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5. 불타는 파리

오늘의 쉼터 2014. 12. 28. 22:19

5. 불타는 파리

 

 

(1)

 

"시간이 거의 되었습니다, 형님."
   고동규가 몸을 돌려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는 극장의 앞쪽 도로에 세워져 있었으므로 옆을 스치고 지나는 사람들이 많았다.
9시 반이면 아직 밤이 깊지 않은 것이다.
   "소지품들을 점검해 봐라. 혹시 지갑을 넣고 있는가도 다시 한번 봐두어라."
   코트의 단추를 채우면서 김원국이 말하자 앞자리의 강대홍과 고동규가 잠시 부스럭거렸다
   그랑팔레는 앞쪽으로 150미터쯤의 거리에 있다.
옆건물에 가려 상반신만 보이고 있는 호텔의 8층에 희미하게 불빛이 보이고 있다.
   
김원국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코트 속에는 이스라엘 제품인 우지 기관총이 매달려 있고 혁띠에는 베레타 자동 권총이 찔려 있다.
코트 밑에 받쳐 입은 방탄 조끼의 주머니에는 기관총과 권총의 탄창이 다섯 개씩 있는 데다가
수류탄도 네 발이나 끼워져 있어서 온몸이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강대홍과 고동규가 차 밖으로 나왔다.

고동규가 차 안으로 다시 상반신을 집어 넣고는 안을 꼼꼼히 살펴보고는 허리를 폈다.

차는 버릴 작정인 것이다.
   팔목의 시계를 내려다본 김원국이 머리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9시 5분전이었고 인도에는 사람들이 왜 많이 오가고 있었다.

날씨가 풀린 탓일 것이다.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김원국이 발을 떼자 강대홍이 서두르듯 그의 앞장을 섰다.

굳어진 얼굴에 입술은 꾹 닫혀져 있다.
   샤틀레 극장의 휴게실 안.
   시계를 내려다본 김칠성이 옆에 서 있는 다케무라 한죠에게 손바닥을 벌려 보였다
   "시간이 되었어, 다케무라 씨."
   "5분전인데 , "
   말은 그렇게 하면서 다케무라는 몸을 돌려 화장실로 서둘러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조웅남이 계단의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명의 동양인이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제각기 머리를 돌렸는데

그들은 일본 정보국 요원이었다.
   다케무라가 길이 1미터쯤의 로켓포 두 개를 부하 한 명과 나누어 들고 화장실을 나왔다.

제각기 한쪽 팔에는 포탄이 든 상자를 무겁게 안고 있었다.
   "자, 이제 우린 갑니다. "
   다케무라가 로켓포와 상자를 그들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시 만날 기회가 있기를 빌겠소."
   "고맙소, 다케무라 씨 ."
   로켓포를 받아 쥐면서 김칠성이 말했다.

조웅남은 20센티미터쯤 되는 포탄 두 개를 한주먹에 꺼내고 있다.
   "지켜 드리고 싶지만 지시를 받아서‥‥‥‥
   반쯤 몸을 돌린 다케무라가 찌푸린 얼굴로 말하자 포탄을 장전한
김칠성이 조준경에 눈을 대면서 잠간 손을 저었다.
   "가시오, 어서."
   "어따, 훤허다. "
   야간 투시경이 달린 최신형 로켓포였으므로 조웅남이 감탄하듯 말했다.

다케무라가 그들을 힐끗거리면서 계단 쪽으로 다가갔다.

이제 그들의 뒤쪽은 비게 되는 것이다.
   "형님, 난 1층의 북한놈들 방이오. 형님은 6층을 맡아요."
   김칠성이 로켓포의 조준경에 눈을 붙인 채 말했다.
   "불이 켜졌거나 꺼졌거나 쏘아 넣읍시다. 포탄은 다섯 발씩이나 되니까."
   "난 저그 8층이다. 저그가 껄적지근혀 "
   조웅남의 말에 김칠성이 혀를 찼다.
   "좋아요. 8층부터 때리고 6층을 때리세요, 그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웅남의 로켓포 뒤쪽에서 쐐액 하는 분사음이 들리면서

휴게실이 진동으로 떨었다.
   김칠성이 얼떨결에 방아쇠를 잡아당겼고 그의 로켓포도 힘찬 진동음과 함께 가스를 분출시켰다.
   안톤 모리스는 앞을 스치고 지나는 장신의 동양인이 어딘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게리 러셀은 뒤쪽 어딘가로 손변을 보러 갔기 때문에 혼자 있었는데 몇 모금 얻어 마신 위스키에

알딸말해져 있는 때였다.

그러자 다른 한 명의 동양인이 코트를 펄럭이며 그의 앞을 지났다.

코리언이다.

안톤은 직감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저렇게 태연한 걸음이면 북한 쪽일 것이다.
사람들을 헤치고 그들이 그랑팔레 호텔의 정문 근처에 다가갔을 때 게리가 나타났다.

생리 현상을 마친 개운해진 얼굴이었다.
   "이봐, 이젠 늦었어. 어디 가서 본격적으로 마시는 것이 어때?"
   바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톤은 불꽃놀이할 때와 같은 분사음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폭발이 일었다
   번쩍 머리를 든 안톤은 그랑팔레 의 8층 모서리가 폭발하면서 화염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6층의 방 하나가 다시 폭발하면서 불덩이가 밤하늘을 갈기갈기 찢었다.
   "시작이다!"
   저도 모르게 고함을 친 안톤은 목에 걸고 있던 카메라를 들어 을렀다.

그리고는 자신도 로켓포를 발사하듯이 정신없이 렌즈를 그랑 팔레에 대었고

잠시 동안 넋틀 잃고 있던 게리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카메라를 눈에 댄 채 호텔의 정문 쪽으로 뛰었다.
월튼이 폭발음을 들은 것은 그가 마악 식당에서 1층의 로비로 내려왔을 때였다.

빌딩이 흔들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다시 두 번째의 폭발이 일자

그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찬 권총을 뽑아 들었다.
   "어디야? 어디서 폭발이야?"
   무선 전화기를 꺼내 든 그가 미친 듯이 소리치자 잡음에 섞인 부하의 목소리가 아우성치듯 들려 왔다.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송신해 오는 것이다.
   "8충입니다!"
   "』층이오! 보스!"
   "1층이오! 놈들이 로켓포를 쏩니다!"
   월튼은 권총을 손에 쥔 채로 계단을 달려 을라갔다.

그리고는 헐떡이며 소리쳤다.
   "정문을 막아라! 그리고 로켓포 공격을 저지시켜!"
   그것이 구름 잡는 듯한 지시인 줄은 스스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 월튼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탄은 왼쪽 창문을 뚫고 들어와 안쪽에 있는 바의 진열장에 맞아 폭발했다.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난 집기와 포탄의 파편이 회의장을 덮었다.
   방안의 사람들은 정면의 창가에 앉아 있었는데 포탄이 들어온 것은 극장 쪽의 왼쪽 유리벽이었다.

수라장이 된 회의장은 자욱한 연기에 덮였고 직격탄을 맞은 바에서는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고트 부통령은 폭발의 충격으로 벽에 어깨를 부딪치면서 소파 밑에 처박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옆에서 누군가 기침을 했고 가느다란 신음 소리도 났다.

그리고 다시 폭발음이 들리면서 천장에 겨우 매달려 있던 샹들리에가 떨어져 내렸다.
    "몰-! "
    쉰 목소리로 고트가 소리치자 한쪽에서도 한국말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수상 동지!"
    "3·! "
    다시 폭발음이 들리면서 건물이 흔들렸다.

바에서는 불길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면서 숨이 막힐 듯한 연기가 철싸여 왔다.
    "3·! "
   "조지, 나 여기 있어."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몰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부서진 가구틈에 끼였는지 몸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문 쪽에서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부통령 각하! 몰 상원 의원님!"
   CIA의 월튼이었다.
   로켓탄이 다섯 발쯤 날아와 폭발했을 때 최성산은 발사 위치가 샤틀레 극장의

2층 창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관 밖으로 뛰쳐나가 그 가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저곳이다!"
   그가 손으로 가리키기도 전에 부하들은 미친 듯이 정문으로 뛰쳐 나갔다.

그들은 정문 앞에 운집한 사진 기자들을 헤치고 극장 쪽으로 달려갔는데

모두 합쳐서 20명도 넘었다.
   로켓탄은 계속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6층과 1층을 계속해서 때리다가 8층으로 다시 한 발이 날아와 폭발했다.

8층에 두 발이 떨어진 것이다.
   카메라의 플래시가 수없이 번쩍이고 있었으므로 최성산은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로비로 뛰어들어 온 그는 휴대폰을 귀에 대었다.
   "S충! 8층 나와라!"
   부하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왔다가 위층에서 들려 오는 포탄의 폭음에 위쪽을 올려다보면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8층!"
    최성산이 다시 악을 쓰면서 몰려 선 부하들을 손짓으로 흩어지게 했다.
   "조장 동지."
   잡음에 섞인 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8층입니다. "
   "어떻게 되었나? 수상 동지는?"
   "안에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
   부하는 말을 멈추고 기침을 했다.
   "수상 동지는 어떻게 되었어?"
   그가 다시 악을 쓰자 잡음 소리가 크게 났다.
   ‥‥‥‥저는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조장 동지."
    최성산이 휴대폰을 내리고는 주위의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로비를 지켜라. 그리고 너희들은 날 따라와."
   포탄이 다시 한 발 떨어져 폭발하자 천장에서 횐 석회가루가 자욱하게 쏟아져 내렸다.
   경호원들이 미친 듯이 사틀레 극장 쪽으로 달려가자 김원국은 기자들 사이로 끼여들었다.

기자들은 시체에 달려든 독수리떼처럼 집요했고 잔인했다.

불타 오르기 시작한 호텔은 그들에게는 둘도 없는 먹이로 보이는지 온몸에 활기가 가득 차 있었다.
   북한측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내가 현관을 나왔다. 그는 샤틀레 극장 쪽으로 부하들을 보내고는

힐끗 이쪽에 시선을 주더니 재빨리 몸을 돌려 호텔 안으로 사라졌다.
    김원국이 기자들을 뚫고 현관 쪽으로 바짝 다가가자 기자 한 명과 몸이 부딪쳤다.

사진을 찍어 대던 기자가 귀찮은 듯 그를 힐끗 스쳐 보더니 놀란 듯 머리를 다시 돌렸다.

김원국은 그를 지나 앞으로 나아갔다.
    경호원 세 명이 현관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들의 시선은 사틀레 극장 쪽과 이쪽으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그가 계단으로 오르자 앞에 서 있던 경호원들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불길이 솟아오르는 호텔의 위층에서 유리창 조각들이 그들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김원국은 코트 안에 있던 우지를 손에 쥐고는 그들을 향해 방아치를 당겼다.

    "타타타타!"

    요란한 총성과 함께 뒤쪽의 기자들이 제각기 놀란 듯 짧은 외침 소리를 내었다.
    두 걸음에 계단을 뛰어오른 김원국은 현관의 유리문을 어깨로 밀어젖혔다.

    "타타타! 타타타! 타타타!"

뒤쪽에서 짧게 속사되는 기관총 소리가 들려 왔다.
고동규와 강대홍이 그를 따라 뛰쳐 들어오는 것이다.  
로비에 있던 1,8명의 사내들이 홑어지고 있었다.
김원국의 귀에 총소리가 여러 차례 들렸고 가슴에 충격이 왔다.
로비 바닥으로 몸을굴리면서 기관총을 난사하던 그는 무엇인가에 걸려서 멈추었다
뒤따라 들어온 고동규와 강대흥이 기관총을 사방으로 휘저으며 총탄을 쏘아 갈겼다.
로비에는 종업원을 포함하여 7, 8명의 사내들이 있었지
만 강대홍이 던진 수류탄이 프런트 안에서 폭발하는 것을 끝으로 총성이 멎었다.
로비 정면의 대리석 흥상 밑에 엎드려 있던 김원국이 몸을 일으키며 옆쪽을 바라보았다.

소파를 방패삼아 쭈그리고 앉아 있던 고동규가 따라 일어섰다. 벽에 붙어 서 있던

강대흥이 로비 안쪽의 엘리베이터로 달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안톤 모리스는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다가 문득 샤틀레 쪽에서의 포격은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호텔의 정문 돌기둥에 몸을 감추고는 불타 오르는 그랑팔레 를 가슴을 떨며 찍어 대는 중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어느 사이에 10여 명의 기자들이 몸을 부딪치며 사진을 찍거나 휴대폰을 귀에 대고

고함을 치고 있었지만 호텔의 계단 위쪽으로는 보이지 않는 철망이 쳐진 것처럼 발을 딛지 않는다.

안에서 바깥쪽으로 쏘는 총탄에 현관의 유리창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고 가끔씩 유탄이 바깥 쪽으로

쏟아져 나와 기자 한 명이 총상을 입은 것이다.
   안톤은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는 머리를 들었다.

로비에서 수류탄의 폭음이 들리더니 총격전이 멎은 것이다.

 

(2)

 

 

 

  "개새끼들."
   옆에서 들리는소리는돌아보지 않아도 게리 러셀이었다 그도 한
숨을 돌리는 듯 목을 뽑고 정면의 호텔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른거
리는 불빛에 비친 얼굴은 허탈해 보였다. 옆쪽에서 기자 두어 명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을 헤치고 빠져 나갔다. 특종을 잡은
것이다.
   "난 보았어."
   로비를 바라보면서 안톤이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리자 게리가 몸을
돌렸다.
   "윌 말이야?"
   그러자포탄 한 발이 날아와 7층의 창문을 뚫고 들어가더니 엄청
난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 파편이 이쪽까지 떨어져 내렸지만 그들은
이제 면역이 된 듯 목만 잠간 움츠렸다가 폈다
   "도대체 윌 보았다는 거야?"
   게리가 다시 다그치듯 물었으나 안톤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이고 다리야."
   조웅남이 씨근거리며 건물의 벽에 어깨를 부딪치면서 멈춰 섰다.
로켓탄을 모두 쏘아 없앨 때쯤 되자 극장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
   관객들이 휴게실에서 들려 오는 요란하고 기분 나쁜 발사음에 놀
라 일어나서는 무더기로 극장 밖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호텔 쪽에
서 달려온 북한과 미국측의 요원들이 사람들을 헤치고 극장으로 들
어오는 데 애를 먹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옆에 멈춰 선 김칠성도 가쁘게 숨을 내쉬고 있었으나 조웅남보다
182 밤의 대통령 제3부 -ll
 는 나았다. 더욱이 화장실의 창문에서 창고 지붕으로 뛰어내릴 때 무
 게에 못 이긴 다리 한쪽이 지붕을 뚫는 바람에 조웅남은 다리를 절고
 있었다.
    앞쪽의 호텔은 불길에 싸여 있었고 간간이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있
다. 그들이 호텔의 뒤쪽 길가에 이르렀을 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오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몰려나
와 있어서 혼잡했다.
    차들은 도로를 가득 메운 채 움직이지 않았고 일부 운전자들은 차
밖으로 나와 그랑팔례의 엄청난 화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사람들을 헤치며 호텔을 향해 뛰었다.
   "에이구 씨발, 이놈의 다리 ."
    헐떡이며 뛰던 조웅남이 으르렁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다리를 빼
어 던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들은 헬스 클럽이 있는 그랑팔레 의 부속 건물 근처로 다가갔다.
5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로켓포를 쏘아 젖힌 극장의 휴게실은 길
건너편에 있었다.
   건물의 모퉁이에 가득 모여 서서 오른쪽의 호텔 정문 쪽을 기웃거
리로 있던 사람들은 총성이나 폭음이 울릴 때마다 탄성을 뱉었다.
   "형님, 갑시다. "
   김칠성이 조웅남의 소매를 잡았다.
   "우리 할일을 해야지요, 어서."
   "신나게 참허는디 "
   두 눈을 꿈백이며 김칠성을 바라보던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가자. "
                                               불타는 파리 183
   최성산은 5층의 비상구 계단 옆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그의
옆쪽으로 세 명의 부하가 권총을 치켜든 채 나란히 서 있었고 위층의
난간 사이로도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6층은 이제 불길이 번져 나
가 비상구 쪽으로 후끈한 열기와 함께 검은 연기가 뿜어 나왔다.
    허리에 차고 있던 무선 전화기가 울렸으므로 그는 서둘러 빼어 들
었다.
    "말해라."
    H조장 동지, 지금 내려가야만 합니다. "
     부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1층의 비상 계단 쪽으로도 불길이 솟아 나옵니다. "
     말을 맺지 못하고 그는 기침을 했다. 최성산은 이를 악물었다.
     ·수상 동지는 어때? 이제 정신이 드셨나?"
     "수상 동지는 돌아가셨습니다. "
   H조장 동지,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연기가 심하고, 그리고 외교
부장 동지는 출혈이 ‥‥‥‥
   ul층이나 6층의 방으로는 들어갈 수 없단 말이냐?"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최성산이 묻자 부하가 겨우 기침을 멈추
고는 헐떡이며 대답했다.
    4그건 더 위험합니다. 불길 때문에, 연기도‥‥‥‥
    엘리베이터 두 대 중에서 한 대는 로비에서 폭파되었고 나머지 한
 대는 3층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것도 수류탄을 문짝사이로 밀어 넣
 어서 받침대를 부수』 놓았다. 탈출구는 비상 계단밖에 없다 그러자
 잡음이 들리더니 곧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영어다.
     184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최, 여기서 기다릴 수는 없소. 내려가야 해."
   월들이 소리치고 있었다.
   "몰 상원 의원이 중상이야. 병원에 데려가야겠어, 당장."
   최성산이 아랫입술을 물었다.
   "좋아, 월튼. 당신이 지휘해서 내려오시오."
   "아래쪽 상황은 어떻소?"
   "놈들이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어."
   전화기의 스위치를 끈 최성산이 부하들을 돌아보았다. 두 눈이 번
들거리고 있었다.
   "지킬 여유가 없다. 우린 내려가면서 길을 튼다. "
   부하들이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아래쪽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리다가 금방 멈추었다. 숨을 들여마
신 최성산은 두 손으로 북한계 AK자동 소총을 움켜쥐고는 몸을 틀
어 계단에 발을 내디다. 그 순간 호텔 밖에서 커다란 확성기 소리
가 들려 왔다. 총성을 제압할 만한 커다란 외침이다.
   "들어라! 우리는 프랑스 경찰이다. 호텔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앞으로 3분의 여유를 주겠다. 즉각 총격전
을 중지하고 손을 들고 밖으로 나와라.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 진압
한다. "
   벽을 등지고 선 김원국이 머리를 돌리자 고동규가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형님, 경찰이 왔습니다. "
   "듣고 있다. "
                                               불타는 파리 18E
    "형님."
    고동규가 눈을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위쪽 계단의
모퉁이에서 총성이 울렸고 총탄이 벽에 맞아 퉁겨 나갔다. 손에 편
우지의 탄창을 쳐올린 김원국이 마악 계단 위로 발을 딛자 고동규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형님, 늦었습니다. "
    "그것도 알고 있다. "
   "형님,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
    "쓸데없는 소리 "
    김원국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조웅남의 로켓포 공격으로 혼란
에 빠졌을 때 진입해 들어 가기로 계획했었다. 일단 진입하는 것은 성
공했다. 그러나 2층과 3층의 계단을 올라오는 데 너무 시간을 소비
한 것이다.
   미국과 북한의 요원들은 손상되지 않은 2, 3층의 방에서 튀어나와
그들의 진로를 결사적으로 방해했다. 위층에 있는 대표단들 때문일
것이다
   고동규는 이마를 스친 총탄으로 얼굴 한쪽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
었다. 어깨를 뚫고 지나간 총탄으로 김원국의 팔도 피에 젖어 있었고
그들의 방탄 조끼에 서너 발씩의 총탄이 박혀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고동규는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강대홍을 포함한 그들 세 사람의 탈출 계획은 없다. 오직 시간에
맞춰 진입하여 강대홍은 로비와 엘리베이터를 맡고 고동규와 김원국
은 8층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계획의 전부인 것이다.
   조금 전부터 아래층에서 격렬한 총성이 울려 오고 있었다. 경찰이
186 밤의 대통령 제3부 -H
호텔을 포위하기 전에 극장으로 달려갔던 사내들이 돌아왔던 것이
다. 그들을 강대흥이 혼자 막고 있는 중이다.
   다시 확성기의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2분 남았다. 총격전을 즉시 중지하라!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무기
를 버리고 밖으로 나와라."
   김원국은 머리를 돌려 고동규를 바라보았다.
   "총소리가 그쳤다. "
   아래층을 울리던 총소리는 어느덧 그쳐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으므로 고동규는 어금니를 물고 머리를
돌렸다.
    "조장 동지, 로비는 소탕했습니다. 저항하는 놈을 사살했습니다. "
   휴대폰에서 부하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올라가겠습니다, 조장 동지 ."
   휴대폰의 스위치를 끈 최성산이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월튼과 미국 요원들 사이로 계단에 앉아 있는 고트 부통령이 보였다.
셔츠 차림으로 어깨 부분이 찢어지고 옷은 그을려 있다. 그리고 그
옆의 벽에 흥진무 상장이 기대 서 있었는데 피로 물든 천조각이 이마
에 감겨져 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최성산은 머리를 돌렸다.
   월튼이 부하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최, 우리도 내려감시다. 서둘러야 돼. 포탄 한 발만 떨어지면 끝
3fol of. "
   그로서는 빈 몰 상원 의원이 죽었으니 눈이 뒤집힐 만도 했다. 그
리고 살아 남은 고트 부통령만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 하
                                                불타는 파리 187
는 것이다.
   이를 악문 최성산은 머리를 저었다. 아까부터 온몸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총성도 멀리 들리는 증상이 생겼다.
   그의 뒤쪽에 서 있는 서너 명의 부하들이 조심스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부하 한 명이 계단의 벽 모서리에서 아래쪽으로 불쑥 상
반신을 내어 보였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최성산을 바라보았다 몸이
아래쪽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다.
   "조장님, 비어 있습니다 "
   』층 계단까지는 비어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계단의 위쪽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내려왔다. 불길이 빠르게 번져 오른 것이다. 아
랫입술을 깨문 최성산이 이를 물었을 때 아래쪽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조장 동지!"
    얼굴이 상기된 부하 두 명이 계단을 급히 달려 오르면서 그를 을
려다보았다.
    "아래쪽은 비었습니다, 어서."
    "비상구는?"
    "경비병을 세워 놓았습니다. "
    최성산은 머리를 돌려 월튼을 바라보았다.
    "갑시다. "
    고트가 몸을 일으켰고 홍진무도 힘들게 어깨를 벽에서 떼었다.
   호텔 앞을 가로막은 10여 대의 경찰차 뒤에는 총을 겨눈 경찰들이
불타 오르는 호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188 밤의 대통령 제B부 -ll
   소방차 두 대가 조금 전에 도착해 있었지만 경찰 지휘관의 지시로
길 건너편으로 물러갔다. 호텔은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타오르고
있었다. 호텔 안에서 요란하게 들려 오는 총소리는 마치 축제 때의
폭죽이 터지는 소리와 비슷했다.
   강변 도로는 이제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은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차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불꽃놀이 구경을 하듯 휘황한 그랑팔레 를 바라보았다. 총소리가 들
려 올 때마다 사람들은 탄성과 같은 외침 소리를 내었다. 불꽃이 크
게 일어날 때에도 같은 소리를 지른다.
   장 구베르 서장은 시계를 내려다보고는 마이크를 입에 대었다가
다시 내렸다. 시간은 지나 있었다. 안에서는 아직도 총성이 울리고
있어서 농들이 이쪽의 경고를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
에는 차체에 몸을 가린 2백 명이 넘는 경찰 병력이 총구를 호텔로 겨
누고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다시 마이크를 입에 대었을 때 옆에서 보좌관인 조르주가 허
리를 숙인 자세로 달려왔다. 손에는 휴대폰을 쥐고 있다.
   "서장님, 수상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
   "뭐야? 수상?"
   이맛살을 찌푸린 구베르가 전화기를 받고는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
다듬었다. 조금 전에도 내무 장관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내무 장
관 레지에는 지금 이곳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여보세요. 구베르 서장입니다, 수상 각하."
   부동 자세로 선 구베르가 말했다.
   "서장, 안쪽 상황은 어떤가?"
                                               불타는 파리 189
   지스카르 수상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이것은 국제적인 사건이고
그것이 파리 한복판에서 일어났다는 것에 대해서 신경이 극도로 예
민해져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파리에서 이렇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
난 적은 없었다. 미국 부통령과 상원의 원내 총무, 그리고 한 국가의
수상과 각료급 인사들이 들어 있는 호텔이 로켓포 공격을 받고 지금
도 치열한 총격전이 일어나고 있다.
   "예, 지금도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수상 각하."
   "빈 몰 상원 의원이 조금 전에 사망했어. 그리고 북한 쪽도 수상과
외교 부장이 죽었어."
   입을 딱 벌린 구베르의 귀에 수상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금방 미국 대사관에서 나에게 연락이 왔어. 호텔 안에 있는 경호
책임자가 연락을 해준 모양이야. 부통령과 북한측 각료급 인물 하나
는 목숨을 건진 모양인데‥‥‥‥
   "예, 각하, 그렇다면‥‥‥‥
   "놈들이 지금도 공격해 올라온다는 거야. 몇 놈인지는 아직 확실
히 모르고 있어."
   구베르는 불타 오르는 호텔을 노려보았다. 로비의 총격전은 그친
모양이었다.
   "서장, 듣고 있나?"
   "예 , 수상 각하."
   "미국 부통령을 구해야 돼. 다치게 하면 안돼 "
   "알at습니다, 수상 각하."
   조르주가 굳어진 얼굴로 전화기의 스위치를 끄는 구베르를 바라보
고 있었다.
190 밤의 대통령 제3부 -ll
   3층의 계단에서 월튼과 최성산은 아래쪽에서 치고 올라온 북미 양
국의 요원들과 마주쳤고 숨돌릴 사이 없이 고트와흥진무를 에워싸
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들이 3층에서 2층으로 꺾어지는 계단의 모퉁이에 다가갔을 때
였다.
   "수류탄이다!"
   누군가가 목청껏 소리쳤으므로 20여 명의 사내들은 일제히 움직
였다. 모두 특수 훈련을 받은 정예 요원들이 어서 월튼과 두어 명의
미국측 요원들은 고트 위로 몸을 덮쳤고 흥진무 위로는 북한측 요원
들이 몸으로 방벽을 쌓았다.
   최성산은 계단을 굴러 떨어지는 수류탄 두 개를 보았다. 수류탄은
4층의 복도 안쪽에서 현져진 것이었다. 그의 부하 두어 명이 굴러 떨
어지는 수류탄을 잡으려다가 놓치고는 몸을 틀며 계단 위에 엎드렸
고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수류탄을 피해 옆으로 갈라지
고 있다. 두 발의 수류탄은 서로 부딪치며 내려오다가 한 발이 공교
롭게도 미국측 요원들이 몸으로 방벽을 쌓은 곳에 걸려서 멈추었다.
   "아앗!"
   아래쪽에서 그것을 본 미국 요원 한 명이 외마디 소리를 쳤다. 수
류탄 한 발이 고트 위에 엎어진 요원들의 얽혀진 다리 사이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최성산은 아래쪽에 있었다.
   그는 나머지 한 발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았다. 수류탄의 안전핀
은 꽃혀 있었다. 이것은 5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최성산에
게는 5분도 넘는 긴 시간 같았고 고속 촬영을 한 느린 화면을 볼 때
처럼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3)

 

 

 

미국측 요원들의 고함과 더불어 다리 사이에 수류탄의 감촉을 반
 사적으로 느긴, 고트를 감싸고 엎어졌던 세 명의 미국인이 튐기듯이
 일어났다. 그러자 최성산은 누층의 비상구 안쪽으로 달려나오는 사내
 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사내는 한 손에 수류탄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는 미국과 북한측
 요원들의 사이를 바람처럼 지나 고트에게로 뛰어 내려왔다. 물론 최
 성산도 무의식중에 그를 향해 기관총을 겨누었고 몇몇의 요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없다. 복도가 요원들로 확 차
있었고 수류탄 때문에 자세들이 흐트러진 데다가 사내가 쥐고 있는
수류탄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사내는 손을 뻗쳐 고트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의 옆에는 서너
명의 요원들에 의해 눌리어진 홍진무가 아직 꿈틀거리고 있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사내의 목소리는 계단을 울렸다.
    "그렇지 않으면 같이 폭사하겠다. "
   "김원국. "
   그를 노려본 최성산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러자 4층의 비상구
에서 두 손에 수류탄을 움켜쥔 사내 한 명이 그들 사이로 들어섰다.
좁은 복도 안이다. 북미 양국의 요원들은 숨을 죽이고 두 사내를 쏘
아보았다.
   "수류탄을 버려라!"
   마침내 하얗게 얼굴이 굳어진 월튼이 입을 열었다.
   "너, 한국놈인 줄 안다. 어서 버려!"
   그러자 김원국이 수류탄을 고트의 목덜미를 움켜쥔 손으로 옮겨
192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쥐었다.
    고트가 차가운 수류탄이 목덜미에 닿자 목을 움츠렸고 그 순간에
김원국은 허리춤에 끼워 넣은 베레타를 뽑아 들었다.
    "타앙!"
    한 발의 총소리는 이제까지의 수백 발 총성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월튼이 가슴을 움켜쥐고 계단 위로 쓰러지자 계단 위의 사내
들은 몸을 굳히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윽고 냉랭한 정적을 김원국이
깨었다.
   "너희들은 내려가라. 하지만 너, 그리고 너,"
    그의 총신이 홍진무와 최성산을 가리켰다.
   "너희 둘은 남아."
   양손에 수류탄을 쥔 사내가 그의 말을 영어로 통역하면서 홍진무
의 앞을 가로막았다.
   "어서!"
   김원국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계단을 울리자 최성산이 손에
쥔 기관총을 계단 위로 던졌다.
   "내려가라!"
   "조장 동지."
   부하 한 명이 입을 열었다가 최성산의 시선과 부딪치자 말을 멈추
었다.
   "내려가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너희 상관들과 같이 폭사해 줄
까?"
   한국어로 김원국이 다시 소리치고는 곧 영어로도 바러 말했다.
   "어서 내려가!"
                                              불타는 파리 193
   최성산의 말에 북한 요원들이 하나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들의 뒤를 미국 쪽 요원들이 따른다. 잠시 후에 계단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다섯이 되었다. 인질범 두 명에 세 명의 인질이었다.
    "서장님, 전화입니다. "
   조르주가 내민 전화기를 낚아채듯 받아 들어 귀에 댄 구베르가 버
럭 소리쳤다.
    "뭐야! 말해!"
    그랑팔레의 불길은 이제 4층까지 번져 내려오는 중이다. 밤하늘에
거대한 불길을 내뿜으며 타오르는 호텔은 그 모습이 참혹했다.
   "차 한 대를 준비해라, 지금 당장."
   송화기에서 사내의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려 왔다.
   "5분 내로, 호텔 앞에 세워 두고 물러가라."
   "빌어먹을 놈, 너는 도대체 ‥‥‥‥
   "코리연 김원국이다. "
   옆에서 리시버를 귀에 끼고 듣던 조르주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옆에 서 있던 사내들의 표정도 비슷했다.
   "난 인질 세 명을 잡고 있다. 고트, 홍진무, 그리고 최성산인데 인
질들 목에 수류탄을 걸어 놓고 있어. 안전핀에 끈을 달아서 내가 쥐
고 있지."
   "이봐, 어떻게 하려는 거야?"
   호텔 5층의 방 하나가 폭발하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었으므로 구베
르는 수화기를 바짝 귀에 대었다.
   "5분이야. 대장, 차를 준비해."
194 밤의 대통령 제3부 -H
그에게 김원국의 목소리는 선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길을 치워라. 우리는 시내로 들어간다. "
"이곳에서 협상을 하자, 김원국."
"안돼.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어, 대장."
   "5분이야. 5분 내로 차를 현관 앞에 대고 문을 모두 열어 놓을 것.
차의 시동은 걸어 놓고 시내로 통하는 길을 비켜라. 그래, 앞에서 선
도하는 경찰차가 있어도 된다. "
   이제 구베르의 주위에는 리시버를 귀에 댄 수십 명의 사내들이 모
여들었다. 낯모르는 얼굴들도 있었다. 그들은 CIA요원이거나 내무
성 또는 외무성의 관리들일 것이다.
   "대장, 너희들이 장난을 치지만 않는다면 인질들은 무사하다. 하
지만 조금이라도 수상한 느낌이 들 때는 끈을 잡아당길 것이다. 세
사람의 목에 걸진 수류탄 세 발이 동시에 폭발하는 거야."
   그랑팔레의 불길이 작전 차량 주위에 모여 리시버를 끼고 듣고 있
는 사내들의 얼굴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김원국이 패럭붙이듯이 다시 말했다.
   "5분이야, 대장, "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다가간 조웅남이 시계를 내려다보
았다. 9시 30분이었다.
   "어뜨케 되얀어?"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그는 옆에 선 김칠성을 돌아보았다.
   "출발했어요, 조금 전에 ."
                                               불타는 파리 195
   김칠성이 귀에 꽃은 리시버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2란분쯤 걸릴 겁니다. "
   로비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엘리베이터 앞에도 기다리는 남녀가 네
명이나 있었다. 손질이 잘 되었지만 백년쯤된 것 같은 구형 엘리베
이터이다.
   "씨발, 잘 되말틴디."
   조웅남이 손에 든 가방을 옮겨 쥐면서 혼잣소리를 하자 옆쪽에 서
있던 백인 남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것들은 20달 후에 깨벗고 도망 나오겄고만."
   그들과 시선이 마주치자조웅남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물론 한국
말이다. 사내가 웃음 떤 얼굴로 머리를 끄덕이자 조웅남이 입맛을 다
셨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들은 안으로 들어섰다. 구석자리를 차
지한 젊은 남녀가 서로 허리를 껴안고는 입을 맞췄다.
   "대흥이가 불쌍허다. "
   그들을 바라보며 조웅남이 다시 혼잣소리를 했다. 엘리베이터는
털컹이며 을라가기 시작했다.
   "그 시키, 여그 와서 여자맛도 못 보고 죽었다. 안 그러냐?"
   김칠성이 아무 반응이 없었으므로 조웅남은 머리를 돌려 그를 바
라보았다.
   "얀마, 대홍이가 불쌍허다고 그렸어, 금방 "
   "들었어요."
   "그 시키, 종표가 죽고 나서 코를 쑥 빠치고 있었는디 인자는 지가
196 밤의 대통령 제3부 -H
   엘리베이터는 느리게 올라가는 중이었고 이제 남녀는 키스를 멈추
었다. 한국말을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분위기를 느긴 모양이었다. 안
쪽의 중년 남녀는 불안한 듯 눈을 껌벅이고 있었다. 강대홍은 지금쯤
시체가 되어 차에 실려 있을 것이었다.
   김원국이 그랑팔레 를 빠져 나오자 기자들이 시체를 향해 하이에나
처럼 달려들었고 테러단 한 명이 사살되었다고 보도를 했다. 그러나
아직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꽁게서 멈추자 그들은 가방을 들고 내렸다.
   "저 자식, 어디로 가는 거야?"
   구베르가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이며 소리치듯 말했다. 강변 도로
를 달리던 횐색 시트로앵은 우측으로 회전하고 있다
   "저런 빌어먹을, 샹젤리제로 가는 거 아냐?"
   "콩코르드 광장 쪽인데요."
   샹젤리제나 콩코르드나 번화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쪽에서 차
로 20분 거리에 있는 곳은 모두 번화가라고 보아도 되는 것이다. 구
베르가 무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봐, 장,속력을 줄여 봐라."
   시트로앵의 앞을 달리고 있는 경찰차를 부르자 곧 대답이 왔다.
   "서장님, 안니다. 속력을 늦추었다가 뒤를 두 번이나 받쳤습니
다. "
   "빌어먹을 놈들."
   구베르가 이를 악물고 시트로앵을 노려보다가 전화기를 내던졌다.
오른쪽으로 회전한 차들은 콩코르드 광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불타는 파ㄹ1 197
    앞쪽의 경찰차는 길을 의어 주기 위해서 사이렌을 요란하게 을리
며 달렸는데 운전사는 죽을 맛일 것이다.
   시트로앵과 나란히 달리다가 신호에 걸릴 때면 사이렌을 켜고 앞
장을 서서 길을 텄는데 꾸물대었다가는 시트로앵이 가차없이 꽁무니
를 들이받는다. 시트로앵은 20여 대의 경찰차를 뒤에 끌고 광장으로
직진해 들어갔다.
   "어, 크리용이다. "
   앞자리에 타고 있던 조르주가 놀란 듯이 소리쳤다. 그는 환하게
불을 밝힌 크리용 호텔을 손으로 가리켰다. 시트로앵은 좌측의 딘젤
리제 대로를 지나쳐 곧장 달려가고 있었는데 정면에 크리용호텔이
있는 것이다.
   "이런 빌어먹을."
   구베르가 다시 전화기를 움켜쥐었을 때 벨이 먼저 울렸다.
   "여보세요."
   소리치듯 전화를 받자 송화기를 타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구베르, 놈들이 크리용으로 가고 있나?"
   내무 장관 레지에다.
   "예 , 장관님 ."
   구베르가 눈을 흡떠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경찰 헬리콥터가 떠 있
을 것이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쪽에서 장관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구베르, 서툰 짓은 하지 마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위험한 짓은
하지 말란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장관님."
   전화기를 내던진 구베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시트로앵은 크리
198 밤의 대통령 제3부 -lf
용의 현관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자, 내려."
   김원국이 말하자 두 손이 묶인 고트와 홍진무,그리고 최성산이
차례로 내렸다. 앓자리에 타고 있던 고트는 두 손이 아픈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곧 편하게 해드리겠소, 부통령 각하."
   김원국이 그의 어깨를 현관 쪽으로 밀며 말했다. 호텔의 벨맨이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주춤거리며 다가왔는데 눈치 빠른 남녀 몇 명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고동규가 기관총을 손에 쥐고는 앞장을 섰다. 벨맨이 그제야 사정
을 알아차린 듯 두 손을 앞으로 뻗고는 옆쪽으로 달아났다. 경찰 차
량이 쉴새없이 다가와 호텔 앞에 멈추었고 김원국은 세 명의 인질을
끌고 로비로 들어섰다.
   그러자 로비에 모여 있던 수십 명의 남녀가 수라장을 이루며 흩어
졌다.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려 왔다. 도망
치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진 여자 위를 사내들이 뛰어넘는다.
   "타탕!"
   총성이 짧게 로비를 울렸고 그것이 그들의 혼란을 더욱 부채질 했
다. 프런트의 직원들은 데스크 밑으로 몸을 감추었고 다급한 남자는
여자 화장실로 여자는 남자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총성이 일어난 것은펄비에 있던 경비원 때문이다. 김원국의 일행
을 보자 경비원이 우물거리다가 권총 손잡이를 쥔 것을 고동규가 보
았던 것이다. 어깨를 맞은 경비원이 바닥에 쓰러졌을 때 이미 로비는
                                               불타는 파리 199
텅 비어 있었다. 로비 건너편의 현관밖에는수십 대의 경찰차량들
이 경고등을 번쩍이고 있다.
   =1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자 곧 문이 열렸다.
   "아이고 형님, 얼릉 오시요."
   조웅남이 기관총을 손에 쥐고는 소리치며 안에서 나왔다.
   "얼릉 타시요, 여그는 나한터 말기고. 칠성이가 기다리고 있응게
빨랑 가시요."
   그랑팔레 호텔 사건이 한국의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을 때 비서 실
장 박종환은 그의 단잠을 깨우지 않아도 되었다. 여덟 시간의 시차
때문에 김원국이 인질들을 끌고 호텔을 떠났을 때가 대통령의 기상
시간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은 정
신이 번쩍 드는 사건이었다. 박종환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다면 머리
끝이 고슴도치처럼 일어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대통령은 즉각 비상 회의를 소집했고 아띔 8시에는 대통령의 집무
실에 눈을 치켜론 요인들이 마주앉아 있었다. 아침 1시에 소집을 시
켰으니 아침 식사를 거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어젯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같이 긴장된 표정들이
었다.
   대통령이 머리를 들었다.
   "빈 몰이 죽었어요. 김사훈이와 최대민이도. 그리고 고트 부통령
과 흥진무라는 장군, 최 아무개 라는 사람까지 셋을 인질로 잡고 있는
fl . "
   모두들 숨을 죽이고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200 밤의 대통령 제3부 -lf
   "오늘이 :띤 4일이니까 엿새 후면 북한 사람들이 공표한, 이른바
해방 전쟁 날이야. 이런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우측의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임병섭이 침을 끌어모아 삼켰
다. 김원국에 대한 일은 자신의 소관인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대통
령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져 왔다.
   "임 부장,김원국이 벌인 일에 대해서 미국 정부가 항의해 올 거
요. 그렇지 않소?"
   "예, 각하, 그렇습니다. "
   "우리가 시킨 것이 아니냐고 따지고 들지도 모르겠군."
   "각하, 지금은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자 대통령이 쓴웃음을 지었다.
   "미국의 상원 원내 총무가 죽고 부통령을 인질로 잡고 있어,그 사
람이. 이건 역사에 남을 사건이오,"
   "그렇습니다, 각하."
   "우리가 해줄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안타깜군. 미국 쪽에 말이
야."
   좌측의 말석에 앉아 있던 강한기 소장은 그들의 대화에서 무엇인
가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 잊었다.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김원국,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렸던 사람답구만. 나라가 어려울
때 인물이 나는 법이오."
   그러자 회의장의 이곳저곳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분위기
는 자아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타는 락리 201
     "그가 국민들의 사기를 올려 줄 것 같소."
     "f131, "
     임병섭이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빼어 들고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지금크리용호텔에 인질과 함께 있는 김원국씨가보낸
 홍진무가 갖고 있던 북한의 합의 각서 사본입니다. 그는 몇 시간 전
 에 저에게 이것을 팩스로 보내 왔습니다. "
    그는 서류를 대통령에게 바치고는 돌아와 앉았다.
    "각하, 그 내용은 김원국이 호텔 팩스를 이용하여 세계의 각 통신
사에 보냈으므로 아침에 전 세계의 언론에 보도될 것입니다. "
    잠자코 서류를 읽어 가던 대통령이 머리를 들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사람, 잘했군."
    "각하, 국민들에게도 그 각서 내용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 "
    "알리시오."
   대통령이 연합군 시정관인 강동진과그의 및자리에 앉은 일몬 파
견군 사령관 가토를 바라보았다.
   "전군에게, 그리고 일본군 장병에게도."
   "예, 긱'하."
   임병섭의 보좌관이 나눠 준 복사본 서류를 읽던 그들이 대답했다.
   "이것을 호외로 돌리도록 하시오. 습격 사건도 그대로 보도하도록
하고. 미국과 북한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요리하려고 했는가를 국민
들이 똑똑히 알아야 할테니까."
   "예, 각·하."
202 밤의 대통령 제3부 -H
   그러자 문득 강한기는 조금 전에 무언가 허전했던 이유를 알아내
었다. 대통령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의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동안 대통령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술을
굳게 닫았다.
   청와대에서 돌아오는 차 안이다. 임병섣이 나눠 준 북한측의 합의
서 사본을 읽고 난 강한기가 옆에 앉은 고성국을 바라보았다.
   "참모장님, 예상했던 것이기는 하지만 기가 막히는군요. 이건 분
하다는 감정보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
   "돌아 버릴 거야,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한국 사람들이라면."
   고성국이 앞쪽을 바라보며 책을 읽듯이 목청을 높였다.
   "첫째, 미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국이 되고 미군을
주둔시킨다.
   둘째,주한 미군의 군정관과 합동으로 남북한 양국의 모든 정부
조직을 개편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셋, 기업 활동과 사유 재산, 모든 경제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미국의 인권 감시단을 상주시키도록 한다. "
   "참모장님은 외우고 계시는군요."
   "저놈들이 미 제국주의를 원수로 쳤던 것을 생존의 수단으로 이해
하려고 했지만 놈들은 그 원수와 더럽고 비열한 타협을 하고 있어.
이젠 정말 참을 수가 없다. "
   "우리 군은 말단사병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읽으면 피가끓을 겁
니다. "
   "놈들은 우리에게 참으로 적절하게 동기 부여를 해주었어."

 


(4)

 

 

 

강한기가 머리를 들어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차 앞에는 검정
색 대형 승용차가 달려가고 있었는데 탄 사람은 강동진과 가토 중장
이다.
   "일본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참모장님."
    앞쪽을 바라보며 강한기가 말하자 고성국이 머리를 끄덕였다.
    "놈들이 작성한 전후의 일본국 처리 사항이 일본 신문에 보도되면
일본 열도가 폭발하겠지."
    "일본군도 사생결단을 하려고 들 겁니다. "
    강한기와 고성국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
았다.
    차는 한강 대교를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크리용 호텔은 18세기식의 석조 건물이었으며 콩코르드 광장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가 18fll기에 크리용 백작의 저택이었던 것을 호
텔로 개조한 1급 호텔이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기 전에 이
건물에 갇혀 있었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호텔이다.
   샹젤리제 대로도 바로 옆쪽에 있어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의 하나였지만 오늘 그 주위에 운집한 사람들은 관광객들만이 아
니다. 수백 명의 경찰이 호텔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새벽 1시가 되었으나 환하게 불을 밝힌 호텔 주위에는 경찰과 구
경꾼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각국의 텔레비전 방송국과 신문사
의 기자들도 운집해 있었는데 오히려 경찰보다도 그들이 더 필사적
인 모습들이었다.
   테러 진압 부대인 GIGN의 검정색 작전 차량도 눈에 보이는 것만
204 밤의 대통령 제3부 -fl
 세 대였다. 1994년 말의 마르세 이유 공항 사T: 이후로 처음 투입되
 는 작전이다.
    레지에 내무 장관과 이야기를 마친 구베르 서장이 호텔 앞의 지휘
 본부에 돌아오자 두 명의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GIGN 대
 장인 도미니크 소령과 CfA의 매클레인이다.
    "지금 한국 정부와 연락을 하는 중이니까 움직이지 말라는 지시
 요. "
    구베르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그에게 오늘밤의 세 시간은 그의
30년 경찰 생활에서 최악의 시간이었다.
    "곧 한국 대사가 이쪽으로 올테니까 그때까지 기다려시다. "
    매클레인이 머리를 끄덕였다.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는 이미 콩코
르드 광장에 와 있었고 NATO의 미군 시령관 더글러스 대장도 방금
도착한 참이다.
    구베르가 머리를 들어 자동차 지붕 너머로 크리용 호텔을 바라보
았다. 41죠신이 정면으로 보였는데 횐색 커튼이 내려져 있다. 그 안
에 미국 부통령과 북한인 두 명의 인질을 잡고 한국 마피아의 두목
김원국과 세 명의 부하가 있는 것이다.
   "두 놈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을 보면 용의주도하게 준
비해 놓은 거야."
   구베르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놈들이 인질들과 함께 자폭한다는 정보도 있어."
   "어디서 나온 정보_5.?"
   매클레인이 거칠게 물었다. 미끈한 용모의 도미니크와는 대조적으
로 레슬러 같은 체격에 우락부락한 인상의 사내였다.
                                               불타는 파ㄹ1 205
   "익명의 제보요. 김원국이 고성능 폭약을 가지고 있다는 거요."
   구베르의 말에 도미니크가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로켓포를 준비할 정도였으니 그쯤은 갖춰 두었겠지 요."
   매클레인이 간이 탁자 위에 설치된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호텔
41쓰신과 직통으로 연결된 전화였다.
   인질들을 방패로 그랑팔레 에서 크리용으로 옮겨온 김원국은 아직
이쪽에 어떤 요구 조건도 제시해 오지 않았다. 그는 호텔의 팩스를
이용하여 북한측 인질이 갖고 있던 기밀 서류를 한국을 비롯한 세계
Blf으로 보냈을 뿐 다른 움직임은 없다.
    물론 이쪽은 두 시간 동안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를 설득하고
위협했지만성과는 없다. 그렇다고 미국부통령이 인질로 잡혀 있는
마당에 보통 인질 사건처럼 GIGN을 투입하는 모험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인질도 다르고 인질범의 수준
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 백악관 회의실에는 클린트 대통령을 중심으로 10여 명의 요
인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파리와는 여섯 시간의 시차가 있었으므로
워싱턴 시간은 오후 1시였고 한국은 아침 9시여서 청와대의 회의를
마친 요인들이 제각기 돌아가고 있는 시간이다.
   클린트가 손끝으로 눈두덩 이를 눌렀다가 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
다. 피로에 지친 듯한 얼굴이었는데 지금 두 시간패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빌어먹을 합의 각서라는 것은 북한측이 일방적으로 제시한 것
인데 언론들은 우리가 합의한 것처럼 보도를 했어. 그건 나도 모르는
206 밤의 대통령 제3부 -H
내용이었단 말이오."
   클린트의 말소리가 회의실을 울렸으나 대꾸하는 사람은 없다.
   미국 전역의 언론은 파리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중이
었다. 그리고 북한측의 홍진무가 소지했던 합의 각서 내용도 텔레비
전에 한글 그대로 방영되어 영어로 자세한 번역을 해주고 있다.
   회의실을 메운 요인들은 무겁게 침묵을 지킨 채 입을 멸지 않았
다. 상원의 여당 원내 총무가 폭사하고 부통령이 인질로 잡힌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미국인 모두는 그 사건이 보도되자 치
를 떨었고 당장에 한국을 쳐야 한다는 전화가 방송국과 언론 기관에
벗발쳤으며 시가지로 뛰어나온 학생들도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
국인 상점들은 총격을 당했고 화염병에 얻어맞은 몇 채는 불에 타 전
소되었다.
   잡혀 있는 고트와 죽은 빈 몰에 대해서는 유감이었지만 미국 정부
로서는 그것으로 국민의 여론을 이끌고 정책을 집행하기에는 호기가
왔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시간 쯤 후에 합의 각서라는 것이 텔레비전과 언론에
보도된 것이다. 한국을 침공, 점령하고 나서 북한이 미국과 함께 어
떻게 통치하겠다는 내용이 적힌 비공개 각서의 형식이다.
   클린트는 입을 다물고 길게 롯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예기치 못했
던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 각서의 내용에는 미국과 미국민에게 해
가 되는 내용이 한가지도 없다. 오히려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비밀 각서의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자 여론은 물벼락을
뒤집어쓴 듯 차갑게 식어 버렸다. 언론사에 걸려 오던 항의 전화는
                                               불타는 파리 207
끊겼고 시위대는 흩어졌다.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 타운에는 오히려
분노에 찬 교민들이 삼삼오오 몰려드는 중이었고 이번에는 미국인이
피해 가고 있었다. 여론이 다시 뒤집힌 것이다.
   클린트는 그것이 현실적인 계산을 떠나 미국인의 전통과 자존심에
관한 문제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중 매체가 극
도로 발달된 나라에서 여론을 조작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다. 실리를 따졌던 정부의 정책은 이제 수치감을 느끼고 있는 국민의
여론에 밀려 전복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클린트가 머리를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사태를 주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부통령을 어떻게
든 구출해내고 볼 일입니다. "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가 현장으로 갔다니까요."
   말을 받은 것은 키드먼이다.
   "그 자가 한국 대사의 말을 들을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어떤 방법
이건 써야 합니다. 부통령과 함께 자폭한다는 정보도 있어서요."
   "그건 안돼, 자폭은."
   이맛살을 찌푸린 글런트가 머리를 저었다
   "그를 죽게 해서는 안돼요, 국장."
   "어서 오시오, 부장 동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자리에서 일어난 김정일이 최광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는
그의 손힘은 세었고 눈빛에도 힘이 들어가 있다.
   "건강하신 모습을 뵈어 기쁩니다, 수령 동지."
   정중하게 인사를 한 최광은 그가 권하는 자리에 앉기 전에 방안에
208 밤의 대통령 제3부 -ll
모여 앉은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주석궁 안에 있는 김정일의 이밀 회의실 안이다. =1와 시선을 마
주치는 사내들은 지금 공화국을 장악하고 있는 실권자들이었다 모
두 김정일의 측근이다. 보위부 사령관 안용준과 군사위 부위원장이
며 군 쳐고 사령부 부시정관이 된 김강환, 호위총국장 백학림에 총참
모부 부참토 총장인 오백룡, 그리고 노농적위대 사령관 전문섭 등이
었다. 그리고 말석에 앉은 부수상 김달현과 주일 북한 대사 강일수의
얼굴도 보였다.
   최광은 그를 위해 마련되어 있는 우측의 첫번째 자리에 앉았다.
   "부장 동무, 어젯밤 파리에서의 사건은 들으셨지요?"
   두 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김정일이 물었다
   "예, 수령 동지. 오는 도중에 차 안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
   연락은 앞쪽에 앉아 있는 호위총국장 백학림에게서 왔다. 백학림
은 김정일의 측근 중의 측근으로 10만 명 가량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집단군 규모의 호위총국 사령관이다.
   호위총국은 편제상 무력부 산하 기관으로 무력 부장인 최광의 하
급 부서였지만 실제로는 무력부, 국가 안전 보위부, 사회 안전부 등
과 마찬가지로 독립 기관이며 당의 직접 통제를 받게 되어 있었다.
통치자가 각 기관의 힘을 분산시키고 서로 견제하게 하는 통치 방법
이다.
   "수상 동무와 외교 부장 동무는 안타깝게 되었소. 우리는 그 원추
를 갚아야 한다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습니다. "
   김정일의 목소리는 열기를 띠고 있었다.
   "세계는 이제 남조선 놈들의 만행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을 거요.
                                               불타는 파리 209
 놈들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놓았소."
    최광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남조선 테러단에 의해 북한은 수
 상과 외교 부장이 무참하게 살해되고 지금도 파리의 호텔 방에 요인
 두 명이 인질로 잡혀 있다. 남조선 정부는들이킬 수 없는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다고 볼 수 있었다.
    "우리는 파리의 사건을 공화국의 모든 인민들이 볼 수 있도록 보
 도하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인민들은 치를 떨면서 원쑤를 갚으려고
 할 겁니다. "
    주위에 앉은 사내들이 일제히 머리를 끄덕였으므로 최광도 그들
 흥내를 내었다.
    그렇다면 모든 조건이 충족된 셈이다. 남조선의 만행이 전 세계에
드러났고 인민들은 그들이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추악한 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제 적이 아니었다. 남조선의 테러단
에 의해 공화국의 대표단과 함께 살해되는 입장으로 우방국이 되었
다. 적의 적은 이쪽편에서 보면 당연히 동지가 되는 것이다.
    "동무, 우리 당 중앙 상임 위원회에서 오늘 아침에 만장일치로 결
정한 일이 있소. 그것을 통보해 드리려고 동무를 부른 것이오."
    김정일이 똑바로 최광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최팡이
그의 시선을 받았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넓은 회의실에 김정일의
말소리가 다시 울렸다.
   "당은 동무를 무력 부장 겸 국가 주석으로 선출하였습니다. 동무
는 또한 공화국 수상을 겸하게 되었고 당 국방 위원회의 위원장도 맡
게 되었습니다. "
   눈을 치켜뜬 최광이 한동안 김정일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
210 밤의 대통령 제3부 -ll
다. 한쪽 입술 끝을 경련하듯 떨던 그가 이윽고 몸을 바로 세웠다.
   "수령 동지, 저에겐 과분한 직책입니다. 사양하게 해주십시오."
   "이미 결정난 일이오. 당의 결정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주석 동무
는 잘 알고 계실 거요."
   김정일이 얼굴에 웃음을 띠자주위의 사내들도 제각기 웃는 얼굴
이 되었다.
   "이제 기회는 무르익었소. 공화국의 온 인민은 철통같이 단결된
상태요. 바야흐로 적개심이 폭발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미국
은 이제 우리 공화국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
국도 남조선의 만행을 규탄하게 되었습니다 "
   김정일의 열기를 떤 시선과 부딪치자 최광은 머리를 」1덕였다.
   김정일이 말을 이었다.
   "닷새 후에는 역사적인 과업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무에
게 공화국의 운명이 걸린 사업을 맡기려고 합니다. "
   "말씀해 주십시오, 수령 동지."
   "흥진무 동무가 갖고 있었다던 비밀 각서라는 것이 보도되고 있다
는데, 그것은 남조선·놈들의 비열하고 더러운 조작이오. 미국과 우리
공화국을 이간질시키려는 악랄한 수작입니다. 동무가 그것을 해명해
주어야겠습니다. "
   "공화국의 주석 자격으로 파리에 가서 잡혀 있는 두 동무의 신병
을 인수하고 보도 기관들에게 해명을 해주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동
무는 로젠스턴을 만날 수가 있을 겁니다. 책임 있는 공화국의 대표를
만나게 해달라고 미국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단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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