모여 서 있는 외신부에 무거운 정적이 깔리고 있다. 안
현식이 팩스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 정적은 더욱 깊게 사무실
에 내려앉았는데 이기팔은 그것이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동료들은 내용을 듣는 순간 분노의 고함을 치고 거친 욕
설을 뱉었지만 그것은 잠깐이다. 그들은 곧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로의 얼굴을 바라보거나 초점 없는 시선으로 서 있는 것이다.
안현식이 머리를 들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호외라니 믿지 않을 수가 없군. 더욱이 뉴스
제공자는 로젠스턴이고."
공허 한 목소리 였다.
"다른 일 간지에도 팩스가 들어왔겠어, 미국에서."
확인해 보나마나였다. 워싱턴의 한국 신문 지사들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다.
"당분간 이건 통제해. 내가 정부 쪽에 알아볼테니 까 "
"알아보나마나요, 국장님 ."
누군가가 뱉듯이 말했다.
"씨팔, 이완용 같은 놈, 우릴 팔아먹으려고 하고 있어."
구석 쪽에서도 거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런 조건으로 합의를 하다니."
"이건 항복이야. 조건은 무슨 조건."
294 밤의 대통령 제3부 -lf
"정부를 전복시켜야 돼."
이런 말까지 들리자 안현식이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조용해. 우린 아직 정부의 의도를 정확히 모른다. 경솔하게 처신
해선 안돼."
"휴전선 백 킬로 이남으로 군을 철수시키는 것이 무슨 의도가 필.5.합니까?"
옆에 선 기자가 사납게 대들었다.
"사흘안에 150억 달러를 내라니. 10년 동안 20억 달러씩을 내고. 이건 항복이오!"
다른 기자가 악을 썼다.
사람들을 헤치고 겨우 방을 나온 안현식은 첫발선 눈으로 책상 사
이를 헤치며 걸었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나 그에게는사물
이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두 다리에 맥이 풀려 휘청이며 걷던 그는
아랫입술을 힘주어 이로 물었다. 비밀 회담의 내용을 폭로한 미국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인가?
"친애하는 국군 장병 여러분,지금 파리에서 열리는 북미 회담에
참가한 남조선 대표가 제의한 협상 조건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
고성능 스피커에서 다시 찌렁찌렁한 목소리가을려 나왔다. 오전
10시 반,아침의 추위가 어느 정도 가시고 햇살이 조금씩 피부에 스
며드는 시간이다.
참호에 서 있던 장영환병장이 머리를돌려 』만호 일병을바라보았다.
항복의 조건 295
"저 미친 놈들, 꿈같은 소리를 하고 있구만. 희망 사항이야, 저것은."
"우리가 백 킬로를 물러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양만호가 묻자 장영환이 피식 웃었다.
"물러나긴 윌? 말도 안되는 소리야. 백 킬로라면 서울, 수원은 말
할 것도 없고 춘천, 강릉이 다 들어가는데, 미쳤냐? 우리가 항복 문
서에 서명하러 갔냐? 인질 잡고 흥정하러 갔지."
"그런데 보상금은 또 뭐고, 인질은 돌려 주고 김원국 씨는 평양으
로 데려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 새끼들의 희망 사항이라니까그러네.저 새끼들 말끝에다 했
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말을 붙여서 들어."
장영환이 어깨를 움츠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30미터쯤 떨어진 왼쪽의 참호에서 상반신을 드러내 놓고 서 있는
소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도 북한의 대남 방송을 듣고 있는 모양인
지 앞을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았다.
신호음이 짧게 울리자 머리를 돌린 이한성 소위는 옆에 놓인 무전
기를 집어 들었다.
"예, 제 1소대장 이 한성입니다. "
"중대장이다. "
조명훈의 목소리였다.
"예, 중대장님."
"방송 듣고 있나?"
"예, 듣고 있습니다. "
20분 전부터 반복되는 방송이라 이제 외우고 있다.
296 밤의 대통령 제3부 -H
"그 쌍놈의 새끼들이 교란 작전을 펴고 있는 거다. 소대원 단속을f:rH . "
"알았습니다, 중대장님 ."
"이쪽 전선 전체에 똑같은 방송을 해대고 있는 모양이야.
대대장님한테서도 단단히 경계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야 흔들리거나 말거나 하지요."
무전기를 내려놓은 이한성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쪽을 보고 있는
장영환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장영환이 먼저 머리를 돌렸으므
로 이한성도 앞쪽의 능선으로 시선을 주었다.
밋밋한 능선 중간에 드문드문 배치된 인민군 초소가 마른 갈대의
저지대 너머로 아스라히 보였고 희끗한 점은 인민군 병사일 것이다.
제51사단 수색 중대의 감시 초소였다.
제3소대장 오연식 중위는 망원경을 눈에서 었다. 남조선군의 사
기는 땅에 떨어져 있을 것이었다. 계엄령이다 뭐다 하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 같더니만 결국에는 항복 문서에 조인을 하려 하고 있다. 후
방 백 킬로 지점으로 후퇴한다면 저곳은 빈 땅이 될 것이다.
옆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김덕천 상사가 다가왔다.
"소대장 동지, 담배 인수해 왔습니다. "
"수고했소."
"전사들에게 모두 한 갑씩 배분시켰습니다. "
"잘했소."
김덕천은 종이에 싼 길쭉스름한 뭉치를 그의 옆 시멘트 받침대에 내려놓았다.
"열 갑 남았습니다, 소대장 동지, "
"아니, 상사 동무는 나눠 갖지 않소?"
"전 한 값이면 충분합니다. "
그들은 시멘트 참호에 나란히 섰다.
며칠 전에는 소주 배급이 있었고 오늘은 담배가 소대별로 40갑이 넘게 지금되었다.
일년에 한두 번이었고 그것도 1인당 반값도 안되
게 나눠 주던 담배를 한 갑씩이나 받게 된 전사들은 흥분해 있을 것이다.
"남조선 군이 물러간다면 우린 저 땅으로 걸어 들어가겠습니다. "
길덕천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4킬로미터 전방이었지만 이쪽은
그들보다 고지대에 있어서 거뭇거뭇한 국군의 참호가 한눈에 들어왔다.
"것뿐이오? 보상금을 받게 되지 않소? 150억 딸라면 그것을 쌀로 치면 얼마나 될 것 같소?"
"글쎄요. 나는 계산해 보지 않았습니다. "
"나도 계산은 안해 보았지만 엄청난 양일 거요."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웃었다.
"남조선 놈들이 잘살기는 하는가 봅니다, 소대장 동지. 그런 돈을 내는 걸 보면."
김덕천의 말에 힐괏 시선을 들었던 오연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미국농들한테 꼬리를 쳐서 돈을 많이 뜯어낸 모양이오."
그들의 옆쪽 참호에서 병사들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전투에서
군대가 승리하는 필수 조건이 사기라면 인민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다고
오연식은 믿었다.
298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인민군의 위력 앞에 드디어 남조선의 국방군은 항복의 의사를 보인 것이다.
제 1군단 사령부의 작전 상황실 벙커 안.
오전 1 1시가 되자 회의를 마친 사단장과 여단장들이 제각기 부대
로 돌아갔고 최상욱 상장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시멘트 벽에 붙
여 놓은 달력에는 2월 8일까지가검게 지워져 있어서 9일이 더욱두
드러져 보였다.
최상욱이 마악 자리에 앉는데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을
설 차수가 들어섰다. 작전 회의는 최상욱의 주관으로 마쳤고 이을설
에게는 연락도 하지 않은 터였지만 알고는 있을 것이다.
"사령관 동지, 웬일이십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최상욱이 눈을 크게 떠 보이며 물었다.
"날 초대 소에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은 밀착 감시를 하기 위해서인가?"
이을설이 주름진 얼굴을 들고 묻자 최상욱이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껌벅이더니 이윽고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뭔가 오해를 하셨습니다, 사령관 동지. 작전 회의는 제 소관이기
때문에 신경 쓰이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
"보고는 해주어야 할 것 아닌가?
나는 이제까지 회의 결과를 한번도 보고받아 본 적이 없어."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시령관 동지, "
최상욱이 자리를 권하자 이을설이 소파에 앉았다.
딱딱했던 얼굴이 조금은 풀린 것처럼 보였다.
(2)
"수령께서는 사령관 동지의 건강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
"난 지금도 전쟁을 치를 수 있어."
"파리에서 남조선이 우리 공화국이 내놓은 조건을 거부하지 못하
고 있습니다. "
"그것도 부관한테서 들었어."
"내일 새벽에 결판이 납니다, 사령관 동지. 남조선은 후방 백 킬로
미터 물러나는 조건만 절충하면 다른 조건은 받아들일 것 같은 분위
기라고 합니다. "
"잘된 일이군."
이제 이을설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우리 공화국의 완전한 승리인데."
"위대하신 수령님의 승리지요."
"파리의 최광 동지가 애를 쓰겠군."
"최광 동지를 파리로 보내고 나를 초대 소에서 이곳으로 끌고 내려
와 허수아비로 만든 이유를 동무는 잘 알고 있73지?"
그러자 얼굴 피부가 뻣뻣해진 최상욱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신 수령 동지를 받들어 인민군을 만들었던 사람은 이제 군
에서 나와 최광 동지밖에 없어. 군생활 50년이 되었단 말이야."
"그만하면 내가 이렇게 구차한 목숨을 이을 수 있는 이유가 뭔지
를 동무도 알겠구만."
"사령관 동지 ."
최상욱이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300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앞으로는 특별한 경우 외에 제 방 출입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
"허, 참모장이 사령관에게 명령하는 건가?"
"더이상 반동적인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자 이을설이 웃음 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령 동지께 내가 한 말 그대로를 보고하도록 하게. 물론 시키지
않아도 하겠지만."
"상관할 것 없어"
김정일이 자르듯 말하고는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 영감탱이, 이번 일이 끝나면 어떻게 될 줄을 알고 있는 거라."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인민군 부참모 총장이자 최고 사령부
부시정관인 김강환이다.
"어쨌든 능구렁이 같은 자야. 제 말대로 50년 군생활을 하면서 산
전수전을 모두 겪었고 제놈들의 기반을 굳혀 왔어, 아직도 군에는 놈
들의 세력이 많아."
김정일의 말에 김강환이 머리를 』1덕였다.
"그렇습니다, 수령 동지. 반동 세력이 아직도 많습니다. "
그들은 군의 반동 세력들이 전시 상황이 된 지금은 준동하지 못하
지만 평시에는 불평과 불만의 무리로 변하고 견제 세력 집단이 된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조선 침공은 그들에게 여유를 주지 않고 이쪽에게는 체제를 정
비할 기회를 준 일석이조의 방법이다. 그리고 남조선의 굴복을 받아
낸다면 군의 완전한 장악은 물론 정치 경제적으로 북한은 급성장하
게 될 것이었다.
항복의 조건 301
김정일이 손을 뻗쳐 탁자 위의 서류를 펼쳤다.
"이제는 계획대로 김인채 동무에게 연락해서 북남의 군대가 동시
에 50킬로씩 물러나는 선으로 양보하라고 하지, 그만하면 남조선 놈
들은 기뻐 날뛸 거야."
"두말하지 않고 승낙하』R지요,수령 동지."
"일본군 철수와 배상금 문제는 양보할 수 없다고 하고."
"물론입니다,수령 동지.동시 철군으로 우리가 양보했으니 그것
은 합의해야 할 것입니다. "
"암호로 보내고 있지? 일본 놈들의 도청을 조심해야 돼."
"예, 수령 동지."
"남조선의 분위기는 어때?"
"로젠스턴의 기자 인터뷰 내용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직후에 한국
의 언론들도 모두 회담의 내용은 알게 되었습니다. "
"보도 통제를 하고 있겠지."
"하지만 군과 정부 관리들의 불안과 동요가 극심합니다. 아마 오
늘 내일 중으로 남조선 인민들이 모두 알게 되겠지요."
"이영만은 로젠스턴이 터뜨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겠지 그것으로
놈은 이제까지의 경력에 치명상을 입고 역적이 될 거야."
김정일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남조선이 동요하고 혼란스러워 질수록 이영만은 협상에 매달릴
거야. 전쟁에 이길 가능성이 없으니까, "
"그렇습니다, 수령 동지."
"내일 이영만이 승낙하면 공식 회담으로 변경시켜서 양국의 실무
대표단을 파견해야 돼."
302 밤의 대통령 제3부 -lf
자리에서 일어선 김정일이 창가로 다가가 창 밖의 잔디밭을 바라
보았다. 마른 잔디로 덮인 넓은 정원에 펑 한무리가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날짐승은 담장을 넘어 날아가므로 대신 날개 양쪽을 묶은 핑
을 닭처럼 기르고 있는 것이다.
』월 8일 새벽 4시의 파리 . 서울 사간으로는 오후 1시이다.
김원국이 방문을 열고 나오자 문 앞에 서 있던 박남호가 그를 복
도의 한쪽으로 안내해 갔다. 복도의 끝쪽에 서 있던 김칠성이 힐끗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에는 안기부 요원으로 보이는 사내 한 명이 있었고 반대편
복도 끝에도 한 명이 보인다.
"김 선생님, 미국에서는 회담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로젠스턴이
기자에게 알려 주었어요. 「워싱턴 포스트』입니다. "
박남호가 다급하게 말했다.
"부장님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휴전선의 대남 방송도 회담 내용
을 계속 떠들고 있답니다. 아직까지는 보도 통제로 누르고 있지만 소
문이 급속도로 퍼져 갈 것이라고."
"당했습니다, 김 선생님, 미국과 북한농들한테. 이런 상태로 며칠
만 더 갔다가는 전쟁도 안됩니다. "
"그건 임 부장이 전하라고 한 말이오?"
"부장님은 미국과 북한이 회담 내용을 공개했다는 사실만 전하라
고 하셨습니다. "
항복의 조건 303
"그리고 김 선생님을 믿겠다는 말씀도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아침 9시 정각에는 부장님은 청와대에서 각하와 같이 계실 거라
고도 하셨습니다. 회담 상황을 수시로 보고해 달라고."
"알았습니다. "
김원국이 그의 말을 자르고는 숨을 크게 들여마시고는 천천히 뱉
어내었다.
"박 보좌관은 요원들을 몇 명이나 데리고 있습니까?"
"안기부 요원 말입니까? 지금 호텔 주위에 배치된 요원만 30명이
넘습니다. "
자신있는 목소리로 박남호가 말했다.
"호텔 경비는 철저하니까 경비를 세우지 않고 주무셔도 됩니다.
41쓰신은 어느 놈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
"일본 정보국의 시바다 씨도 이곳에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적극
협력하고 있지요. 미국과 북한 요원들도 있지만 이젠 우리를 건드리
지 못합니다. "
"엊그제 광장 구석에서 일본 요원과 같이 북한놈 두 놈을 없애고
우리 요원 한 명을 빼내었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지희은이라는 여자
요원인데."
이야기가 길어지자 방안에 있던 조웅남이 문을 열고 머리만을 이
쪽으로 내놓았다. 눈을 꿈벅이며 이쪽을 바라보던 그는 잠자코 머리
를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304 밤의 대통령 제3부 -H
베개를 세워 놓고 침대 머리에 등을 붙이고 앉은 박은채는 앞쪽
벽을 응시한 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숨소리가 귀에 들렸고 배를 덮은 횐 시트는 숨소리에 맞춰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다. 벽의 한쪽에 붙여진 둥근 거울에 자신의 반
쪽 상반신이 비쳤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고풍스런 방이다. 조그맣고 둥근 탁자와 두 개의 의자는 금박을
입혔고 바닥에 깔린 양탄자는오래 되었지만 깨끗이 손질되어서 얼
룩 한점 보이지 않았다. 인터큰티넨털 파리는 1800년대에 건축된 건
물로 나폴레옹 3세 황제 때 황후가 자주 들른 곳이다.
박은채는 김원국과 헤어진 날 저녁부터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새
벽 4시가 넘었으므로 호텔 앞 거리에는 차량의 통행이 적었지만 가
끔씩 들리는 엔진의 진동음이 방안의 정적을 깨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탁자에는 전화기와 항공표가 놓여 있다. 자카
르타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바러 타고 반자르마션 공항에 내린다. 그
곳에서 카질이라는 사내를 만나 수상 비행기를 전세내어 만탄 섬으
로 가는 코스를 김원국은 자세히 일러 주었다.
김원국이 지도를 펴놓고 손가락으로 짚을 때의 콧날과 입술,잘
다듬어진 둘째손가락이 머리속에 떠올랐으므로 박은채는 이제 숨도
죽였다.
"이곳에서 기다려 . 따뜻하고 좋은 곳이야."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고기를 잡으면 제일 큰 놈은 꼭 나
한테 가져온다. "
그렇게 말할 때의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항복의 조건 305
"바닷가에 집이 있다. 그곳에서 머물도록."
김원국은 그렇게 말해 주었는데 그녀가 만탄 섬에 간다는 것을 들
은 조웅남의 평은.달랐다.
"깨벗고 댕기는 것들여 딴 건 볼만헌디 젖통 처진 것들은 못 보곤
더라"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고,
"우리 형님이 괴기잡이 어선을세 척이나사다주었어.세상에 그
숭악헌 촌놈들이 졸지에 떼부자가 된 것이여."
하다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거그우리 형수님허고,거시기,몇 명을묻어 놓았는디‥‥‥ 나도
연지 가봐야 헐턴디."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박은채는시트를 걷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난
것이라 우선 거울로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흐린 조명
아래서 화장기 없는 창백한 피부는 더욱 어두워 보였다. 긴 머리는
어깨를 지나 가슴 위로 흐트러졌고 검은 눈동자는 요즘 들어서 더욱
커져 보였다.
회담은 오늘로 끝나게 될 것이다 먼저 인질을 잡고 시작한 회담
이어서 설령 회담이 잘 끝나게 된다고 해도 그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
은 아니다. 한국 정부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애초에 이야기가 되었
다. 그러니 한국 정부가 보호해 줄 수도 없을 것이다.
박은채는 머리를 돌려 다시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렇게 음
지에서 살아 왔었다. 스스로 빛을 내지도 않고 빛을 받지도 않으면서
어둠 속의 바람처럼 지나가는 사람이다
306 밤의 대통령 제3부 -ll
박은채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는 자신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파리, 2월 9일 오전 9시. 서울로 치면 B월 9일 오후 5시다.
크리용 호텔의 현관 앞과 콩코르드 광장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과
기자들은 모처럼 화창하게 개인 날씨를 반기며 호텔을 바라보았다.
프랑스 혁명 때 이곳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되었을 때에도 구경꾼들이 이렇게 모여들었을 것이다. 타인의
비극을 보면서 사람들은 자극과 생기를 함께 느긴다. 동정심의 바탕
을 이루는 것은 선의의 충동이고 그것은 자극이다.
회담장에는 어제의 여섯 명이 모여앉아 있었다. 한국측 대표들은
어제와는 달리 제일 먼저 회담장에 들어섰고 다음이 미국과 북한의
순서였다.
김인채는 오늘도 회담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듯 움직임에 생기가
보였고 분주히 테이블 위에 서류를 늘어놓는다. 그 옆에 앉은 최광의
앞에 백지 몇 장이 놓여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로젠스턴이 입을 열었다.
"회의를 시작합시다. 밤 사이에 모두 본국과 충분히 협의를 하셨
으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
옆자리에 앉은 더글러스 대장이 힐끗 그를 바라보고는 담배를 입
에 물었다. 어제는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았었다.
"문제는 한국이 북한의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냐, 또는 북
한이 한국의 요구 조건 특히 양국군의 동시 철수 안을 승낙하느냐는
것에 있는 것 같소."
항복의 조건 307
고성국이 김원국에게로 몸을 돌렸다.
"역사에 남을 회담이 될 집니다, 김 선생."
그의 한국말 소리가 조금 컸으므로 김원국의 옆쪽에 앉아 있던 최
광이 무거운 눈시울을 들어올렸다. 검은 눈동자가 이쪽으로 로아졌
다가 옮겨 갔다.
"그럼 한국측의 의견부터 말씀해 보시오."
로젠스턴이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남북한 양국의 군대가 동시에 같은 거리를 철수해야 합니다. 그
것이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입니다. "
김원국의 말에 김인채가 머리를 들었다.
"어제하고 조금도 변한 것이 없군, 당신들은. 도대체 성의가 없소.
우리 공화국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의 양보를 한 것이오."
김원국과 고성국이 잠자코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일본군 철수 등 나머지 조건부터 이야기합시다. 그건
어떻습니까?"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
고성국이다. 그는 지난밤 잠을 자지 못했는지 충혈된 눈으로 김인
채를 바라보았다.
"동시 철군만 합의된다면 나머지 조건들은 고려해 볼 수 있소."
"고려하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소? 하면 한다, 아니면 아니다지."
"하되 절충해 보자는 말이오."
"이 사람들 말재간 부리는 것 좀 보라우."
김인채가 헛웃음을 웃더니 금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분명히 말하시오. 나도 분명히 할테니까. 우리가 동시 철군을 한
308 밤의 대통령 제3부 -ll
다면 나머지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일 거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되어야지 동시 철군도 하고 나머지 조건들도 절충해 보자면 회담은
없는 것으로 합시다. "
"그렇다면 양쪽 대표가 잠시 앙국 정부와 협의할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
그렇게 나선 것은 로젠스턴이다.
"한국은 북한이 동시 철군을 한다면 나머지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
일 것이냐를 결정해야 하고,북한은 한국이 나머지 조건을 모두 받아
들이면 동시 철군을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되겠소. 그러면 서로 양보
한 셈이 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고성국과 김인채는 학생처럼 대답하지는 않았으나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상대방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본
국의 승인이다.
"자, 그러면 본국에 연락을 해보시지요, 여러분."
로젠스턴의 말에 입맛을 다신 고성국이 일어섰고 김인채가 뒤를
따랐다. 옆쪽에 설치된 직통 전화기로 가는 것이다.
로젠스턴이 그들을 바라보다가 김원국과 시선이 마주치자 슬쩍 웃
었다. 잘되어 간다는 표시의 웃음이다. 그의 옆쪽에는 제각기 전화기
를 귀에 댄 고성국과 김인채가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서울,2월 8일 오후 5시 45분. 대통령의 집무실 안.
오늘은 대통령의 테이블 앞에 안기부 부장 임병섭과 한일 연합군
사령관 강동진, 비서 실장 박종환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방금 파리
의 고성국과 통화를 마친 후여서 집무실의 분위기는 열기에 차 있는
항복의 조건 309
것처럼 보였다.
대통령이 임병섭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생기를 띤 표정이다.
"그들이 동시 철군에 합의하다니 뜻밖이야. 」0킬로씩 철군하면서
전쟁을 피한다면 반대하는 국민은 한 사람도 없을 거야."
"그건 그렇습니다만 각하."
"보상금 문제 말이오?"
"그렇습니다. 사홀 안에 150억 달러와 10년 간 20억 달러씩 지급
하는 조건은‥‥‥‥
대통령은 의자의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들기며 임병섭을 바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강동진이 입을 열듯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
면서 다시 닫는다.
박종환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10분 후에 다시 파리의
고성국과 통화를 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 정부의 결
정 사항을 전해 주어야 한다.
이윽고 박종환이 침묵을 깨었다.
"1994년에 체결된 북미 간의 경수로 회담 때는 한국은 참석도 못
하고 내용도 모른 채 자금만 대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
그러고서 말을 멈추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낫지 않느냐고 말할
참이었을 것이다.
강동진이 입맛을 다시고는 머리를 돌렸다. 북한은 한국이 제공한
30억 달러가 넘는 자금으로 중국과 러시아, 프랑스 3국이 공동 제작
한 경수로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클린트 정권과 미국의 정책에
거슬리지 않으려는 한국 외교가 낳은 결과였다.
310 밤의 대통령 제3부 -H
박종환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지금도 돈은 내게 되었지만 1994년
경수로 회담 때처럼 회담에 참석도 못하고 돈을 내는 것은 아니다.
강동진이 무겁게 입을 떼었다.
"각하, 서부 전선에서는 인민군의 준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위성관측에 의하면 토산과 연안 근처의 인민군 특수 공정 부대가 비
행장으로 집결하고 전차 사단들이 작전 지역을 이동하고 있습니다. "
"물론 놈들은 즉각 충동할 수 있게 훈련되었는데 지금 움직이는
것은 시위하는 것입니다. "
"각하, 군의 지휘관 대부분은 각하께서 북한과 협상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나다. 각하, 군의 사
기가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
대통령이 머리를 들었다.
"군의 사기가 그렇게 중요한가?"
"군은 나라를 지키는 힘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둥입니다. "
"군인도 대한민국 국민이야. 목숨을 가진 시민이라구."
"나라가 망하면 군인이나 시민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각하?"
"말을 삼가시오, 사령관."
대통령의 눈샙이 치켜올라갔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굴욕도, 내 이 늙은 목숨도
기꺼이 버리겠어. 그래, 김정일이에게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 발도 할
으라면 할아 주겠어. 나는 6 · 25와 같은 동족 간의 참상이 내 나라에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
항복의 조건 311
숨이 차 올랐으므로 대통령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진정시켰다.
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닦고 난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아. 나는 요즘 한 달 동안이 내 인생에 있어
서 가장 자랑스럽고 벅찬 날이었어 국민들은 나를 의지했고, 군관민
은 일체가 되어서 침략에 대비했어. 나는 그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
아. "
"각하, 김정일 일당을 각하의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
강동진의 얼굴도 상기되었는데 임병섭의 눈에는 그가 기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침공 선포 사건을 받아들이는 미국의 자세를
보십시오. 결국 우리는 북한에게 항복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고 미
국은 조정자의 능력도 없을 뿐더러 그럴 의사도 없는 것이 확인되었
습니다 각하, 북한은 결코 이번 일로 그치지 않을 겁니다. "
"개방이 될 거요,우리의 자금으로.그러면 곧 중국처럼 되어요.
러시아처럼 되든지."
대통령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쉽습니다. 난 한 달 동안 잠을 제대
로 자본 적이 없소.이제 우리는 일사분란하게 전쟁 준비를 해왔고
승리의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었어.하지만 그것만이 능사가 아니
야. 그것은 대통령으로서 너무 가벼운 처신이야. 요즘 나는 나를 희
생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어."
"진정한 용기는 희생이야. 김정일이가 제 자리를 지키려고 이 짓
을 했다면 나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굴욕을 뒤집어쓰겠어. 죽
312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으라면 죽겠어 ,"
"각하, 그것이 ‥‥‥‥
강동진이 입을 열었다가 닫으면서 침을 삼켰는데 임병섭은 그의
부릅뜬 눈에서 눈물 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강동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각하,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
"이것은 항복이 아니오. 동포에 대한 원조라고 선전합시다. "
"북한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
"개방된 북한은, 그리고 북한 국민은 머지않아 내 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오."
"그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각하."
"노력하는 거요, 끝까지 "
"적화 통일로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게 됩니다. "
"북한이 오히려 민주화가 될 거요."
그러자 임병섭이 헛기침을 했다.
"각하, 시간이 되었습니다. "
머리를 」1덕인 대통령이 임병섭에게 말했다.
"받아들인다고 하시오, 임 부장."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
이케다 소장이 문을 열고 들어서며 말했다.
"방금 임 부장의 통화 내용을 듣고 오는 길이오."
소파에 앉아 있던 강한기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눈밑의 주름
살이 더 늘어진 것 같았고 코밑과 턱에는 희끗한 수염이 꺼칠하게 돋
항복의 조건 313
아나 있다. 한잠도 자지 못한 것쯤은 문제가 아니다. 정신적인 혼란
때문일 것이다.
"사령관께서는 지금도 각하와 같이 계신답니다. 하지만 이젠 끝났
어요."
이케다가 몸을 던지듯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강동진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사령부 내의 모든 참모들
과 전방의 지휘관들은 사령관이 이영만 대통령을 설득시켜 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전쟁보다는 굴욕적인 평화를 택한 것이다.
"50킬로씩 동시 철군이면 서울은 무방비 상태가 돼요, 강 장군 물
론 서울 북쪽의 미군은 남아 있겠지만."
이케다의 말투는 이제 가벼워졌다.
일본군은 철수하면 그만이다. 한반도에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당
분간 비무장 지대가 4킬로미터에서 50킬로미터로 넓어졌을 뿐이다.
굴욕은 그들이 입은 것이 아니고 보상금도 그들이 내는 것이 아니다.
"곧 통일이 되겠군요, 강 장군."
이케다의 말에 강한기가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
케다는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언론 통제로 회담 내용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발달에 있어서는 한국이 세계화의 대열에서 뒤진 나라가 아니다. 주
한 미군 방송과 일본의 햄(ham) 통신, 그리고 미국과의 통신 채널은
개방되어 있었으므로 국민들은 오후가 되자 파리 회담의 내용에 대
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314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우선 방송국과 신문사로 문의 전화가 폭주했고 공무원과 시내 방
위를 맡은 직장 예비군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정부와 계엄 사정부의
지시에 솔선수범하여 따르던 국민이다. 계엄 이후로 시간이 지날수
록 치안 상태는 안정이 되어 이제 범죄율은 사상 최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계엄 초기의 혼란기에 갖가지의 수단을 써서 국외로 탈출하려는
공직자, 부유충 등을 정부는 가차없이 처형했는데 그 숫자는 수백 명
이 되었다.
범죄에도 질이 있는 것이다. 평시에는 사기, 강도, 강간 둥 대인 관
계에서 일어난 범죄가 주종을 이루었던 것이 지금은 반역이 범죄의
잣대가 되었다. 평시에는 판가름할 수도 없고 표출되지도 않던 애국
과 반역이 구분되는 상황인 것이다.
강도,강간범이라고 애국심이 없으라는 법이 없고 사기와 횡령을
했다고 해서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반역의 유형은 해외
도피, 징집 도피, 주거지 이동 등이 주가 되었지만 이제는 체포되는
반역자도 드은 상황이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이기팔 기자는 옆에 앉은 동료를 바라보았다.
"왠지 허탈해. 가슴이 텅 빈 것 같단 말이야, 지금 "
"군이 동요하고 있다고 들었어. 사령부에 나가 있는 강 기자가 그래."
동료가 뱉듯이 말했다.
"장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불평을 하고 있다는 거야."
그러자 이기팔이 입맛을 다셨다.
"할 수 없지. 대통령의 결단이니까."
(3)
"북한의 조건을 허락할까?"
"동시 철군이라떤 받아들일 것이라고 미국에서 보도했지 않아?"
동료가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청와대에 사령관도 함께 있는 모양이던데, 지금쯤 파리에 연락을
했겠군, 받아들일지 말지를."
창가에 서서 이야기를 마친 그들이 자리로 돌아오자 로젠스턴이
웃음 떤 얼굴로 물었다.
"결정되 었습니 까?"
한국측보다 일찍 평양과의 통화를 끝낸 김인채는 최광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하다가는 멈추고 앉았다.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던 더글러스도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김
원국이 머리를 끄덕였다.
"한국은 남북한미 동시 철군을 한다면 나머지 조건은 받아들이기
로 결정했습니다. "
로젠스턴이 테이블에 상체를 바짝 붙였다.
"일본군의 철수도?"
"철수할 겁니다. "
"배상금 150억 달러와 매년 20억 달러씩 10년 지급도 물론."
"그렇소, 로젠스턴 씨."
"마지막으로 인질 석방과 당신과 당신 부하들의 평양 송환도."
그러자 김원국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것은 내 소관이오, 로젠스턴 씨."
김인채가 눈썹을 모으고 그를 바라보았다.
316 밤의 대통령 제3부 -ll
"그렇게 합니다. "
자르듯 김원국이 말하자 김인채가 상체를 뒤로 물렸다.
"좋습니다. "
로젠스턴이 밝아진 얼굴로 김인채를 돌아보았다 북한측의 수장은
최광이었지만 어제 시작부터 회담은 김인채가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눈길이 그에게로만 간다.
"북한측은 어떻습니까? 이의 없지요? 남북한 군이 휴전선 남북으
로 50킬로씩 동시에 철군하는 겁니다. 미군 기지는 그대로 남아 있
기로 하고."
"이의 없습니다. "
김인채가 다부지게 말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킵니다. "
"그럼 합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순간이오."
로젠스턴이 상기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양국의 실무 대표단과 미국의 대표가 다시 모여서 세부적인
진행 절차를 협의해야 합니다. "
"그것은 빠를수록 좋소."
김인채가 말을 받는다.
"우리는 기본 합의서에 지금이라도 서명할 수 있습니다. %
그러자 김원국이 상체를 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합의 사항을 발표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로젠스턴이 김인채를 돌아보았다. 김인채가 커다랗게 머리
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당연한 일이오."
항복의 조건 311
"가능한 한 빨리 발표합시다. 남조선 인민들이 불안해 하고 있을
테니까. 내일모레가 바로 』월 10일 아니오?"
로젠스턴이 머리를 끄덕이자 김인채가 말을 이었다.
"합의 사항을 세계 각국에 발표해야 됩니다. 한반도 인민뿐만 아
니라 세계 각국의 인민들에게도 알려 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로젠스턴이 힐끗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로젠스턴은 합의가 된다면 그 사실만 발표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감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까지 미국이 북한과 협의
하면서 써오던 방법이다. 그런데 북한은 세부 사항까지 발표할 눈치
였는데 불행하게도 발표 문제를 먼저 언급을 한 것은 한국측이다.
이윽고 로젠스턴은 한국의 다급한 입장이 이해가 되었다. 어떤 굴
욕을 당하더라도 우선 전쟁을 피하겠다는 것이 정부의 의도였으므로
합의 사항을 국민들에게 한시바삐 공식적으로 알려 주어야 하는 모
양이었다.
"발표는 미국측 대표가 하는 걸로 결정합시다. 어떻소?"
김인채가 웃음 띤 얼굴로 김원국을 향해 물었다. 최광도 두꺼운
눈시울을 떠서 그를 바라보았고 더글러스도 담배를 비벼 11면서 그
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상관없소."
가볍게 말한 김원국이 로젠스턴을 바라보았다.
"기자 회견 장소는 아래 충으로 해주시오. 나는 인질범이라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
318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안톤 모리스 기자가 남북한의 합의 사항 발표에 대한 기자 회견
소식을 들은 잣은 오전 1 1시가 조금 못되었을 때였다. 기자 회견은
크리용호텔의 1충 로비에서 12시 정각에 시작될 것이라고 미국 대
사관이 각 언론사에게 통보해 주었던 것이다.
"미국은 이번에도 생색깨나 내겠군 그래 . 남북끌을 두들기고 달래
서 합의를 끌어낸 걸 보면 말이야."
광장을 가로질러 호텔로 다가가면서 동료 마이클 케넌이 말했다.
이마와 코만 빼놓고 털로 덮인 그는 지원차 나온 사내였는데 전쟁터
만 돌아다닌 베테랑 기자였다.
"안톤, 지난번 네 기사는 김원국을 영웅으로 그려 놓았어. 널 호텔
에 들여보내지 않을지도 몰라."
마이클이 1를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래? 그럼 관두지 뭐. 로겐스턴 놈이 잘난 척하는 꼴 보기도 싫
으D까."
그들은 남북한의 합의 내용을 대충 알고 있었다. 로젠스턴이 어젯
밤 터뜨렸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이제 미국 내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옆을 스쳐 대여섯 명의 동양인 사내들이 호델 쪽으로 달려
갔다. 텔레비전용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받침대와 부속품 가방을 제
각기 든 것을 보면 어느 방송국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구경꾼들은 이제 여유 있게 잔디밭에 앉거나 조형 물들에 기대 서
서 크리용 호텔을 바라보며 떠들고 있었는데 그 수는 어제보다 더 늘
어나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리용이나 낭트 같은 곳에서부터도
구경꾼들이 몰려온다는 것이다.
항복의 조건 319
"결국 한국이 항복을 하는군. 내, 그럴 줄 알고 있었어."
마이클이 카메라를 바러 메면서 말했다.
"그 국력으로 북한에 굴복한 것은 이유가 어떻든 정권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야. 남한은 곧 붕괴돼. 남한 내부에서 북한 동조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할 것이고 북한은 이제 계속 남한에 압력을 가할 거라
구 미국은 방관할 것이고."
"이봐, 넌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서 실망한 모양인데."
안톤이 웃음 띤 얼굴로 묻자 마이클이 머리를 」1덕였다.
"서울로 들어갈 작정이었어, 안톤. 근사한 전쟁 사진을 찍을 생각
이었는데. 스페인 병사의 죽음 같은 장면 말이야."
호텔의 현관 앞은 수백 명의 구경꾼이 모여 있었고 그들 앞에 늘
어선 경찰들이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자증을 보이고 호
텔 안으로 들어섰다.
로비에는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분주히 서두르며 회견장 설치를
마무리하는 중이었고 방송국의 직원과 기자들이 벌써 확 차서 시끌
덕적했다.
사람들을 헤치고 뒤쪽으로 다가간 안톤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섰다.
마이클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일본 기자 서너 명이 딱딱한
발음의 일본어를 뱉으면서 그의 앞을 지나갔다.
특종도 끝이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으므로 안톤은 자신도 모르
게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취리히에서부터 한국인을 따라다니면서
특종을 뽑아내었다. 조민섭 대사의 분사, 안승재 장관의 피살, 그리
고 죽고 죽이는 사건들에 이어서 파리의 그랑팔레 폭격과 인질 사건
of flfrftf.
320 밤의 대통령 제3부 -H
그것들은 모두 특종 기사가 되었고 자신의 성가를 높여 주었으며
또한오랜만에 성취감과 자신의 직업에 대한 긍지를 느끼게 해주었
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다. 특종도 끝이고 영웅의 시대도 끝이 난
것이0.
안톤은 문득 떠오른 자신의 착상에 만족하여 얼굴에 웃음을 띠었
다. 이번 회담의 기사 타이틀을 평양으로 끌려갈 김원국에 맞출 생각
을 한 것이다.
"3백 명 정도는 입장할 수 있어, 이 정도의 공간이면."
매클레인이 로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는 말하는 순간에도 안전
면도기를 얼굴에 열심히 문지르고 있다.
"그런데 벌써 2백 명이 넘는 것 같구만, 이 지겨운 놈들이."
그러나 그의 표정은 밝았다. 북한측 경호 책임자인 우정만이 다가
왔다.
"이봐요, 매클례인 씨. 연단의 중심 부분을 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1이크와 연설대만 설치해 놓으면 되지 왜 단을 높이는 거요?"
우정만이 손을 들어 로비 안쪽의 연단을 가리켰다. 로비 바닥보다
는 1미터쯤 높게 설치된 연단 위에서 서너 명의 미국측 사람들이 마
이크 시험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연설대 부근을 20센티미터쯤 높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단을 치워 주시오, 매클레인 씨. 옆과 똑같은 높이로 해야 됩니
다. "
입맛을 다신 매클레인이 손짓으로 지나가는 부하를 불러 세웠다.
"토니, 연설대 밑의 단을 치워라. 옆쪽과 높이를 똑같이 해."
항복의 조건 321
"알았습니다. 보스."
텔레비전 방송국 기자들이 기재를 끌고 다가왔으므로 그들은 옆쪽
으로 자리를 옮겼다. 로비는 이제 기자들이 내뱉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준비된 의자는 2백 개 정도였으나 이미 빈자리는 한 개도 남
아 있지 않았고 서 있는 사람들도 백 명이 넘었다.
매클레인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스터 박은 어디에 있소?"
"내가 압니까?"
"이봐요, 미스터 우 아까부터 풀이 죽어 있던데 신경 좀 써요."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는 않소."
그러면서도 그의 시선은 매클레인을 따라 사람들을 훌어 나갔다.
"이것,20분 전이로군."
시계를 내려다본 매클레인이 말했다.
"역사적인 순간이야. 그렇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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