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3. 취리히 탈출

오늘의 쉼터 2014. 12. 28. 19:34

3.  취리히 탈출 

 

 

 

(1)

 

    2월 1일이 되었다.

이제 북한의 침공 예정일이 열흘 앞으로 다가 온 것이다.

한국은 계엄령이 선포된 지 20일이 되어 국민들은 계엄하의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생필품의 사재기 현상이 정부가제일 우려했던 일 중의 하나였지만 처음 며칠 동안은

그런 현상이 계속 되다가 이제는 정상으로 되돌아갔다.

정부가 가구당 월별 구매량을 정해서 통제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을 몇 년분씩 쌓아 놓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국민은 정부의 통제에 따랐다.
   이제까지 제대로 주권 행사를 하지 못했던 정부는 극약에 극약 처방 식의 대처를 하는 중이었는데

국민들은 그런 정부를 믿고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국군은 20일 동안 맹렬한 내부 진통을 겪고는 빠르게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부조리와 비능률적인 사고와 행동, 국가와 국민에 대한 불성실한 태도가

곧바로 자신들의 목숨과 관계되는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기는 것이 사는 길이다.

그들의 적개심은 나날이 고취되었고 사기와 단결력도 높아지고 있었다.
   비루먹은 당나귀에게 옥토를 빼앗길 수는 없다. 우리는 이긴다.
30년의 군사 정권을 거친 국군의 사기와 국민들의 신망이 이때처럼 높아지고 있는 때는 없었다.

우리는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대명제 하에 단결한 남한 국민과 국군의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

이기심이고 그것이 민족을 떠난 국가 이기주의라고 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본의 공군 3개 비행대가 오산과 대구로 옮겨 왔고 해군이 동해와 서해에 나누어 배치된 것은

닷새 전이었다.

그리고 어제 자위대의 육군 2개 사단이 서부 전선에 집중 배치되자 상황은 더욱 가열되었다.

일본군 제98·라단과 99사단이 미군 제2사단과 5사단의 바로 뒤쪽에 포진해 버린 것이다.
   이제 북한군이 침공해 내려오면 미군은 앞뒤의 유탄에 당하게 되어 있었다.

한미 방위 조약은 거의 백지화되어 가는 상황이었고 일주일 전에 체결된 한일 방위 조약 아래

전시 작전이 진행중이었다.

한미 연합군 사령관인 월슨 대장이 이번에 한일 연합군 사령관이 된 강동진에게 강력히 항의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클린트 대통령은 창틀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자못 어두운 표정이었다.
   "『뉴욕 타임스』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고 있어. 이런 때에 그런 기사를 쓰다니 ."
낮은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요즘 들어 목청이 더욱 갈라져 있었다.
    "언제는 한반도의 일은 자기들끼리 해결하도록 놓아 두어야 한다 더니 지금은 날 공격한단 말이오.

그 망할 워렌비 자식."
    "각하,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워싱턴 포스트』는 저희들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습니까?일본이 끼여들었지만 세 나라 모두 치명상을 입게 될 겁니다.

우리에게 손해될 것은 없습니다. "
    그렇게 말한 것은 로젠스턴이다.

그는 이제 비f)참전론자의 우두머리였고 클린트는 그의 정책에 호응해 왔다.
   로젠스턴이 말을 이었다.
   "북한이 한일 연합군을 격파하건 한일 연합군이 북한군을 이기건 간에 결과는 같습니다.

한국과 일본은 승전 후에라도 복구에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리고 대단히 중요한 것은 그들은 결코 동맹국으로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천년 가깜게 이어져 내려오는 숙적입니다. "
   방안의 사람들이 잠자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CIA국장인 키드먼이 그의 옆에 앉아 있었고 끝자리에 서울에서 날아온

주한 미국 대사 마이클 그리피스의 꺼칠한 얼굴이 보였다.
   "우리는 그들을 적당히 견제시키고 조종하면 됩니다.

북한이 한반도를 통일해도 마찬가지입니다. "
   클린트가 키드먼을 바라보았다.
   "국장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동감입니다. "
   키드먼이 짧게 대답하자 그리피스가 머리를 들었다.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뿌리 깊은 것입니다.

각하, 지금도 일부 한국 국민은 일본군의 진주를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
   키드먼이 헛기침을 했다.
   "각하, 일본은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북쪽이나 남쪽 어느 쪽의 통일이건 간에 말입니다. "
   "하지만 아까 회의 때 합참의 사람들이 말했던 것처럼

전쟁 기세는 누구도 조정할 수 없다는 말에 나는 공감하고 있어요.

그들의 본의가 아니게 통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
   클린트가 창틀에서 몸을 떼어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일본은 호전적인 북한에 의해 한반도가 통일되는 것보다

남한이 통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각하."
   로젠스턴이 나섰다.

그는 몇번이나 비슷한 이야기를 되풀이하여 클린트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의 언론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는 내용이다.
   클린트가 머리를 돌려 그리피스를 바라보았다.
   "오늘 현재 시간까지 한국에 남아 있는 미국 시민은 몇 명입니까, 그리피스 대사?"
   "5만 5천 명 정도입니다. 한국 정부가 여자와 아이들, 노약자들은 보내 주고 있어서 ‥‥‥‥
   "빌어먹을 이영만 자식 . "
   쉰 소리가 그의 잇사이로 터져나왔다.

자신으로 하여금 미국 역사상 최악의 인기도를 기록하게 만든 장본인이

한국의 대통령 이영만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갤럽의 여론 조사는 그의 지지율을 5퍼센트 내외로 계산해서 발표했는데

이런 상태에서의 재선은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인 것이다
   로젠스턴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각하, 성명을 발표하실 시간입니다. "
   "그렇군."
   의자에서 일어선 클린트가 입맛을 다시면서 머리를 저었다.
   "한국놈 이영만이 내 성명 발표를 보고 있을 걸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나빠지는군, 그 망할 자식이 ."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 안 대통령은 소파에 앉아 정면에 놓인
대형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좌우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
들은 계엄 사령관이자 한일 연합군 사령관인 강동진과 안기부 부장
임병섭, 비서 실장 박종환이다.
   텔레비전에서 마악 클린트 대통령이 머리를 들어 똑바로 이영만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따라서 본인은 한국 정부가 세계 역사상유례 없는 대량의 미국
시민에 대한 구속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엄중히 촉구합니다. 한국
정부는 이에 따라 발생되는 문제에 대해서 책임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
    대통령이 머리를 돌려 임병섭을 바라보았다.
    "어떤 책임이란 말인가?"
    "그것이 여러가지로‥‥‥‥
    선뜻 말하기 어려운 물음이었는 데다가 대통령이 다시 텔레비전으로 머리를 돌렸으므로

임병섭도 입을 다물었다.
클린트가 말을 이었다.
   "미국은 아시아 지역의 안보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와 질서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결코 질서를 파괴하는 나라나 집단을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
   "저 친구 쾌 말랐군."
   이영만 대통령이 턱으로 클린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눈 밑의 주름이 더 뚜렷 해졌어."
   클린트가 머리를 들고 대통령을 쏘아보았다.
   "한국의 이영만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한미 방위 조약을 깨뜨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는 50년 동안 쌓아 왔던 양국의 우호와 협력 관계를 단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버리고

그들만의 생존을 목적으로 미국 시민 5만 5천 명을 인질로 잡고 있는 것입니다. "
   "50년이나 되었나?"
   대통령이 박종환에게 묻자 성실한 그는 눈썹을 모으며 잠시 햇수를 계산했다
   "51년입니다, 각하 그러니까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부터 ‥‥‥‥
   그러나 대통령은 이미 텔레비전의 클린트에게 시선을 돌린 후였다.

마칠 때가 되었는지 클린트는 원고를 덮고 상체를 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본인은 미국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를 주한 미군 사령관 월슨 대장에게 내렸습니다"
   대통령이 소파에서 상체를 펴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한국에 거주하는 모든 미국 시민은 내일까지 주한 미군 부대의
영내로 이동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그것을 막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미국 시민은 우리의 자랑스런 미군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
   이영만 대통령이 조그맣게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소파에 등을 묻었다
   클린트가 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려는 듯 두리번거리자 이영만 대통령이 손을 들었다.
   박종환이 텔레비전의 전원을 껐다.
   "이젠 인질 소리는 하지 못하겠구만, 저 녀석이."
   대통령이 꺼진 텔레비전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하자 임병섭이 그를 바라보았다.
   "미군까지 스스로 인질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각하 인질이 5만 5천에서 10만으로

금방 늘어났다고 생각하셔도 되겠습니다. "
   "그런가?"
   눈을 꿈벅이며 임병섭을 바라보던 대통령이 입을 벌리고 소리없이 웃었다

아마 20일 만에 처음 웃는 얼굴이 될 것이다.
   "월슨은 인질군 사령관이군, 앗하하!"
   대통령이 웃음 떤 얼굴로 강동진을 바라보았다.
   "인질들이 인질군 영내에 들어가도록 계엄군이 협조해 주게."
   "예, 각·하."
   "열흘밖에 남지 않았어, 강 장군."
   "예, 각·하."
   "나도 성명을 발표할까 하는데."
   박종환을 향해 대통령이 말했다.
   "아까 회의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났는데 한일 양국의 공군력에 미국의 공군력을 보태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어떨까? 성명을 발표해서 한국과 일본의 기지에 있는 미군기들을 빌려 달라고 한다면.

어차피 놀게 될 비행기일테니까 말이야.우리 조종사들 여유도 있을테고."
   강동진과 임병섭, 박종환 등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으나 아직 입을 여는 사람은 없다.
   "계산이 빠른 놈들이니까 승낙할 것 같은데.부춰지면 변상해 주기로 하고.

인명 피해도 없을테니까 말이야."
그러자 비서 실장답게 박종환이 대통령의 의중을 제일 먼저 읽고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입술로만 웃었다.
임병섭도 따라 웃었으나 강동진은 굳게 입을 다물고는 눈을 꿈벅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미 제2사단장 케리 니콜슨 소장은 막사로 들어서자 지휘봉을 내동댕이쳤다.
    "견딜 수가 없다. 이 빌어먹을 나라를 나는 저주한다. "
    창가에 서 있던 기갑 여단장 조 칼라한이 방바닥에 떨어진 지휘봉을 집어 들었다.

칼라한은 준장으로 니콜슨의 예하 여단장이었지만 그와는 친구 사이였다.
   "케리, 진정해. 어때? 위스키나 한잔 할까?"
   "닥쳐 . "
   눈을 부라린 니콜슨이 모자를 벗어 의자 위에 던지고는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굵은 주름살이 팬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안된 모양이군. 그봐,내가 뭐했어?월슨을 만나 봐야 소용없다고 했지 않아?"
   니콜슨의 방이었으나 서랍 위에 놓인 발렌타인 병을 집어 든 칼라 한이 잔에 술을 따랐다.
   "그저 술이나 퍼마시고 있자구. 군인은 모름지기 명령에 따라야 돼,"
   니콜슨은 벽을 노려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50대 후반으로 머리는 반백이 되었으나

건장한 체격의 네브라스카 출신이다.

그는 사령부로 월슨을 찾아가 본국으로의 전출이나 그것도 안되면 열흘 간의 휴가를 신청했다가

모두 거절당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칼라한이 물잔에 3분의 1쯤 담긴 붉은 위스키를 한모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니콜슨과 비슷한 나이의 와이오팅 출신으로 체구는 작다.

그들은 웨스트 포인트 동창이었다.
   "케리, 제임스가 명령을 기다리고 있어. 곧 그를 출발시켜야 돼."
   칼라한이 말하자 니콜슨이 머리를 돌려 =I를 바라보았다.
   제임스 핸든은 동두천에 본부를 둔 그의 예하 보병 연대장이다.
월슨은 제임스의 연대를 대구로 이동시켜 그곳의 공군 기지와 그곳으로 몰려을 예정인

만 명 가까운 미국 시민을 보호할 임무를 부여했던 것이다.
   전방에 배치되었던 미군은 기지를 버리고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제 제 위치를 지키고 있는 미군 부대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고정 포대나 진지, 그리고 막대한 양의 탄약과 병참, 시설물들은 재
빨리 빈자리를 메꾸며 들어오는 한국군과 일본군의 차지가 되었다.
   "가라고 해, 조. 네가 말해." 

 

 

(2)

 

 

 

  니콜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이 내 30년 군생활이 치욕으로 끝나는 순간이다. 조, 너도 잘
봐두어라."
   "빌어먹을. 케리, 너만 그러는 게 아냐."
   유리 술잔을 소리나게 탁자 위에 내려놓은 칼라한이 니콜슨을 쏘
아보았다.
   "빌어먹을 한국인들이 우리를 하찮게 보고 있다는 걸 모두 느끼고
있단 말이다. 너만 잘난 체하지 말어."
   "떠나려면 진작 떠났어야 했다고 이제야 떠들고들 있어 이 빌어
먹을 반도는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전술적 가치가 없었는데도 말이
야. "
   "우리는 인질이야, 조. 그 개같은 정치인들이 한국놈들의 술수에
말려들어 철수를 미졌던 바람에 이 꼴이 되었다 "
   "에치슨 같은 놈이 한 놈이라도 있었다면."
   칼라한이 다시 술잔을 쥐었다.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고 난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대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제임스 핸든 대령
에게 전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케리,이제 전방에 남아 있는 미군은 내 기갑 여단 하나밖에 없
어, 우리도 언제 이동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군인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니콜슨이 다시 버럭 언성을 높였다.
   "우리는 엄청난 화력을 가지고도 인질이 되어 버렸어.한국군 놈
들에게 말이야."
102 밤의 대통령 제3부 -H
   "인질이라니, 그것 기분 나쁜 표현이군, 궤리 ."
   "시민을 구하려고 한국군과 싸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북한과 싸
우지도 않는다. 우리의 위대하신 클린트 대통령 각하의 국민의 생명
을 아끼는 자애심 때문이다 "
   "진지를 버리고 도망병처럼 후방으로 빠져 나가 시민들과 함께 웅
크리고 있게 되었다. 남쪽과 북쪽 어느 쪽에서 총탄이 날아올지 몰라
떨면서 말이야."
   "춥냐?"
   장영환이 묻자 양안호가 머리를 끄덕였다.
   "되게 추운데요,들판 바람이 "
    비무장 지대의 철망이 바로 20미터 앞쪽에 쳐져 있었고 옆쪽으로
뻗쳐나온 철조망 가닥이 바람을 는 소리를 내었다. 그들은 땅을 1
미터쯤 파고 나서 그 위에 시멘트 기둥에 받쳐 지붕을 얹고 흙을 덮
은 임시 참호에 들어가 있었지만 바람은 사정없이 휘몰려 들어왔다.
시계를 확보하기 위해서 앞쪽을 모두 의어 놓았기 때문이다.
    "30분만 참아라. 교대가 을테니까."
    입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을 피하려고 장영환이 얼굴을 틀고는 웅
 얼거리듯 말했다. 오후 3시 반이었지만 하늘은 흐려서 저녁때가 다
 된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눈보라가 흩날릴 것 같은 날씨이다.
    "장 병장님, 우리는 이제 총알받이가 되었군요. 그렇지 않습니
까?"
    양만호가 턱을 가슴에 묻고는 소리치듯 말했다. 추위에 얼굴이 파
                                                                     취리히 탈출 103
랗게 굳어 있었다.
   "그런 셈이지. 아닌게아니라 벙커에 있을 때가 그립구나. 거긴 패
아늑한 못자리 였는데 ."
   "씨발, 억울해요, 이런 데서 죽는 것이 ."
   "할 수 없지."
   철조망의 건너편은 갈대숲이 우거진 넓은 평원이었는데 밋밋한 경
사면을 이루고 있어서 2킬로미터 전방의 분계선도 보였다. 그리고
그 지점 부근에서 다시 경사면이 되는 지형의 위쪽 부분이 북방 한계
선이다. 지금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맑은 날에는 북한 병사들과 그
초소도 육안으로 보였다.
   "결혼하셨다면서요?"
   양만호가 소리쳐 다시 물었는데 추위를 잊으려는 것 같았다. 다리
사이에 막사에서 가져온 가스 스토브가 켜져 있었지만 무릎 근처만
뜨뜻할 뿐이다.
   "했지. 아직 신혼이다, 나는."
   장영환이 K-2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두 팔을 몸통에 붙였다.
겨드랑이가 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누라보고 친정에 가 있으라고 했더니 서울 집에 그대로 남아
있어. 이틀 전에 편지가 왔었다. "
   "저놈들이 서울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기는? 뻔한 일이지. 눈이 뒤집힐 거다. 자동차, 빌딩, 그
리고 보도 듣도 못한 갖가지 물건들."
    마침내 얼굴에 차가운 물기가 부딪쳐 왔다. 그리고는 곧 희끗한
눈발이 시oHl 들어왔다
104 밤의 대통령 제I부 -ll
   "다시 공산주의 낙원을 건설하겠지, 북한놈들의 낙원 말이다. 남
한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겠지만."
   장영환이 방한모의 앞부분을 늘러 눈에 부딪치는 눈발을 차단시키
고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쉽게 안될 거야. 6 · 25 때하고는 다르니까."
   "미국이 나자빠져 버렸는데두요?"
   "일본이 왔잖아, 대신."
   "그놈들이 몇 놈이나 된다고‥‥‥‥
   "최신형 전차가 8백 대나 들어왔어. 전투기가 신형으로 3백 대가
넘는다. "
   "그리고 내가 군대 생활 할 때보다 군기가 더 잡혀 있어. 소대장,
중대장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단 말이다, 나쯤 되면."
"씨발, 이왕 이렇게 된 것, 죽기 아니면 살기다. 안 그러냐?"
   그들로부터 2백 미터쯤 떨어진 능선 밑의 막사 안.
   중대장 조명훈이 네 명의 소대장과 함께 긴장한 얼굴로 탁자 위의
지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한사람이 더 끼여 있었는데 대
대장인 오진갑 중령이다. 그는 작달막한 체구에 양쪽 볼이 늘어진 고
집스러운 인상의 사내였다.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놈들의 참호 뒤쪽에는 기값사단이 있어.
이쪽으로 밀고 내려을 T-62와 AFV(장갑전투차)는 모두 2백 대가
넘는다. "
                                               취리히 탈출 105
   오진값이 손끝으로 북방 한계선의 위쪽을 짚었다.
   "그 빌어먹을 T-62가 매달고 있는 것은 115밀리 활강포다. 하긴
활강포나 강선포나 그게 무슨 상관이냐."
   머리를 든 오진갑이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 후방에 155밀리 곡사포가 있어.대전차 미사일 부대도 있
고. 재들끼리 치고 받으라고 하면 된다. "
   중대장 조명훈이 입맛을 다시고는 고참중령 오진갑의 얼굴을 슬
쩍 바라보았으나 나서지는 않았다. 오진갑이 두 팔굽으로 탁자를 짚
었다.
   잠시 동안 막사 안의 장교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근무 교
대 시간인지 밖에서 병사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인민군 보병 제51사단 수색 중대, 제3소대의 막사 안.
    김덕천 상사는 소대장오연식 중위 앞에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근무중인 탓으로 밖에 나가 있어서 막사 안에는 그들
둘뿐이었다.
    오연식이 입을 열었다.
    "동무가 23호 초소를 맡아 주어야겠소. 소대 하사관 중에는 동무
가 제일 선임이니까 소대에서 제일 중요한 곳을 맡기는 거요."
    "알겠습니다, 소대장 동지. 맡지요."
    김덕천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맡겨진 임무는 목숨을 바쳐 완수합니다, 소대장 동지."
    "전출 온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상황이 급하니 어쨀 수 없
소. "
106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소대장 동지 "
오연식이 마른 얼굴을 들고 김덕천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보위부에 있을 때와는 조금 다를 거요."
   "기록을 보니 평강에서 검문소 조장을 지냈던데."
   "그렇습니다, 소대장 동지 하지만 그 전에는 서부 지역 군의 보병
사단에 있었습니다. "
   오연식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보위부 사령관 이동석이 신의주 폭동 사건으로 숙청을 당하고 김
정일의 심복인 안용준이 후임으로 부임해 왔다.
   안용준은 호위총국의 부국장이었던 사내였는데 부임해 오자마자
보위부의 대대적인 인사 조치를 단행했던 것이다. 이 태풍에 잘못 끼
여든 것이 김덕천이다. 그는 말단 하사관이었지만 이번에 서부 전선
으로 좌천당한 평강 지역 보위 대장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연식이 입을 열었다.
   "앞쪽에 남조선의 부대가 증강되어 왔소. 1개 중대 규모인데 경계
를 강화하고 있소. 감시를 늦추지 마시오."
    "알겠습니다, 소대장 동지."
    오연식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사를 나온 오연식은 길게 이어진 참호를 따라 걸어 중대장의 막
사로 들어섰다. 중대장 한만규 대위가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가 머리를 들었다.
    "그래, 그에게 임무를 맡겼소?"
                                               취리히 탈출 107
   "예, 중대장 동지. 맡겼습니다. "
   오연식이 그의 앞에 다가가 섰다.
   "순순히 일을 맡더군요.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
   "반발할 리는 없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아는 놈이니까."
   "제23호 초소는 21호 초소의 후방입니다. 중요한 지점도 아니니
까요."
   "중요한 지점을 맡길 수는 없지."
   그들은 마주보고는 서로의 공감을 읽었다.
   "부패한 놈들이야, 보위부 놈들은. 이번에 잘 숙청이 되었어."
   한만규가 검은 얼굴을 들고 말했다.
   "이젠 전군이 한마음 한덩어리가 되어 총공격을 해야 돼. 며칠 남
fl 꺾꺼."
   스위스, 바젤.
   취리히에서 국경 도시인 바젤까지는 열차로 한 시간 거리였고 낮
에는 매시간마다 두 편씩 열차가 운행되고 있다.
   바젤은 라인 강이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트는 곳에
세워진 스위스 최대의 하천 항구 도시이다. 시내를 라인 강이 관통하
고 있는 오래된 도시지만 금응과 화학 공업이 발달하여 취리히에 이
어 스위스 제2의 국제 도시이기도 했다.
   김원국 일행이 바젤의 스위스국철역에 내린 것은 오후 5시였다.
시내를 관통하는 라인 강은 곧 위쪽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선이
되었으므로 그쪽으로 여행하는 승객들이 무리를 지어 열차에서 내리
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여 플랫폼으로 나온 김원국이 뒤를 따르
108 밤의 대통령 제3부 -H
는 강대홍과 박은채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는 아무 일 없었지만 이곳을 빠져 나가는 것이 문제다.
정신들을 차려 ."
   "예, 형님 ."
   긴장한 얼굴로 대답한 강대흥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6시 열차인데 곧장 프랑스 국철역으로 갈까요?"
   김원국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그들
옆을 지나고 있었는데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들의 말소리는 발
음이 강해서 플랫폼을 가득 채웠다. 김원국이 머리를 」1덕이자 강대
홍이 앞장을 섰다.
   프랑스 국철역은 같은 건물에 있었으므로 그들은 중국 관광객들의
뒤를 따랐다. 모두 파카와 두툼한 바지를 입은 여행자의 차림이어서
3;가 나지는 않는다.
   "열차에서 신문을 보았는데 지한호 씨가 살해당했다는 기사가 났
습니다. "
   옆에서 걷던 박은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체는 시외의 길가에서 발견되었다고
". ..
   "경찰은 강도의 소행이라고 추정하고 있던데요."
   앞장서 가고 있는 강대홍의 뒷모습을 쫓던 김원국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마 놈들도 파리로 몰려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도착해 있
을지도 모르지 . "
   "북한 사람들 말씀이세요?"
                                                취리히 탈출 109
"=1래 ."
"그쪽 사람들은 떳떳하게 비행기를 탔겠지요. 우리처럼 이렇게는
   힐끗 김원국을 바라본 박은채가 말을 멈추었다. 중국인들이 무어
라고 떠들면서 옆쪽의 안내판 앞으로 몰려 갔으므로 그들도 발길을
돌렸다
   "불평하는 것이 아녜요. 그리고 불편하지도 않구요."
   박은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이 중국인들 사이에 끼여 서 있
었으므로 그녀의 목소리는 컸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좋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하는 시선으로 김원국이 바라보자 박
은채가 얼른 머리를 돌렸다. 중국인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방향이 다르다. 그들은 건물의 입구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강대홍은 앞쪽 기둥에 기대 서 있다가 머리를 들어 김원국을 바라
보았다. 김원국이 발을 떼었다.
   "가자."
   국제선의 출입구는 30미터쯤 앞이었다. 오가는 여행객들이 많았
고 대합실의 의자에는 사람들이 빼꼭하게 들어차 있어서 혼잡한 편
이다.
   출입구 옆쪽에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서 있었으므로 박은채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사람들 사이에 긴 강대홍이 경찰의 옆을 지
나 계단을 내려갔다.
    박은채는 김원국의 팔을 끼었다. 그들과 경찰들과의 거리가 10미
터쯤으로 가까워졌을 때 박은채는 숨을 들여 마시면서 김원국의 팔을
110 밤의 대통령 제I부 -H
움켜쥐었다. 뒤쪽에서 다가온 동양인 한 명이 김원국의 옆으로 바짝
붙어온 것이다.
   "그냥 걸으시지요. 전 안기부 요원입니다. "
   사내가 한국말로 말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매끄러운 서울 말
씨였다.
   "특수 경찰이 플랫폼에 깔려 있습니다. 정보가 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쪽은 위헛합니다, 김 선생님."
    경찰의 옆을 지나면서 사내가 재빨리 말하자 김원국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먼저 내려간 사람이 하나 있는데."
    "압니다. 제 동료가 뒤따라 갔으니 곧 데려을 겁니다. "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 왼쪽의 대합실로 들어섰다. 플랫폼이 유리
벽 너머로 바라보였고 미끈한 열차에는 승객들이 오르고 있다. 대합
실은 승객들로 혼잡했다.
    "내가 바젤로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유리벽 근처의 빈 의자를 찾아 앉은 김원국이 사내에게 물었다.
    30대의 사내는 얼굴이 붉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다소
 거친 인상이었고 두툼한 가죽 코트 차림이었다.
    "본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전 베를린
에서 근무하는 신을수입니다. "
    사내가 머리를 숙여 보였다.
    강대홍은 대합실의 구석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고 그의
 옆에 사내 한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부장께서 김 선생님이 바젤로 해서 프랑스로 입국하신다고 말씀
                                                취리히 탈출 1 1 1
해 주시더군요."
    김원국이 머리를 끄덕였다.
    떠나오기 전에 임병섭에게 미리 연락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호
를 부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오히려 이쪽보다 더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뜻밖인데. 괜찮겠소?"
    김원국이 묻자 앞에 서 있던 신을수가 눈을 꿈벅이며 그를 바라보
았다.
    "뭐가 말씀입니까?"
    "안기부 요원들은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고 들었는데."
    "쉽지 않았지요. 지금쯤 저희가 없어진 걸 알고 찾고들 있을 겁니
다. "
   "하지만 이젠 구애받을 것 없습니다. 쫓고 쫓기는 게임이라면 우
리도 CIA만큼은 합니다. "
   신을수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발차 20랄 전인 5시 40볼이었다.
   "국경을 통과하시면 윌루즈에서 내리십시오. 그곳에서 자동차로
가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저희 요원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건 알겠는데 우선 이곳이나 빠져 나가고 봐야겠지."
   "어떻게 되겠지요."
   김원국이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당신, 뱃심이 있어 보이는군."
   "칭찬이시라면 기쁩니다. "
   다시 시계를 내려다본 신을수가 김원국에게 머리를 숙였다.
112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어쨌든 잘 부탁합니다. 김 선생님, 파리의 일이 잘 되시기를."
    스토반과 물러 형사는 플랫폼의 기둥에 붙어 서서 앞을 지나는 여
행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옆쪽에도 두 명의 사복 형사가 서 있었
고 우측의 출입구 근처에도 다른 두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곳에 배치된 인원은 모두 열두 명이었으므로 나머지 여섯 명은
좌측의 출입구와 플랫폼의 중간 부근 등에서 동양인 암살자들을 찾
으려고 눈을 번쩍이고 있을 것이다.
   뮬러가 스토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반장님, 김원국이라는 코리언, 왜 알려진 거물이던데요. 저도
CIA가 보내 준 자료를 보았습니다. "
   "코리언 마피아의 대부야. 그놈이 이곳에 들어왔다니 나도 놀랐
어"
   스토반이 두툼한 콧날을 손끝으로 피됐다.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
하는 육중한 체격의 40대 사내였다.
   "취리히가 시끄러웠던 것이 당연해. 그놈 일당이 들어와 있었으니
말이야."
   "한국은 이제 완전히 미국과 적대 관계가 되어 있던데요. 내일 모
래 전쟁이 일어날 참인데 야단났습니다. "
   "일본이 있잖아? 한일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고. 오히려 잘 되었는
지도 모른다. "
   한몌의 사람들이 몰려 왔으므로 그들은 몸을 벽에 붙였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의 시선은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
었다. 김원국과 조웅남 등의 사진까지 입수하여 눈에 익혀 두고 나온
                                               취리히 탈출 113
참이어서 동양인들이 지나면 유심히 살펴보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하
다 싶으면 검문을 한다. 좌측의 동료들이 동양인 두 명을 세우고 신
분증을 검사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스토반의 귀에 꽃은 리시버에서 말소리가 들려 왔다.
   "반장님, 하센입니다. "
   플랫폼에 있는 부하였다
   "뭔가?"
   옷깃에 숨겨 놓은 마이크의 스위치를 켜고 스토반이 물었다.
   "한국인 한 명이 검문에 불응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인리히가 붙
잡고 있는데."
   스토반이 머리를 들어 옆쪽을 바라보았다. 오가는 사람들에 가려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끌고 사무실로 들어가."
   "예, 반장님, 아앗!"
   그의 외침 소리가 들렸고 거의 동시에 플랫폼을 진동하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 왔다.
   "하센, 어떻게 된 거야?"
   몸은 이미 그쪽으로 달려가면서 스토반이 소리쳐 물었다. 사람들
이 물고기 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뛰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아수라
장이었다.
   "반장님! 다른 한 놈이 총을‥‥‥‥
    그러자 다시 총성이 울렸다. 연속해서 쏘는 소리였다.
    스토반과 뮬러는 이제 권총을 빼어 들고는 사람들과 부딪치며 앞
쪽으로 달려갔다.
114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잡았습니다!"
   하센의 말소리가 울려 나왔고 마이크로 통화하지 않더라도 앞쪽에
서 총을 빼들고 있는 하센과 하인리히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주위에
서너 명의 요원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고 나머지 요원들도 달려오고
있다.
"움직이지 마라, 이 자식아!"
스위치를 켜놓은 채 하센이 소리를 질렀으므로 귀가 울린 스토반
 리시버를 귀에서 떼었다.

   사내 한 명이 플랫폼의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
나온 피에 전등불이 비쳐 검게 보였다 다른 한국인 한 명은 두 손을
치켜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잡았군, 김원국의 일당을."
   뮬러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말했다.
   "사람들을 물리쳐라. 주위를 정리해, 어서."
   스토반이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이 권총을 빼고 먼저 쏘았습니다. "
   하센이 턱으로 쓰러진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저와 하인리히가 같이 쏘았습니다. "
   동양인에게 다가간 스토반이 그를 바라보았다. 부하 두 명이 그에
게 달려들어 수갑을 채우고 몸수색을 하는 중이다.
   "너, 한국인인가?"
   사내가 머리를 」1덕였다.
   "그렇다. " 

 

 

 

(3)

 

 

 

  "이름은?"
    "김원국이다. "
       플랫폼을 나온 그들 앞에 동양인 한 명이 다가왔다. 긴 얼굴에 안
    경을 긴 허술한 차림의 사내였다.
       "전 안기부 요원 조기식이라고 합니다. 바젤에서 이야기를 들으셨
    을 줄 압니다만."
       "들었소."
       김원국이 대답하자 사내는 잠자코 앞장을 섰다.
       짙은 어둠이 깔린 역 았의 광장에는 오가는 행인들이
    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많았다. 저
    사내는 광장을 가로질러 차도에 세워 놓은 검정색 시트로앵으로
 다가갔다
    "타시죠. 제가 파리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운전석의 문을 열면서 그가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고맙소."
    "천만의 말씀입니다. "
    차 안은 조금 전까지 히터를 켜고 있었던 모양으로 따뜻했다. 사
내가 익숙한 솜씨로 차를 발진시키자 김원국이 물었다.
   "바젤 역의 이야기는 들었소?"
   "예, 조금 전에 들었습니다. "
   사내가 가볍게 대답했다.
   "신을수 선배는 병원으로 후송되던 중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동료
하나는 지금 경찰서에 있지만 곧 풀려 나겠지요."
    116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어떻게 된 일이오?"
    "저도 잘 모릅니다. "
    핸들을 쥔 사내가 머리를 저었다.
    "그저 저는 신 선배가 임무를 달성한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
    김원국의 옆자리에 앉은 박은채가 소리 죽여 숨을 내쉬었다. 차는
곧장 시가지를 빠져 나가 고속 도로로 접어들었다. 소음 방지 장치가
잘되어 있어서 차 안은 조용했다. 박은채는 온몸의 긴장이 풀려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플랫폼에서 총성이 울리고 그곳이 수라장이 되었을 때 그들은 열
차에 올랐다. 열차는 제시간에 출발을 했는데 박은채는 땅바닥에 엎
드려 있는 사내의 모습을 떠나가는 열차 안에서 볼 수 있었다. 얼굴
은 보이지 않았지만 검정색 가죽 코트는 낯익은 것이어서 그녀는 가
슴폭 철렁 내려앉았다. 김원국과 강대홍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
물고 앉아 있었으므로 물어 볼 수도 없었고 그럴 용기도 일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람, 우릴 보내려고 목숨을 버린 거요. 신세를 졌어."
   혼잣소리처럼 김원국이 말하자 조기식이 힐끗 백미러를 올려다보
았다.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선생님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
   "물론 그렇지."
   김원국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 어깨가 더 무거워진 것 같소."
   "서울은 지금 전쟁 준비가 끝나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
   조기식이 말머리를 돌렸다.
                                               취리히 탈출 117
   "지난 20일 동안 서울에 만들어진 지하 대피소가 천 군데가 넘는
다는데 시민 2백만 명이 대피할 수 있다는 겁니다. 좌우간 우리나라
건설업체는 빨리 만드는 것으로는 세계 최고지요."
   조기식이 백미러를 통해 뒤쪽을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전 국민이 똘똘 뭉친 역사가 없었습니다. 북한놈들이
우리에게 그런 기회를 준 것이지요."
   "국민이 정부를 믿고 있기 때문이야."
   김원국이 앞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관리들이 모범을 보여 주었어. 조 대사, 안 장관, 그리고 대통령
의 결단도 훌릉했고."
   "부패하고 비겁한 놈들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말로만 떠들던
놈들은 마지막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본색을 드러내게 되지요."
   김원국이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차 안은 한동안 희미한 엔
진 소리만 들릴 뿐 조용했다.
   이윽고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저쪽도 제시간에 도착해야 할텐데 ."
   혼잣소리처럼 말했으나 강대홍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조웅남의 일행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에 조웅남은 제네바의 시내를 달리는 12번 전차 안에 서
있었다. 제네바는 주위가 프랑스에 둘러싸여 있어서 스위스로서는
튀어나온 영토였으므로 12번 전차의 종점은 프랑스의 국경에 접해
있다.
   조웅남이 옆에 서 있는 김칠성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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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사 걱정할 것 없다마는 형님이 잘 빠져 나갔어야 허는디."
   전차는 휘황하게 불빛이 비치는 거리를 천천히 달려가고 있었다.
   취리히에서 열차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제네바는 국제 기관이 집
결해 있는 세계적인 도시이다. 5백 년의 역사를 가진 제네바는 봉건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피난처 역할도 했다가 19세기 후반부터는
차츰 영국 귀족들의 휴양지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이 관팡 스위스
의 시작이었고 제네바는 스위스의 알프스 등산이나 몽블랑 원정의
기점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물가가 비싸 관광객들이 다른 곳을 경
유하기도 한다.
   창 밖을 바라보던 김칠성이 입을 열었다.
   "아직 국경을 빠져 나가지도 않았어요.우리도 끝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
   전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10여 명밖에 되지 않았고 동양인들은
그들 세 사람뿐이었다.
    "도망 댕기는 것에는 이골이 난 몸이여, 내가. 안 그러냐?"
    조웅남이 창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주마산간으로 제네바를 보는구나. 하룻밤 자고 갔으은 좋렀는
디,"
    "주마산간이 무슨 말이오?"
    "무식헌 놈 같으니. 한문이여 달리는 말이 산을 간신히 본다는 말
 이다. 빨리 달링게로 볼 틈이 없는 거여."
    "처음 듣는 말인데. 주마간산 아니오?"
    "간신히 산을 본다는 뜻은 마찬가지여."
    전차가 정류장에서 멈추자 그들은 입을 닫았다
                                                취리히 탈출 119
   종점이 멀지 않았으므로 서너 명의 승객이 내렸고 차가운 밤바람
이 휘몰려 들어왔다. 전차가 차체를 진동시키면서 다시 출발하자 김
칠성은 차 안을 둘러보았다. 승객들은 그들을 포함하여 모두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출입문 앞의 의자에 앉아 있던 중년 사내가 김칠성과 시선이 마주
치자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자은 코트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50
대의 사내였다. 두 무릎 위에 서류 가방을 올려놓고 있었는데 사무직
월급쟁이 티가 몸에 배어 있었다.
   "제에기, 되게 샐렁허고만 "
   조웅남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머리를 든 김칠성이 주위를 둘러보았
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서너 명의 승객들과 시선이 일제히 부딪쳤
고 그 순간에 김칠성은 온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형님,"
   그가 조웅남에 게로 몸을 돌리는 순간이 었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
   권총을 겨눈 중년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는 이제
월급쟁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치켜뜬 눈과 긴장으로 굳은 얼굴 근육
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와 동시에 뒤쪽 좌석에서 두 명 , 옆과 앞
쪽에서 세 명의 사내가 권총을 빼어 들고 그들을 에워쌌다.
   "어허 "
   입을 따악 벌린 조웅남이 김칠성을 돌아보았다.
   "이것들이 어뜨케‥‥‥‥
   "너희들을 체포한다. 손들어, 어서 ."
   다시 사내의 고함 소리가 들려 왔고 김칠성과 고동규는 두 손을
120 밤의 대통령 제3부 -H
올렸다.
   사내들이 달려들어 그들의 팔을 뒤로 꺾어 내렸다.
   "너! 손 안 들어?"
   사내의 고함 소리가 다시 울리자 조웅남이 얼굴을 찌푸리며 웃었
다. 그는 두 손으로 파카의 가슴 양쪽 부분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
다. 옷깃을 쥐고 있었으므로 공격적인 자세는 아니었지만 손을 든 것
은 아니다. 영어를 쓰던 사내가 이제는 프랑스어로 소리쳤다
   "손을 들어올려 !"
   조웅남이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히었다.
   "형님,조심해요. 제발‥‥‥‥
   뒤로 가 있는 두 팔목에 수갑이 채워지던 중에 김칠성이 조웅남을
향해 소리쳤다. 고동규는 사내 두 명에게 양쪽 팔이 잡혀 있었다. 전
차는 덜거덕거리면서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조웅남은 유리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는데 좌석 안쪽에 들어가
있어서 사내가 뒤로 다가오지는 못할 위치였다. 머리를 끄덕인 그가
옷깃의 양쪽을 잡아 벌렸다. 뚜뚜뚝 하는 소리와 함께 파카의 단추가
일제히 열렸고 그 순간 전차 안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여기를 보아라, 개새끼들아."
   간단한 단어였으므로 조웅남의 정확한 영어가 전차 안을 울렸다.
그의 말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않았으나 전차 안의 모든 사람들은 동
작을 멈추었다.
   "내가 이 스위치를 누르면 이곳은 가루가 된다. 움직이지 마라."
   사내들은 그의 배와 가슴에 두 겹으로 둘려져 있는 다이너마이트
를 보았다. 검정색 테이프로 감겨진 다이너마이트에서 제각기 가는
                                               취리히 탈출 121
전선이 뻗어 나와 그가 손바닥으로 감바고 있는 가슴의 플라스틱 조
정기에 모여 있다.
    "총을 내려라. 바닥에 던져. 내가 스위치를 누르기 전에.r
   이를 드러내며 잇사이로 말을 뱉는그의 얼굴은 고릴라의
었다. 김칠성이 어깨를 흔들어 잡힌 괄을 불었다. 사내들의
떨어져 나간 것을 느낀 것이다.                                          형상이
                                                                       팔힘이
"어서 !"
조웅남이 다시 말하자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이봐, 진정해. 우리 타협을‥‥‥‥
"닥쳐! 이 개자식아!"
조웅남이 벼락같이 소리치자 사내가 입을 닫았다.
  거리면서 정류장을 그냥 지나치고 있다.                          전차는 덜거덕
     "수갑을 풀어! 어서! 그리고 너희들은 권총을 던져!』
     "풀어라!"
    중년 사내가 권총을 바닥으로 던지면서 말했다.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서 손을 떼자 그는 다시 사무원의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이 씨발놈들의 권총을 주워라."
    가슴을 펴고 선 조웅남이 말했는데 o7것은 한국말이다. 수갑이 풀
 린 김칠성과 고동규가 권총을 줍고 사내들을 전차의 뒤쪽으로 몰아
세웠다.
    "이것들이 도대치 나를 』뜨케 보고."
   조웅남이 어깨를 부풀리며 사내들을 흘겨보았다. 전차는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는데 종점이 가까워지는 모양이었다.
122 밤의 대통령 제3부 -ll
   고트 부통령은 40대 후반으로 건장한 체격에 용모도 단정해서 대
중의 인기가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성격도 무난해서 적이 없는 것이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다.
   개성이 부족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1는 클린트 대통령이 신임하는
몇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 이유는 그가 나서는 스타일이 아니기 때
문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공은 클린트에게 돌리고 과는 자신
이 먹는다. 러닝 메이트로 클린트와 함께 대선을 치른 그는 지금까지
철저히 그런 자세로 처신해 왔다.
   그러나 지금 템퍼러 호텔의 특실에 앉아 있는 고트의 표정은 어두
웠다. 여느 때처럼 자신만만하고 여유 있어 보이는 표정이 아니다.
소파에 등을 묻은 그는 한동안 앞에 앉아 빈 몰 공화당 원내 총무를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빈 몰이 탁자 위에 위스키 잔을 내려놓았다. 70대 노정 객으로 고
트의 아버지 벨이 되었고 그가정치에 발을 딛고 난후에 태어난고
트가 부통령이 되었다.
   "조지, 난 2차대전 때 중위로 참전했었소. 이곳 파리에서 재미도
좀 보았지. 젊었을 때니까."
   몰이 입을 열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이다.
   "그땐 걱정이 없었어.그저 오늘만 생각하면 되었으니까.젊었기
때문이야. 나날이 새로운 것이 닥쳐 왔으니까. 신이 났지."
   "빈, 키드먼 이야기로는 북한군은 전쟁 준비를 마쳤다고 합디다.
일주일 후면 침공이 시작돼요."
   "인구 밀도가 너무 높은 지역이야, 조지. 좁은 땅에 7천만이 넘는
인구가 있어."
                                              취리히 탈출 123
    "미국인이 10만이 넘어요, 빈."
    "하긴 일본인도 10만 가잠게 몰려가 있구만."
   몰이 잔에 남은 위스키를 입 안에 털어넣었다.
   "나도 한국이 그렇게 강수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소,조
fl . "
   "그렇다고 이제 와서 북한과 전쟁을 치를 수는 없어요, 몰."
   "남한과도 마찬가지지 우린 진퇴양난에 처했소."
   몰이 빙그레 웃자 고트가 입맛을 W다.
   "빈, 공화당 의원들 중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
   "곧 잠잠해질 거요, 조지. 전쟁이 시작되어 쌍방의 막대한 희생자
가 나면 언론이건 떠드는 농들이건 모두 입을 닫게 될 거요."
   몰이 자신있게 말하고는 잔에 위스키를 채웠다.
   "동북아에서 다소 우리의 위상이 실추된 것은 사실이지만 시대가
변한 것을 모두 곧 깨닫게 될 거요. 실리가 없는 곳에서 미국인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의 힘을 깔보는 나라는 세계 어
느 곳에도 없소.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어느 곳
에든 미군을 투입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테니까 말이오."
   "동감입니다. 몰, 대통령도 요즘 당신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고 있
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었어요 "
   고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민주당인 고트로서는 공화당 총무인 몰의 적극적인 지원이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더구나 지난 선거에서 공화당은 상하원의 다수당이
되어 있는 것이다.
   "빈, 어쨌든 나는 이렇게 무거운 일을 맡기는 처음이오. 나는 내일
124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의 일이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불안합니다. "
   고트의 말에 몰이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을 펴고 웃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서 나와 후세에 정리되는 것인데, 조지. 그
리고 우리는 결코 패할 리가 없소."
   전화기의 스위치를 끈 찰스 월튼이 몸을 돌려 마크 캔들을 바라보
았다.
   "놈들이 프랑스로 들어왔다. 제네바를 통해서 세 놈이 들어왔어."
   "세 놈입니까?"
   "그래, 다 잡았다가 한 놈이 온몸에 다이너마이트를 감고 달려드
는 통에 모두 놓친 모양이야."
   "그렇다면 파리로 오겠군요."
   "목적지는 여기야. 틀림없어."
   월튼이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9시 반이다.
   "북한 쪽 경호 팀에게 연락을 해. 김원국 일당을 조심하라고."
   "알겠습니다. 그런데 세 명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자리에서 일어선 캔들이 긴 팔로 책상을 짚으며 물었다.
   "세 명 중에 김원국은 없었다. 하지만 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보아
도 되겠지."
   머리를 」1덕인 캔들이 방을 나가자 월튼은 책상 위에 놓인 횐색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도청 방지 장치가 부착된 무선 전화기였는데
키드먼과 연락할 때만 사용하고 있다. 신호가 세 번쯤 울리고 나서
곧장 키드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취리히 탈출 125
    "국장님, 찰스 월튼입니다. "
    "음, 월튼, 무슨 일이야?"
    키드먼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는데 월튼에게는 놀람에 대비하
려는 방어적인 자세로 느껴졌다.
    "김원국이 일당이 제네바를 돌파하고 프랑스로 진입해 왔습니
다. "
    그러자 키드먼이 성대를 을리며 낮게 웃었다.
   "월튼, 전쟁 놀음에 자네도 물이 든 모양이군 몇 개 사단이 진군
해 가는 것처럼 들리는데."
   "국장님, 프랑스 보안국도 비상 대기에 들어갔습니다. 저도 북한
쪽 경호원들에게 그 정보를 주었습니다만. "
   "당연한 일이지, 월튼. 취리히에서처럼 당하면 안될테니까. 이번
은 대단히 중요한 회담이야. 마지막 회담이라구 "
   "알고 있습니다. 국장님."
   "요원들을 총동원해서 찾아. 찾아서 제거해."
   "알았습니다, 국장님 ."
   전화기를 내려놓은 월튼은 어깨의 힘을 풀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
었다.
   바깥의 사무실에서 직원들의 말소리와 전화벨 소리가 희미하게 울
려 왔다. 이미 파리의 CIA본부는 비상상황에 돌입해 있어서 요원
들은 철야 근무를 하는 중이다. 그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회담장의
경호였고 취리히에서와 같은 돌발 사고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파리의 한국 대사관은 빈틈없이 감시되고 있을 뿐만 아니
라 직원들에게도 요원이 따라붙었다. 한국에서 그들이 미국 시민들
126 밤의 대통령 제3부 -fl
을 에워싸고 있는 것과는 반대의 현상이다 더욱이 프랑스의 보안국
과 공동 작전을 펼 수가 있었고 북한측의 지원을 받을 수도 있다.
월튼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담장을
러볼 생각이 난 것이다.

   "그랑팔레 호텔은 센 강가에 세워진 지 일년밖에 안되는 일급 호
텔이지요. 본래 미국측은 미국 대사관에서 회담을 하자고 했는데 북
한측의 주장에 밀린 겁니다. "
   조기식이 앞에 앉은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개선문을 중심
으로 부챗살처럼 갈라진 도로 가의 조그만 호텔 안이다. 개선문에서
3백 미터쯤의 거리였는데도 창가에 서면 불빛에 비친 사각의 기둥이
훤히 바라보였다.
   "북한 대표들의 숙소는 어디야?"
   김원국이 묻자 조기식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랑팔레 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상마리노호텔입니다 이곳에서
는 차로 케분쯤 걸립니다. "
   "회담장에 기자들이 몰려들겠군 "
   "이번은 스위스 때하고는 다르니까요. 회담장도 공개해 놓고 시간
도 정해져 있습니다. 내일 아침 10시에 시작합니다. "
   김원국이 머리를 돌려 옆쪽에 앉아 있는 박은채를 바라보았다.
   "12시가 다 되어 가는데 웅남이가 늦는군 "
   박은채는 눈만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도착한 지 두
시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 저도 처음 와 보는 곳인데 괜찮겠습니까?"
                                                    취리히 탈출 127
    조기식이 물었다.
    "일본 정보국이 소개해 준 곳이야. 일단은 믿을 수밖에."
    "하긴 저희 대사관 직원들은 집에 있는 전화까지 도청당하고 있습
니다. "
   조기식이 안경을 벗더니 손수건으로 알을 닦았다. 안경을 끼지 않
은 얼굴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이제 대사관으로 돌아갈 수 없는 입장이 되었는데 만 하루
동안 행적을 감춘 것을 미국측이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를 잡아다 심문할 수는 없다손치더라도 집중적으로 감시할 것이
틀림없었다.
   "피곤한 모양인데 옆방으로 가서 쉬어."
    김원국의 말에 조기식이 놀란 듯 눈을 치켜뜨고는 머리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잣 몇 시간 운전했다고‥‥‥ 피곤하지 않습니다. "
   그러자 박은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커피 끓여 드릴까-5.? 커피 포트와 커피가 있는데요."
   "생각 없어. 그리고 거기도 방에 돌아가 쉬도록 해. 내일 일도 있
   .니 까. "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밖에 나가 있던 강대홍
의 얼굴이 먼저 보였고 그의 뒤쪽으로조웅남의 커다란 몸이 들어서
고 있다.
   "형님, 빨리 오셨네요 잉?"
   그의 뒤로 김칠성과 고동규가 따라 들어섰다. 박은채가 얼굴에 환
한 웃음을 띠었고 김원국도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128 밤의 대통령 제3부 -H
    회담장으로 정해진 곳은 호텔 8층의 라운지다. 본래는 간단한 음
식과 술을 즐기는 장소였는데 지금은 깨끗이 치워진 넓은 방이 되어
있을 것이다
    방의 복판에 장방형의 테이블이 놓여 있고 벽 쪽에는 소파와 보조
의자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안쪽의 칵테일 바는 그대로 있었
으므로 지치거나 목이 마른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음료를 골라 마실
수도 있을 것이다.
   회담장을 둘러본 홍진무 상장은 머리를 끄덕였다.
   "좋군. 도청 장치 확인은 했지?"
   "예, 부국장 동지. 미국측과 같이 조금 전에 확인을 했습니다. "
   홍진무가 힐끗 벽에 기대 서 있는 미국인들을 바라보았다. 무표정
한 얼굴의 흑인과 백인이다 그들은 이쪽과 시선이 마주치자 아는 척
도 하지 않았다. CIA 요원들이었고 이쪽의 경호원들은 창가에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회담장을 둘러본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안에도 경호원을 배치시켜야겠어."
   "그렇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부국장 동지, "
   로비에는 미국과 북한 양측의 경호원들로 가득 차 있었고 투숙객
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북한측의 요청으로 투숙객들을 모두 내보낸
것인데 그들의 호텔 알선과 배상금은 모두 미국 대사관에서 지급되
었다
   "남조선 깡패 새끼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던데,끈질긴 놈들이
야. "
   홍진무가 부드러운 얼굴로 말했다.
                                               취리히 탈출 129
   그는 평양에서 어제 도착한 회담의 진행 책임자였다. 실제 회담은
김사훈과 최대민의 몫이었지만 그외의 모든 것은 흥진무의 책임인
것이다.
   그는 이번에 인민군 총정치국 부 국장으로 승진이 된, 김정일의 만
경대 혁명 학원 동창생이다. 인민군의 실세라고 볼 수 있는그가 파
리로 날아온 것은 그만큼 회담이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취리히에서의 실패 때문이다.
   최성산은 며칠 사이에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김정철이 폭사
한 것은 3억 달러의 행방이 묘연해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이다.
   그들은 호텔의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랐다. 회담
장은 이제 철저히 점검되고 봉쇄되어 있었다. 그들이 탄 승용차는 정
원에 서 있는 미국측의 경호 요원들을 스치고 지났다.
   "동무, 이틀이야. 이틀 동안 회담이 방해받아서는 안돼."
   차가 차도로 나서자 홍진무가 입을 열었다.
   "동무에겐 이제까지의 실패를 만회할 기회야 이틀 동안이 무사히
지난다면 그것을 동무의 업적으로 만들어 주겠네. "
   "감사합니다, 부국장 동지 .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굳어진 얼굴로 최성산이 대답하자 홍진무가 얼굴에 웃음을 띠었
다. 차갑게 느껴지던 금테 안경 속의 눈이 반쯤 감기면서 부드러운
학자품의 표정이 되었다.
   "지금 수령 동지에게는 한 사람이라도 더 능력 있는 동무가 필요
하네 ."
   "잘 알고 있습니다, 부국장 동지."
130 밤의 대통령 제3부 -ll
    "미국은 지금 진퇴양난에 빠져 있어. 남조선이 재빠르게 일본과
손을 잡는 바람에 상황도 크게 달라졌고."
    최성산은 잠자코 머리를 끄덕였다. 정치적인 발언은 삼가는 게 보
신에 제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진무가 말을 이었다.
   "남조선의 이영만이 미국인을 인질로 잡을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 이제 남조선은 미국의 적이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국장 동지."
   "하지만 남조선과 총부리를 마주대고 전쟁을 할 수는 없는 입장이
지 그렇다고 뒤늦게 한미 방위 조약을 지킨다고 할 수도 없고."
   "계산만 따지다가 그렇게 되었지요. 누굴 원망할 처지도 못됩니
다, 부국장 동지 ."
   "어쨌든 일주일 후에는 우리 공화국의 전사들이 남조선 해방 작전
을 시작한다. 일본군이 들어와 있지만 전쟁은 단기 전으로 끝이 날 것
01다. "
   승용차는 차량의 행렬이 뜸한 밤거리를 달려 그들의 숙소인 상마
리노 호텔 입구로 들어섰다. 눈발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어서 운전
사는 와이퍼를 작동시켰다.
   "그 여자, 오늘 오후에 제 애비의 시체를 확인하러 왔다던데, 지금
어디에 있지?"
   문득 머리를 돌린 홍진무가 최성산을 바라보았다.
   "집에 있습니다, 부국장 동지. 오후에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잠시 풀
려 나온 모양입니다. "
   "장례식을 치르라고 경찰이 놓아 준 모양이군, "
                                               취리히 탈출 131
   "그렇습니다, 부국장 동지. "
   "그 여자가 놈들의 계획을 알텐데 .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부국장 동지 ."
   "우리 쪽에서 제 애비를 그렇게 했다고 믿고 있겠지?"
   "예, 부국장 동지."
   그들의 시선이 잠시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승용차는 상마리노 호
텔의 정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집안은 친지들이 모여 있어서 어수선했다. 자정이 지난 시간이었
으나 고인이 된 지한호의 친구들은 밤샘을 할 작정으로 모여앉아 술
을 마셨고 일부는 한국식의 화투를 한다. 친척은 없었지만 지한호는
교민 사회에서 왜 발이 넓은 사람이었다. 집에 모인 교민들은 30여
명이 되었고 그들은 지희은을 대신해서 서로 역할을 분담하여 장례
식 준비를 해주고 있다.
    지희은이 주방의 일을 거들고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모여앉아
있던 아버지의 친구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희은이 그중의 한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대머리에 비대한 체격
의 배영섭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아저씨, 말씀 드릴 것이 있는데요."
   "응,그래."
   그들은 창가의 빈자리로 옮겨가 섰다.
   배영섭은 취리히에서 독일산 벤츠의 대리점을 크게 운영하고 있는
성공한 사업가 중의 하나였다. 지한호와는 동년배로 30년 가깝게 친
구로 지낸 사이여서 이번 일에 충격이 컸는지 입에서는 술 냄새가 풍
132 밤의 대통령 제3부 -ll
겨 나왔고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내일 장례식 때 대사가 참석한다고 그러더라.그리고 장례식이
끝나면 우리는 구국 결의 대회를 갖기로 했다. "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전쟁에 참가할 수는 없지만 교민들은 조국 수호단을 결성
하기로 했어."
   지희은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배영섭이 그녀를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남의 일처럼 생각해 왔는데 네 아버지가 북한놈들에게 당
하고 나니까 나도 정신이 들었다. "
   "모두 저 때문이에요. 제가 한국측의 일을 거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자책할 일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
   "지독한 놈들이다 대사관에서 그 김가놈 가족을 죽인 것이 북한
놈들이라고 했을 때 긴가민가 했는데 지금은 믿어진다. "
   "아저씨,저는 한국의 테러단과 함께 있었어요, 이번에 사건들을
일으킨."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교민들 대부분도 알고 있을 것이야."
   "아저씨한테 부탁이 있어요."
   지희은이 바착 그에게로 다가가 섰다.
   "전 내일 장례식이 끝나면 경찰에 다시 불려 가게 되어 있어요."
   "그래, 그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가 큼직한 변
호사를 붙여 줄테니까. 너도 알 거야. 그 헤글러라는 변호사, 네 아버
지하고도 친했던."
                                                취리히 탈출 133
   "저는 경찰에 불려 다닐 시간이 없어요."
   "시간이 없다니?"
   "제가 없더라도 내일 아저씨가 아버지 장례식을 맡아 주셨으면 해
서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네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
   배영섭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내일이 장례식인데, 무슨 일이 있다고‥‥‥‥
   "경찰뿐만이 아녜요. 북한 쪽 사람들도 저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제가 한국의 테러단 내막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겠다만."
   "그렇다고 그들이 무서워서 도망치려는 것이 아녜요, 아저씨, "
   "저도 일하려고 해요, 아저씨가 조국 수호단을 만드시는 것처럼 ."
   배영섭이 미간을 좁히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너는‥‥‥‥
   "그 사람들을 따라가겠어요, 아저씨, "
   "그 사람들이라니, 그 테러단을?"
   지희은이 머리를 11덕이자 배영섭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제각기 화투와 술에 열중해 있어서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은
없다.
   "약속이 되어 있는 거냐?"
   지희은이 머리를 저었다
   "아녜요, 아저씨. 하지만 전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는 알아요."
134 밤의 대통령 제3부 -B
   "저는 그들을 배신했어요. 저 때문에 그들 중 한 사람이 죽었고
아버지를 살리려고 한 것인데. "
   가늘게 숨을 내쉰 지희은이 더욱 커진 눈을 들었다.
   "그런데도 저를 살려 주었어요. 그들이요. 북한놈들은 아버지를
살해했구요. 저는 빛을 갚아야 해요. 살려 준 사람과 살해한 사람들
양쪽에요."
   "말릴 수가 없구나."
   배영섭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다.
   "상황이 어렵구나. 네 말대로 하는 것이 낫겠다. 이곳은 나에게 맡
기고. 네 아버지도 이해하실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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