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국 부통령의 행방
(1)
초대소의 창문은 전통 한국식으로 창호지를 바른 미닫이 창이었
다. 이을설이 미닫이를 밀어젖히자 찬바람과 함께 횐 눈가루가 휘몰
려 들어왔다. 앞에는 눈에 덮인 야산과 그 아래쪽의 농가가 펼쳐져
있다. 초대소의 정문 옆에 세워 둔 검정색 벤츠의 차체 윗부분에도
횐 눈이 쌓여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앞 범퍼의 첫봉에 꽃은 원수의 빨
강색 깃발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창에서 몸을 돌린 이을설이 방안의 소파에 앉은 최상욱 상장을 바
라보았다. 동부 전선을 맡고 있는 제1군단의 참모장인 그가 예고도
없이 이을설을 찾아온 것이다.
이을설이 입을 열었다.
"이제 동무가 찾아온 목적을 말해 주지 그래? 바쁠텐데 말이야."
최상욱은 김정일의 심복으로 만경 학원 출신이다. 그는 당 군사
위원회 위원으로 평양에서 근무하다가 이번에 제1군단 참모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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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되어 간 사내였다. 실권을 빼앗기고 초대소로 물러나 있는 이을
설에게 3주 만에 처음 찾아온 고위급 장성이다.
"예, 총참모장 동지. 말씀 드리지요."
북한에서는 보기 드문 살찐 몸매의 최상욱이 자리를 고쳐 앉았다.
"수령 동지께서는 총참모장 동지의 애국심과 충성심을 깊게 찬양
하셨습니다. "
"또한 이제까지의 공적은 공화국의 군인 누구라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난 내 충성심을 보여 드릴 기회를 달라고 수령님께 탄원서를 내
었어, 지금 같은 시기에 군에 대한 내 경험이 이런 산골의 초대소에
서 묻히면 안된다고 수령님께 호소했네 "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총참모장 동지."
"나는 동무가 수령님의 지시를 받고 온 것으로 생각하는데."
"예, 지시를 받들고 왔습니다. "
최상욱이 허리를 세우고 똑바로 앉았다.
"수령 님께서는 총참모장 동지에게 부대 지휘를 맡기셨습니다. "
그러자 이번에는 이을설이 허리를 폈다.
"나에게 부대 지휘를?"
"예, 총참모장 동지. 수령 님께서는 총참모장 동지를 저희의 막강
한 제 1군단 사령관으로 임명하셨습니다. "
"제 1군단 말인가?"
"예, 총참모장 동지. 수령 님께서는 동부 전선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맡길 사람은 총참모장 동지밖에 없
미국 부통령의 행방 213
다고 하셨습니다. "
"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셨군, 수령 동지께서."
"모두 수령님의 혜안 덕분입니다. "
"수령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하fl네 목숨을 바쳐 충성을 바칠 것
이라고 말씀 드려 주게."
"곧 친히 연락하실 것입니다. "
"내가 자레의 사령관이 되었군."
"예, 그렇습니다, 총참모장 동지 ."
"그 소리는 이제 빼고 날 사령관이라고 부르게. "
"예, 사령관 동지."
"그런데 누가 인민군 총참모장이 되었나?"
"수령 동지입니다.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상욱이 대담하자 이을설은 머리를 11덕였
다 동부 전선의 제 1군단 사령관으로 직급이 두 계단 이상으로 내려
갔지만 초대소에 박혀 있는 것보다는 몇 배나 나은 일이었다.
"조국이 어려울 때 일을 맡게 되어서 감격했네. 자네가 꼭 수령 동
지께 이 말을 전해 드리게."
"잘 알겠습니다, 사령관 동지 ."
제 1군단 사령부는 회양에 있었고 사령관은 하진우 대장이었다. 하
진우가 어떻게 되었는가는 물어 볼 필요도 없었고 대장중 보직에 차
수가 좌천되어 간다는 것에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는 최광과의
연락을 맡았던 박기천 소장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포함한 최광이나 김철만, 김봉율, 이하일, 김광진 등 혁명
1세대의 군 원로들을 해방 전쟁의 긴장된 정국을 이용하여 숙청시키
214 밤의 대통령 제3부 -ll
고 군을 일사분란하게 장악하려는 김정일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마무
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을설은 자신이 중부와 서부에 비해 한
직인 제 1군단이라도 맡게 된 것은 아직도 군 내부에 잔존하고 있는
혁명 1세대의 세력들을 위 무시키기 위한 김정일의 작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참모장 최상욱이라는 감시자가 옆에 붙어 있는
것이다.
혀상욱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2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령관 동지, 제가 사령부로 모시겠습니다. "
"그럼 , 준비해야지 ."
자리에서 일어선 이을설이 갑자기 생각난듯 움직임을 멈추고 최
상욱을 바라보았다.
"최광 동지는 잘 계신가?"
"OtOt, fl . "
최상욱도 잠자기 생각났다는 듯 얼굴을 폈다.
"무력 부장 동지는 오늘자로 국가 주석과 수상을 겸하게 되셨습니
다. 당 국방 위원회의 위원장도 맡으셨고 조금 전에 임무를 띠고 파
리로 출발하셨습니다. "
"어제 파리에서 남조선 깡패 새끼들의 테러가 있었습니다. 호텔에
있던 김사훈 수상과 최대민 외교 부장이 살해되었고 흥진무 동무와
최성산 동무가 놈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미국 부통령 고트도
함메 인질로 잡혀 있지요. 상원의 원내 총무 빈 몰은 놈들에게 살해
되었습니다. "
이을설이 눈을 치켜뜨고 그를 바라본 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
미국 부통령의 행방 215
다. 초대 소에는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이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되
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그런 일이 일어났군 "
혼랄소리처림 이을설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를 가볍게 』1
덕이고 있었다.
"그런 엄청난 일이 ‥‥‥ 그리고 최광 동지는 파리로."
"예, 사령관 동지. 주석 동지는 수령님의 지시를 받들고 떠나신 겁
니다. "
최광이 떠나기 전 김정일을 만나 임무를 맡는 조건으로 이을설의
구제를 부탁했다는 것을 최상욱은 알지 못했고 이을설 본인 또한 말
할 것도 없다.
"사방에 정보원이 있습니다. 호텔과는 수시로 연락을 하는데 주파
수를 ul꾸기 때문에 방해할 수도 없고 찾아내기도 힘듭니다 "
말하는 중에도 조르주는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콩코르드 광장은 경찰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크리용
호텔은 지금 순간으로는 파리에서 제일 가는 관광 명소였는데 경찰
은 관광객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멀찍이서 구경할 수 있도록은 했다.
조르주가 말을 이었다
"한국의 안기부인지 일본의 정 보국인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초정밀 통신기를 쓰고 있는 것은 확실해요. 호텔에서
밖으로 나가는 통화는 몇 번 잡혔는데 짧아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었습니다. "
"빌어먹을 놈들, 철저하게 준비해 두었군."
구베르가 하룻밤 사이에 자란 턱밑의 수염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도대체 무슨 요구 조건이라도 내놓아야 할 것 아닌가? 저 빌어먹
을 놈들이 크리용에서 눌러살 작정은 아닐테고."
조르주가 그의 시선을 따라 앞쪽의 호텔을 바라보았다.
호텔에 투숙했던 손님들은 경찰의 인도로 모두 빠져 나왔으므로
41죠신에만 투숙객이 있는 셈이다. 김원국의 요청으로 호텔의 현관
문은 폐쇄되었고 호텔 관리에 필요한 열 명의 직원이 남겨진 호텔은
무거운 정적에 싸여 있다.
구베르는 입맛을 다시고 조르주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호텔에서는 연락이 없나?"
"없습니다. "
연락이 없다는 것은 현상태에서 변화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구베
르는 열 명의 호텔 직원을 추려서 남겼을 때 GfGN 요원 네 명을 도
미니크 소령과 함께 호텔에 침투시켰다. 어차피 저쪽은 네 명이』서
호텔 안의 감시까지 할 수는 없다.
도미니크의 보고를 들으면 놈들은 4충의 방문을 열어 놓고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종업원이 음료수를 들고 방안에 들어갔을 때 고트와
홍진무는 목에 수류탄을 한발씩 걸고 창가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
었다는 것이다. 또 한 명의 북한친은 문 안쪽에 같은 모양으로 앉아
있었으므로 놈들이 손 하나만 까딱하면 모두 가루가 될 판이었다. 따
라서 도미니크는 질색을 한 내무 장관의 명령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레지에의 생각은 구베르토 알 수 있었다. 프랑스측이 작전을 벌여
고트나 북한측 요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것이다.
그는 미국측이나 북한측이 작전을 벌여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CIA의 매클레인이 찌푸린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구베르, 히터의 공기 구멍으로 가스를 투입하는 방법을 보류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소.
그 작전은 없는 것으로 합시다. "
"빌어먹을."
구베르가 허리를 돌리면서 투덜거렸다. 이 상황에서 제일 골탕을
먹는 자가 있다면 자신일 것이라고 구베르는 믿고 있었다. 명목상의
현장 책임자는 자신이었지만 CIA의 매클레인이 사사건건 간섭을 한
다. 하긴 광장 뒤쪽의 작전 차량에는 미국 대사와 NATO 사령관, 그
리고 북한 대사와 프랑스 외무 장관, 내무 장관 등 거물들이 모여 앉아 있다.
"젠장, 겨우 보일러실에 요원들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제 와서
보류시킨다는 건 무엇 때문이야?"
"그건 나도 모르겠소. 워싱턴에서 내려온 지시니까."
"여긴 프랑스야.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이란 말이오, 젠장 "
"그걸 누가 모르나?당신네 수상이 워싱턴에서 이 꼴을 당해 봐
당신이라고 가만 있겠어?"
그러자 탁자 위의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구베르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구베르 서장입니다 "
"구베르, 나, 레지에야."
광장 뒤쪽에서 꼬박 밤을 세우고 있는 내무 장관이다.
"예, 장관님."
"지금 그쪽으로 한국 대사가 갈 거야. 나하고 미국 대사가 이야기
잘해 놓았으니까 놈들과 통화하게 해줘."
"예, 장관님 ."
"우리가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해줘. 한국말로 할테니까 동시 통역 준비도 하고."
"준비해 두고 있습니다. "
"그리고 구베르."
"예, 장관님 ."
"텔레비전 생중계를 할 거야. 그들의 통화가 그대로 중계될 거란 말이야.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해 "
"알겠습니다. "
수화기를 내려놓은 구베르가 매클레인과 조르주를 바라보았다.
"한국 대사가 온다는군."
"늦는군요. 하긴 인질이 잡힌 나라하곤 입장이 다를테니까."
불쑥 말을 뱉고 난 조르주가 힐끗 매클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통화도 텔레비전에서 생중계할테니까 준비시켜, 조르주."
조르주가 몸을 돌리자 매클레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텔레비전 생중계를 하다니,1건 또 왜?"
"그건 우리 정부의 결정이오,매클레인. 당신도 잘 알텐데,정부
관리들이 언론 매체에 대해서 호의적 이란 것을."
창가에 나란히 앉아 있는 인질들을 바라보며 김원국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김원국 씨, 저,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 정필섭입니다. "
대뜸 한국말이 수화기를 울렸다. 새벽 4시가 되어 있어서 창 밖의
광장에는 구경꾼들이 줄고 대신 경찰들로 채워져 있었다. 수많은 차
량이 호텔 앞 광장에 늘어서 있었고 그중 하나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김원국이 차갑게 묻자 저쪽은 당황한 듯 잠시 가만 있다가 말을 이었다.
"인질 문제로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는다만 같은 한국인으로 김 선생께서‥‥‥‥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
"김 선생, 하지만 미국은 우리의 우방국입니다. 김 선생의 행동이
양국의 50년 우호 관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나는 당신 정부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그랬소.
그러니 당신이 나설 일이 아니오."
"김 선생은 한국인입니다.
정부와는 관계가 없다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
김원국이 고트의 어깨 너머로 아래쪽의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경찰차의 경고등은 밤바다의 물결이 빛에 반짝이는 것처럼 어둠 속에 넓게 깔려 있었다.
고트가 부스럭거리며 어깨를 틀었다. 불편한 모양이었다.
창가에 소파를 놓고 코트와 흥진무를 묶어서 나란히 앉혀 놓았다.
그들의 가슴에는 수류탄이 한 개씩 매달려 있었고 안전핀에 걸린 끈이
의자의 다리에 매어져 있었으므로 엉덩이를 들기만 해도 안전핀이 빠져 나간다.
김원국이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이봐요, 정 대사님, 오늘이 며칠입니까?"
"예, 2월 6일입니다. "
"그렇다면 침공 나흘 전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
"대사님 옆에는 미국과 북한 양국의 기관원들이 잔뜩 모여 있을텐데,
프랑스 경찰과 특공대를 빼고 말이오."
"글쎄, 저는‥‥‥‥
한국말로 주고받는 대화였지만 즉석 통역 리시버를 귀에 찐 수백 명의 사람들이 듣고 있다는 것을
그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김원국이 말을 이었다.
"비슷한 상황 아닙니까? 나는 이곳에서 북쪽 놈들의 침공일까지 기다릴 작정이오.
나흘 동안 어디 이곳을 북미 양국의 특공대가 공격을 해보라고 하시오."
"김 선생. "
"나홀 간 견디고 나서 2월 10일에 북쪽 놈들이 침공해 오면 여기있는 다섯 명은 모두 가루가 됩니다.
놈들의 침공을 기념하는 폭발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
"프랑스 정부와 국민에겐 미안한 일입니다. 그래서 난 내 스위스 은행의 계좌를 털어
그랑팔레와 이곳 크리용 호텔 앞으로 각각 5천만 달러씩을 보내도록 하겠소.
피해에 대한 보상이오.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아름를운 곳인데 유감이오."
"김 선생, 그러신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
이제 정필섭의 목소리가 간절해졌다. 이제까지는 주위에서 듣는 사람과 텔레비전 생중계가
마음에 걸려 말을 걸러서 했고 한국 정부가 이 일과 무관하다는 것에만 신경을 썼던 것이다.
"김 선생, 차라리 다른 요구 조건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 ‥‥‥‥
이것은 그가 미리 준비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TV 카메라에 등을 돌린
정필섭이 수화기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김 선생, 그러시지 않아도 우리는 이깁니다. 두고 보십시오.
우리는 놈들에게 당하지만은 않습니다, 절대로."
"김 선생이 보내신 팩스는 전 세계의 언론 기관이 보도했습니다.
그것만 해도 김 선생은 한국인으로서 할일을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들을‥‥‥‥
"텔레비전을 보니까 미 국무 장관 로젠스턴이 이곳에 온다고 하더군요.
오늘 오전에 도착할 거라고."
그러자 정필섭은 입을 다물었고 주위에 있던 수백 명의 리시버를 긴 요원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목소리를 들으며 자막을 보고 있던
수백만의 사람들도 말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김원국의 말소리가 다시 울려 나왔다.
"북한에서는 이번에 새로 주석이 된 최광이란 자가 온다고 들었소.
나는 그들 둘과 만나고 싶소.
셋이서 만나 이야기하고 싶단 말이오.
설마 내가 무서워서 핑계를 댄다든가 하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내가 자격이 없다는 둥 하지도 못할 것이고.
어디, 이제야말로 한국과 미국,북한의 3국 회담을 해봅시다. "
"3국 회담이라."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강한기가 혼잣소리처럼 말하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파리에서 한국과 미국,북한의 정상회담이 이제야 열리게 되었구만. "
고성국 중장이 입술 한쪽을 비틀며 웃었으나 그의 시선은 여전히 텔레비전에 붙박여 있다.
"참모장님."
강한기가 부르자 고성국이 텔레비전을 끄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강한기는 그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참모장님, 어떻게든 김원국 씨를 도울 방법이 없겠습니까?
저대로 내버려 두었다가는‥‥‥‥
"미국과 북한놈들을 끌어안고 폭사하73지 ."
"그렇게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저 사람을 누가 말린단 말이야?"
고성국이 각진 얼굴을 찌푸리자 더욱 날카로운 표정이 되었다.
"내버려 두는 것이 저 사람을 위한 일이야.
우리 정부는 모른 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 사람은 잘 알고 있어.
대사한테 말하는 것 들었지 않아?
어떻게든 정부를 연관시키지 않으려고 했어."
(2)
"국민들이 충격을 받을 겁니다. "
"오늘 아침의 신문과 방송으로 이미 충격 받았어. 파리에서 일어난 일은
군 ·관 ·민 할 것 없이 우리의 결전 태세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 f."
이제 김원국은 할일을 다했으므로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투로 들렸으므로
강한기는 눈을 치켜뜨고 고성국을 쏘아보았다.
"참모장닝,오늘 밤의 회담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그 결과를 기다려 야 합니다. "
"미국과 북한은 아직 회담에 대해 가타부타 발표를 하지 않았어."
"미국이 고트라는 인질이 있는데 거부할 리가 없습니다. "
"그런데 무슨 회담을 한다는 거야? 나는 그 내용이 짐작이 안 가 "
고성국이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물론 후련해. 밤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사람다운 행동이야.
시기가 적절했고 대상도 잘 선택한 데다가 깜짝 놀랄 만한 공격 방법도 성공적이었어.
하지만 마무리가 어떨지 걸려 "
"참모장님, 그래서 제가 말씀 드린 겁니다. 우리가 도와 줄 방법이 있는가를 말입니다 "
"글쎄, 우린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손을 대면 안된다니까 그러 fl . "
고성국의 날카로운 시선이 강한기를 쏘아보았다.
"그 사람의 생사에 관해 생각하면 안돼, 강 소장 그 사람도 원하고 있지 않을테니까.
당신은 작전 참모야. 한두 사람의 희생을 떠나 큰 작전을 보란 말이야."
그러자 책상 위의 전화벨이 울렸다. 계엄 사령관과의 직통 전화인
빨강색 전화기였으므로 고성국은 서둘러 수화기를 들었다.
"예, 참모장 고성국입니다. "
"f4f. "
계엄 사령관 강동진의 목소리였다.
"정부의 지시가 내려왔어. 한국 시간으로 오늘 밤 자정 무렵에 파리에서 회담이 열려 "
"각하, 그럼 김원국 씨와‥‥‥‥
"그렇다네, 로젠스턴이 승낙을 했고 북한의 최광도 뒤늦게 승낙을 했어, "
"OIOt, fl ."
"그런데 김원국 씨는 그 회담에 우리 정부의 관리 한 명이 참석해줄 것을 요청해 왔어,
말하자면 비공식적인 참관인이 되겠는데,그 관리가‥‥‥‥
"묘한 회담이야, 고 중장.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사령관 각하."
"대통령 각하께서는 우리 군인 중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참석하기를 바ㄹHf어.
북한측의 최광은 군인 출신이고 김원국 씨는 그 회담을 북한의 2월 10일 침공일예 맞출테니까,
누가 간다면 우리 군인 중의 하나가 가야 돼. 강단이 있는 사람이.
그래서 한국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거야."
"김원국 씨는 그 회담의 결과를 발표하도록 요청했고 북미 양국도 승낙했어.
그래서 나는 자네를 추천했어,"
"각하, 저는‥‥‥ 작전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만."
"하루면 돼 그리고 자네의 심복이 있지 않나?강한기 말이야.
그 친구한테 맡기고 다녀와."
고성국이 힐끗 앞자리에 앉은 강한기를 바라보았다.
시치미를 몌면서 강한기는 딴곳을 보고 있었지만 고성국은
그가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뿌연 아침 안개가 콩코르드 광장을 덮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한 눅눅한 날씨였다.
이제 호텔을 올려다보며 호기심으로 떠들던 광장의 구경꾼들은 보이지 않았다.
수십 대의 경찰차들은 그대로였지만 잘 정돈되어 있어서 마치 높은 사람의
검열 준비를 하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경찰차 사이로 늘어서 있는 무장 경찰들의 자세도 어젯밤과는 달리 느슨해져 있다.
그들도 오늘 오후에 회담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창가에 서서 광장을 내려다보던 김원국이 몸을 돌렸다.
열려진 문 밖으로 고동규가 등을 보이며 서 있었고 안쪽의 벽에 둥을 기대고 앉아 있던
최성산과 시선이 마주쳤다. 김원국이 방을 가로질러 그에게로 다가갔다.
"뭐가 필요한가?"
낮은 목소리로 묻자 그가 머리를 저었다.
"필요한 것 없어."
김원국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나란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침대에 누워 잠이 들어 있는 고트와 홍진무의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솔직히 넌 인질로서의 가치도 없는 놈이다.
그건 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러자 의외로 최성산은 담담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알고 있어."
"입장을 바러 놓았을 때 너 같으면 날 어떻게 했겠나?"
"당연히 죽여 없앴겠지. 난 흥정의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죽여 달라고 말하는 것 같군."
"너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더이상 날 고문하지 마라."
복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절름거리며 조웅남이 들어섰다.
온몸에 수류탄을 주령주렁 매달고는 손에 기관총을 쥔 모습이었고
잠을 자지 못한 때문인지 두 눈에는 펏발이 서 있었다.
그는 김칠성과 함께 복도의 양쪽 끝을 감시하고 있는 중이다.
"형님, 좀 주무쇼. 내가 대신 여그 있을텡게로,"
조웅남이 허리를 굽히고는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깥은 칠성이허고 동규가 있으은 됨게 쬐끔만이라도 눈을 붙이쇼. "
"난 됐다. 너희들이나 교대로‥‥‥‥
"아따, 말 좀 들으쇼."
그러다가 옆에 앉은 최성산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부륩떴다.
"아니, 이 씨발놈은 자빠져 자지도 않고 눈을 말똥말똥 뜨고는, "
김원국이 눈을 붙이지 않으려는 이유를 찾아낸 듯이
그는 으르렁 대며 한걸음 최성산에게로 다가섰다.
"대갈통을 딱 한패 쳐서 혼절을 시켜 주끄나? 왜 안 자빠져 자고."
"이 자를 내보내라."
턱으로 최성산을 가리키며 김원국이 말하자 조웅남이 눈을 껌벅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얼굴이다.
이맛살을 찌푸린 최성산도 김원국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김원국이 묶여진 최성산의 손목을 들어올렸다.
"이 자를 밖으로 내보내. 우린 인질 두 명이면 된다. "
"날 죽여라."
그러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최성산이 다급하게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 날 죽여. "
"=1러지 뭐 ."
선선히 대답한 것은 조웅남이다.
그는 손을 뻗어 최성산의 머리위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었다.
"형님,무신 자선 사업 할 일 있당가요? 소원대로 적여서 떤집시다. "
"일으켜 세워라. 그리고 옆방으로 데려가."
자리에서 일어션 김원국이 차갑게 말하자조웅남이 입맛을 다시고는 아쉬운 듯
머리 위를 덮은 손을 치웠다.
"인질 협상으로 국한시킬지도 모릅니다.
미국은 인질 때문에 협상에 끌려들지 않으려고 할 겁니다. "
시바다 친지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로젠스턴은 오후 1시경에 도착할 예정이고 최광은 2시경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4시까지 크리웅호텔에 모일 겁니다. "
"시바다, 한국에서 가는 고성국 중장은 강경파야.
군 혁신 세력의 주동 인물이라구.
김원국이나 고성국이 인질 문제만 이야기할 리가 없어 ."
말하는 사람은 정보국의 혼다국장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회의장을 지켜 . 시바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알고 있습니다, 국장님."
"한국의 임 부장하고도 이야기가 되었어. 안기부 요원들이 대거 파리로 들어가는 중이야."
"그렇습니까?"
"한국측도 불상사를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일 거야.그들과 협력해야 돼. "
"알겠습니다, 국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시바다가 옆에 앉은 다케무라를 바라보았다.
"한국 안기부가 나쳤어. 요원들이 몰려을 모양이야."
"당연하지요. 이젠 미국에 대한 미련을 버릴 때도 되었습니다. "
"처음에 깅원국을 내세운 건 잘한 일이야.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겠지만."
말을 멈춘 시바다가 풀썩 웃었다.
"국장은 불상사가 일어나면 안된다고 했어. 다케무라,
그 불상사가 뭔지 알겠나?"
다케무라가 따라 웃었다.
"인질이 풀려나는 것 아닙니까?회담 도중에 말입니다. "
"그래, 그것이 우리에겐 불상사야. 미국과 복한측에겐 경사가 되겠지만."
코트 깃에 귀를 묻고 지희은은 크리용 호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서 있는 독일 관광객은 아까부터 계속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대는 중이다.
오후 1시가 되어 햇살은 머리 위에 하앙게 떠 있었지만 영하의 날씨였다.
광장을 스쳐 온 바람은 얼음날처럼 차라고 날카롭게 피부를 찔렀지만 구경꾼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경찰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대형 승용차가 호텔 쪽으로 다가가자 구경꾼들이 술렁거렸다.
미국이나 북한의 대표단은 아니다.
아마 프랑스 정부의 고위 관리일 것이었다.
이미 텔레비전에서는 거의 전 채널이 크리용 호텔 상황을 생중계하고 있었으므로
로젠스턴이 드골 공항에 1시에 도착하고 최광이 2시에 도착한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지희은은 몸을 돌렸다. 단두대는 이제 없어졌지만 프랑스 혁명 때에는
이곳에서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처형되었던 광장이다.
사람들을 헤치고 오벨리스크 쪽으로 다가가던 지희은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양옆으로 두 사내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다시 발을 떼자 그들은 그녀의 양쪽에 바짝 붙어 섰다.
동양인이었고 한국인의 얼굴이다
"잠깐 같이 좀 가실까요?"
왼쪽의 사내가 어깨를 부딪치며 말하자 지희은의 얼굴이 굳어졌다.
북한 쪽의 억양이었던 것이다.
"반항하면 이 자리에서 없앨 수도 있어. 그러니까 순순히 따라 와."
양쪽 어깨가 사내들에게 붙여져 있었으므로 빠져 나갈 수도 없다.
지희은은 그들에게 끌려가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옆을 지났지만 그들의 관심은 뒤쪽의 크리용 호텔이었다.
서두르며 걷는 바람에 지희은이 비틀거리며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이자
왼쪽 사내가 그녀의 팔을 끼었다.
"허튼 수작 하지 마라, 이년아."
이를 악문 지회은이 두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고 섰다.
그 옆을 중년의 부부가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 자리에서 없애 버리겠어."
사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고 다른 사내는 중년 부부의 앞을 가로 막고 섰다.
시야를 가리려는 것이다.
"of 개』띤들."
지희은이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날 어쩌려고 이래, 이 더러운 놈들아?"
사내가 팔을 잡아채었으므로 지희은은 쓰러질 듯 다시 걸음을 떼었다.
경찰은 뒤쪽의 구경꾼들 앞에 있었고 지희은은 사내의 코트 주머니에서
불룩 튀어나온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간 곳은 광장 바깥쪽의 간이 휴게소 앞이다.
그늘진 곳이었고 인적도 드문 휴게소 옆에는 검정색 벤츠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널 여기서 보다니 다행이야."
차로 다가가면서 팔을 움켜쥔 사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검은 피부에 눈은 물고기의 그것처럼 흐린 채 번들거 렸는데
이제 여유를 찾은 모양이었다.
"취리히에서 우릴 잘도 골탕을 먹였겠다, 이년."
다른 사내는 차로 먼저 다가가더니 열쇠를 꽃아 문을 열고 그들에게로 돌아섰다
지희은의 가슴이 절망으로 내려앉았다.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다.
이것으로 끝날 수는 없다는 분노가 일었다가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나서 엄습해 오는
절망감인 것이다.
그러자 문을 열고 기다리던 사내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입이 뒤따라 벌어졌다.
그리고는 그 얼굴 그대로 문짝에 등을 부딪치며 주저앉는다.
지희은은 머리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팔을 끼고 있던 사내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다.
두 명의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쥐고 있는 검은 권총이 보였고 그 순간에 횐 불꽃이 튀었다
옆의 사내가 짧은 숨소리를 뱉더니 가슴을 끌어안고 고꾸라졌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지희은이 저도 모르게 한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사내들은 한국인 임에 틀림없었고 이제는 남쪽일 것이었다.
앞장션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땅바닥에 쓰러진 사내에게로 허리를 굽혔다.
"자, 빨리 이곳을 뜹시다. "
뒤쪽에 있던 사내가 지희은에게 다급히 말하고는 다른 사내를 돌아보았다.
"요시무라 씨, 어서."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설 매클레인은 방안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짙은 눈썹 밑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보이는 중년 사내였다.
상황 판단이 빠르고 대인 관계가 좋은 그는 NATO 주재의 CIA 책임자로
키드먼의 신임을 받고 있는 간부중의 하나였다.
그에게로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박이라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조정관님, 한국 안기부의 미스터 요."
"미스터 박?"
매클레인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한국 안기부가 왜?'
"CIA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면서
'프랑스 경찰에게 상의하라고 해.
"그렇지만 조정관님 . 호텔 앞에 와 있습니다.
장신의 흑인 부하는 두 그렇지, 구베르를 만나라고 해."
"구베르는 눈을 꿈벅이며 머리를 저었다.
자신이 상관할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과
"도대체 그자가 무슨 일로 날 보자는 거야?
"회담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다고 하던데요.
매클레인이 잠자코 그를 쏘아보다가 머리를 ll덕였다.
"좋아, 만나 보기는 상의하라 하지. 데려오ㄹf.% 관이다. 고"
부하가 몸을 돌리자 옆쪽에서 있던 월슨이 다가왔다.
"조정관님, KCIA 단단히 일러 두션야 합니다.
4층 그의 보좌 놈들은 KCIA 놈들에게 놈들의 협조를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W'』레인은 팔짱을 낀 채 대답하지 않았다.
뫼담은 세 시간 후인 오후 8시 정각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김원국 의 요구대로 회:
강장이 크리용 호텔 2층의 연회실로 결정되o; 』서 지금 좌석 배치가 거의 끝나 가는 중이다.
참석 인원은 미국측은 로젠스턴과 NATO의 미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대장,
북한 쪽에서는 최광과 인민군 총정치국장인 김인채 상장,
그리고 한국측은 김원국과 고성국으로 모두 여섯 명이다.
매클레인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인질을 잡고 열리는 회담치고는 거물급 정상 회담인데
역사상 이런 유례가 없었다.
한국측은 미국과 북한에게 인질 교환 조건을 내놓을 것이 틀림없고 북미 양국은 합동으로
그것에 대처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쨌든 한국인이 바라던 한반도 문제에 대한 남 ·북 ·미 3국의 회담이 열리게는 되었다.
사람들 사이로 동양인 두 명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명 모두 작달막한 키에 단단한 몸매의 사내들이었다.
그들의 옆을 조금 전의 부하가 안내해 오고 있었다.
"조정관님, 여기, 이 분이."
다가온 부하가 앞장선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스터 박이고, 이 분은 매클레인 씨요."
"매클레인 씨, 난 KCIA의 박남호요."
한국인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횐 머리가 희끗희끗한 40대 초반의 사내였다.
그의 옆에 선 30대 중반의 부하는 턱을 든 채 아예 이쪽과 시선을 마주치려고 하지도 않는다.
"미스터 박,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습니까?"
매클레인이 대뜸 물었다. KCIA의 간부급 유럽 주재원은 모두 낯이 익었는데 이 자는 아니다.
서울에서 온 사내일 것이다.
"회담장 경비를 서야 될 것 같아서. 아시겠지만 서울에서 고위급 장군이 오시니까."
박남호가 말하자 매클레인이 옆에 선 월슨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당신들이 경비를 선단 말이오?"
"그렇소. 당신들과 함께. 그렇지, 북쪽도 있군."
"인질을 잡고 있는 것이 누군데?"
"김원국 씨 아닙니까?"
"그런데 당신들이 경비를 해요?"
그러자 박낭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당신, 머리 회전이 빠르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소?"
"이?"
매클레인이 눈을 부릅떴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아직도 착각하고 있느냐고 했어."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회담장을 둘러본 박남호가 퍼뜩 눈을 들어 매클레인의 시선을 잡았다.
"이곳에는 경비원이 들어을 수 없도록 김원국 씨가 요청했으니까,
대표들만 입장시키고.그렇다면 밖의 경비를 3국이 나누어 서야겠군. "
"이봐, 미스터 박."
"당신, 회담을 깰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야?"
"뭐ㄹf?"
"그럴 만한 직책이 아니라면 닥치고 가만히 있어."
그러자 매클레인이 어금니를 물면서 어깨를 부풀렸다.
박남호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자,매클레인 씨, 회담 시작 전에 경비 책임자들이 먼저 회의를 하는 것이 어떻소?
당신 친구 북한 쪽 경비 책임자도 불러서 말이오.
우리가 빨리 결정을 해야 회담이 시작될 수 있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지, 매끌레인 씨?"
프랑스 주재 한국 대사관 직원들에 둘러싸여 공항 건물을 빠져 나오는 고성국 중장에게
대사관 무관 한기수 대령이 바짝 다가왔다.
"참모장님, NATO 미군 참모장 핸든 중장이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만. "
"핸든 중장? 난 그 사람 모르는데 ."
고성국이 머리를 한쪽으로 눕혔다.
"NATO 참모장이 왜 날 보자는 거야?"
"회담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옆쪽에서 걷던 대사관의 참사관이 힐끗 =1들을 바라보았다.
기자들을 피하기 위해 =I들은 승무원들의 출입 통로를 이용해 공항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다.
"참모장님, 주차장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한기수가 다시 말했다. 시큰둥한 고성국의 반응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사복 차림의 서양인 한 명이 곧장 고성국에게로 다가왔다.
"장군, 저는 핸든 장군의 보좌관 퍼거슨 대령입니다.
장군께서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절도 있게 말하고 난 그가 손을 들어 주차장 한쪽을 가리켰다.
검정색 대형 캐딜락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운전사로 보이는
사내가 부동 자세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고성국이 옆에 선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미군 참모장이 영접을 나온 걸 보면 한국군 위상도 왜 높아진 것 같군."
주위의 아무도 입을 열지도 웃지도 않았으므로 고성국은 저혼자 풀썩 웃었다.
"좋아, 갑시다. "
고성국이 캐딜락으로 다가가자 운전사가 뒤쪽의 문을 열어 주었다.
안쪽에 앉아 있던 란은 머리의 50대 사내가 고성국을 향해 웃어 보였다.
"긴 비행이었지요?난 핸든입니다 "
"고성국입니다. "
악수를 나누는 사이에 보좌관이 앞자리에 탔고 캐딜락은 천천히 움직였다.
"대사관으로 내가 모션다 드리지요,고 장군."
고성국이 힐끗 뒤쪽을 바라보자 그의 일행들은 서둘러 차에 오르고 있다.
"장군, 난 대위 시절에 일년 간 동두천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소령을 달고 한국을 떠났지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다. 마르고 주름살이 깊은 얼굴이었지만 다부진 턱에
어깨가 넓은 사내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린 이번 사태를 정말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유대 관계가 이렇게 째어지면 안됩니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핸든 장군."
"이번 사건으로 미국민에 대한 감정이 악화되어 있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미국은 한국 정부의 협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원국이 미국의
요인까지 공격해서 살해하고 인질로 잡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 01오. "
"잠간, 장군."
고성국이 그의 말을 막았다.
"한국 정부가그런 일을 한 건 아니오.난지금 옵서버 자격으로 온 겁니다. "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소. 설령 당신 정부가 계획하지 않
았더라도 김원국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을 거요. 왜냐하면 그
자는 당신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고 있으니까."
"김원국에게 즉각 인질들을 석방하고 자수하라고 설득해 주시오.
그 일을 맡을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
"한미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오. 미국은 북한
을 설득시키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을 당신들은 알아야 합니다. 북한
측의 비밀 각서는 그들이 우리를 회유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우리가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소."
"사흘 남았소, 장군."
고성국이 입을 열었다.
"설득과 회유로 벌써 한 달이 다 지났고 그것이 북한측의 계략이었소.
여론에 핍쓸린 당신네 정부는 우왕좌왕만 하다가 이 지경이 었고."
고성국이 이를 드러내며 소리없이 웃었다.
"빗나간 말 같지만 30년이 넘는 군생활에서 내가 요즘처럼 군인
으로서 긍지를 갖고 일하기는 처음이오."
"한일 연합군으로 북한을 당할 것 같소?"
"지금 흔들리고 있는 것은 북한과 당신네 미국이야. 이제 한국은
결사항전의 태세로 들어섰다구."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시오, 장군. 미군은 한국을 적대국으로 간주할 수 있어."
이미 그들의 말투는 냉랭해져 있어서 앞쪽에 앉은 보좌관과운전
사는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있다.
핸든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장군. 내 말은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니까 주의해 주기 바랍니다. 김원국을 만나면 그에게 즉각 인질을 풀
어 주도록 하시오. 그와 상관이 없다는 당신의 말을 믿을 사람은 없
소. 그렇게 해준다면 우리는 북한을 설득시키도록 해보73소."
"모두 한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일이오. 그것을 중개
할 나라는 미국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잘 알 거요."
"우리는 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요.
물론 인질이 석방되면 말이지만."
(3)
"그것 참, 마지막 사흘 전까지 희망을 갖게 하는구만, 당신들은."
고성국이 이제 입술 끝으로만 웃었다.
"그리고 그 버릇도 여전하고.평화협정인지 전쟁 협정인지를 말
하면서 그 당사자인 우리 정부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야."
"그 내용을 로젠스턴이 말해 줄 거요, 당신에게."
머리를 들려 창 밖을 바라보던 고성국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장군, 다른 시나리오를 말씀해 주시겠소?참고삼아 들읍시다. "
"전쟁이오."
"남북한은 이제 당연한 상황이고, 미국도 뛰어들겠소?"
"아닐텐데, 장군. 당신들은 그럴 능력이 없어.
이제는 시기를 놓쳤단 말이오. 당신이 잘 알텐데."
눈을 부릅뜬 핸든이 고성국을 노려보았다. 한동안 두 사람의 시선
1 마주쳤고 차가 털컹이며 흔들리는 순간 동시에 떨어졌다.
육중한 몸체의 선도 장갑차가 사령부의 철조 콘크리트 정문을 들
어서자 어둠 속에 도열해 서 있던 호위총국 병사들이 일제히 부동 자세를 취했다.
엔진 소리를 밤하늘에 울리면서 장갑차 대열이 빠르게 다가왔다.
등화관제를 철저히 하고 있어서 보이는 빛이란 선도 장갑차의 푸른색 야광 투시등뿐이었다.
이을설은 속도를 줄이는 장갑차 대열 쪽으로 두어 걸음 다가갔다.
선도 장갑차와 두 번째의 장값차가 그의 앞을 지났고 세 번째가 속력을 줄이더니 멈추어 섰다.
동체의 옆쪽 문이 열리더니 작달막한 체격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령 동지."
이을설이 굳어진 몸으로 그에게로 다가갔다.
"이렇게 왕림해 주석서 영광입니다, 수령 동지."
"반갑습니다, 시정관 동무."
에게 손을 내밀며 김정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김정일의 전선 시찰이었다.
10여 일 전부터 시작된 그의 전선 사령부 방문은 해주의 제4군단, 평산의 제2군단,
평강의 제5군단을 거쳐 오늘은 마지막으로 회양의 제1군단이 된 것이다.
이을설의 안내로 지하 벙커에 들어선 김정일은 입고 있던 방한 점퍼를 벗었다.
장갑차 안의 난방 장치가 잘 되어 있었는지 얼굴의 혈색이 좋다.
그는 탁자의 상좌에 앉았다.
"10일 새벽 3시요,사령관 동무. 이제 만 사흘이 남았습니다. "
김정일이 대뜸 말하자 탁자 주위의 의자에 따라 앉은 20여 명의
고급 장성들이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3시 정각에 포격과 공습이 시작되면서
전전선의 공격 명령이 떨어질 것이오,
역사에 남을 해방 전쟁입니다
동무들의 건투와 충성심을 기대합니다. "
"기필코 승리하여 수령 동지께 조국 통일의 영예를 바치겠습니다. "
이을설의 맹세에 이어 참모장 최성욱이 나섰다.
"일초의 차질도 없이 적을 궤멸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총사
령관 동지. 우리는 당과 수령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
흥분으로 떨리는 목소리였다.
김정일이 표정 없는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제 1군단은 4개의 사단과 8개의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2개 사단은 기갑사단이었고
3개 여단이 산악 기동 여단이다.
동부의 험준한 지형에 적합하도록 훈련하여 배치시켜 놓은 공격 부대인 것이다.
"적의 반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오.처음 30분이 적이나우리에게 똑같이 중요합니다. "
김정일이 벽에 붙여진 대형 작전 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백 번 작전 연습을 해놓아서 질리도록 보아 온 것이지만
모두들 그의 시선을 따라 지도를 올려다보았다.
기동 부대의 진격이 있기 전에 포격과 공습으로 적의 포대와 고정 진지,
공군 기지를 파괴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제 1군단 산히석 포병대는 스커드 미사일과 107, 122, 132, 200, 240밀리의
방사포 5백여 문이 배치되어 있었고 122밀리에서 180밀리 구경의
자주포와 견인포를 합해 각종 야포의 수는 2천 문이 넘는다.
중부와 서부 전선에 비해서는 약한 화력이었지만 이에 대응하는 남한측의 화력보다는 월등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제 공격이오. 동무들, 초전에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
김정일이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단장과 여단장, 정치참모가 모두 모인 1군단의 마지막 작전 회의가 될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면 이렇게 모두가 한자리에 모일 기회가 없다.
이을설은 굳은 얼굴로 김정일을 바라본 채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머리를 숙여 공감과 복종의 표시를 했다.
작전 회의가 끝나면 모두에게 김정일의 훈장 수여식이 있을 것이었다.
"몇 시간 후에 파리에서는 북미 정상 회담이 다시 열립니다.
검에 질진 남조선 놈들이 프랑스 경찰의 경비 상태가 소홀한 것을 이용해서
김사훈 동무를 살해하고는 두 명의 동무를 인질로 삼아 살아 남기를 구걸하려는 수작이오."
차감고 날카로운 김정일의 목소리가 벙커 안을 울렸다.
"미국이 서둘러 우리에게 회의 소집을 요구한 것은 고트 부통령을 구해내려는 이유뿐이오.
그들은 이미 우리의 해방 전쟁을 묵인하기로 결정을 내렸소.
남조선이 배은망덕한 망종들의 집단이라는 것을 이번에 다시 깨닫게 되었으니
우리의 계획에 걸릴 것이 없소."
"열흘이오. 동지들, 열흘 후에 우리 서울에서 이렇게 다시 모입시다. "
김정일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을설이 결의를 다지듯 깊게 머리를 숙였다가 들었다
"목숨을 바쳐 파업을 완수하TR습니다, 수령 동지."
"충성을 맹세합니다. "
최상욱이 외쳤고 나머지 장군들도 제각기 한 번씩 소리쳤다
냉랭한 벙커 안이 열기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전의에 두 눈을 번쩍이는 장군들의 분위기에
마침내 김정일도 얼굴의 근육을 불고 웃었다.
"이것, 참말로 좇같구만."
조명훈 대위가 망원경을 내려놓으며 욕질을 했다. 548 고지에 있을 때보다
그의 입은 거칠어져 있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다.
"저, 쌍놈의 새끼들이 누굴 약을 올리는 거야, 뭐야?"
"우리도 지난번에 사기 올린다고 노래자랑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옆에 서 있던 이한성 소위가 말하자 조명훈이 머리를 저었다.
"저렇게 마이크를 대고 떠들지는 않았어.그리고 12시가 넘어서
"저놈들이 쇼 하는 거야 어디 한두 번 입니까?"
그들은 상반신이 드러나는 간이 참호에 서서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어둠에 덮인 비무장 지대에는 오늘따라 바람 한점 불지 않았으므로
갈대가 바람결에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전방의 능선 위에서 울리는 노랫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 왔다.
"개새끼들, 술 마시는 것 아냐?"
조명훈이 다시 망원경을 눈에 대었다. 야간투시 장치가 붙은 적외선 망원경이었지만
능선 위의 인민군 막사와 초소에는 불까지 켜놓아서 병사들의 움직임이 육안으로도 드러나고 있다.
"저 새끼들, 아예 블테면 보라는 식이군 "
"어차피 저건 진지가 아니니까요.
전쟁이 나면 옮겨갈 곳이니까 드러나도 상관 없지요."
이쪽도 같은 입장이었으므로 조명훈은 망원경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양및에 늘어선 참호에서 부하들이 앞쪽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북한측의 의도적인 행위라는 것을 병사들 모두가 짐작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심리적인 영향은 받는다. 수동적인 입장과 능동적인 입장이 발전되어 전투의 수세와 공세가 되면 그 영향은 치명적인 것이다.
"제기랄, 우리도 쇼나 할까 부다. 서태지나 김건모 노래를 틀어 놓고,"
조명훈이 혼잣소리처럼 말하더니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전방의 노랫소리에 섞여 왁자한 웃음 소리도 들려 왔다.
"파리에서 곧 회담이 시작되겠군요, 중대장님."
이한성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김원국 씨가 무사히 빠져 나와야 할텐데요."
"고성국 중장이 갔으니까 무슨 수를 쓰겠지 "
"한반도 문제 회담에 우리 대표가 긴 것은 처음입니다.
인질을 잡고 있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가벼운 이한성의 말에 끌려 조명훈의 굳어진 얼굴이 펴졌다.
"시원해. 하긴 요즘 일어나는 일들이 시원하긴 해."
"어제 신문 보셨지요?
대구에서 통금에 걸린 미군 장교를 포함한 일곱 명을 구속시킨 것 말입니다. "
"공무원들이 솔선수범하고 있어.
어제 낮에는 우리 뒤쪽 선골 마을에 면 사무소 직원 두 명이 찾아왔어."
"선골 마을에서 말입니까? 모두 대피시켜서 사람이 없는데."
"그래, 그래서 19사단 애들이 붙잡았는데, 위장 간첩인 줄 알고."
"그래서요?"
"농기계 보관 상황을 확인하러 왔다는 거야.
대피한 마을 사람들이 제출한 명세서와 확인을 해야33다고."
"그쪽 김 대위가 병사들을 동원해 도와 됐다고 했어 눈물이 날려고 했다는 거야,
그 독사 같은 김 대위농도."
"씨발, 한판 붙어 봐야 할 것 아니냐? 저 좇같은 놈들한테 우리가 뭐가 꿀린다고."
"동무, 한잔해, "
오연식 중위가 술잔을 내밀며 소리쳤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연거푸 소주를 들이켜더니 취한 모양이었다.
"고맙습니다. "
술잔을 받은 김덕천 상사는 한모금에 술을 삼켰다.
막사 바깥 쪽에서 왁자한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노래는 그쳤지만 누군가가 여자 흥내를 내며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옆의 쓰재 막사에서는 병사들이 합창을 하고 있었다.
음정과 가사가 제각기여서 겨우 흥내만을 내고 있는 김정일 장군의 사랑이란 노래였다.
술잔을 받은 오연식이 병에 남은 소주를 잔에 부었다. 소대에 소주가 30병이나 배급된 것은
그의 10년 군생활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 부자의 생일 때에도 많아야 다섯 병이었던 것이다.
"사흘 남았어, 김 동무. 오늘은 당에서 긴장을 풀고 푹 쉬라고 지시가 내려온 거야.
그러니까 마음놓고 마셔."
손에 든 술병을 내밀며 오연식이 말했다.
"동무는 너무 긴장하고 있어 이젠 마음을 놓으라구,
김 동무. 보위부보다야 못하겠지만 이곳도 지낼 만해."
"불만 없습니다, 소대장 동지."
김덕천이 술병을 받아 들고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소대장의
막사에서 둘이 대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제 충성심을 보여 드릴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
"사흘 후라니까. 그리고 보름쯤 후에는 우리가 서울에서 이렇게
마주앉아 마시고 있을지도 모르지. 살아 남아 있다면 말이야."
"수령께서는 죽음을 각오하고 빠우면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렇지."
오연식이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짜짓 남조선 놈들이나 일본 놈들, 우리가 치면 단숨에 부춰진다. "
"일본군의 74식 전차는 우리 인민군의 122밀리 자주포탄에 맞아도
산산조각이 난다고 들었습니다.
일본 놈들은 전쟁을 모르는 허깨비들입니다. "
"맞아. 우리처럼 살아 오지 않았지, 그놈들은."
오연식이 붉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남조선군 뒤쪽에 일본군의 기갑 여단이 배치되어 온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작전 회의에서 중대장이 듣고 와 중대 간부들에게 알려 준 것이다.
일본군의 기감 여단은 전차가 2백 대 가깜게 되었고 기갑 보병과
기값 포병, 대전차 중대, 기라 정찰 중대에다 헬기로 이루어진
항공 중대까지 갖춘 독립 여단이었다.
인민군 제51사단의 참모 회의에서는 일본군의 74식 전차에 대해서
왜 오랫동안 대책을 상의했는데 그것은 몇십 년 간 연구해 온
남조선과 미군을 상대로 전쟁 연습을 하다가 낯선 놈이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얼른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대장 동지."
이제는 두 눈이 붉어진 김덕천이 오연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조선 놈들과 일본 놈을 까부수고 하루 빨리 서울에 공화국 깃발을 꽃아야 합니다. "
"위대하신 수령넘을 모시고 가야지, 서울로."
말을 멈춘 오연식이 딸꾹질을 했다.
밖에서는 다시 노랫소리가 들려 왔지만
이제는 무슨 노래인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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