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수송 작전
이정환이 자리에서 엉팅이를 들자 오 여사가 따라 일어싫다.
자그맣고 가발픈 체구에 얼굴에는 첫기조차 없다
"우리 그이가 제 앞으로 보험을 들어 주었어요."
그녀가 몸매만큼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자 이정환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보험이라니요?"
"생명 보험이에요."
"1억 원짜린데 탈 수 있다고 연락이 왔어요."
하마터면 잘됐다고 말할 떤한 이정환은 두통한 목살을 움직여 침을 삼켰다.
오 여사가 흐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도 몰랐는데, 우리 그이는 보험이나 적금 같은 것은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
아랫입술을 깨물고 난 오 여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집에 오면 잠을 못 자고 불안해했어요.
그러다가 영등포로 발령 받고 나서는 며칠 동안 술만 마셔대더니
조금씩 안정이 되는 것 같았는데 ‥‥‥‥
"과장넘도 조심하세요."
이정환이 눈을 치켜었다.
그러나 무엇을 조심하라는 것이냐고 차마 묻지를 못하고 발을 ◎웠다.
유혁근의 집을 나온 이정환은 휘청거리면서 비탈길을 내려왔다.
가파른 언덕길이어서 올라갈 때도 힘이 들었지만 내려을 때도 두 다리가 회청거렸다.
그의 머리에는 유혁근이 보험을 들었더라고 하면서 자신에게도 조심하라고 일러 주던
오 여사의 말소리가템돌고 있었다.
차가 다니는 평탄한 길로 내려선 이정환은 길가에 세워져 있는 승용차로 다가갔다.
온몸에 열이 오른 듯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가 차의 앞쪽으로 다가가자 제복을 입은 운전사가 밖으로 나왔다.
"년 먼저 들어가 있어. 난 일이 있어서 택시 타고 들어가겠다. "
"알겠습니다, 과장님."
숭용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정환은 갑자기 생각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근처 어디에서 유혁근이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시체의 부검 결과는 차에 치면서 머리와 목 부분을 시멘트 블록에 부딪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결정적인 사인은 그것이었다. 이정환은 손을 들어 지나치는 택시를 세웠다.
사인에 대핸서 의문을 제기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다면 놈들에게 도전장을 던진 꼴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은 벨했다.
그의 주장은 처음부터 묵살되고 주변의 압박이 가중될 것이다.
그리고 유혁근과 같은 상황이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는 택시 됫자리에 앉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들었다.
같은 시간에 최순태는 에푸린 얼굴로 승용차에 앉아 있었다.
한동안 앞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손을 별어 카폰을 쥐었다.
다이얼을 누르자 곧 신호가 갔다.
"여보세요."
무쪽뚝한 샤내의 목소리가 들리자 최순태는 전화기를 바짝 귀에 대었다.
박용근의 직통 전화였다
"시장님, 접니다. "
"야, 예. 웬일이시오, 갑자기?"
"우리 수사관들은 쓰기가 첫해서 그러는데‥‥‥‥
최순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애들을 이정환씨 집하고,그렇지,유혁근씨 집 근처에 배치시켜 주세요.
오후 3시즘에 그 양반이 갑자기 유혁근의 집에 갔다가 차만 보내고 종적을 감추었어요."
"그 영감, 애를 먹이는구만."
박용근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지금 어디 있는가를 찾기 힘 들겠는데,
집으로 돌아온 것이나 확인할 수밖에."
"그럼 그렇게라도 해줘요."
입맛을 다시며 최순태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앞자리에 맞은 부하들의 등을 힐끗 바라본 최순태는 의자에 등을 깊게 묻었다.
이정환의 운전사는 그의 동향을 일일이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카폰의 벨이 울렸으므로 차에 탄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움직였다.
운전사는 힐끗 백미러를 보았고 옆자리의 부하는 머리를 돌렸다.
최순태는 손을 텔어 전화기를 쥐었다.
"여보세요."
"아, 최 계장, 나야."
"아니, 과장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왜?무슨 일 있나?"
"아넘니다. 차만 먼저 보내셨다고 해서요."
"자넨 지금 어디에 있나?"
최순태는 머리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승용차는 을지로 3가를 마악 통과하고 있었다.
"지금 명동입니다. 무슨 지시하실 일이라도
"없어. 난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려고."
"OtOl, 네."
"자네도 오늘 비번이지?"
"네, 계장넘."
"그럼 이만 "
전화가 끊기자 최순태는 잠자코 전화기를 내려놓고는 머리를 들었다.
집에 일찍 들어간다고 했으니 그것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구찌 클럽으로 가자."
그가 말하자 승용차는 오른쪽 차선으로 줘어져 들어갔다.
6시여서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딴 그곳에 가서 오블하게 한잔 마실 생각이 든 것이다.
정기욱이 방으로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던 최장수가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여어, 최형, 어서 오시오."
얼굴에 활짝 웃음을 떠올린 정기욱이 손을 내밀며 다가갔다.
그러나 얼굴을 대하기는 처음인 것이다.
그들은 악수를 나누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이거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졌겠습니다. "
최장수가 부드럽게 말하자 정기욱이 한손을 저었다.
"그게 무슨 말씀,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우런 진작에 만났어야 하는데 ‥‥‥‥
"저도 명성만은 들어 왔습니다만."
말들은 서로 좋게 나누고 있었지만 한쪽은 해결사로 교도소를 밥 먹듯이 드나 들었던
사내였고 다른 한쪽은 김원국의 조직에게 분해 되어 이민을 갔다 온 처지였다.
서로 상대방을 경멸해 왔으나 지금은 1들에게 밝은 세상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표정들도 밝았다.
"사무실이 좋더군요. 대단하십니다, 이런 큰 기업을 운영하시다니."
최장수가 사장실 안을 둘러보는 시농을 하며 말했다.
넓은 사장실의 한쪽 구석에는 연습용 골프 시설이 되어 있었다.
인조 잔디로 만든 3미터 정도의 시설 위에는 수십 개의 골프 공들이 흩어져 있다.
"기업이라고 할 것이 있습니까?우리 사이니까 말하는데 그저 업체들을 관리하는 것이지요, 월."
그러면서 정기욱이 웃자 최장수도 따라 웃었다.
정기욱은 이제 20여 개의 업체들을 직접 관리하는 사장이었고 줬 '
가 다른 곳에서 얼마나 보호세를 받는가는 최장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t‥‥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최장수가 소파에 등을 기대면서 정기욱을 바라보았다.
"전 솔직히 박용근 사장과 손을 잡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박 사장 의 예비 부대 역할을 하고 있지요."
"짐작은 하고 있었지요.원체 인덕이 있으셔서 애들이 많이 모이 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정기욱이 가는 눈을 치켜뜨고는 거친 목소리를 한껏 부드럽게 만 들어 말했다.
"그러고 보면 박용근씨도 인덕이 있어요.최형 같은 사람을 끌어 들이다니."
"글에, 그것이 ‥‥‥‥
최장수가 입맛을 다시며 턱을 들었다.
"저야 박 사장님을 존경하지만 저 혼자만 그런다고 일이 됩니까?
원체 애들의 개성이 강해서요."
"허어, 저런 "
"그렇다고 박 사장넘하고 사이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님니다.
지금도 잡일은 모두 제가 맡고 있지요."
"나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
"하지만 저는 정 사장님하고도 교분을 맺고 싶어서요.
왜냐하면 제 입장이 독립된 입장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
"대충 이해는 가지만 박용근씨가 좋지 않게 생각할 것 같은데, 나 상관없지만 말이오."
"우린 공식적인 관계가 아님니다. 일을 하다보니까 말이 그렇게는 퍼졌는지는 모르지만요."
정기욱이 어깨를 펴고는 한동안 눈을 껌백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한테 바라는 것은 뭐요? 난 박용근씨와 직접 교제하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 건드리지는 않고 있는데 ."
"저를 동생으로 삼아 주십시오."
"박용근씨하고도 그런 관계 아니오?"
"아넘니다. 그 양반은 우리하고 체질이 다른 분이셔서,
그냥 사장 넘이라고 부르는 관계입니다. "
정기욱이 벽을 바라본 채 손가락 끝으로 소파의 팔걸이를 가법게 두드렸다.
이윽고 그가 머리를 돌려 최장수를 바라보았다.
"최형 문제로 해서 나와 박용근씨가 대립될 수도 있겠어.
최형이 그 사람 일을 안했다면 몰라도.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하고 요즘 문제가 있습니까?"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정기욱이 잠자코 바라보자 최장수가 말을 이었다.
"용병 생활은 체질에 맞지 않습니다.
어느 곳에 기반을 굳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조직에 들어가제몫을 하고 싶은데
박 사장님하고는 그것이 힘들어서 ."
"하긴 그 사람, 자존심이 대단하다지? 아마 그 사람 밑에서는 잡일이 고작일 거야."
"그렇습니다. 정식으로 일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 근처에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니 ."
"창피해서 그런 모양이군, 당신들 만나는 것이."
최장수가 퍼뜩 머리를 들어 정기욱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저한테 일을 맡겨 주십시오. 제가 데리고 있는 애들도 쓸 만합니다. "
"이거, 이런 이야기 하기에는 장소가 불편하구만."
그러자 최장수가 눈꼬리를 좁히며 웃었다.
"제가 모시지요. 허락하신다면 말입니다. "
"아니, 그럴 것 없어요."
정기욱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저녁 식사나 같이 하십시다. "
그들이 장안동에 있는 레오날드 클럽에 도착했을 때는 밤 9시가 되어 있었다.
사거리에 서 있던 교통 경찰이 그들의 차량 행렬을 보고는 놀라 부동 자세를 취할 만큼
어마어마한 행렬이었다.
정기욱은 최근에 구입한 벤츠 500에 최장수와 나란히 딘고,
그들의 앞뒤로 정기욱과 최장수의 부하들이 탄 십여 대의 승용차가 길게 늘어져 있었으므로
교통 경찰은 대통령의 행차쯤으로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벤츠가 멈춰 서자 이쪽저쪽에서 뛰어 나온 양쪽의 부하들이 그들을 에워짧고 레오날드 클럽의
지배인과 마담이 현관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이것, 철통같구만."
주위를 둘러보던 정기욱이 최장수를 향해 웃었다.
"최형이 빈틈없는 사람이라고 소문이 났던데 틀린 말이 아니네."
"매사에 철저한 것이 제 성격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왔는 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지금 나도 믿지 않겠구만 "
"아님니다. 제가 힘이 있는 한 믿습니다. "
정기욱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에 옷음을 책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넘."
지배인과마담이 허리를 끈으면서 그들을 향해 절을 했다
이곳은 정기욱의 소유는 아니었으나 그가 관리해 주는 곳이었다.
업무부장과 영업부장, 지배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수하들인 것이다.
그들이 밀실에 자리잡고 앉자시키지도 않았는데 술과 안주가 날라져 왔다.
술은 요즘 들어 정기욱이 맛을 들인 나폴레옹 꼬냑이다.
그는 맥주잔에 꼬냑을 못고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아, 여자들은 조금 있다가 보내라. 우리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
여자를 데리고 오겠다는 지배인에게 손을 저으며 정기욱이 최장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를 마쳐야지. 안 그렇소?"
"그렇습니다, 형님 ."
승용차 안에서부터 최장수는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으나 정기욱은 싫은 눈치가 아니었다.
그도 슬슬 말을 낮추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금 밤의 세계는 양분되어 있지요.
형님과 박 사장 두 개의 조직으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최장수가 꼬작 술병을 들고 술을 따르려는 시능을 하자 정기욱이 맥주잔을 내밀었다
"김원국씨 조직은 이제 재기 불능입니다.
보스급들 모두가 수배자 명단에 들어 있고 조직원 대부분은 를어져 버렸지요.
다시 모을 수는 없습니다. "
최장수는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맥주잔을 든 정기욱이 벌컥이며 맥주 마시듯 꼬딘을 삼키는 것을 힐끗 바라본 그는
술잔을 코에 가져다 대었다가 한모금을 입안에 넣었다.
"따라서 형님과 박 사장 두 분이 밤의 세계를 관리하게 되었지요
모두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
"그, 박용근씨 단점은 무엇인가?"
정기욱이 어깨를 펴며 물었다.
"솔직히 박 시장넘은 실세가 아님니다.
리즈 호텔의 안정태, 그 사람이 조직의 실세이지요.
박 사장은 점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
"박 사장넘이 용병으로 저를 고용한 것도 그런 이유지요.
경비 용역 회사의 직원만으로는 도저히 이 세계를 관리할 수 없는 겁니다. "
"하긴 그래 . 내 유통 회사의 조직으로도 마찬가지야.
이쪽 물을 먹은 놈들이 있어야 되겠더구만."
정기욱이 다시 끌컥이며 꼬딘을 삼켰다
"그래, 안정태가 박용근의 부하로 되어 있지만 실세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술잔을 내려놓은 정기욱이 입으로 더운 김을 뿜으며 말했다.
"그 이상 아는 것이 있나?"
"저보다 형님이 더 잘 아실텐데요."
최장수가 얼굴에 옷음을 띄며 말했다.
"저는 그 윗선까지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모를수록 안전한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지요."
"영리하군, 듣던 대로."
"형님을 위해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주십쇼."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정기욱이 조그맣게 머리를 』1덕이더니
소파 옆의 탁자에 붙어 있는 단추를 눌렀다.
십 초도 되지 않아 지배인이 문을 열고 들어싫다.
"부르셨습니까?"
"들여보내라."
"예, 사장님 "
지배인이 나가자 정기욱이 소파에 등을 묻고는 한쪽 팔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괄걸이 위에 올려놓았다.
아까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참이라 최장수가 물었다.
"팔을 다치셨습니까?"
"그래, 이제는 나아가는데 째 오래 가는구만."
그러자 방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사내가 들어싫다.
앞장선 거한을 본 순간 최장수는 몸을 솟구쳐 일어싫다.
일어서는 서슬에 최장수는 무를을 탁자 모서리에 렇었고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이 엎어졌다.
"앉아라.도망칠 곳은 없다. "
무뚝뚝하게 말을 뱉은 사내는 김칠성이었다
그는 정기욱의 옆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내려놓고는 최장수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최장수가 김칠성을 모를 리가 없다.
왕년에 길거리에 서서 그의 행차를 보며 이를 갈았던 기억도 있다.
"네가 최장수라는 놈이구나, 낮짝은 처음 보는데."
김칠성으로서는 그의 조직에 의해 붕괴되어 간 수많은 보스들의 하나로만 기억되어 있을 것이다.
최장수는 이를 악물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정기욱과 김칠성은 나란히 앉아 시치미를 떼고 있었는데
김칠성을 따라 들어온 사내 한 명은 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가 입고 있는 바바리 코트를 본 순간 최장수의 가슴이 다시 내려앉았다.
말로만 들던 개백정놈이었다.
개 잡듯이 사람을 쳐서 죽이는 놈이다
"정 사장, 이야기 다 했어?"
김칠성이 머리를 돌려 정기욱을 바라보았다
"저놈이 박용근이와 짜고 웅남 형님을 잡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하던가?"
"아님니다, 형님, "
정기욱이 머리를 저었다.
"그 이야기는 안했습니다. "
최장수는 두 손을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바지의 뒤쪽 혁대에는 38구경 권총이 쩔려져 있다.
어깨를 늘어뜨린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차총 가습의 고동이 가라앉았다.
정기욱은 김칠성의 동생이 되어 있는 것이다.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은 꼴이 되었다.
"이 비열한 놈, 널 잡아서 웅남 형님한테 넘기고 싶지만 그럴 필요도 없어.
결과나 알려 드리면 되겠지."
최장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김칠성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 있으면 해라."
최장수의 시선이 정기욱의 얼굴로 돌려졌다.
그는 가는 눈을 한껏 구부리고는 소리없이 웃고 있는 중이었다.
최장수는 두 팔을 슬그머니 몸통 근처로 붙여갔다.
그는 김칠성을 바라보았다.
"나도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어.
기반을 굳히려면 이놈저놈 할 것 없이 이용하고 배신해야 했지 "
오른쪽의 문 앞에 서 있는 개백정과의 거리는 3미터 정도여서 여유가 있다.
탁자 건너편에 나란히 앉아 있는 김칠성과 정기욱은 조금도 이쪽을 경계하지 않고 있었다.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나라도 그했을 거야."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몸을 한쪽으로 틀면서 한 손을 등뒤로
별어 권총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는 몸을 바로 세우면서 둘째손가락을 방아최에 걸고는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가슴이 세차게 고동을 쳤고 기쁨으로 출렁거렸다.
이제 총신만 바로 세우고 방아죄를 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순간에 최장수는 옆쪽에서 덮여 오는 그림자를 느줬다.
방안의 커튼이 떨어져 내리는 듯 펄럭이는 느낌이 왔고 다음 순간에 머리가 번적이며
하얗게 폭발한다고 생각되었다 그것으로 그의 의식은 끝났다.
채영도 기자가 골목의 입구로 들어서자 안쪽에 멈춰 서 있던 자동차의 보조등이 켜졌다.
밤 11시가 넘어 있어서 골목 좌우의 빌딩은 조용했고 불빛이 흘러 나오는 창문도 보이지 않았다.
승용차로 다가간 채영도는 곧장 뒤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 있습니다. "
채영도가 가슴속에서 접혀진 종이를 꺼내어 내밀자 최순태가 낚아 채듯 쥐었다.
신문의 필름을 복사해 온 것이다.
승용차 안의 등을 켠 최순태는 필름을 읽어 내려갔다.
그의 얼굴이 점점 험악하게 굳어져 갔고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채영도는 머리를 들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짙은 어둠에 덮인 빌딩의 그늘은 누군가가 튀어 나을 것같이 으스스했다.
앞쪽의 차도 건너편에는 환하게 불을 밝힌 빌멍이 보였다.
옥상에 동그란 회사 마크와 '아주일보'라고 커다랑게 책어진 네온이 번책이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최순태가 머리를 들었다.
희미한 등에 비친 그 모습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있었고 작고 암팡진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것, 내일 아침 조간이란 말이지?"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네, 지금 인쇄가 거의 끝나 갑니다. "
"야단, 야단났어 ."
그는 서둘러 차 안에 설치된 전화에서 수화기를 떼어냈다.
"저, 저는 그만 갈까요?"
서둘러 다이얼을 누르는 그에게 묻자 최순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앞자리에 랄은 사내들이 머리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청장넘, 밤늦게, 밤늦게 죄송합니다. 하지만 큰일이 ‥‥‥‥
최순태가 목소리를 낮추었는데 그것이 더 이상하게 들렸다.
"아주일보에서 폭로 기사를 내보내려고 합니다.
이철우, 이무섭 조직과 배후 관계, 거기에는 청장넘과 장관넘도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 인쇄가 거의 끝나 간다는데‥‥‥ 네, 투고자는 대한일보의 이재영기자라고."
더듬거렀다가 목청을 올렸다가는 하였지만 대충 보고를 마친 최순태가 이제는
수화기를 움켜쥐고는 네, 소리를 연발하고 있다.
채영도는 눈을 껌택이며 그를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차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덜컥 소리가 나자 최순태의 한손이 뻗어 오더니 그의 목덜미의 옷깃을 쥐었다.
입을 적 벌린 채 다시 끌려 앉혀진 채영도가 그를 바라보았으나 입을 열 수는 없다
아직도 최순태는 지시 사항을 듣는 중이었는데 상대는 경찰청장인 것이다.
"좋다. "
전화기를 내려놓은 최순태가 앞쪽의 신문사 건물을 노려보았다.
"어디 네놈들이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해보자 "
그는 앞좌석에 앉은 사내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김 형사, 자네가 먼저 신문사로 가 있어. 인쇄는 내버려 둬라.
배송부를 지켜. 밖으로 못 나가게 하란 말이야.
15분쯤 후면 강동 경찰서 기동대가 도착할테니까."
"알았습니다. "
김 형사라고 불린 사내가 서둘러 밖으로 나서더니 골목 밖으로 뛰어 사라졌다.
"양 형사, 비상 연락망으로 요원들을 이쪽으로 집결시켜라."
"예, 계장넘."
직급은 계장이지만 상대는 청장과 직접 보고를 하는 사람이다.
운전석에 앉은 형사가 무선 전화기의 스위치를 올렸다.
"자, 그럼 채 기자, 나하고 얘기 즘 할까."
최순태가 채영도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 기사는 이재영이가 썼다고 치고, 어떻게 해서 강상현의 손에 들어갔지? 그년이 직접 보냈나?"
"그건 모릅니다. 강 국장이 알겠지요."
"주관한 놈들은 누구야?이 일을 추진한 놈들 말이야."
"글쎄요."
채영도가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강 국장, 그리고 임동배 부장, 아마 그들 아닐까요?
그들이 자주 이야기하더군요. 이 기사는 빈 난으로 남겨 두었다가 필름으로
되기 직전에 끼워진 겁니다. 저도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다행이야, 자네가 발견해 주어서."
"그나저나 못해 먹겠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달 동안 이 노릇이니."
"자넨 큰 공을 세웠어."
"내가 경찰입니까? 이런 일이 공이 되다니요."
최순태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봐, 지방 신문에서 잘린 걸 생각해 봐.
자네는 지금 5대 일간지의 하나인 아주일보의 기자가 되어 있어 그게 누구 덕분이야?"
그러나 채영도는 얼굴을 굳힌 채 대답하지 않았다.
최순태가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법게 두드렸다.
"걱정 마, 비밀로 할테니까. 그리고 곧 자네가 깜짝 놀랄 만한 포상이 있을 거야. 기다려 봐."
"그리고 이 일은 체제 전복 기도를 적발해낸 것과 같아. 자네는 그렇게 생각해야 된단 말이네."
선도차는 소형 승용차였는데 지붕에 경고등을 매달고는 있었다.
"저런 빌어먹을, 저 자식은 왜 저렇게 달려? 뒤쪽을 즘 봐야지."
뒤쪽 차는 9인승 승합차였는데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함종민 경위는 짜증을 내었다.
선도차가 마구잡이로 속력을 내는 것이다.
도로는 차량 통행이 적은 편이 아니다.
어느 사이에 선I차와 승합차 사미에 얌체 같은 대형 승용차 한 대가 끼어들어 속력을 내고 있었다. 함종민은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얼굴의 기동대원들 사이로 경고등을 번적이며 바짝 뒤를 따르는 승합차가 보였다.
"배송부로 직접 갑니까?"
됫좌석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소리쳐 물었다.
9인승이었지만 아마 열 서너 사람은 합을 것이다.
"그래, 배송부에 가서 신문 뭉치만 압류시키면 돼. 한장도 못 나가게 하라는 청장의 지시다. "
차에 타기 전에 지시 사항을 일러 주었으나 그는 나중에 끼어든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무슨 일이야? 영장도 없이 신문사 건드렸다가 일나면 어쩌려고."
뒤쪽에서 누군가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기동대에다가 형사과에 남아 있던 형사들,
그것도 모자라 조사과의 당번 형사들까지 몰고 나온 참이다.
고참 형사들 중의 하나가 걱정하는 소리였다.
머리를 돌린 함종민은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청장의 직접 지시를 어긴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아주일보는 학교 갔다 온 놈들 투성이의 까탈스런 신문이었다.
아마 체제나 공산주의에 대한 무슨 기사가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갔다.
사거리들을 거침없이 횡단하여 오른쪽 길로 줘어져 가던 선도차의 브레이크등이 켜졌다.
함종민은 머리를 들어 앞쪽의 도로를 바라보았다.
노란색 차단등이 도로를 지그재그로 막고 있는 사이를 차량들이 서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차 앞으로 십여 대의 차량들이 기어가듯
앞으로 나아간다.
"이런 병신 같은, 음주운전 단속이야?"
와락 짜증을 낸 함종민이 반대편 차선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차량들이 지그재그 코스를 따라 힘겹게 이쪽으로 빠져 나오고 있다.
"저건 경찰이 아닌데요, 반장넘."
뒤쪽에서 머리를 내민 형사가 말했다.
"우리 애들이 아닙니다. "
"저건 음주 단속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
핸들을 잡고 있는 형사가 말했다.
함종민의 눈에도 사내들이 저만치 보였다.
십여 명의 사내들이 차량을 하나씩 살피면서 통과시키고 있다.
모두 정장 치점이거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요란한 경적과 사이렌 소리를 내던 선도차가 잠잠해진 것을 보면
그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핀 모양이었다.
선도차가 사내들이 몰려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사내들도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열 횡대로 늘어서서 그들을 맞았다
"자네들, 준비하고 있어!"
함종민이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반장님, 월 말입니까? 뭘 준비해요?"
누군가가 느린 목소리로 되물었을 때 사내 한 명이 유리창 가로 다가왔다.
"이것봐, 당신들 누구야?"
함종민이 소리쳐 묻자 사내는 양복 호주머니에 매단 신분증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안기부 수사관이오. 경찰이신 모양인데, 어디로 가십니까?"
"우린 명령을 받고 아주일보로 가는 길이오. 도대체 안기부가 길가에서‥‥‥‥
"경찰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난처한데, 우리도 명령을 받았어요."
"그게 무슨 말이오?"
"아주일보에 접근하는 어떤 세력도 저지시키라는 명령이오.
단 법적으로 하자가 없을 때는 통과시키라는 지시였습니다'."
"이봐요, 우리는 경찰청장의‥‥‥‥
"염장이 있습니까?"
함종민이 눈을 점택이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젠장, 그것봐."
뒤쪽에서 누군가가 투별거렀다.
"경찰청장이 지시하면 영장 없이도 신문사를 습격할 수 있습니까?"
이제 사내들은 20여 명 가람게 되었고 이쪽의 차량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젠장, 돌아갑시다. 점점해 "
뒤쪽에서 다시 누군가가 투덜거리자 함종민이 버럭 고함을 쳤다.
"시끄러! 이 새끼야!"
길이 막힌 차량들이 뒤쪽에서 요란하게 경적을 울려 대었다.
"난 영문을 알아야겠어. 이대로는 돌아가지 못해."
함종민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
그러자 답답했던지 형사들도 따라 내렸고 차도는 금방 형사들과
사내들로 뒤섞이게 되었다.
"우선 차를 길가로 템시다. 통행을 시키기는 해야 할테니까."
안기부 요원의 제의로 기동대의 차량들은 길가에 붙여졌다.
"어이, 피차 고생이 많시다. "
붙임성 좋은 어느 형사는 안기부 요원에게 담배를 권했고
두어 명은 인도에 둘러서서 잡담을 나누었다.
소변이 마려웠던 모양으로 골목을 찾아 서둘러 가는 형사도 보였다.
함종민은 그중 지휘자로 보이는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그쪽은 누구 지십니까?"
"부장님 지십니다. 그쪽은 청장님 지십니까?"
나이 지긋한 사내가 정중하게 되물었다.
"네, 내가 직접 받았습니다, 마침 일직이어서."
"내 생각입니다만 이건 훈련 같아요.
그렇지 않으면 조금 나쁜 경우입니다만‥‥‥
사내가 말꼬리를 흐리고는 힐끗 함종민을 바라보았다.
"문민정부 아닙니까? 법적 절차 없이 공권력이 움직이는가를 체크하는지도 모르지요."
함종민이 침을 삼키고는 와락 이맛살을 찌푸렀다.
옆에 따라와 싫던 나이든 형사 한 명이 땅바닥을 향해 침을 별었다.
그러자 함종민의 주머니에 든 전화기가 울렸다.
입맛을 다신 함종민이 전화기글 귀에 대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강동 경찰서 기동대요?
거기 함 경위가 있다는01."
"제가 그런데요."
"어떻게 된 거야? 왜 안 와?"
전화기에 대고 악쓰는 소리가 옆에 선 사람들한테도 들렸다.
"본부의 최 경감이라고 하셨던가요?"
함종민이 묻자 그쪽은 어이가 없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악을 썼다.
"빨리 오지 않고 워 하는 거야? 내가신문사 앞에서 기다리고 었단 말이야!"
"영장 없이는 움직이지 않겠습니다. "
함종민이 말하자 둘러섰던 형사 두어 명이 머리를 끄덕였다.
"지시는 정식으로 법적 절차를 밟아 내려 주십시오, 이상."
스위치를 내리자 안기부의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걸음 다가와 섰다.
"우린 신문사를 방어하기 위해서 지원 나온 팀입니다.
신문사에 쳐들어가서 소동을 부리면 안되니까요.
훈련인지 뭔지 아주일보를 상대로 한다는 계획이 있었고 이 선에서 저지시키라는
명령이었으니까요. "
"선생넘."
나이든 형사 하나가 그에게 다가싫다.
"서로 밤늦게 고생하는데 우릴 못 본 것으로 해주쇼. 같은 공무원아넘니까?"
"그러지요, 뭘 "
사내가 머리를 끄적이자 기쁜 나머지 형사는 손을 내밀었다.
사내의 손을 두어번 흔든 형사가 몸을 돌리고는 함종민을 향해 한쪽 눈을 감아 보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강상현은 자리에서 튕기듯이 일어졌다.
"서둘러. 배송부에 지시해서 지금부터라도 배달시켜 경찰이 냄새를 맡았어."
"아직 포장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쇄는 끝났지만."
임동배가 주춤대며 따라 일어서자 강상현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이 친구야, 어차피 콩밥 먹을 바에는 신문이나 뿌리고 먹어야 될 것 아냐!"
임동배가 겅중거리는 걸음으로 방을 빠져 나갔다.
그를 따라 마악 방을 나서려던 강상현은 전화벨 소리에 돌아했다.
그는 서둘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강 국장, 나 강한석이오."
강상현이 눈을 치켜뜨고 몸을 굳했다 어느 사이에 강한석에게까지 연락이 된 것이다.
"아, 장관님, 웬일이십니까?"
그와는 언론인 모임에서 식사를 갈이 했었고 그가 초대한 파터에서 술자리를 함께한 적도 있다.
"강 국장, 그러시면 안됨니다. "
강한석의 말투는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당장에 배포를 중지시켜요. 충고합니다. "
"경찰력을 동원하려다가 안되니까 이젠 협박하시는 겁니까?"
"나는 모르는 소리요. 다만 그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거요.
그 추측 기사로 인해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
"사회가 아니라 몇 사람이겠지요, 장관넘을 비롯해서 "
"체제가 흔들리게 됩니다. 모처럼 안정과부흥의 기틀을 잡은 정권이오."
"내일모레 당 대표 경선에 오르신다고 정권을 젊어지신 것은 아님니다, 장관님 ."
"각하를 곤경에 빠뜨리게 됩니다. "
강한석은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았다
"강 국장은 누가 정권을 쥐건 상관없다는 생각이겠지만 나는 확신이 있습니다.
각하는 보호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맥을 이어야 합니다. "
"그건 국민이 심판하게 합시다 장관님이나 제가 전부가 아닙니다.
대통령까지 합해도 서너 사람이오. 우리 기준으로만 생각하지 맙시다. "
강상현은 전화기를 때려 부술 듯이 내려놓고는 방을 뛰쳐 나왔다.
급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배송부의 직원들은 이제까지 해온 대로 포장해서 트럭에 싣고 있는 것이다.
전국의 수천 개의 보급소로 신문이 배달되면 전 경찰력을 동원해도 모두 수거할 수는 없다.
그를 뛰게 만든 것은 강한석에 대한 알 수 없는 노여움이었다.
그가 차라리 악을 쓰든가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다면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가면을 쓴 놈이었다.
위장과 술수로 출세 가도를 달려온 놈이 틀림없었다.
배송부의 계단을 내려가는데 아래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였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 소리는 한 사람의 고함과 서너 사람의 대답으로
어우러진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상현은 직원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는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그는 출구를 가로막고 서 있어서 서너 대의 트럭이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그를 향해 소리치자 사내가 몸을 돌려 다가오는 강상현을 바라펄았다.
"난 경찰이야. 당신은 누구이?"
"건방진 놈 같으니, 야 이놈아, 난 너희 장관하고 방금 통화를 했어."
사내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역적같은 놈,너,누구 지시로 이런 불법 행동을 해?박동호 지시겠지? 당장 물러가지 못해?"
"이것봐요, 나는‥‥‥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 사내가 무전기를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들었다.
직원들이 그의 어깨를 한쪽으로 밀었고 트럭이 그들의 곁을 스쳐지났다.
"이봐, 시간 있으면 이 신문을 한 부 읽어. 박동호가 곧 파멸될 내용이니까.
그래서 죄없는 당신 같은 말단을 이용해서 막아 보려는 거야. 저리 비켜 서 ."
이제 사내는 기세를 잃었으나 눈을 치켜뜬 채 열심히 다이얼을 두드리고 있다.
트럭이 계속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다섯 대째의 트럭이 스치고 지나자 강상현은 앞쪽에 서 있던 형사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강한석을 대했을 때와 다르게 그에 대한 가습 저린 연민의 감정이 강상현에게서 솟구치고 있었다.
기어를 삼단으로 올린 김씨가 마악 엑셀러레이터를 밟았을 때 옆의 일차선을 달리던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머리를 틀었다.
가습이 서늘해지도록 놀란 그가 무의식중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승용차의 뒤쪽 창이 열리더니 사내의 상반신이 나와 이쪽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무어라고 소리치면서 길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런 우라질놈이 무슨 수작이야?"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강북 지역을 맡은 그는 스무 군데의 보급소를 거쳐야만 했다.
앞 길을 가로막은 승용차에서는 사내가 성난 듯한 표정으로 길가를 가리키고 있다.
김씨는 입맛을 다시면서 핸들을 우측으로 끈었다. 트럭이 멈추자
앞쪽의 승용차에서 두 명의 사내가 뛰쳐 나봤다. 그들은 트럭의 양쪽
으로 다가와 양쪽 문을 거의 동시에 열었다.
"당신, 밖으로 나와,"
운전석의 문을 연 사내가 김씨의 옷자락을 움켜쥐며 말했다.
"이것보시오, 이건 신문 수송차여!"
김씨가 버럭 소리치자 조수석에 올라 앉은 사내가 주먹으로 .1의 목덜미를 쳤다.
"이 새끼가 웬 말이 이렇게 많아?죽을테야?"
"어? 이거 왜 치는 거야?"
50대 초반이지만 체격이 건장한 김씨가사내의 멱살을 쥐자 옆쪽 머리에 둔한 충격이 오면서
눈앞에 불이 번책였다.
옆으로 넘어지는 김씨를 트럭 밖으로 끌어내린 사내들은 브레이크를 풀었다.
동작대교를 들어서던 아주일보의 수송 트럭은 옆을 달리던 승용차가 부및치는 바람에 차를
길가로 벤 다음 멈추어 싫다.
이쪽은 대형 트럭이어서 어둠 속에 보이는 파손 흔적은 없다.
하지만 승용차는 옆 부분이 심하게 긁혀져 있었다.
"이것보시오, 당신, 술 먹었소? 잡자기 달려들면 어떡해?"
차량끼리의 교통사고에서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도 있지만
이번은 명백한 저쪽 잘못이다.
멀정하게 이차선을 달리던 놈이 비틀 하면서 이쪽으로 부및쳐 온 것이다.
그러나 당당하게 서 있던 수송 트럭의 운전사는 다가온 사내의 발 길에
사타구니를 채이고는 땅바닥에 무릎을 끊었다.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끊어앉은 그는 사내들이 수송 트럭에 옮겨 타고는
승용차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 당장에 일어날 수도 없었다.
시흥을 지나 안양으로 달리던 수송 트럭이 있었다.
이놈은 구입한지 석 달밖에 안된 신형 트럭이었고 운전사는 경력 십년의 박씨였다.
그가 검문 검경이 없는 검문소를 지나 속력을 내었을 때 빠르게
달려온 승용차 한 대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뒤쪽 창에서 사람의 얼굴이 보이더니 길가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나박씨는핸들을 일차선으로 꺾고는 속력을 내었다.
배송 창고 앞에서 경찰 한 명에게 국장이 소리치는 것을 들었던 박씨였다
그는차에 실려 있는신문뭉치에 굉장한기사가인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승용차는 이제 일차선으로 건너와 앞을 가로막았다.
박씨가 이차선으로 옮기자 승용차도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박씨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저놈의 중형 승용차는 뒤쪽만 한번 받아 주면 뒤집히거나 분리대에 부딪쳐서
안에 탄 네 놈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박씨가 다시 차선을 이차선으로 바꾸자
승용차도 따라 옮기더니만 와락 속력을 줄였다.
하마터면 승용차를 들이받을 떤한 박씨가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욕설을 했다.
그리고는 은근히 불안해졌다.
저놈들은 경찰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쪽이 잘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속도 위반이나 차선 위반, 또는 아까 떠들어 댄 것처럼 신문 배포가 금지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차선으로 승용차 한 대가 앞질러 갔다.
그리고는 앞쪽을 달리는 승용차와 나란히 달리는 상황이 되었다.
핸들을 움켜쥐고 있던 박씨가 갑자가 턱을 내밀고 눈을 치켜했다.
일차선 승용차의 오른쪽 창문들이 열리더니 불쪽 총구가 내밀어진 것이다.
모두 세 자루나 되는 것이 이쪽에서 똑똑히 바라보였다.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트럭 앞을 가로막던 승용차의 왼쪽 창들이 하얗게 부서져 내렸고 승용차는
팅 빈 도로를 비스듬히 달리더니 인도의 턱에 부딪치며 멈추었다.
그러자 일차선 승용차에서 손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손은 어서 가라는 듯 앞쪽을 향해 저어 보였다.
경부 고속도로의 틀게이트를 통과하던 세 대의 수송 트럭은 티켓을 끊고
마악 출구를 빠져 나가려는데 앞에서 가로막는 경찰에 의해 멈추어 섰다.
"뭐요?"
앞장선 차의 운전수 오씨가 버럭 소리를 치자두 명의 경찰이 다가왔다.
자세히 보자 얼굴의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전경이다.
"아주일보 수송 트럭이죠? 못 갑니다. "
자그마한 체구의 전경이 다부지게 말했다
"이것봐요, 전경, 누가 그럽디까?"
"비상망으로 명령을 받았습니다. 못 가요."
"도대체 누구한테?"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
오씨는 50대 초반이었고 삼남이 강원도 철원에서 군대 생활을 하고 있다.
자식 같은 애들과 싸울 수는 없다.
"이봐요, 당신 상관을 만남시다. 도대체‥‥‥‥
"안됩니다. "
"안되다니? 영문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알 필요 없습니다. "
"알 필요가 없다니?"
"차를 저쪽으로 빼요, 어서."
M-16의 탄창에 총알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전경은 총을 고쳐 잡고 있었다.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도 불사하겠다는 태도壽.다.
오씨가 후진 기어를 넣고는 밖으로 머리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는데
승용차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더니 멈추어 셨다.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사내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모두 사복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다.
"이봐, 전경, 트럭 통과시켜라."
앞장선 사내가 말하자 주출하던 전경이 물었다
"누구십니 까?"
"우린 안기부 직원이야. 통과시켜, 어서."
"안됩니다. "
자그마한 체구의 전경이 소총을 고쳐 쥐었다.
어금니를 물고 있는 듯 두 볼의 근육이 긴장되어 있었다.
조금 큰 전경도 덩달아서 소총을 쥐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다.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는 절대로."
"내가 책임진다 이봐, 네 상급자 어디 있어?"
"시내 들어가셨습니다. "
"내가 책임질테니까 어서 통과시켜."
사내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그 총에 실탄 없는 것도 알고 있어. 말 안 들을테야?"
사내가 저고리를 한쪽으로 젖혔다.
가슴에 찬 권충 혁대 속의 권총이 보였다.
"안됩니다. 저희 직속 상관이 명령할 때까지는."
자그마한 전경이 하얀 얼굴이 되어 말했고 다른 전경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러나 트럭 앞을 비껴나지는 않았다.
"제가 기다리지요, 여기서, "
그렇게 말을 연은 것은 오씨였다
서둘러 트럭에서 내린 그는 사내들과 전경 사이에 싫다.
"연락이 될 겁니다. 까짓, 기다리지요, 월."
사내들과 전경들은 제각기 눈을 꿈백이며 오씨를 마라보았다.
뒤 쪽의 수송 트럭에서 운전사들이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침 첫살이 응접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반들거리는 나무 탁자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첫살이 와 닿았다.
김원국은 탁자 위에 펼쳐진 신문에서'머리를 들었다 신문은 오늘자 아주일보 조간이었다.
"갑자기 만철이가 생각나는구나 "
김칠성과 오함마가 제각기 시선을 떨어뜨렸다.
신문에 강만철이 만탄 섬에서 피살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제수씨가 이걸 읽으면 더 가슴이 아프겠는데."
오함마가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형님, 오늘 오후에 이쪽으로 호구 조사를 온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바다 쪽으로 피하시는 것이 ‥‥‥‥
"알았다, 그래야지 "
"이거, 나머지 반은 실리지 못하겠는데요."
이번에는 김칠성이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아침에 고차장의 이야기로는 배달이 10분의 1정도밖에 안되었다는군요.
강원도와 충청도 지역은 한 부도 내려가지 못했답니다. "
"10분의 1도 다행이야. 그리고 나머지 반은 생각이 있는 사람이면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고."
김원국이 이재영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재영씨도 우리와 동급의 수배자가 되었어. 이렇게 당당히 이름을 실었으니 ."
잠자코 입술 끝으로만 웃어 보인 이재영이 시선을 돌렸다.
"어첫밤에 안기부와 경찰의 충돌 사건은 없었더냐?"
김원국이 묻자 김칠성이 상체를 세웠다.
"고 차장은 없다고 그러더군요. 결정적인 순간에서는 서로 자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용근과 안정태가 부하들을 있는 대로 동원했기 때문에 ‥‥‥‥
"우리 쪽 피해는?"
"장우길 쪽 부하 세 명이 차가 부딪치는 바람에 약간 다쳤습니다.
하지만 그놈들은 대충 계산입니다만 30여 명이 다쳤거나 어떻게 되었을 겁니다. "
어첫밤의 밤거리는 그야말로 전쟁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안기부와 경찰이 부딪치고 밤의 조직들이 제각기 기관을 등에 업고 격전을 치렀다.
그러나신문에는 그런 내용이 한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설령 그것을 알고 있는 기자가 있어도 기관의 압력으로 싣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것으로 강한석이는 치명상을 입을 겁니다.
대표 경선에도 나서지 못하겠지요."
오함마의 말에 김칠성도 머리를 끄덕였다.
"대통령이 안기부와 경찰의 어첫밤 일을 알게 될는지 궁금해요.
어했든 아주일보의 이 기사는 읽게 되겠지요."
"어제 이정환씨한테서 연락이 왔다. "
김원국이 입을 열었다.
"그도 곧 경찰학교로 전출될 것 같다고 했다.
아마 거기에서 정년을 맞을 것 같다고."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는 거다 "
"그 양반은 최순태가 웅남 형님에게 및을 놓았을 때도 나중에야 기동대원한테서 들었다고 합니다. "
김칠성이 말했다.
"본부에 있었어도 겉돌기만 했어요."
그들을 조심스럽게 둘러보던 이재영은 차출 분위기가 가라앉아 가는 것을 느줬다.
오늘 아침 아주일보가 배달되고 나면 여론은 금세 부풀어 오를 것이다.
경찰은 그 기사가 완전 조작된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할 것이고 전 수사망을 동원해서
그 기사를 쓴 자신을 잡으려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김원국이 예전의 조직을 채건할 것인가는 아직 미지수였다.
아니, 이재영의 눈에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오함마가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형님, 준비하셔야‥‥‥‥
머리를 」1덕인 김원국이 자리에서 일어딘다.
경찰과 동사무소 직원이 합동으로 호구 조사를 하는 동안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있을 계획이다.
배는 50톤급 어선으로 꽤 큼지막했는데 겉모양은 허름했지만 안은 깨끗했다.
선실의 바닥에는 화학 섬유로 만든 첫빛 양탄자가 깔려 있었고 소파에 책운 흰색 커버도
새것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검푸른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배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소파에 랄아 바다를 바라보던 김원국이 일어싫다.
"난 바람 좀 쓰이고 올테니까‥‥‥‥
"저도 같이 가요."
따라 일어선 이재영을 힐끗 바라본 김원국이 아무 말 없이 선실을 나왔다.
바닷바람이 몰려와 머리칼을 날렀고 파도가 부서지면서 날리는 물방울이 얼굴을 때렸다.
오함마는 앞쪽의 조타실에 있는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배의 난간을 잡고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엔진 소리를 숨가쁘게 내면서
배는 속력을 내고 있었다.
"섬을 떠난 지 꽤 오래되셨지요?
머리칼을 날리면서 이재영이 소리치듯 물었다.
물보라에 젖지 않으려는 듯 그녀는 바바리 코트의 깃을 세줬다.
김원국이 아무 말 없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녀는 옆쪽으로 바짝 붙어 싫다.
"거긴 언제나 따뜻하다면서요?"
"템지."
"네 ?"
그녀가 얼굴을 가랄게 대었다.
"덥단 말이야."
"그럼 벗고 살아요? 원주민들 말예요."
바다에 시선을 준 채로 김원국이 머리를 끄덕였다.
"집을 손수 지으셨다면서요?"
셔츠 차림으로 난간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김원국은 잠자코 앞쪽을 바라보았다.
배가 파도를 타고 출렁이며 흔들렸다.
수평선은 흐린 하늘과 맞닿아서 윤곽룬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저도 이 일이 끝나면 그런 곳에 가서 쉬고 싶어요.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 푸른 숲이 있고‥‥‥‥
김원국이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으므로 이재영은 자신도 모르게 어금니를 물었다.
선실로 들어온 김원국이 물에 젖은 셔츠를 갈아입는데 오함마가 들어섰다.
"형님, 시내에는 온통 아주일보 기사 이야기로 시끄럽다는데요.
조금 전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
그의 얼굴은 밝게 펴져 있었다.
"아직 정부에서는 공식 논평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각한 모양이지요?"
"이재영씨는 어디 있어?"
김원국이 불즉 묻자 그가 눈을 껌택이며 선실 안을 둘러보았다.
"글쎄요, 저는 보지 못했는데, 찾아올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나하고 둘이 있도록 머리를 쓰지 마라. 알았나?"
"예, 형님 , "
오함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래서, 강 국장은 어떻게 되었어?"
옷을 갈이집은 김원국이 소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신문사에 있습니다. 조사를 받기는 하는데 아직 경찰서로 끌려 가지는 않았습니다. "
"고 차장은?"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답니다. "
"어첫밤의 소란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곳에도 보도되지 않았단 말 OIfl?"
"예, 형님. 다친 놈들이 모두 입을 열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아주일보의 전화통이 불이 난다고 합니다. 그건 방송에서 들었습니다. "
그러자 이재영이 선실로 들어왔다.
물에 젖은 머리가 이마와 얼굴에 달라 붙어 있었고 바바리 코트는 물에 담갔다가 꺼낸 것 같았다.
오함마가 그녀를 바라보며 엉거주춤 서 있다가 슬그머니 선실을 나갔다.
"어디 있었어? 물에 빠진 사람 같군,"
자리에서 일어선 김원국이 벽에 걸려 있던 수건을 꺼내어 건네 주었다.
잠자코 얼굴의 물기를 밖던 이재영이 문득 시선을 들었다.
"그냥 궁금했어요,사생결이, 물론 직업상의 호기심만은 아님니다. "
"번번이 굴욕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를 저도 자세히 모르겠어요."
얼굴의 물기를 랄은 그녀가 코트를 벗어 벽에 걸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말할 수 있어요.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골목 대장을 동경하는 동네 처녀 같은 거야. 단순하고 본능적인것이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게 되는 일이다. 내가 수없이 줘어 보아서 알아."
"저를 어린애 취급 하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은 골목 대장도 아니에요. "
"그저 힘에 대한 동경이라고 그했다, 힘센 수컷에 대한 암컷의. 이재영씨는
이런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어울렀고 곧 떠날사람이야. 그러면 잊는다. "
"전 지금이 중요해요. 그리고 후회하지도 않을 거예요."
김원국이 머리를 저었다.
"그만, 나는 이런 이야기가 싫다. "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다고도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너무 벽을 쌓고 있어요."
굳어진 얼굴의 이재영이 그의 앞자리에 랄았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을 깍지껴 쥔 채 그녀는 똑바로 얼굴을 들었다.
"말씀대로 힘센 수컷처럼 저를 다스려도 좋아요.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당신도 알 것이고."
김원국은 이재영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는 창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런 이야기를 할 기분이 아냐,
이재영씨. 타의에 의해서 우리에게 그런 분위기가 많이 만들어졌어."
"당신은 젊고 아름다운 데다가 지성까지 갖춘 여자야.
이런 이야기로 자꾸 자신을 격하시키지 말어."
"장민애씨가 부럽군요."
"이런 이야기는 못 쓰겠죠?"
입술 끝을 올려 이재영이 웃었으므로 김원국이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먼곳을 바라보는 시선이었고 이재영은 그것이 자신을 관통하여 밀리 섬에 있는
장민애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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