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2. 함정에 빠지다

오늘의 쉼터 2014. 12. 28. 19:18

2. 함정에 빠지다

 

 

 

(1)

  

 취리히에서 리마트 강을 따라 20킬로미터쯤 북상하면 바델이라는
오래된 도시가 있다. 바덴이란 독일어로 온천이라는 말인데 이 도시
에는 온천욕을 즐기려는 관광객이 많다. 김정철과 그의 보좌관이 쿠
어베더 근처의 2층 양옥집 앞에 차를 대고 내렸을 때는 저녁 7시 10
분전이었다.
   짙은 어둠에 덮인 거리를 쌀쌀한 바람이 훌고 지나갔다. 강이 바
로 옆쪽에 있어서인지 물 냄새가 풍겼다.
   "이 집인가?"
   바람에 코트 자락을 날리면서 김정철이 벽돌로 지은 양옥집을 을
려다보았다. 창문에는 모두 불이 켜져 있어서 주변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다. 현관의 주춧돌에는 17세기에 지었다는 연도 표시가 새겨
져 있다.
   "예, 부대사 동지. 이 집이 맞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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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좌관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차문을 여닫는 소리가 두어 번
들리더니 그들의 주위에 서너 명의 사내가 모여 섰다.
   그들을 따라온 경호원들이었다. '군터 호텔'은 리마트 강가에 서
있는 우중충한 건물 중의 하나였는데 장기 요양을 하려고 바델에 온
사람들을 위한 민박 형태의 호텔이었다. 가로등만 희미한 빛을 내고
있는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주변의 건물들도 비슷한 형태의 호텔인
모양이었다. 얼어 있는 거리에는 드문드문 지나는 차량들이 소음을
낼 뿐 인기척도 별로 없었다.
   그들은 한무리가 되어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대사님."
   로비는 열 평쯤 되었는데 안쪽에서 커다랗게 소리치며 다가오는
사내가 있다. 금테 안경이 불빛에 번쩍이는 루벤돌프였다 그는 얼굴
에 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찾기 어렵지는 않았지요? 이곳이 쿠어베더 끝에 있어서 말입니
다. "
   "어렵진 않았습니다. "
   주위을 둘러보며 김정철이 대답했다. 루벤돌프 뒤에 서 있는 금발
의 사내가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로비는 텅
비어 있었고 옆쪽의 안내 데스크에도 종업원은 없다.
   "우리 은행에서 압류한 집입니다. "
   루벤돌프의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가 안내한 곳은 옆쪽의 식당이다. 식당 겸 휴게실로 사용했던
곳인지 식탁이 놓여진 방의 구석에는 당구대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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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들은 식탁에 마주앉았다. 식당문 양쪽에 김정철의 부하 두 명이
 섰고 현관의 로비에도 부하들이 남겨져 있다. 루벤돌프의 부하가 식
 당 안쪽의 주방으로 들어가자 문 옆에 서 있던 김정철의 부하 한 명
이 뒤를 따른다.
    "힘들었습니다, 대사님."
    루벤돌프가 입을 열었다. 그는 김정철과 보좌관을 번갈아 바라보
며 지친 표정으로 머리를 저었다.
    "당신들의 요구는 무리였습니다. 내 목이 위험했단 말이오."
    "3억 달러는 준비되었지요?"
    김정철이 입을 열었다. 냉랭한 목소리였고 얼굴의 표정도 차갑다.
    "오늘 내가 사인만 하면 내일중으로 돈이 홍콩으로 송금될 줄로
믿습니다,루벤돌프 씨 "
   입맛을 다신 루벤돌프가 옆에 놓인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어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서너 장의 타이핑된 서류가 탁자 위에 가지런히
펼쳐졌다.
   "이걸 읽어 보시오. 송금 청구 서류이니까 눈에 익으실테지요. 사
인은 여기와 여기."
   그는 살찐 손가락으로 서류 위의 두 곳을 짚었다.
   루벤돌프의 부하가 쟁반에 커피잔을 받쳐 들고 다가왔다.
   "주방이 비어서 준비한 것은 커피밖에 없습니다. "
   루벤돌프가 미안한 듯 말했으나 김정철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이
며 서류를 읽는다. 보좌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밖에서 보기보다 쾌 큰데, 방이 몇 갭니까?"
   "1,2충 합해서 열두 개지요. =I중 세 개는 1인용이지만 아흡 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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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용 합숙실입니다. "
   커피잔을 든 루덴돌프가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울
긋불긋한 색으로 칠해졌을 법한 천장의 그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
을 정도로 바래고 지워져 있었다.
   "지은 지 3백 년 가깝게 되어서 집을 헐어 현대식 호텔로지을생
각입니다. 집 주인 되는 사람은 백만 프랑에 이곳을 압류당했는데 실
제 가치는 그 열 배가 넘지요."
   김정철이 서류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좋습니다, 루벤돌프 씨. 이제 내가 사인하면 내일 돈이 홍콩으로
송금되 Tf지요?"
"홍콩에서 돈을 인출하려면 2,3일은 기다려야 할 겁니다. 물론 나
내일 보내겠지만."
"그거야 홍콩의 우리 동지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이곳에서는 내일

보내기만 하면 돼요."
   김정철은 루벤돌프가 짚어 준 부분에 사인을 했다. 표정이 아까보
다는 한결 밝아져 있었다.
   "내가 요즘 정부 기관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 거요,
대사님은."
   서류를 챙겨 봉투에 넣으면서 루벤돌프가 말했다.
   "지난번 한국 대사가 뿌린 주르메에게서 나온 명단 때문이오. 그
래서 내가 취리히에서 왜 떨어진 이곳에서 보자고 한 것인데 꼬리를
잡히지 않았나 모르겠군."
   "미행은 없었소.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
   "어련히 알아서 하셨겠지만 신경이 쓰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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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우린 이만 가보겠소."
    김정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틀림없이 송금해 주시오."
    "염려하지 마시오, 대사님."
    따라 일어선 루벤돌프가 손으로 서류를 가볍게 두드렸다.
    "서류가 다 꾸며 졌으니 이제 끝난 겁니다. "
   "이곳에 계실 겁니까? 언제 취리히에 돌아가실 거요?"
    김정철이 묻자 루벤돌프가 다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두 시간쯤 후에 출발할 예정이오. 이곳에 일이 있어서요."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
   "현관까지 배웅해 드리지요."
   들어설 때와는 달리 홀가분한 표정들이 되어서 그들은 식당을 나
왔다.
    "손을 들어라."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I들은 일제히 발을 멈추었다. 아니 발을
멈추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김정철의 부하였다. 그는 동작이
빠른 사내였는데 손을 들라는 한국말이 끝나자마자 허리춤의 권총을
빼어 들고는 옆쪽으로 뛰었다. 그가 두 발짝을 뛰었을 때 위쪽에서
무딘 소음기를 통한 발사음이 들렸다
   "퍽!퍽!"
   사내가 춤을 추듯이 두 손을 휘저으며 다시 두 걸음을 딛고는 로
비의 바닥에 엎어졌다.
   "두 손을 들고 움직이지 마, 이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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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국말이다.
   그러자 김정철의 눈에 2층의 계단으로 내려오는 두 명의 사내가
보였다. 그리고 옆쪽의 안내 데스크 뒤에서도 불쑥 솟아오른 또 한
명의 사내가 있다. 모두 셋이다.
   그들은 총구를 이쪽으로 겨눈 채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
었는데 모두 동양인이었다. 한국인이다.
   "손을 번쩍 들어!"
   2층에서 내려온 사내 한 명이 다시 고함을 치자 이제 모두들 손을
치켜들었다. 김정철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네가 김 정철이냐?"
    체구가 당당한 사내가 김정철을 쏘아보며 물었다. 30대 후반의 눈
매가 매서운 사내였다.
    "그렇다. "
    김정철이 잇사이로 말했다.
    "남조선의 미제 똘마니 들이로군 네놈들이 기를 써봐야 헛일이
다. "
    "이놈이 죽을 지경에 처했어도 입은 살았구만."
    성큼성큼 다가온 사내가 주먹을 휘둘러 김정철의 볼을 쳤다. 해머
로 치는 것 같은 충격에 입안이 터졌는지 김정철의 입가로 핏물이 흘
러내렸다.
    "너 ."
    사내는 김 칠성이었다. 총구로 루벤돌프를 가리킨 김칠성이 때려붙
이듯이 말했다.
    "네가 김정철이하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 대충 알고 있다. 네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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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있는 봉투를 이리 내라."
   "이건 ‥‥‥‥
   루벤돌프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노란색 봉투는 손에
쥔 채 팔을 치켜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 내, 이 새끼야."
   김칠성이 다시 고함을 치자 루벤돌프가 한걸음 다가와 봉투를 내
밀었다. 김칠성이 그에게서 봉투를 잡아채었을 때 현관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형님 !"
   오종표가 구르듯 들어왔는데 배를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놈들이 옵니다, 사방에서. 저는‥‥‥‥
   털썩 한쪽 무릎을 꿇은 오종표는 허물어지듯 로비의 바닥에 주저
앉았다.
   "저는 한방 맞았습니다. 어서‥‥‥‥
   그의 입에서 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강대홍이 달려와 그를 부
둥켜안았고 안내 데스크 앞에 서 있던 고동규가 현관 쪽으로 달려갔
다. 김정철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졌다. 그 순간 김칠성의 총에서 다
시 횐 섬광이 번쩍였다.
   "퍽!퍽!"
   김정철 옆에 서 있던 보좌관이 가슴을움켜쥐고는비명 한마디 지
르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한두 놈이 아니야. 대여섯, 아니 그보다 많아."
   현관 옆의 흐린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본 고동규가 다급하게 소리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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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빨리, 뒤쪽으로."
   눈을 치켜뜬 김칠성이 김정철을 쏘아보았다.
   "어떠냐?죽여 주랴? 널 죽이고 떠날 시간은 있다. "
   이를 악물었으나 김정철은 얼굴을 굳힌 채 그의 시선을 받았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는다. 김칠성의 시선이 루벤돌프를 쏘아보다
가 비껴났다.
   "종표야!"
   오종표를 부둥켜안은 강대홍이 소리쳤다.
   "야! 떠나! 어서!"
   고동규가 강대홍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강으로 뛰어라! 어서!"
   뒤창을 열면 어둠에 묻힌 강이다.
   김칠성은 총구를 김정철의 가슴에 겨누었다가 들어올리고는 발을
들어 그의 사타구니를 찼다. 그리고 다른 사내의 옆구리를 권총을 쥔
손으로 치고는 빙글 몸을 돌려 루벤돌프의 경호원의 턱을 차올렸다.
사내 세 명이 순식간에 로비 바닥에 쓰러졌다.
   고동규가 강대홍을 끌고 달려왔다.
   "자, 어서."
   루벤돌프를 노려보던 김칠성이 선뜻 다가가 주먹으로 턱을 쳤고,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넘어졌다. 그들은 옆쪽의 식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고동규가 의자를 들어 유리창을 향해 던지자 오래된 유리창문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창틀째 부숴졌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아래쪽의 어두운 강물로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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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놈들이 함정을 파고 있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
    김칠성이 방안의 침묵을 깨었다.
    이른 아침이어서 창 밖의 어둠은 걷혀 있었는데도 아무도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을 끄려 하지 않았다.
    방안은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에 덮여 있었다.
    "너희들 셋이 살아 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오종표의 시체 확인을 하라고 한국 대사관으로 연락이 온 모양이
  t. "
    "개같은 농들이여, 니놈들은."
    조웅남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젤로 어린 놈을 쥑이고 잘도 살어서 돌아왔구나, 이 씨발놈들
아. "
    김칠성과 고동규는 잠자코 그의 시선을 피해 머리들을 떨구었다.
    김원국이 말을 이었다.
    "대사관은 종표를 받아들이지 않을 작정이다. "
    "그기 무신 말이오, 형님?"
    조웅남이 턱을 치켜들었다
    "안 받아들이다니 ? 왜요?"
    "한국인이 아니라고 할 거란 말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약속된 거
야. "
    "지기미 씨발."
    "닥쳐 , "
    김원국이 눈샙을 치켜올렸으나 조웅남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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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은 그 블쌍헌 놈이 이 개좇같이 추운 넘의 나라에서 ‥‥‥‥
    "언젠가는 데려갈 거다, 한국으로."
    "어떤 놈들은 국장을 치러 주며 난리 법석을 허고."
    그러다가 조민섭과 안승재를 머리속에 떠을린 조웅남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들에 대한 불경을 깨달은 것이었지만 다시 성미가 북받
쳐 왔다.
    "응?대통령이 훈장이라도 몰래 보내 주를 되잖여?관에 넣어 주
fl . "
    "시끄럽다. 이젠 그만해라."
    "불쌍혀서 그려요, 그놈이 ."
    이윽고 조웅남이 어깨의 힘을 빼자 김원국이 머리를 들고 방안의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강대홍만 빼고 모두 모여 있었는데 김칠성과 고동규는 피로에 지
친 듯 얼굴색이 창백했다. 영하의 추위에 강물에 뛰어들어 백 미터
정도를 헤엄쳐 반대편 강둑으로 도망친 것이다.
    강대홍은 아직도 탈진 상태여서 여자들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너희들이 도망쳐 오는 사이에 루벤돌프한테서 연락이 왔다. "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서류만 빼앗아 갖고는 일이 안된다는 거야. 그는 다시 기회를 만
들어야 한다고 했다. "
    "제기랄 놈 같으니.그러은 우리 몫도 올립시다 두 배나 세 배
로."
    조웅남이 나섰다.
    "그 씨발놈이 북한놈들 돈을 떼어 처 먹을라고 허는 짓거린디 아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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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타작을 허자고 헙시다. "
    "시간이 없다. 김정철은 서두를 것이다. "
    "이젠 쉽게 걸려들지 않을 텐데요."
    김칠성이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김원국이 머리를 끄덕였다.
    "놈들은 루벤돌프를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
    루벤돌프와 함께 김정철을 인질로 잡고는 강제로 양쪽의 사인을
받아 3억 달러를 싱가포르의 은행으로 입금시키는 것이 본래의 계획
이었다. 그것은 루벤돌프가 세운 계획으로 일이 성사되면 이쪽은 총
액의 10퍼센트를 받게 된다.
    "루벤돌프는 오늘 다시 북한측과 만나 서류에 서명을 하게 될 것
이다. 아침에 경찰에 불려가 진술을 하고 나서 북쪽과 만날 작정이라
고 했다. "
   김원국이 다시 말을 이었다.
   "위험하더라도 지금 손을 뗄 수는 없어. 이 일을 마쳐야 이곳을 떠
난다. "
   "스위스 경찰은 우리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형
님."
   잠자코 있던 고동규가 머리를 들고 말했다.
   "대사관에서 부인하더라도 CIA 쪽에서 정보를 주겠지요."
   "북한측이 우리의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같으냐?"
   김원국이 묻자 고동규가 김칠성을 돌아보았다.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대답한 것은 김 칠성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군터 호텔 근처에 잠복해 있을 만한 장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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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한 시간 동안 밖에 있으면서 주위를 살폈지만 의심할 만한
점이 없었습니다. "
   "김정철이 부하들과 함께 호텔에 들어간 후에 루델돌프와 약속한
대로 20분쯤 지나서 우리가 현관 앞과 로비에 있던 놈들을 처치하고
기다렸지요. 오종표는 밖의 경비를 맡았지만 이상이 없었습니다. "
   "그러면 놈들은 뒤늦게 달려온 것이로군."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그러은 어디서 정보가 샌 것이여."
   조웅남이 결론을 짓듯 말했다.
   "그 시키들이 지키고 있었다은 느그덜이 쳐들어가서 윅일 때꺼정
내싸둘 리가 몫다. 그 시키들은 늦게 정보를 알고는 좇빠지게 달려온
거다. "
   김원국이 천천히 머리를 」1덕였다.
   "웅남이 말이 맞는 것 같다. "
   그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온몸이 얼음덩이가 된 김칠성 들이 돌아
오자 그는 곧장 숙소를 교외의 이곳 모텔로 옮겼던 것이다.
    강대흥은 온몸에 땀을 흘리며 잠이 들어 있었지만 가끔 헛소리를
했다. 그러나 본래 건강한 몸이다. 시간마다 다르게 상태는 나아지고
있었다.
   물수건을 강대홍의 이마 위에 올려놓은 박은채가 지희은을 돌아보
았다.
   "지희은 씨, 이분한테 무얼 좀 먹여야 할텐데, 어떡하죠?" 

 

 

(2)

 

 

 

    "주방에 부탁해서 뜨거운 수프를 만들도록 하죠."
     지희은이 탁자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었다. 강대흥이 다시 헛소리
 를 했다. 웅얼거리는 소리에 오종표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두 손을
 휘젓다가 이마에 놓인 수건을 벗긴 그가 눈을 떴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형님, 형님들은 어디에?"
    정신이 돌아온 그가 처음 뱉은 말이다.
    "옆방에 계세요, 모두."
    박은채가 물수건을 다시 그의 이마 위에 올려놓자 그는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난 괜찮습니다. 이젠 나았어요."
    "큰형님이 그냥 누워 계시라고 했어요."
    "괜찮다니까."
    그러자 전화기를 내려놓은 지희은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손으로
눌렀다.
    "조금만 더 누워 계세요. 우선 땀이나 닦고."
    길게 숨을 내쉬면서 강대흥이 침대에 다시 몸을 누였다.
   그는 모텔에 들어서자마자 정신을 잃었으므로 이곳이 어디인지는
 칸다.
   "종표, 종표 소식 못 들었습니까?"
   붉게 충혈된 눈으로 강대흥이 물었으나 여자들은 아무 대답도 하
지 않았다.
   "그놈, 질긴 놈인데. 하와이에서는 칼침을 두 번이나 맞고도 살아
난 놈인데."
64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숨은 쉬고 있었어요. 병원에만 데려가면
"죽었어요."
박은채가 똑바로 그를 바라보았다.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머리를 돌린 박은채가 물수건을 접었고 지희은은 침대 시트의 한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자리에서 소스라쳐 일어난 지희은이 묻자 조웅남의 걸직한 목소리
 가 들려 왔다.
    "LH . "
    문이 열리고 조웅남과 김칠성이 들어섰다.
    "형님 "
    강대흥이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면서 아랫입술을 물었다.
   "증표가‥‥‥‥
   "그려, 죽었다. "
   조웅남이 자르듯 말하고는 입맛을 다셨다.
   "니 잘못이 아닝게로 인상 쓰지 마라."
   "괜찮으냐?"
   다가선 김칠성이 묻자 강대홍은 침을 끌어모아 삼키고는 우선 숨
을 뱉어내었다.
   "예, 형님, 저는 괜찮습니다. "
   "그럼 너는 이곳에 남아 있어라, 여자들하고.
                                             함정에 빠지다 65
    "형님, 이젠 괜찮다니까요."
    강대흥이 얼굴을 붉히며 말하자 조웅남이 혀를 찼다.
    "그 시키, 오기는 살어서. 일어날 수 있으은 형님한티 가봐라. 널
부르신다. "
    "예, 형님 . "
    벌떡 몸을 일으킨 강대홍이 방을 나가자 조웅남이 여자들을 둘러
보았다.
    "허기는 우리가 여고서 종표 송장을 안 치렀응게 다행이여. 안 그
려?"
   "총에 맞어서 피를 멈청 흘렸다는디 징헐 거여, 치료헐라은."
   "형님, 가십시다. "
   김칠성이 조웅남의 어깨를 슬쩍 건드리면서 돌아서자 여자들은 잠
자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씨발, 좇같이 춥네."
   이용식 일병이 벙커로 들어서면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구석에 앉아
있던 장영환 병장이 들었다.
   "야, 이 일병, 이리 와."
   분해를 마친 K-2 자동 소총을 옆으로 밀어 놓은 장영환이 부르자
이용식이 다가갔다.
   "부르셨습니까?"
   "사역 갔다 오는 길이냐?"
   "예, 중대 본부 옆에 로켓포 진지 공사에 다녀옵니다. "
66 밤의 대통령 제3부 -ll
   "그건 알아.소식 들은 건 없냐?"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최영문 상병도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총안에 설치해 놓은 20밀리 기관딘좌에 기대 서 있는 양만호 일병은
밖을 내다본 채 움직이지 않는다.
   "중대장 전령이 그러는데 우리는 모두 죽은 몸이라고 하던데요."
   "그거야 말하면 잔소리고, 또?"
   "미군이 뒤를 칠지도 모른다고도 했습니다. "
   "당연하지. 하지만 힘들 거야. 그 씨발놈들은 몇 놈 안되거든."
   "장 병장님, 미군하고 북한놈들이 합세해서 앞뒤에서 칠지도 모른
다고 로켓포대의 한 놈이 말하던데요."
   "다행이다. "
   "뭐가 다행입니까?"
   "핵은 못 쓰겠다, 미국놈이나 북한놈들이 ."
   "왜요?"
    "멍청한 놈 같으니. 생각해 봐라. 그놈들이 합세했다면 북한놈들
은 미군 다칠까 봐 핵폭탄을 쓰지 못할 거 아녀?"
    "그런가요?"
    "허긴 일본놈들도 올테니까, 미군이나 북한놈들 핵은 못 쓴다. "
    "일본이 우리하고 손잡게 되니까 미국은 아예 북한하고 배를 맞춘
 것 아닙니까?"
    "그건 누가 그래?"
    "제 생각이지만, 모두 그렇게들 말하고 있던데요."
    그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일본 자위대의 해공군은 이미 모든 준
 비를 끝내 전쟁을 기다리는 상황이었고 일주일 안에 다섯 개 사단의
                                               함정에 빠지다 67
 일본 육군이 한반도의 땅을 밟는다. 일본과 한국 양쪽의 국회는 방위
 동맹의 조약을 통과시켰기 때문인데 양국의 재빠른 행동이었다.
    "이제 해볼 만해요, 저 새끼들하고."
    잠자코 있던 최영문이 나섰다. 자동차 정비공 출신으로 고참 상병
 이다.
    "씨발, 방송 들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한 건 우리라고 합디
 다. 물론 사기 올리려고 공갈 좀 섞은 건 알아요. 하지만 저쪽 새끼들
 도 사정이 좋은 것만은 아닐 거요."
    그러자 기관포좌에 기대 서 있던 양만호가 몸을 돌렸다.
    "그래도 여기 지나갈 힘은 있을 거요, 최 상병님."
    "씨발, 지나갈지 돌아갈지 니가 어떻게 알아? 야, 이 빵카도 155밀
리 포탄은 견먼단 말이다. 그냥 무너지지는 않아."
    "시멘트 빼먹었는지 어떻게 알아요?철근 얇은 거 쓰고,군대 공
사라고 제대로 했을까? 상납 안하고?"
    "저 씨발놈은 육본 못 간 것을 누구한테‥‥‥‥
    그러다가 최영문은 말을 멈추었다. 육본 작전 과장이었던 그의 외
삼촌 정병식 소장이 값자기 사망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가 자연사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없다. 누구는 사무실에서 총을
맞아 온몸이 걸레가 되었다고 하고 누구는 연병장에서 총살로 처형
되었다고도 했다.
   "에이, 씨발, 무너지든지 어쩌든지 얼른 결판이나 났으면 좋겠다. "
    장영환이 뱉듯이 말하면서 분위기를 바꾸었다.
   "야, 이따가 분대 건의 사항 때 노래방 기계 하나 합카에 놓아 달
라고 하자. 서울에 기계가 지천으로 남아돌고 있을테니까."
68 밤의 대통령 제3부 -H
   중대 본부의 벙커 안.
   조명훈 대위는 간이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지도의 한 부분을 손
가락으로 짚었다.
   "이곳이다. 우리는 오늘 밤 자정에 고지를 내려가 이곳에 있는 제
19사단 수색 중대와 합세한다. "
   "분계선 바로 밑이군요."
   이한성이 그의 손끝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 서 있
던 김정환이 나섰다. 얼굴이 굳어 있었다.
   "중대장님, 19사단 수색 중대는 분계선 감시 중대로 상황 발생시
에는 즉각 이곳으로 후퇴해 오기로 되어 있는 부대 아닙니까?"
   "그렇지 "
   "그런데 우리가 합세하는 이유는 핍니까?분계선 감시가 충분하지
못해섭니까?"
   "그건 나도 모른다. "
   "어차피 후퇴해 올 건데 왜‥‥‥? 차라리 이곳을 보강시키는 것이
   "이곳엔 제』대대 3중대가 들어와."
   "후방에 있던 부대가 앞쪽으로 오는군요."
   이한성의 말에 조명훈이 머리를 끄덕였다.
   "병력은 많아, 우리도."
   그러자 벙커의 문이 열리더니 제3소대장과 화기 소대장이 들어섰
다. 로켓포 중대의 포 배치 작업을 돕고 오는 길이다. 548 고지는 이
제 로켓포가 50문 가깝게 증강되어 상당한 화력을 갖춘 진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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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대 원들의 사기가 올라가는 판에 떨어진 이동 명령이어서 소대장
들의 표정은 어둡다. 이동도 분계선 쪽으로의 이동인 것이다.
   "우린 이제 말 그대로 총알받이가 되는군요, 중대장님."
   김정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이동해 갈 곳에는 시멘트 막사와 평지의 참호밖에 없습니
다. 제가 얼마 전에 가보았어요."
   "명령이야, 김 소위. 잔소리 마라."
   머리를 든 조명훈이 김정환을 쏘아보았다.
   "작전 명령대로 따르면 돼, 우리는."
   "19사단 수색 중대는 우리에게 막사를 비워 줄 것이다. 우리는 당
분간 그들의 지원을 맡는다. "
   "예비 부대인 셈이군요, 그들의."
   이한성이 말하자 김정환이 혼잣소리처럼 중얼거렸으나 모두들 똑
똑히 들었다.
   "도대체,그들에게 왜 예비 부대가 필요한지 모르겠구만.상황이
시작되면 후퇴하는 부대인데."
   "후퇴할지 공격할지 그것도 김 소위 네가 말할 것이 못돼.
   조명훈이 소대장들을 둘러보았다.
   "앞장들을 서라. 너희들의 앞장은 내가 설 것이고. 나도 이곳 548
의 벙커 속에 묻히려고 했지만 명령이야. 이젠 들판에서 죽을 작정이
다. "
   "등에 총을 맞기는 싫단 말입니다 중대장님, 제 말을 오해하지 마
십시오."
70 밤의 대통령 제3부 -H
   스물세 살의 김정환이 조명훈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제가 언제 명령을 거역한 적이 있습니까?"
   "너는 요즘에 말이 많아, 김 소위."
   "요즘 들어 그렇게 되었습니다. "
   그러자 소대장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제각기 웃음을 띠었다.
   그들은 김정환이 말이 많아진 이유를 안다. 20일 전만 해도 그는
우울했고 어떻게 보면 실의에 빠진 젊은이였다. 소대 내의 문제에 무
기력하게 대처하던 김정환은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가가 전시 체제로
운영되자 물을 만난 물고기가 되었다. 그것은 옆에 서 있는 이한성도
마찬가지였다.
   군인의 능력은 전시 상황에서 발휘되어야 하고 평가되어야 정상이
다. 육사를 갓 졸업한 그들은 대처하는 방법은 달랐지만 제대로 상황
을 만난 셈이었다.
   임병섭이 방으로 들어서자 강한기 소장과 양복 차림의 사내가 자
리에서 일어섰다. 계엄 사령부의 작전 과장실 안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장님, 이쪽은 일본 정보국의 야마토 과
장입니다. "
   강한기가 소개하자 사내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야마토입니다.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
   유창하지는 않으나 정확한 한국말이다.
   "혼다 국장한테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반값소."
   인사를 나눈 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야마토는 40대 후반으로 짙은
눈썹과 치켜올라간 눈꼬리가 마치 그림에 나오는 일본 무사와 같다.
                                               함정에 빠지다 71
    "사무실을 우리 안기부에 두어야 정상인데 아직 그럴 여건이 안되
어서 ."
   임병섭이 입을 열었다. 오전에 청와대의 비상각료 회의를 마치고
곧장 이곳으로 달려온 참이다. 그는 피로한 듯 두 눈을 손끝으로 눌
렀다.
   "강 소장이 잘해 주시리라고 믿지만."
   "상관없습니다, 부장님 ."
   야마토가 대답했다.
   "오히려 이곳에서 일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습니다. "
   "그런가요?"
   임병섭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는 일본 정 보국에서 파견된 한국 지
역 책임자인 것이다. 자위대의 막료들과 함께 그는 계엄 사령부 내에
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편리하다니 할말이 없다 한국을 실제
로 통치하는 곳이 이곳인 것이다.
   "부장림,어제 취리히에서 다섯 명의 한국인이 살해된 사건을 아
시지요?"
   야마토가 묻자 임병섭이 머리를 』1덕였다.
   "알고 있소, 야마토 씨. 그중 네 명이 북한측 사람들이고 한 명이
우리 요원이라고 스위스 당국은 발표했더군 "
   "그 한 명이 김원국 씨의 부하더군요. 스위스 주재 북한 부대사가
습격을 받은 겁니다. "
   강한기가 주의 깊게 야마토의 말을 듣고 있었다.
   "부장님,오늘 아침에 평양에서 북경으로 특별기 한 대가했습니
다. 특별기에는 김사훈 수상과 최대민 외교 부장이 탑승한 것으로 확
72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인되 었습니다. "
   "김사훈과 최대민이?"
   임병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놈들의 침공일은 이제 13일 남았어. 날짜를 지킨다면 말이오. =1
렇다면 미국측과 끝내지 못한 회담을 마무리할 작정인가?"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
   "목적지는 어디요?"
   "지금 북경 공항에 착륙해서 두 시간째 기내에 있습니다. 어디로
갈지는 아직 모릅니다. "
   "그렇다면 미국측은?로젠스턴은 위싱턴에 있던데."
   다그치듯 묻던 임병섭이 입맛을 다셨다. 북한측의 동향에 대해서
는 일본 정보국의 정보가 빠르다. 그들이 오랫동안 조총련계에 심어
놓은 정보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로젠스턴이 북미 회담의 주역이었소. 그가 워싱턴에 있는데 놈들
이 그쪽으로 날아갈 수는 없을 것이고."
   "고트 부통령과 빈 몰 상원 의원이 파리에 있습니다. "
   야마토의 말에 임병섭이 몸을 굳혔다.
   빈 을은 다수당인 공화당의 상원 원내 총무로 민주당 대통령인 클
린트의 강력한 견제 자였다. 상원 의장인 부통령과 다수당 원내 총무
의 팀이면 로젠스턴과 패트릭스보다 격이 높다.
   "그렇군 "
   임병섭이 머리를 』1덕였다.
   "고트가 OPEC 회담에 옵서버로 참가한다는 것이 꺼림칙했어. 몰
이 프랑스 정부의 초청을 받아 떠난 것도 걸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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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그들이 만날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강한기가 입을 열었다. 대외 관계도 알아
두어야 한다는 임병섭의 배려로 동석하고 있지만 선뜻 입을 열 처지
가 아니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말을 거든다.
   "부정림,지금은 그놈들이 만나서 무슨흥정을 하거나 간에 기대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 허황된 기대가 우리를 해이하게 했고 놈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우리 군은 전쟁 준비를 마쳐 갑니다. 일주일, 아니 내일이라도 치
고 와보라고 해요. 생각대로 안될테니 간요."
   임병섭이 야마토를 바라보았다.
   "회담을 한다면 놈들이 취리히에 가지는 않겠군요, 야마토 씨."
   "아마 그럴 겁니다, 부장님. 저희 정보국도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
니다. 취리히에서 너무 당했거든요, 북한 사람들이."
   "취리히에서 세계의 이목을 끌어 준 덕분에 우리가 기를 폈어요.
당신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
   가라앉은 목소리로 임병섭이 말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최성산이 몸을 돌려 김정철을 바라보았다.
    "난 내일 아침에 파리로 갑니다,부대사 동지. 명령을 받았습니
다. "
    김정철은 전화가 어디서 걸려 왔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잠자코 머
리를 끄덕였다.
    "출발하기 전에 이곳 일을 모두 끝마치라는 상부의 명령이오."
74 밤의 대통령 제8부 -ll
   "나도 돕겠어, 최 동지."
   "수상 동지와 외교 부장 동지가 내일 저녁에 파리에 도착합니다. "
   "회담은 모레부터 시작되겠군."
   "홍콩의 은행으로 내일까지 돈이 입금되어야 한다는 당의 지시요.
우리는 계획에서 열흘이나 늦었습니다. "
   최성산은 김정철의 앞자리에 앉았다. 네모난 얼굴을 굳히고 있어
서 더욱 각져 보였다.
   "부대사 동지, 우리는 이곳에서 놈들에게 당하기만 했습니다. 그
김원국이란 놈을 가볍게 본 것이 우리의 실책입니다. "
   "일본놈들이 도와 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날뛰지 못했을 거야."
   찌푸린 얼굴의 김정철이 입맛을 다셨다.
   "앙리 주르메가 습격 당했을 때부터 우리는 계속해서 허를 찔렸
어."
   ‥‥‥‥
    "회담이 중지된 것도 우리 책임이야. 최 동지, 난 수령 동지를 뵐
면목이 없네."
    "오늘중으로 깨끗이 끝장을 내지요."
    최성산이 각진 얼굴을 들고 말했다.
    "오후 3시에 루벤돌프의 서류에 다시 사인을 하고 나면 그쪽 일은
끝납니다. 그리고 아마 김원국 일당과의 싸움도 같이 끝나게 되겠지
요."
    "놈들을 이곳에서 해치워야 돼, 최 동지."
    "두 번 실수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대사 동지. 그리고 어젯밤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연락이 늦었을 뿐이지요." 

 

 

(3)

 

 

 

    루벤돌프의 저택은 은행장의 지위에 걸맞게 웅장했고 호화스러웠다. 
  호화롭다고 해서 번쩍이는 요란한 장식물들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문의 양쪽에 세워진 단순하게 보이는 전등 받침, 정원의 마른 잔디
복판에 놓인 철제 기마상과대리석 기둥,그리고 몇백 년은족히 되
었을 것 같은 석조 건물의 창살과 현관문 둥이 모두 세련되었고 여느
아파트나 벽돌 건물과는 완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구시가지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저택은 찻길에서 30미
터쯤 안쪽으로 들어가야 정문이 나온다. 물론 정문으로 향하는 길의
양쪽은 그의 사유지여서 높은 담장이 요철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중
세의 성곽 모양을 본뜬 것이다.
   루벤돌프를 태운 벤츠가 찻길에서 우회전하여 정문 앞으로 다가가
자 원격 조정 장치가 된 아치형 철문이 양쪽으로 벌어졌다. 검정색
벤츠는 정원의 왼쪽에 나 있는 자갈길을 달려 현관 옆의 차고로 들어
갔다. 열려졌던 차고의 문이 소리 없이 닫히면서 어두운 차고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곧 손님들이 오실 것이다. 맞을 준비를 하도록."
   차에서 내리면서 루벤돌프가 차고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에게 말
했다. 단정한 양복 차림의 사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루벤돌프는 차고
옆문을 통해 저택의 로비로 들어섰다.
   무의 있는 이탈리아 산 대리석이 깔린 로비는 얼음판같이 반철거
리며 윤이 났다. 벽에 걸린 커다란패종 시계가 오후 2시 10분을가
리키고 있었다. 2층에서 보좌관인 마르코가 계단을 내려왔다.
   "행장님, 북한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2시 정각에 출발했다
는 전갈입니다. "
76 밤의 대통령 제3부 -ll
   "곧 도착하겠군, 그 사람들."
   그들은 양탄자가 깔린 계단을 올라 2층의 서재로 들어섰다.
   책장 옆에 서 있던 두 명의 사내가 들어서는 그들을 향해 돌아섰
다. 김칠성과 고동규다.
   "정보가 새고 있어요."
   찌푸린 얼굴로 말하며 루벤돌프가 =1들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북쪽 사람들은 내가 당신들과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
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김칠성이 그를 쏘아보았다.
   "우리 쪽에서 새고 있단 말이오?"
   "그렇소. 샐 곳은 그곳밖에 없소."
   "그렇다면 우리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
   "그럴지도 모르지요."
    책장 옆의 둥그런 테이블에 둘러앉아 그들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이윽고 루벤돌프가 입을 열었다.
    "다급한 것은 저쪽이라 사인을 받으려고 이곳에 오73지만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을 거요. 난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경찰서에
서 곧장 이곳으로 오는 길이오."
    고동규가 그를 바라보았다.
    "3시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하니까 순순히 응낙하던가요?"
    "알겠다고 합디다. "
    그러고 난 루벤돌프가 김칠성과 고동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당신들 둘만 온 건 아니겠지요? 어젯밤 일도 있고 해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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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단단히 경계하고 있을텐데."
    "차라리 어젯밤에 김정철이를 없애는 것이 나을 뻔했소. 그렇게
되더라도 앙리 주르메의 1억 5천만 달러는 내 임의로 처리할 수가
있으니까. 물론 당신들의 몫도 포함되어 있지만 말이오."
    김칠성이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2시 25분이었다.
   루벤돌프가 말을 이었다.
   "놈을 위협해서 3억 달러의 송금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제
일 나은 방법이지. 가능하다면 말이오."
   그러자 탁자 위의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방안의 사내들이 일제히
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마르코가 일어나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그리고는 루벤돌프를 바라보았다.
   "행장님, 북한 대사관의 김정철 부대사입니다. "
   얼굴이 굳어진 루벤돌프가 전화기를 건네 받았다.
   "여보세요."
   김칠성과 고동규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부대사님, 장소를 변경하신다면 어디로‥‥‥‥
   루벤돌프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는 것이 나을텐데.조용하고,주위의 시선에 방해
도 받지 않고요."
   그리고는 한동안 저쪽의 이야기를 듣더니 전화기를 마르코에게 건
네 주었다.
   "장소를 변경하잡니다. 4시에 취리히 호숫가의 연락선 몽블랑호
78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에서 만나자는데, 놈들은 눈치를 챈 것이 틀림없어요."
   굳은 얼굴로 루벤돌프가 말했다.
   "당신의 사인이 없으면 북한은 돈을 보내지 못합니까? 예를 들어
은행의 다른 사람이 당신을 대신해서‥‥‥‥
   갑자기 김칠성이 묻자 루벤돌프가 가슴을 폈다.
   "아무도 날 대신할 수는 없소."
   "내가 위임장을 써주지 않는 한 안됩니다. 그리고 북한의 계좌는
비밀 계좌로 처리되고 있어요. 인계하기도 어려워요."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김칠성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고동규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럼 당신부터 없애야겠어, 루벤돌프."
   "이것 보시오, 날 죽이면 당신들의 몫은·
   루벤돌프의 얼굴이 금방 하얗게 되었다.
   김칠성과 고동규가 제각기 권총을 빼어 들고 있는 것이다. 자리에
서 일어서려던 마르코는 고동규의 총구가 이마에 닿자온몸을 굳히
고는 주저앉았다.
   "북쪽 놈들이 돈을 가져가지 못하기만 하면 돼. 넌 착각하고 있어,
돼지 새끼야."
   총구를 루벤돌프의 가슴에 댄 김칠성이 방아치를 당기자 루벤돌프
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마르코가 고동규의 총격을 받고 그의
위에 겹쳐 쓰러지자 김칠성이 고동규를 바라보며 웃었다.
   "이 새끼는 돈이 아까워서 제대로 눈을 감지도 못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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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루벤돌프의 몸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휴대폰을 귀에 댄 최성산이 눈을 부릅떴다.
   "뭐라구요? 루벤돌프가 죽었단 말입니까?"
   그러자 주위에 서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몽블랑 호의 객실 안이다. 사면이 유리로 된 객실에는 그의 부하들
7, 8명이 모여 있을 뿐으로 다른 승객은 없다.
   김정철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다시 들렸다.
   "놈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한 모양이야. 조금 전에 그와 그의
보좌관 마르코의 시체가 실려 나갔어."
   "그렇다면 놈들이 루벤돌프와 손을 잡은 것이 아니었군요."
   "그건 모르지. 하지만 야단났어. 송금을 시켜야 할텐데 "
   "난 대사관으로 돌아가는 중이니까 최 동지도 철수하도록 해."
   "그거야‥‥‥‥
   계약 당사자가 피살되었으니 철수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최성산은
무럭무럭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으므로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부대사 동지, 놈들이 살해한 것이 틀림 없습니까? 나는 이해할 수
가 없습니다. 살해하려면 어제도 기회가 있었을텐데."
   "계획을 바됐을 거야. 어젯밤 우리측의 습격을 받고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을 눈치챈 것이지."
"부행장인 크노르에게 연락을 해보기는 하겠지만 돈을 인출하기
80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에는‥‥‥‥
   말이 막힌 듯 김정철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부행장크노르는 자
금 거래의 내막도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는 나는 모르
는 일이라고 해댈 것이고 결국 3억 달러는 은행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
   "놈들은 루벤돌프를 제거하면 자금 인출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한
짓이야."
   김정철의 목소if는 가라앉아 있었다. 송금의 일차적인 책임은 그
에게 있는 것이다.
   "부대사 동지, 전화 끊겠습니다. "
   휴대폰의 스위치를 끈 최성산이 주위에 늘어서 있는 부하들을 둘
러보았다.
   "매복조를 철수시켜라. 이곳을 떠난다. "
   연락선은 빌려 놓은 것이었으므로 떠나면 되었으나 갑판과 선실,
항구 입구의 요소요소에 매복시킨 부하들이 20명 가깜게 된다.
   "조장 동지, 이대로 떠나는 겁니까?"
   황태식이 나서며 말했다. 옆에서 김정철과의 통화 내용을 들은 그
는 얼굴을 붉히고 최성산을 바라보았다.
   "남조선 요인들을 습격해서라도 분을 풀어야 합니다, 조장 동지 ."
   자리에서 일어서던 최성산이 퍼뜩 머리를 들고 그를 쏘아보았으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승용차가 좌회전해서 리마트 강변을 따라 다시 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의자의 등받이에 깊게 등을 묻은 김정철은 앞쪽을 바라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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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지 않았다. 앞좌석에 앉은 부하들은 차 안의 깊고 무거운정
적에 압도된 듯 온몸을 굳힌 채 숨소리도 죽이고 있다. 이윽고 김정
철은 앞에 놓인 카폰을 빼어 들고는 다이얼을 눌렀다.
    거리 곳곳에 녹지 않은 눈더미가 보였으나 모처럼 환한 햇살이 내
려쪼이는 날씨여서 강가를 걷는 사람들은 어깨를 펴고 있었다.
    "여보세요."
   신호가 서너 차례 울린 다음에 잡음과 함께 사내의 목소리가 수화
기에서 울려 나오자 김정철은 시선을 돌렸다.
   "나다. "
   "예, 부대사 동지."
   "인질을 처치해라."
   "예, 부대사 동지."
   카폰의 스위치를 끈 김정철이 길게 숨을 내쉬고는 자리를 고쳐 앉
았다. 승용차는 강변 길을 벗어나 바로크 양식의 교회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청색과 흰색이 섞인 색조가 밝은 햇살에 뚜렷이 드러난 교회 앞에
는 금방 결혼식을 마쳤는지 흰 웨딩 드레스 차림의 신부가 하객들에
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 보였다.
   대형 벤츠는 앞에 경호원들이 탄 흰색 뷔크의 뒤를 따라 달리고
있다. 다시 우회전한 그들은 이제 대사관저가 있는 거리에 들어섰다.
   "저기 옵니다. "
   대사관 건너편의 카페 앞이다. 인도에 바짝 붙여 정차하고 있던
우유 배달 트럭이 있었는데 운전석에 앉은 사내가 소리치듯 말했다.
82 밤의 대통령 제3부 -H
   "뒤쪽 벤츠에 타고 있습니다. 앞차는 경호차요."
   "앞차는 보내라. 뒤차를 받어, "
   옆자리에 앉은 조웅남이 바둑 훈수를 하듯 가볍게 말했다.
   "옆구리를 받어서 홀딱 뒤집어 놓아라."
   "예, 선생님 . "
   배형식은 이번에 취리히에 증원 나온 안기부의 파견원이었는데 물
론 조웅남과는 첫 작전이다. 고동규의 지시로 일을 맡게 되었지만 전
신을 나무 토막처럼 굳히며 긴장하고 있었다.
   대사관은 그들의 왼쪽 길 건너편에 있었으므로 앞장선 횐색 뷔크
는 왼쪽의 보조등을 깜박이며 다가왔다. 20미터쯤 뒤에서 검정색의
육중한 벤츠가 따른다.
   "저그 흰 놈이 꼬부라져 들어가고 난 다음이다. "
   조웅남이 뷔크를 쏘아보며 낮게 말했다.
   대사관 정문은 길에서 30미터쯤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우
유 배달 트럭이 낮고 굵은 엔진 소리를 내며 동체를 가늘게 떨고 있
었다. 기어를 2단으로 놓고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어 놓은 상태인
것이다. 뷔크는 속도를 줄이더니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금이여!"
   조웅남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 소리에 놀란 듯 배형식이 트럭을
급발진시켰다. 스카니아 트럭은 대각선으로 길을 횡단하면서 요란한
타이어의 마찰음을 내었다. 벤츠는 마악 왼쪽의 정문으로 회전해 들
어가려던 참이다.
    바닥까지 잔뜩 엑셀러레이터를 밟고 두 손으로 핸들을 움켜쥔 배
형식은 검정색 벤츠가 와락 눈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함정에 빠지다 83
      번들거리는 차체의 옆부분에서 사람들의 흰 얼굴이 눈에 띈 순간
  요란한 충돌음과 함께 전신에 충격이 전해져 왔다. 벤츠의 옆구리를
  정면으로 들이받은 트럭은 5미터쯤 그대로 돌진하여 건물의 모서리
  에 벤츠를 쑤셔박고는 멈추어 섰다.
     "조오타!"
     한마디 소리치고 난 조웅남이 문을 열고 뛰쳐나가자 배형식도 그
 가 내린 문 쪽으로 굴면서 내렸다.
     "타타타타타!"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귀를 울렸다. 배형식은 땅바닥에서 상반신
 을 들었다.
    "타타타타타!"
    다시 총성이 울렸고 그 순간에 배형식은 앞쪽에 선 조웅남이 부서
 진 벤츠 안으로 무엇인가를 던져 넣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몸을
 돌리더니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다시 한번 뒤쪽으로 던진다 수류탄이
 었다.
    "야, 뛰자!"
    눈을 부릅뜬 조웅남이 큰 입을 벌리고 소리치자 붉은 입안이 드러
났다.
    배형식이 그를 따라 두 발짝을 뛰었을 때 뒤쪽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리면서 차체의 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는 또 한번의 폭음이
고막을 때린다. 등을 무엇인가로 후려 치듯이 맞았으나 배형식은 기
를 쓰고 조웅남의 뒤를 쫓아 달렸다.
   '뛰는 사람은 하나들이 아니었다. 그 주변에 있던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뛰고 있는 것이다. 조웅남의 등판을 바라보며 뛰던 배형식은 곧
84 밤의 대통령 제3부 -H
그의 옆쪽을 달리는 사람을 알아보았다.
   코트 자락을 날리며 뛰는 사내는 김원국이었다. 그는 대사관 정문
근처에 있다가 경호원들을 저지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린 박은채가 강대홍을 바라
보았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죠? 벌써 저녁 7시가 되어 가는데."
   "형님들이 오실 때까지, "
   강대홍이 창에서 눈을 떼었다.
   이곳은 그라이편 호수와 우스터 사이에 있는 숲속의 조그만 모텔
안이다. 눈에 덮인 숲은 짙은 어둠이 깔려 있어서 금방 늑대라도 튀
어나을 것같이 음산했다. 검은 나뭇가지 위로 반쪽 달이 희미하게 빛
을 내고 있었다.
   "기분 나빠요, 이곳은."
   박은채가 어깨를 들먹거리면서 지희은을 바라보았다. 페치카의 장
작불이 그들의 뒤쪽에서 타오르고 있었지만 넓은 거실을 감돌아 흐
르는 공기는 찼다.
   "텔레비전도 없고. 전화도 안돼 난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
요. 아무리 산속 모텔이라지만."
   두 다리를 뻗으며 박은채가 말하자 강대홍이 무표정한 얼굴을 들
었다.
   "전화기는 코드를 뽑아 버렸고 TV 세트는 관리실에 쌓여 있어요.
겨울에는 손님을 받지 않기 때문에 치워 놓은 거요."
   "이런 곳을 찾아낸 건 누구죠? 지희은 씨인가요?"
                                              함정에 빠지다 85
   지희은이 머리를 저었다.
   "난 아니예요."
   "일본 정보국의 고용인들이오. 현지인들이지. 그들이 우릴 돕고
있소. "
   그녀들을둘러보며 강대홍이 말했다 장작불빛이 그들의 얼굴위
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박은채가 입을 열었다.
   "오종표 씨는 참 안됐어요."
   "착한 분이었는데, 강대홍 씨도 정말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그분
도 나라를 위해서‥‥‥‥
   몇 시간동안이나 그들의 머리속에 박혀 있던 생각이었으나 한결
같이 서로 꺼내기를 피해 온 말이었다.
   강대홍이 눈을 점벅이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창 밖으로 시선을 돌
렸다. 한동안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창 밖에서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
다. 지붕에 쌓여 있던 눈병이거나 나뭇가지를 덮고 있던 눈덩이가 떨
어져 내린 것이다.
   "오종표는 하와이에서 날 따라 나온 유일한 부하였소."
   무릎 위에 두 팔굽을 얹어 놓아 허리를 낮게 숙인 강대홍이 입을
열었다.
   "가족이라고는 하와이에 여동생이 하나 있지요.그리고는 아무도
없어. 한국은 그놈에게는 낯선 나라요. 나하고 오기 전에는 지도에서
만 보았다고 했지요."
86 밤의 대통령 제3부 -ll
   장작에서 불꽃 튀는 소리가 조그맣게 났다.
   "한국 대사관에서 그놈 시체를 인수하지 못하겠다고 한 걸 알아도
서운해하지 않을 거요, 그놈은."
   "이곳의 공동 묘지 납골당에 자리잡고 있게 되었어도 불평 안할
겁니다. "
   "한국으로 데려가겠지요, 이 일이 끝나면."
   박은채가 말하자 강대홍이 거칠게 머리를 저었다. 얼굴이 찌푸려
져 있었다.
   "글쎄, 그것도 반가워하지 않을 거라고 해도 그러네."
   "그 새끼는 열심히 살다가 죽었단 말이오. 형님들한테 인정을 받
고 죽은 것으로 만족한단 말이오."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고 누가 말하는 소리를 그놈이 듣는다
면 웃을 거요."
   바로 그때 그들의 귀에 땅이 울리는 듯한 소리의 진동이 느껴졌
다. 그리고는 그 진동이 점점 가까워졌고 이윽고 그것이 자동차의 엔
진 소리인 것이 분명해졌다.
   "오시나 봐요."
   여자들이 일어나자 강대홍윽 허리춤에 찬 권총을 빼어 들었다.
   "커튼을 내려요. 내가 나가 볼테니까."
   여자들이 서둘러 커튼을 내리는 동안 강대홍은 파카를 걸치고 밖
으로 나왔다. 하얀 달이 머리 꼭대기 위에 떠 있었다.
                                             함정에 빠지다 87
   그들이 들어서자 방은 더이상 넓게 보이지 않았다. 여자들이 분주
하게 의자를 페치카 주위에 벌려 놓는 동안 사내들은 잠자코 서 있었
다. 여자들을 거들면서 강대홍은 입을 열지 않았고 김원국과 조웅남,
김칠성, 고동규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김원국이 중앙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자 사내들도 주위에 앉았다. 의자가 부족했으므로 여
자들은 침대의 양쪽 귀퉁이에 걸터앉았다.
   "우리는 지금 이곳을 떠나 파리로 간다. "
   조용해진 방안에 김원국의 말소리가 울렸다.
   "이곳 일은 이것으로 끝낸다. 파리에서 이틀후에 북미 회담이 다
시 열릴 계획이야."
   장작불이 파닥거리며 튀는 소리가 났고 사내들의 얼굴은 불기운을
받아 모두 붉었다.
   "루벤돌프가 죽었고 김정철이도 죽었다. 스위스 경찰이 모든 공항
과 국경에 비상을 걸어 놓았을 것이다. "
   김원국의 시선이 주위의 부하들을 하나씩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강대홍은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고는 몸을 굳혔다.
   김원국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여기서 흩어져 파리에서 모이기로 한다. 여권은 일본측이
준비해 주었지만 이쪽의 정보국도 만만치 않다고 들었다. "
   조웅남이 헛기침을 하고는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고 엉거주춤 일어
섰다가는 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김칠성이 입맛을 다셨기 때문인지
도 모르지만 강대홍은 그의 시선이 향해진 곳을 보았다. 창가에 짐빔
위스키 병이 놓여 있다. 그가 모텔의 관리인에게서 사온 술이었다.
88 밤의 대통령 제3부 -ll
   김원국이 다시 말했다.
   "난 대홍이와 박은채를 데리고 떠날테니 나머지는 웅남이의 인솔
로 출발한다. 모두 준비하도록."
   조웅남이 김원국을 바라보았다.
   "형님, 그건 아까 말씀혀서 알쳤는디 하나 빼먹은 것 있습니다. "
   그는 손가락으로 지희은을 가리켰다.
   "야를 어뜨케 쥑여 없애라는 말씀 말이오."
   온몸을 빳빳하게 굳힌 지희은이 조웅남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두 눈을 치켜뜨고 있었으나 입을 열지는 않는다.
   "이년이 배신혀서 종표가 죽었는디, 인자 편수를 갚어야 헐 때 아
니오?"
   김원국이 지희은을 바라보았다. 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
고는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놈들에게 정보를 주었지?"
   침을 끌어모아 삼킨 박은채가 지희은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의
입이 열렸다.
   "어제 아침이었어요."
   가늘었지만 분명 한 음성이다.
   김원국이 다시 물었다.
   "누구에게?"
   "모릅니다. 그쪽 전화 번호만 알고 있었어요."
   "그쪽은 어떻게 접촉해 왔지?"
   "집에 전화해 보니까 녹음이 되어 있었어요.아버지를 인질로 잡
                                              함정에 빠지다 89
고 있다고."
   "그래서?"
   "정보를 주지 않으면 아버지를
   "어떤 정보를 주었지?"
   "이쪽의 인원하고‥‥
   "이런 쌍년."
   조웅남이 으르렁거리자 김원국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다시
묻는다.
   "그리고?"
   "위치는 말해 주지 않았어요."
   "그건 왜?"
   "아버지를 구하는 대가로는 너무 클 것 같아서."
   김칠성이 턱을 들고는 쓴웃음을 지었고 강대홍은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조웅남이 창가로 다가갔다
   "루벤돌프와 군터 호텔에서 놈들을 기다린다는 정보는 언제 주었
f1?"
"출발한 후예요. 연락하기가 곤란해서
박은채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김칠성 등이 출발한후에 그녀와 함께 김원국의 방에 불려 가 있
었던 것이다. 이제 생각하니 그녀는 불안정했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
인가를 대고 밖으로 나갔었다.
   "정보가 새는 것 같아 조사를 했었다. 네 아버지가 며칠째 소식이
끊겼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널 눈여겨보았다. "
   김원국의 말소리가 방을 울렸다.
90 밤의 대통령 제3부 -H
    "널 살려 두겠다. 널 없앤다고 해서 죽은 오종표가 살아나진 않
아. "
   "그기 무신 말씀요?"
    김원국의 말에 버럭 소리를 친 것은 창가에서 병나발을 불고 있던
조웅남이다. 그는 씨근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지희은의 앞에
섰다.
   "주먹 한방으로 골통을 부수어 땅에 묻읍시다. 땅은 내가 팔팅게
로. "
    김칠성과 고동규, 강대흥이 잠자코 있는 것은 그와 동조하는 것이
라고 볼 수 있었다.
   "내 이 지기미 씨발년을."
   조웅남이 술병을 든 손을 치켜들었다가 술이 쏟아지자 얼른 술병
을 바러 쥐었다.
   "뻔뻔스럽게 말대답을 허는 주딩이를 어 윅여야지."
   온몸에서 무럭무럭 더운 기운을 뿜으면서 그가 소리쳤다.
   "그만두지 못해?"
   김원국의 싸늘한 목소리가 방안을 가르자조웅남이 치아 전체를
드러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런 년을 안 윅이은 누굴 쥑여? 형님이 지미 카터요?"
   "살려 둔다. 그 대신 저 여자를 묶어 두어야겠다 내일 관리인이
풀어 주겠지."
   자리에서 일어선 김원국이 그들을 둘러보았다.
   "자, 준비해라."
   조웅남의 일그러진 얼굴과 마주친 김원국이 그에게로 다가가 손에 든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저 여자의 아버지는 아마 놈들에게 살해 당했을 것이다.

   부녀를 남북한이 나눠서 죽일 필요까지는 없다 "
   그는 병을 기울여 위스키를 끌컥이며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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