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밤의 대통령

12. 섬으로 가는 사람들

오늘의 쉼터 2014. 12. 5. 17:01

12. 섬으로 가는 사람들

 

 

이를 악문 정기욱은 앞에 선 차우석을 노려보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어서 아무것이나 집어 던질 듯한 얼굴이었다.
"야 이 시키야, 네놈 대가리가 돌맹이인지는 알았지만 아예 시멘 덩어리구만, 이제 보니까."
그는 두 손을 책상 위에 짚고는 마악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는 시능을 했다.
"이 어째? 경찰에 알려 보자고? 경찰한테 가서 김동천이를 찾아 달라고 그래?"
"그게 아닙니다, 형님.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형님."
"이놈의 시키가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하구 있어!"
"형님, 만일 동천이가 어떻게 되었다면 괜히 형님이 뒤집어 씁니다.

경찰이 뒤집기는 선수 아닙니까?"
"이 어째?"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차우석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저래 봬도 전과가 8범인 차우석이다.

사기와 절도, 폭력과 강도에다가 강간으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교통 사고로

사람을 친 까닭으로 대부분의 중요 범죄는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여덟 번의 교도소 생활에서 두 번은 경찰의 뒤집어 씌우기로 당했다고

지금도 주장하교 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다.
차우석이 한걸음 다가와 섰다.
"형님,동천이는 김칠성이한테 당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개백정 백동혁이를 여관 주인이 봤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시키야, 코트만 걸치면 백동혁이여?"
"개 냄새가 나더람니다, 노린내가."
이를 악문 정기욱이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그도 김동천이 당했다면 김칠성의 일당에게 당했을 것이라고 짐작은 했다.

그러나 이제 마무리를 짓는 마당이다.

정부의 강력한 제재 조치로 김원국의 모든 업체는 세무 조사를 받고 있었고

수천 명의 경찰이 김원국 소유의 업체들만 둘러싸고 있어서 손럼들은 발길을 끊었다.

아마 대부분의 업체들은 세금이 떨어지기도 전에 넘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다른 유흥업체나 음식점,기타 소비업체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는데

무부 장관이 유흥업체의 시간 규제를 철폐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주부터 시행될 것이라고 장관이 직접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발표했던 것이다.
김동천은 정기욱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그가 김원국의 조직에게 잡힌 것은

결국 그들이 크리스틴 호텔 사건의 내막을 눈치챘다는 의미도 된다.

정기욱은 김동천이 조직을 위해 입을 다물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그런 입장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쉼게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악 방의 세계에 뿌리를 뻗고 금덩어리를 거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닥쳐 왔다.

그러나 바로 이매 김원국의 조직과 직접 부딪쳐야만 하는 것이 분했다.

아직도 깅원국의 잔존 세력의 힘은 막강했다.
김칠성과 강만철이 인도네시아의 섬으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있고

웅남은 병원에 있었지만 졸개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찾아내, 애들을 모두 풀어서."
정기욱이 다시 소리치자 차우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찾고 있습니다, 형님. 구석구척을 다 뒤지고 있습니다. "
"시체라도 찾아."
그러면서 차라리 그가 죽어 있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원국의 조직에 잡혀서 살아 나을 가능성은 없다.
차우석이 방을 나가자 정기욱은 손을 뻗어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책상 옆쪽에 놓인 휴대폰을 쥐었다.
"여보세요."
다이얼을 누르고 신호=가 한번 울렸는데 긍방 저쪽에서 전화를 받는다.

정기욱은 fl리를 고쳐 앉았다.
"접니0."
"아, 웬일이오?"
이무섭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네, 다름 아니라, 그 김동천이 때문에 ‥‥‥‥
"왜?무슨 일 있습니까?"
338 밤의 대통령 제2부 -I
"아니올시다, 다만 무슨 방법이 없겠는가 하고."
"방법은 무슨 방법? 나도 찾는 중이니까 그림게 서두르지 말아 _a. .
"하지만 조금 걱정이 됩니다만,"
"무어가 걱정이 됩니까?"
정기욱은 수화기를 바러 쥐고는 땀에 밴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만일 저쪽이 알게 되면‥‥‥‥
"알기는 무얼 안단 말입니까? 그것이 무슨 잘못이라고."
"아니,그것이 아니라 저쪽이 이제까지 우리가그래 왔다고 생각 하지 않젠습니까?"
저쪽은 김원국의 조직을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무섭은 경찰로 생각하는 모양이어서 답답했다.
"이거 우리만 괜히 놈들하고 원수가 되어서야."
"이제 원수고 뭐고 따질 것이 없어요. 저쪽은 이미 머리가 떨어진 독사요."
"네?"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머리 없는 뱀이 꿈틀거리는 것을 생각하자

정기욱의 기분은 다시 언짢아졌다.

담럭이 뛰어나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그였지만 뱀은 질색인 것이다.
"김동천이가 무슨 말을 했건 김원국의 조직은 손을 쓸 도리가 없습니다.

놈들은 죄없는 가족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처요.

어린아이들까지 말입니다.

당신들은 그 가족들을 구하려고 했던 사람들이오.

동천이도 마찬가지겠고." 

 "어쨌든 김동천이는 안되었소, 하지만 정 사장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사업은 이제부터니까."
"flfl ."
"김원국의 조직이 악을 쓸수록 더 깊게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거지.

놈들은 나타나지 못해요."
이무섭은 정기욱의 가슴에 박힌 가시를 한마디에 하나씩 뽑아 주고 있었다.

정기욱은 한모금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김원국의 업체들은 모두 세무 조사를 받고 있어요.

며칠 후면 엄청난 세금이 떨어질 것이고 아마 세금 납부 기일 전에 모두 문을 닫게 될 거요.

준비나 해둬요."
이무섭이 말을 이었다.
"리즈 호텔 같은 곳은 일급 호텔이어서 몇백억 원 정도가 아니오.
정 사장은 그걸 경영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야 제가‥‥‥‥
정기욱은 이무섭이 분위기를 바러 자신의 엉덩이를 두드려 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리즈 호텔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 눈앞에 떠오르자

기분이 자아지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었다.
호텔의 현관을 나온 김선주는 주차장을 가로질러 또박이며 정문을 나섰다.

헛살이 머리 위에 떠 있는 한낮이었다.

사람들에 섞여 호텔의 앞길을 걷던 그녀는 머리를 돌려 호텔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은 유리창이 반짝였고 현관의 위쪽에는 투숙하고 있는 러시아의 발레단을

환쳔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한 블록쯤 걷고 나서 우측에 있는 커다란 일식집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점심 식사 손럼으로 일식집은 떠들썩하였으나 종업원이 허리를 숙이며 그녀를 맞았다.
"혼자이신가요?"
"아니, 동행이 저쪽."
턱으로 안쪽을 가리키며 김선주가 곧장 안으로 들어가자 종업원은 따라오지 않았다.
커다란 흘의 안쪽은 여러 개의 방이 가로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끝쪽은 화장실이고

화장실 옆에는 후문이 있다.

김선주는 곧장 화장실 쪽으로 다가갔고 화장실을 지나 후문으로 빠져 나왔다.

이곳은 직원들과 여러 차례 식사를 한 곳이어서 익숙해 있는 곳이다.

후문을 나와 다시 오른쪽으로 꺾자 이제는 한정식집의 후문 마당이 보였는데
그 옆은 또 다른 식당의 주차장이다.

주차장에 세워 둔 승용차들의 유리창이 햇볕을 받아 번들거리고 있었다.

깅선주는 서슴없이 그쪽으로 다가가 회색빛을 띤 대형 승용차의 뒤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유, 다리 아퍼."
의자에 앉자마자 김선주가 이맛살을 정그리며 두 손으로 종아리를 만졌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백동혁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죠? 날 불러낸 건."
"우선 회사 사정을."
백동혁이 눈꺼풀을 조금 치켜올렸다.
"자세하게 아는 대로."
"지금 세무 감사를 받고 있어요. 텔레비전과 신문은 보시고 계시 3:?"

"외국인 투숙객은 아직 줄지 않았지만 내국인은 절반 이상이 줄었
어요. 경찰이 매일 체크한다는 것을 아니까요."
"나이트 클럽, 오락실, 사우나, 모두 손님이 없어요.

김 상무님은 이번 주말까지 견디다가 내부 수리를 하겠다고 했어요."
김 상무는 전문 경영인 출신으로 호텔의 총지배인이었다.

백동혁이 잠자코 있자 김선주가 말을 이었다.
"억울해요. 분해서 잠이 안 와요. 백동혁씨가 어떻게 해봐요."
뜻밖의 말이었으므로 백동혈이 눈을 갬벅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그 이철우씨 가족을 죽이지 않았죠?

그것은 그놈들의 음모지요?"
"우리는 아냐,절대로."
백동혁이 말하자 김선주가 머리를 」1덕였다.
"됐어요, 나는 당신 말을 믿어요.

당신이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다른 것은 모르지만요."
"묻고 싶은 건 그것뿐인가요?"
"이것."
백동혁이 옆에 놓인 가방을 들어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검정색 가죽 손가방이었다.
"그 손가방 안에 든 서류 한 부를 경찰청 유혁근 경감한테 전해 줘.

그리고 그 안에 활동비가 천만 원 들었는데,

그건 형님이 주신 돈이야. "
김선주의 짙은 눈썹이 번쩍 치켜올려졌다.
"돈은 왜요?"
"그걸 내가 아나? 형님이
"위험 수당인가요?"
"글쎄, 그것이. "
"유혁근 경감을 은밀히 만나 전해 주란 말이겠죠?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
치켜뜬 눈으로 김선주가 한동안 백동혁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두어 번 눈샙을 깜박였다.
"왜 날 시키는 거죠? 다른 사람도 많을텐데."
"누가 추천을 했어,"
"누군데요?"
"대한일보 이재영 기자. 그 사람이 당신을 추천했어."
"이재영 언니. 당분간 쉰다고 하던데, 신문사에 전화해 보니까."
"그런데 참 달라졌어요. 기분이 이상해요."
백동혁이 다시 머리를 들었는데 말에 휘둘리는느낌이 스스로드는 모양으로

이맛살이 찌푸려져 있었다.
"예전의 백동혁씨 같지 않아요.

그래서 조금 저는, 뭐랄까, 백동혁씨가 예전의‥‥‥‥
"ATll러 . "
백동혁이 늘어진 눈꺼풀을 치켜올지면서 이를 드러내었다.
"잔말 말고, 할 거야 안할 거야?"
"해요. "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면서 김선주도 역시 이를 드러내었는데 웃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이젠 코트를 벗으신 거예요? 벗으니까 참 좋다. "
저도 모르게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본 백동혁이 어금니를 물었다.

회색의 정장 차림이었는데 이것은 큰형님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걸친 것이다.

웃음 띈 얼굴로 김선주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녀의 미끈한 종아리가 얼펏 눈에 보였다가 문이 닫히면서 사라졌다.
창 밖에서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함께 현관 앞에 짤린 자갈이 타이어에 눌리는 소리가 났다.

저녁 햇살이 바다를 비스듬하게 비추어 수평선 위쪽을 붉게 물들였고 바다는 더욱 짙게

출렁이고 있는 때였다.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이재영은 몸을 일으켜 정원 쪽의 창가로 다가갔다.

마침 승용차가 멈추고 뒤쪽 문에서 김원국이 내리는 참이었다.

진회색의 양복을 입고 흰색 셔츠를 안에 받치고 있어서 옷차림만으로는 무역 회사의 세련된

직원처럼 보였다.
백동혁과 대여섯 명의 부하들이 그를 맞아들이고 있었다.

허리를 기역자로 꺾는 그들 사이를 김원국은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

이윽고 그가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소파에 앉았다

 

이재영은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무릎 위의 스커트를 잡아딩겨 평평하게 폈다.

신문사의 안청준에게 전화를 하자 그는 펄쩍 뛰듯이 놀라면서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납치된 것으로 믿고 경찰이 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분간 쉬겠다는 이재영의 부탁을 안청준은 선선히 허락해 주었는데

그에게는 지금 설악산의 조그만 호텔에 있다고 말해 주었다.
방문이 열리면서 김원국이 들어섰다.

저고리만 벗은 셔츠 차림이었다.

이재영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는 머리를 』1덕여 보이면서 앞 자리에 앉았다.
"이 부장을 만나고 왔어. 그 사람이 지금은 제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깅원국이 말꼬리를 흐리고는 이재영을 바라보았다.
"이재영씨는 당분간 이곳에 있도록 해. 놈들이 노리고 있으니까."
"집에도 연락을 해놓았어요. 저한테 부담 느끼지는 마세요."
"성격이 적극적이어서 좋구만."
김원국이 찬찬히 이재영을 바라보았다.
"정기욱을 잡아들일 분위기가 아니라는 거야.

이미 사건은 일단락 지어졌고 대통령에 의해서 결론이 나 있어서,"
"강만철과 김칠성의 명의로 된 업체들은 소유주가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에

위임을 받은 대리인이 처분하도록 할 모양이야."
김원국이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리면서 웃었다.
"조웅남이는 아직 안 나았어 어제는 입원실에서 아령으로 체력 단련을 하다가

의사한테 뺏겼다고 하는구만,"
이재영은 잠자코 그를 바라본 채 머러를 끄덕였다.

이제 그의 주변에 남아 있는 빅 보스들은 한 사람도 없다.

강만철과 김칠성은 인도네시아로 떠났고 조웅남은 병원에 있는 것이다.

그녀는 김원국의 말 상대가 되어 있는 자신을 깨닫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가 오늘 유혁근 경감한테 전화를 했어요.

서류 보낸 것도 확인해 볼 겸 해서요."
이재영이 입을 열었다.
"그 사랑도 비슷한 반응이더군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결백을 믿는 것 같아서 위안이 되었어요."
그녀를 바라보던 김원국이 이제는 눈꼬리에 주름을 잡으면서 웃어보였다.
"우리라고 했는데, 내 조직에 여자 보스가 생긴 기분이구만, "
"그리고 또 한가지, 이정환 총경이 경찰청의 실무 책임자인데

그 에게는 보고했다고 하더군요.그 말은 이정환씨를 믿을 수 있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
"김칠성이한테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 안기부 제3차장인 고성섭씨도 사건의 윤곽을

잡고 있는 사람이야."
문득 말을 그친 김원국이 이재영을 바라보았다
"우리 일에 너무 깊게 빠져 드는 것 같군. 그래서 불안한데."
"저는 기뻐요, 이제까지 지금처럼 하는 일에 보람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
"목숨이 걸린 일이야. 그날 밤에도 하마터면 당할 뻔했어.

내가 생각했던 의도와는 다르게 되어 가, 이 기자는."
"호텔에서 그사람들의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저는 이미 이 일에 깊게 빠져 들었어요."
김원국이 찬찬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유는 그것 때문인가? 이미 빠졌다는 것 "
"도와드리고 싶어요.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상기된 이재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으나 시선을 내리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it존심은 내세우지 않겠다.

이 기자는 머리가 좋고, 사회부 기자출신이어서인지 정치 감각도 뛰어나서 많은 도움이 돼."
김원국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셔졌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이야. 아니, 전쟁보다도 더 참혹하고 비열한 싸움이다.

이제까지 여자들이 미끼나 인질로 이용되어서 대부분이 비참한 결과가 되었어."
"난 이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제수씨를 납치한 놈,

그리고 이철우의 가족들을 잔인하게 학살한 놈, 이놈들을."
깅원국이 눈을 치켜떴으므로 시선이 마주친 이재영이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머리를 돌렸다.

그외 시선과 마주쳐서 오래 견디기가 힘든 때문이다
"이 기자, 머리속에 잘 새겨 두도록 해. 당신은 내 증인이고,

언젠가 이 일로 특종을 만들어야 할테니까 "
김원국의 표정이 다시 가라앉았으므로 이재영은 어깨를 세웠다.
"잘 새겨 두고 있어요, 언제나."
그녀가 똑바로 바라보자 김원국은 잠자코 머리를 돌렸다.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가려던 장민애가 걸응을 늦추더니
몸을 돌렸다.

옆쪽의 응접실에 앉아 있는 강만철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은 색깔의 바지에 셔츠를 걸치고 있었는데 산뜻한 차림이었다.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그가 머리를 돌려 다가오는 장민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칭에 해장국은 제가 잘 먹었습니다. "
강만철이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칠성이는 지금도 자고 있어서요."
그들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이곳에서 오래 있다 보면 세상일을 잊게 되겠군요."
"신문을 읽지 않으신다면 더 빨라지실텐데요."
장민애가 살짝 웃자 강만철도 따라 웃었다.

어제 심부름꾼을 자카르타로 보내 한국 신문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오전 10시가조금 넘어 있었지만 햇살은 뜨거웠다.

응접실의 창문을 통해 파란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흰 모래사장은 햇볕을 반사하여 더욱 희게 빛났고 잔잔한 바다 위에는

원주민의 목선이 바위처럼 떠 있었다.

강만철은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모금 삼켰다.
"형님께서도 한국의 일은 당분간 잊어 버리고 있으라고 하셨지만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칠성이처럼 밤낮으로 술이나 마신다면 모르지만."
지금도 김칠성은 2층의 방에서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이제 우린 한국에 있는 기반을 정부측에 세금으로 바친 셈입니다.

신문에 그렇게 났더군요."
찻잔을 내려놓은 강만철이 다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형님도 곧 돌아오시겠다고 했으니까 여기에 가족을 데려와서 살까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장민애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전 잘 모르겠어요.하지만 지금 형편은 전하고 다르니까."
잠깐 망설이던 장민애가 시선을 들었다.
"가족들과 함께 당분간 이곳에서 지내시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싸울 수 있었습니다, 형수님, 어떤 조직하고도. 설령 상대가 정부라 하더라도."
혼잣소러처럼 강만철이 말했다.

아직도 시선은 바다 쪽을 향한 채 였다.
"칠성이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목숨이 아까워서 이곳으로 피해 오지는 않았습니다. "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상대가 없어지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형님 말씀에 우선 따른 져니다.

우리 상대는 아직 보이지도 않았지요."
"형수님, 우리 상대는 교활한 놈들입니다.

그들은 정부 당국자들을 손에 넣었거나 아니면 조퐁하고 있습니다. "
강만철이 이곳에 온 지 열흘이 지났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 =I들은 방에 처박혀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방이 스무 개나 되는 데다가 시중드는 원주민이 열 사람도
넘는 큰 집이어서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칠성이 밤낮으로 위스키를 마셔 대어서 걱정이 된 장민애가 요즘은 아칭까다

직접 해장국을 끓여 올려보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만철의 분위기가 그보다 크게 낫다고 볼 수도 없었다.

하루 종일 바닷가를 내려다보거나 베란다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마치 껍데기만 남은 사람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장민애가 머리를 들었다.
"전 여기에 있었던 3년 동안이 제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이도 마찬가지라고 믿고 있었어요."
"전 평범한 여자예요. 남편을 사랑하고, 아이를 잘 기르고 싶은.
저, 제가 그이의 아래로 부족하다는 건 잘 알아요."
"아닙니다, 형수님. 무슨 그런 말씀을."
"전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것이 잘못된 생각일까요?"
"당연합니다, 당연히‥‥‥‥
강만철이 손을 들어 찻잔을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그가 망설이듯 말을 이었다.
"바깥일은 집안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저희들의 전통입니다.
제 처도 제가 어디 시골에나 가서 살기를 바라고 있지요."
"우리 모두 가족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셈입니다. "
"김 부시징힘이 안되셨어요. 아직도 아주머니가‥‥‥‥
강만철이 잠자코 머리를 끄덕이자 장민애는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아랫입술을 물었다.
"잡혀 있는 사람보다 밖에서 걱정하는 사람이 더 고통이에요. 저는 잘 알아요."
"이 누구라는 사람도 안되었어요.가족이 모두 그렇게 살해되다니, 무서워요."
강만철이 다시 머리를 돌려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파란 바다와 좌우에 둥그렇게 떠 있는 겅은 섬, 바다는 잔잔했고 햇살은 눈이 부셨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어울지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잔잔한 바다 위를 10인승 쾌속정은 시속 40노트의 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선미의 스크루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거품이 바다 위로
희고 긴 선을 그으며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갑판 위로 선수에서 튕겨 오른 물보라가 쏟아져 왔다.
태양은 아직 머리 꼭대기에서 지글거리는 한낮이었다.

조종석이 있는 2층의 계단을 서대식이 내려오고 있었다.

두 손으로 층계의 난 간을 붙잡고 있었는데 머리칼과 남방 셔츠의 자락이 바람을 받아

어지럽게 날리고 있다.
"형님, 한 시간 후면 기요스 섬에 도착합니다. "
다가온 그가 소러치듯 말하자 이철우는 팔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후 1시 반이었다. 어제 아침에 자카르타에 도착하자마자 맞춰 놓
은 시간이다. 서울과는 세 시간의 시차가 나고 있었다.
"천천히 달리라고 해라. 너무 서두를 것은 없다. "
"선장이 말을 안 듣습니다.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는데."
머리를 돌린 이철우는 선실의 의자에 앉아 얼굴이 하얗게 되어 있는 두 명의 부하를 바라보았다.

배멀미를 하는 것이다. 다른 한 명은 조종석에 올라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기요스 섬까지 한 시간이 걸린다면 2시 반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기요스 섬에서 만탄 섬까지는 직선거리로 40킬로미터였으니

이 배로는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이철우는 흔들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으며 겨우 계단의 난간을 두손으로 쥐었다.

물보라가 휘몰려와 이번에는 얼굴에 뿌려졌으므로 그는 머리를 흔들어 물방울을 털어내었다.

계단을 올라간 이철우는 운동모를 눌러 쓴 선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조종간을 잡은 그는 라디오의 노랫소리를 따라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이었다.

30대 중반쯤의 나이에 비대한 체격이었고 검은 피부에 짙은 콧수염을 기른 중국계였다.

그가 옆으로 다가오자 선장 옆에 서 있던 그의 친구인지 기관사인지

지금까지 알 수 없던 사내가 이철우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머리가 어깨에 닿는 장발이었다.
"이것 봐, 속력을 줄여!"
이철우가 소리치자 선장이 머리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러자 구석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이철우의 부하가 기를 쓰고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속력을 줄이라니까!"
그가 다시 소리치자 선장은 한쪽 손을 귀로 가져다 대었다.

잘 안들린다는 소리였는데 선장 옆의 사내가 턱을 들고 소리내어 웃었다.
그들에게 사흘간의 예정으로 배를 빌리면서 일본에서 온 낚시 관광단이라고 했었다.

배삯도 그들이 요구한 금액을 선뜻 내주었으므로 서로 기분 좋은 거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배는 빨라, 속력을 늦추는 것이 불가능이야."
선장 옆의 사내가 토막 영어로 소리쳐 말했다.

배는 기우뚱거리면서 바다 위를 튕기듯이 달려나갔는데 아까보다 속력이 더 빨라진 것 같갔다.
"돈을 더 내라는 것 같은데요."
뒤따라온서대식이 얼굴을찌푸리며 말했다.

구역질을참는듯 입을 부풀려 다물고 있었다.

 머리를 끄덕인 이철우는 뒤쪽 혁띠에 차고 있던 칼집에서 대검을 쑤욱 뽑아 들었다.

선장과 그의 동료는 이철우가 주머니에서 지자이나 꺼내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들이 제각기 눈을 치켜뜨는 순간 이철우는 긴 머리 사내의 머리칼을 움켜쥐어

아래 쪽으로 잡아채었다.

목의 앞부분이 길게 드러났고 이철우의 대검이
무우를 샐듯이 목을 썩둑 베었다.
"속력을 줄여라."
이철우가 다시 말했으나 배의 속력은 이미 반 이상으로 줄여져 있었다.

눈을 크게 뜬 선장이 조종간을 움켜쥔 채 온몸을 떨었다.

이철우는 시체가 된 사내의 머리칼을 놓고는 피범벅이 된 칼날을 선장의 볼에 대고 닦았다.
"어차피 이놈도 죽인다. "
한국어로 이철우가 말하자 서대식이 머리를 끄덕였다
"네, 형님."
선장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이철우를 바라보았다.
눈의 초점은 흐렸고 온몸을 눈에 될 정도로 떨고 있었다.
이철우는 계단을 내려와 다시 후미의 라판에 섰다.

배는 얼음판 위를 미끄러져 가듯이 바다 위를 달려나갔다.

기운을 차린 부하가 선실을 나와 난간을 잡고 바다를 향해 침을 뱉고 있었다.

그가 침을 뱉는 방향에 둥근 단지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섬이 하나 보였다.

그 옆에도 접시를 엎어 놓은 것 같은 섬이 있었고 다시 그 뒤쪽에도 있다.
이철우는 난간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섬들을 바라보았다.

깊고 푸른 바다는 잔잔했고 햇살을 받아 물결 끝이 구슬처럼 반짝였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고 파랬는데 폐 속으로 호홉되는 공기는 깨끗해서

가슴을 청소하는 기분이었다.

저 섬들 중 하나가 만탄 섬일 것이고 거기에 김원국이 있다.

그리고 강만철과 김칠성도 제 고향처럼 돌아와 있을 것이다.
이철우는 난간을 움켜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피범벅이 되었던 오른손은 벌써 말라 손둥은 붉은 딱지가 뒤덮여 있다.

나도 피바다로 만들 것이다.

이를 악문 이철우는 번쩍 머리를 치궈들고 태양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햇살에 눈물을 말러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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