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개와 늑대의 시간

제5장 몽정기 4

오늘의 쉼터 2014. 12. 27. 15:46

제5장 몽정기 4

 

 

해외 영업 2팀의 중국 진출을 위한 준비가 하나 둘씩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 아니라 한번이라도 이길 수 있기에

 

먼저 중국의 역사에서부터 중국 사람들의 습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지역마다 사람들의 성향이 이렇게 많이 다르니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처세가 달라져야 하겠어요.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이 어느 성 출신인지를 먼저 알아야 겠는데요.”

 

해외 영업 2팀의 실질적인 팀장인 노애란이 회의를 위해 모인 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튼 무지하게 넓은 나라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다민족이 사는 나라니까.”

 

“뭐 전라도랑 경상도 같은 차인가요?”

 

봉수가 애란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 정도면 다행이게요.

 

황허강 이북 사람은 정통 한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에요.

 

특히 북경 사람들은 학벌이 높은 편이고 권력욕이나 명예욕이 강하면서도 예의가 밝은 편이라네요.

 

양자강 부근 그러니까 우리가 첫 교두보로 삼을 상해 사람 같은 경우엔 국제적인 감각이 발달해 있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실용적이며 외관과 디자인을 중시한다는 군요.

 

우리의 첫 시발지로 적절하죠. 또 산둥 사람들은 몸집이 크고 성격이 단순하고 사람 사귈 땐

 

무척 경계하는데 일단 친구가 되면 의리가 변하지 않는 특성이 있고 절강 사람들은

 

계산이 빠르고 저축률이 매우 높은 사람들이고 추진력도 대단하대요.

 

중국 사람들 중에 가장 근면한 사람들은 복건성 사람들로 여긴 주로 산악지역인데

 

가난하지만 매우 부지런하다는 겁니다.”

 

애란이 달달 외듯 입을 놀렸다.

 

나머지 세 사람은 그저 그녀의 입만 바라보았다.

 

“역시 노 팀장입니다.”

 

봉수가 장난스럽게 박수를 쳤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실용적일 수 있을까요?”

 

병달이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첫 교두보를 정할 때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한국 사람이 아닌 그 곳 사람으로 말이죠.”

 

“그 점은 인화의 부친께서 어느 정도 힘이 되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중국에서는 누구와 일을 하느냐도 매우 중요하거든요.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병달은 인화와 중국 폭력조직과 연관된 일 때문에 아직도 걱정이 남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진국은 전혀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 저나 우리 중의 하나는 중국에 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두 사람은 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럼 일본이나 베트남 싱가포르쪽 일은 누가 담당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겠구만.”

 

병달이 투덜댔다.

 

“오늘 저녁에 사장님이 우리 부서원들하고 회식을 하겠다는 전화를 받았어요.”

 

“무슨 또 천장벽력 같은 소리를 하실까?”

 

“일단 자신한테 주어진 일 충실히 해줘요.”

 

애란이 팀장답게 매듭을 졌다.

 

“오너 명이니까 다들 나갑시다.”

 

네 사람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모습을 강 실장이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는 사람들한테 속옷을 팔아먹겠다.

 

그나마 속옷이라도 갈아입는 족속들은 이미 다른 기업들이 점령을 했지.

 

죽어라 고생들 해 봐라.’

 

강 실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 실장이 서류를 들춰보았다.

 

중경이 앞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래, 이제 제대로 돌아가는 거야.”

 

강 실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중국 쪽 일은 어떻게 진행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중경은 말을 꺼낸 후 자신이 주제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강 실장이 힐끔 쳐다보고 말았다.

 

“중국 사업이란 말야. 거기에 가서 한 2, 3년 굴러먹어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말까하는 게 중국에서 사업하는 거야.

 

중국에 인지도도 전혀 없는 우리 ‘코지’가 발붙일 데가 있을 거 같아.”

 

강 실장이 손가락을 저었다.

 

“자넨 중국 쪽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어. 앞으로 이런 실수 없도록 해.”

 

중경은 얼굴이 붉어졌다. 중경이 사무실을 나가자 강 실장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강일환인데, 오랜만이야.”

 

“이거 강 실장님이 어인 일로 전화를 다 하셨을까?”

 

“빈정대지 좀 마라.”

 

전화를 받은 사람은 ‘비라’의 기획실장 겸 비서실장인 친구인 장기표였다.

 

“저녁에 술 한잔하자.”

 

“니가 어쩐 일로 술을 다 산다고 하냐?”

 

“언제 내가 술 안 샀냐?”

 

“일단 스케줄 좀 보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녁 약속이 있는데 아홉 시면 괜찮겠다.”

 

“그럼 아홉 시에 서울호텔에서 보자.”

 

“부킹? 좋지. 술은 네가 사는 거다.”

 

“좋은 정보 주면 네가 사는 거냐?”

 

짧은 침묵.

 

“그럼 정보 값은 해야지. 그런데 무슨 정보야?”

 

“만나서 얘기할게.”

 

“뭐 대충 알아야 얼마를 준비할 지 계산해 놓지.”

 

“아무튼 중요한 거다.”

 

강 실장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미소를 지었다.

 

‘이번 기회에 차 사장까지 몽땅 몰아내야 돼.

 

그나 저나 조진국이라는 놈의 정체를 아직도 알 수가 없으니.’

 

강 실장은 의자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도시의 건물 숲 위로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올해 안에 총판 스무 개라. 공장도 있어야 할거고. 협력업체도 있어야 할 테고.

 

비라나 다른 업체들이 그냥 구경만 하고 있진 않을 테지.’

 

강 실장은 속으로 낄낄거렸다.

 

어쩌면 오성의 차 회장이 의도적으로 차몽현을 밀어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건 당연지사지만 오성의 차상경 만큼은 달랐다.

 

강일환은 누구보다 오성 차상경의 경영방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할 때는 자식도 제물도 잡아먹는 타이탄과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실장님 전화 왔는데요?”

 

인터폰이 울렸다.

 

“누군데?”

 

“신수정라는 여자분인데요?”


“신수정?”

 

이름이 낯설었다.

 

강 실장은 그 이름을 입안에서 여러 차례 굴린 후에야 한때 육체관계까지 가졌던

 

보험설계사 신해수라는 걸 깨달았다.

 

왜 그런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전화를 해도 연결이 안 되던 여자가 왜 갑자기…’

 

라는 생각에 젖어있을 때 비서가 물었다.

 

“실장님 어떻게 할까요?”

 

강일환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녀가 전화를 건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여시 같은 년!’

 

강일환은 수화기를 들까말까 망설였다.

 

전화 통화를 하는 순간 그녀에게 휘말려들 것만 같았다.

 

그래도 한번쯤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연결해.”

 

강일환은 수화기를 들었다.

 

“오랫만이죠.”

 

그녀의 목소리에 기름기가 좔좔 흘렀다.

 

“어쩐 일이야?”

 

강일환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어머, 그 동안 제가 전화를 안 드렸다고 삐지셨나봐.”

 

강일환은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이 년아, 그런 년이 그때 내 전화는 왜 안 받아?’

 

강일환은 그녀 면상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한동안 저를 괴롭히는 남자가 있어 괴로웠어요.

 

그래서 전화번호도 바꾸고 한동안 연락 못 드렸던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아랫도리에 찰싹 감겨오던 축축한 느낌이 되살아났다.

 

강일환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그 동안 얼마나 괴로웠다구요?

 

스토커라는 말만 들었지 제가 그렇게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녀가 울먹거렸다.

 

“뭐, 그러니까, 수정씨가 예뻐서 그런 걸 어떡해?”

 

강일환의 목소리가 여전히 미지근했다.

 

지금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는 지도 몰랐다.

 

“농담 마세요.

 

지난주에 겨우 고발해서 재판 받고 구속되는 걸 본 후에야 다리를 펴고 잤다니까요.”

 

강일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 집 대문에 페인트 칠하고 회사에 전화해서 나 안 짜르면 폭파시키겠다고 협박하고…”

 

침묵 사이로 그녀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괜히 강 실장님도 피해를 볼까봐 연락도 안하고 안 만나고 그랬던 건데…”

 

진실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녀를 굳이 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수정을 만나 손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예전엔 수완이 좋았던 것 뿐이었다.

 

“저 정말 어렵게 어렵게 전화 드린 거예요. 괜한 오해하지 마세요.”

 

“아냐. 사실 좀 섭섭하긴 했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강일환은 화랑에 있을 아내를 떠올렸다.

 

아내와 저녁을 먹을 계산이었는데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신수정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조금 반올림하면 1년만에 보는 셈이었다.

 

머리는 허리까지 길러 치렁치렁했고 볼의 살이 쪽 빠져 가냘퍼 보였다.

 

엷게 화장을 했지만 창백한 얼굴을 감출 수 없었다.


친구 장기표와 만나기로 한 곳에서 가까운 레스토랑이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만.”

 

강일환은 그 동안 그녀에게 쌓였던 미움이 눈녹듯 사라졌다.

 

“괜히 바쁘신 분 제가 불러낸 거 아니에요?”

 

“아홉 시에 약속이 있긴 있는데…”

 

“애게, 그러면 겨우 한 시간…”

 

신수정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냥 친구랑 술 한잔하기로 한 약속이니까 취소해도 돼.”

 

“그러지 마세요.”

 

신수정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개를 푹 떨구었다.

 

강일환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장기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약속을 취소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도무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저녁 약속이 있다더니 중요한 자리인 모양이었다.

 

“어쩌지?”

 

“저는 괜찮아요. 친구 분이 더 중요하죠.”

 

강일환은 순간 생각 하나가 번득였다.

 

“저 말야. 같이 만나도 될 친군데 어때?”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수정씨 이런 모습을 보고 그냥 보낼 수도 없고 친구 약속도 취소하려니까

 

전화를 안 받고 가장 현명한 건 같이 만나는 거야.

 

그게 좋지 않을까. 내 오랜 친구라 흉허물없이 지내는 친구거든.”

 

“그래도 어떻게…”

 

“일단 같이 가지 뭐.”

 

그제야 신수정의 얼굴이 밝아졌다.

 

“실은 연락이 안되서 얼마나 섭섭했다고.

 

그래 그 스토커라는 놈은 이제 감방에 처 넣은 거야?”

 

강일환은 그녀의 접시 위에 자신의 고기를 덜어주었다.

 

“저 많이 못 먹어요.”

 

“많이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그 놈은?”

 

“일단 재판 받고 구치소로 넘어갔어요.

 

1년 실형을 받았는데 1년 뒤에 나오면 또 어떨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별 놈들이 다 사는 세상이야.

 

그런 것도 모르고 난 괜히 오해를 했지 뭐야.”

 

“저 나쁜 년으로 생각하셨죠?”

 

신수정이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웃음을 보자 강일환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 듯했다.

 

“꾸역꾸역 다 먹도록 해. 얼굴이 많이 상했다니까.”

 

“고마워요.”

 

그제야 신수정이 포크를 재게 놀렸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내가 뭘?”

 

“지난번 직원들 일도 그렇고, 또 매번 저를 배려해 주시는 것도 그렇고.”

 

신수정이 눈물을 찔끔 흘렸다.

 

강일환은 손을 뻗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데 왠지 선뜻 손이 나가질 않았다.

 

장기표는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에 관한 한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더라도 철저한 그였다.

 

룸에 들어와 있었지만 클럽의 음악이 빵빵하게 울렸다.


“누구셔?”

 

장기표가 신수정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내가 잘 아는 후밴데 마침 오랜만에 오늘 연락이 돼서 말야. 괜찮지?”

 

장기표가 신수정을 아래 위로 훔쳐보았다.

 

신수정은 모로 선 채 뒷짐을 쥐고 있었다.룸의 조명 때문인지 그녀는 청초해 보였다.

 

무릎 위로 올라가는 짧은 실크치마를 입고 있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육감적인 몸매가 도드라졌다.

 

다리에 달라붙은 치마에서 유혹이 물씬 풍겼다.

 

장기표의 눈길이 그녀의 몸을 은밀하게 따라갔다.

 

장기표. 그는 ‘비라’의 해외영업담당 부장이었다.

 

강일환과는 대학 동창이기도 했다.

 

그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뭉툭한 코와 두툼한 입술을 지니고 있었다.

 

강일환의 첫 인상이 날카롭다면 장기표는 두리뭉실했다.

 

하지만 둘 다 눈만큼은 매처럼 날카로웠다.

 

“야, 너 너무 하는 거 아니냐?”

 

장기표가 강일환에게 노골적으로 말했다.

 

“뭐, 뭐가 너무해?”

 

“아니, 데려 오려면 한 사람을 더 대려 오던가 해야지.

 

여기서 나만 부킹하냐?

 

아니면 다른 데서 만나자고 하던가 그랬어야지.”

 

강일환이 장기표의 곁에 앉으며 어깨를 쳤다.

 

“짜식, 내가 그렇게 의리 없는 놈으로 보이냐?”

 

강일환이 신수정의 눈치를 보며 속삭였다.

 

신수정이 그런 둘을 보고 쿡 웃으며 입을 가렸다.

 

장기표의 눈은 그녀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소개 안 해?”

 

장기표가 신수정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수정이에요. 후배예요.”

 

신수정이 얇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장기표는 신수정의 야들야들한 입술을 보곤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지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정씨처럼 입술이 예쁜 여자는 처음입니다.

 

저 장기표라고 합니다.”

 

장기표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저 비라에서 일합니다.”

 

“어머, 그럼 두 분 다 속옷으로 유명한 회사에서 일하시네요.”

 

신수정이 자신의 입술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명함 주셔야죠.”

 

장기표가 신수정에세 손을 내밀었다.

 

“성격이 무척 급하신 모양이에요.”

 

신수정이 호호거렸다.

 

강일환은 그녀가 예전의 발랄함을 다시 찾은 듯해 안심이 되면서도

 

장기표가 너무 나대는 게 조금 염려스러웠다.

 

그때 신수정의 휴대폰이 울렸다.

 

“려원이니?”

 

신수정이 두 남자를 번갈아 보며 전화를 받았다.

 

“지금 호텔 로비래요. 금방 올 거예요.”

 

신수정이 다소곳이 앉아 물잔을 들었다.

 

웨이터가 들어왔다.

 

장기표는 상대의 의견을 듣지도 않은 채 혼자서 이런 저런 주문을 했다.

 

강일환은 그런 그가 괜히 경계되었다.

 

웨이터가 나가자마자 바로 문이 열리고 신수정의 친구가 들어왔다.

 

강일환과 장기표는 자신들도 모르게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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