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인질 교환 (2)
"고 차장 그 양반은 이철우에 대해서 뭐라고 하던가요?"
이정환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20미터 사방에는 사람이 얼다.
"기무사에 헙조 의뢰를 했더니 차일피일 늦어져서 자체적으로 조사를 했다는구만,
이철우의 배경에 대해서."
유혁근이 침을 끌어 모아 삼괴고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윤곽이랄까, 이철우의 배경이 드러났다고 하더군.
예상대로 군인 집단이야. 그것도 한때 막강했던."
"누굽니까?"
입맛을 다신 이정환이 머리를 저었다.
"난 물어 보지 않았어."
"그게 무슨 말입니까?물어 보지 않았다니요?"
"모르는 게 약이야. 이철우 한 놈도 처리를 못하는데 알아서 어텀게 한다구."
"자네,날 경멸하나?"
"아니, 제가 이 계급까지 올라온 것이 무엇 때문인데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
"부지런히 움직이면 처자식 밥 굻기지 않는다면서?"
"그저 조금 가슴이 아픔니다. 겁도 나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해 봐. 그렇다고 세상이 뒤집어지지는 않을 거야."
"밤세계가 뒤집어질 것 같은데요.그리고 밤의 조직 체계가 우리가 이제까지
겪어 온 것하고는 완전히 달라질 것 같구요."
"밤은 밤이고 낮은 낮이야."
"세상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시간만 다를 뿐인데. 다른 모든 것은 같습니다. "
길게 한숨을 내쉰 이정환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유혁근을 바라보았다.
"난 내후년이 정년이야."
"과장님은 전결권이 있습니다. 몇 가지, 잊고 계시는지 모르지만."
이정환이 얼굴을 앞으로 내밀자유혁근이 자세히 보려는 듯한 몸짓을 했다.
"그 전결권 안에서만 저를 움직이게 해주십시오.
이철우의 가족문제 같은 경우처럼 말입니다. "
"내 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겠다는 말이로군."
"과장님 대신 뛰는 것이지요.
저는 과장님이 제가그러길 바란다고 생각했는데요."
"수작부리지 말어."
두툼한 턱을 치켜든 이정환이 벤치에 등을 기댄 채 한동안 잔디밭을 바라보았다
점심 시간이 끝나 가고 있어서 직원들은 옆쪽의 건물 입구로 하나씩 들어가고 있었다.
"보고는 꼭 하도록 해. 영문도 모르면서 목이 떨어지기는 싫으니까. "
이윽고 혼잣소리처럼 이정환이 말했다.
시계를 내려다본 고태석은 상반신을 돌려 뒤쪽에 앉은 부하에게 말했다.
"거기, 애들 먹을 즛 준비해 왔지? 아주머니에게 드려라."
"네, 형님 ."
부하가 발밑에 내려놓은 종이 봉투를 들고는 뒤쪽에 앉은 30대의 여자에게 건네었다.
"아주머니, 여기."
동그란 얼굴의 여자는 잠자코 봉투를 받았다.
12인승 소형 버스여서 맨 됫좌석에 네 명의 가족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60대의 할머니와 30대의 부인 사이에 여섯 살과네 살짜리 형제가 천진한 얼굴로
봉투에서 과자와 빵을 꺼내고 있다.
"야, 시간 충분하다. 영호한테 연락해서 천천히 달리라고 해, "
고태석이 앞쪽을 바라보며 말하자 부하가 휴대폰의 다이얼을 눌렀다.
버스는 강변 도로를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저녁 7시여서 차량이 밀리기 시작했으나 아직 심한 정도는 아니다.
버스의 앞쪽에는 네 명의 부하가 탄 승용차가 길을 인도하고 있고 뒤쪽에도
한 대가 따른다.
고태석이 탄 버스에는 여섯 명이 타고 있었으므로 모두 열네 명이
이철우 가족의 경호를 맡고 있는 셈이었다.
뒤쪽에서 아이의 울음 소리가 났다.
작은 놈이 큰 놈과 과자를 가지고 다투다가 짜증을 부리는 것이다.
이철우의 부인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큰 아이를 야단치자 이제는 큰 아이가 울었다.
할머니가 큰 아이를 안아 달래 주었다.
머리는 백발이었고 검은 피부에 주름살이 많은 얼굴이었으나 담담한 표정이었다.
세파에 오랫동안 시달려 와서 어지간한 환경의 변화에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철우의 부인은 조직에서 깼던 넓은 개인 주택에 옮겨져서 전화와 외출하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어도 자주 짜증을 냈고 때로는 울기도 했다.
철모르는 아이들을 다독거려 주고 끼니를 거르지 않게 해준 것은 할머니였0.
버스는 강변 도로에서 좌측으로 려어져 들어갔다. 이제 30분이면
충분히 크리스틴 호텔 앞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봐요, 청년."
뒤쪽에서 할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앞쪽에 탔던 여섯 명의 청년이
일제히 머리를 돌렸다.
할머니의 시선이 부하들 사이를 지나 똑바로 고태석을 향하고 있었다.
"네 , 할머니 ."
"우리 큰 애가 소변이 마렵다는데, 차를 세울 수는 없을테니 무슨 그릇이나 하나 주시구려 ."
"네, 할머니."
고태석이 부하들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윌 해? 찾아 드려라."
한동안 수선거린 끝에 유리창 세척용 물통을 찾아내었고 반쯤 남아 있던 물을
창 밖으로 쏟고는 부하 한 명이 큼지막한 대검을 허리 춤에서 뽐아내더니 통을 반으로 잘랐다.
그것을 바라보던 고태석은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서둘러 휴대폰을 귀에 댄 그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7시 반이었다.
"여보세요."
"ftr."
백동혁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그래, 왜?"
"거기 별일 없냐?"
"없다. "
"지금 어디냐?"
"15분쯤 후에는 도착한다. "
"여긴 안 왔어. 8시 정각에 도착하도록 해라."
"알고 있어 "
스위치를 끈 고태석이 앞을 바라보면서 버럭 소리를 쳤다.
"저 새끼는 왜 저렇게 달리는 거야?
속력을 늦추라고 해! 8시 정각에 도착해야 한단 말이다!"
놀란 부하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들었다.
차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칭얼대던 꼬마도 소리를 그쳤다.
백동혁은 지금 한세라의 아파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눈을 치뤄뜬 고태석은 앞을 노려보았다. 앞쪽의 차가 속력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 놓아서 차가운 밤공기가 몰려 들어왔다.
이재영은 어깨를 움츠리고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승용차 한 대가 아래쪽을 지나 오른쪽에 있는 주차장으로 다가갔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퇴근해 오는 듯한 30대의 남자였다.
"8시라고 했으니까 곧장'을 거야."
김선주가 벽에 한쪽 어깨를 기대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루한 듯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다.
"언니, 밖으로 나가면 안돼요?"
김선주가 얼굴을 옆쪽으로 조금 눕히면서 물었으므로 이재영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리즈 호텔에 투숙할 적에 호텔의 홍보직원인 그녀를 알게 되었었다.
얼굴도 예뻤지만 하는 짓도 밉지가 쟈았던 것이다.
"안돼, 여기서 움직이면 안돼, 선주씨가 따라온 줄 알면 남자들이 싫어할 거야."
시계를 내려다본 이재영이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3충이어서 건너편 아파트의 입구가 환히 내려다보였다.
아파트의 주민으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 뿐 3, 』호실의 현관은 샐렁했다.
그러나 어디엔가 한무리의 사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8시 20달전이었으니 이제 몇 분 후면 한세라가 돌아온다.
이재영은 창가에 내려놓았던 카메라를 들고 현관의 입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번의 정보는 김선주에게서 듣게 되었는데 행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김선주는 호텔의 흥보 업무를 담당하고 있기도 했지만 폭널은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조직원의 한 명에게서 8시에 인질 교환이 있다는정보를 듣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싫든 좋든간에 조직원 사이에서 일하는 처지였고 조직원은
그녀를 같은 식구로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언니, 이번에 또 특종을 따내면 한턱 단단히 내야 돼요."
창틀에 두 팔을 짚고는 그 위에 턱을 고인 김선주가 한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옆쪽의 문이 열리더니 아주머니 한 명이 그들을 지나 뒤에 있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한복을 짓는 집이어서 그들도 손님으로 와 있는 것이다.
"그래, 한잔 단단히 살게, 걱정 마."
망원 렌즈의 초점은 확실하게 잡혀졌다.
경비실의 경비가가슴에 꽃아 놓은 볼펜도 똑똑하게 보였다.
"언니, 백동혁이라고 있어요. 그 사람이 오늘 사모님을 인수한다는데, 별명이 개백정이야."
혼잣소리처럼 김선주가 말했다.
"바쁜 일이 없을 적에는 막대기를 들고 도살장으로 간다우.
가서 개나 소를 죽인대. 그래야 기운이 난대."
"체격도 작은 데다가 못생겼어.눈어풀이 밑으로 처져 있어서
언제나 자고 있는 얼굴이야. 눈샙도 갈매기 날개처럼 구부러졌어."
이재영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강제로 끌고갔던 사내였다.
그러나 그녀가 갑자기 그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회사가 하루종일 술렁거렸어.
회사 직원치고 오늘 사모님이 풀려 나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쉬쉬하지만 어차피 내일이면 알려질 일인데 언니한테 생색이나 낸 거야.
나도 구경 좀 하고."
"그런데 왜 백 무어라는 사람 이야길 꺼내?"
카메라를 눈에 댄 채 이재영이 묻자 김선주는 잠시 입을 열지 않았다.
이재영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징그러운 사람이야. 하지만 가끔씩 생각이 나.
그 자식이 날 무시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려."
"난 한번도 남자한테서 그런 취급을 당해 본 적이 없어.
언니, 이해할 수 있어?
더군다나 그 지지리도 못생긴 자식한테 말이야."
다시 카메라를 눈에 대면서 이재영은 머리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의 특종은 맡아 놓은 것이다.
"그 자식이 이번 일을 맡아 하고 있어. 대장이지, 두목이야.
난 그 자식이 도대체 어떻게 행세하는가를 보고 싶어.
이제까지 사무실에서만 보았거든."
"선주씨, 그 사람 좋아하는가 보구나?"
"고태석씨라고 있어.그 자식하고 서열이 같은데 대조적이야.
멋쟁이고 매너 좋고, 용모도 뛰어났어.
난 그 사람하고 사귀었거든. 반 년 가깝게 만났는데,
그 자식이 방해를 놓았어. 이젠 못 만나."
"이상해.못 만나니까 더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점점 생각이 안나."
이재영은 김선주가 이곳에 졸래졸래 따라온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숨어서 취재 사진을 찍듯이 김선주도 숨어서 누군가 를 보려는 것이다.
"저게 뭐야?"
깅선주는 무심한 시선을 아파트의 옆쪽으로 던지고 있었는데
그가 가리키는 쪽으로 머리를 돌린 이재영은 온몸을 굳혔다.
승용차 두 대가 아파트의 뒤쪽에서 나타난 것이다.
열 몇 동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여서 찻길만 해도 다섯 개가 넘었고 입구는 열 몇 개가 되었다.
승용차가 뒤쪽에서 나타났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승용차들은 라이트를 켠 채 천천히 다가왔다.
그들이다.
이재영은 카메라의 렌즈를 그쪽으로 대었다.
강력한 망원 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는 한수영에게서 빌린 것이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차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이제까지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재영은 긴장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주차장의 그늘에서도 나왔고 놀이터의 어둠 속에서도 나왔다.
그리고 놀란 것은 이쪽 빌딩의 아래에서도 그쪽으로 다가가는 사내들이 있는 것이다.
김선주도 숨을 죽이고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메라 렌즈에 사내들의 얼굴이 잡혔다.
모두 이쪽의 사내들이다.
차 안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승용차들은 머리를 아파트의 입구 쪽으로 향한 채 일렬로 멈추어 섰다.
사내들은 승용차들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서너 명이 사내가 몇 걸음 다가갔다.
그러자 백동혁의 얼굴이 보였다.
바바리 코트 차림이 낯에 익었다.
두번째의 승용차문이 열리더니 사내 한명이 나왔다.
그리고 됫문이 열리더니 다시 사내 한 명이 나온다.
이재영은 카메라의 셔터에 손가락을 걸쳤다.
백동혁과 마주 선 사내가 시계를 내려다보더니 휴대폰을 』에 대었다
그러고 보니 백동혁 옆의 사내도 귀에다 휴대폰을 붙이고 있다.
이윽고 머리를 끄덕인 사내가 몸을 돌렸다.
차의 문을 열고는 엉덩이를 뒤쪽으로 뽑고 있다.
다른 사내도 뒤쪽의 문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백동혁이 엉거주춤한 몸짓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요란한 파열음이 들리면서 앞쪽의 차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차의 앞쪽에 서 있던 두어 명의 사내가두 손을 벌리며 차를 막아 세우려는
몸짓을 하다가 겨우 옆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두번째 차도 거의 동시에 앞으로 발진을 하였는데 이쪽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반대쪽 됫문을 열고 들어선 사내는 마악 문을 닫는 중이었으나
이쪽에 섰던 사내는 문을 닫기 전에 허리 부근을 백동혁에게 잡혔다.
어지러운 고함 소리가 이쪽저쪽에서 터져 나왔고 승용차는 한쪽 문을 연 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입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백동혁에 의해 끌어 내려진 사내는 땅바닥에 굴고 있었는데
이쪽 사내들에 의해 어지럽게 발길질을 당하고 있다.
이재영은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번쩍 하면서 플래시의 섬광이 터졌다.
이를 악문 이재영은 다시 셔터를 눌렀다.
섬광이 다시 터졌다.
아래쪽에서 이쪽으로 올려다보는 사내들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김선주가 비명 소리를 냈다.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이쪽으로 달려 오고 있었다.
목검을 빼든 백동혈이 바바리 코트 자락을 풀어 헤친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렌즈에 잡혔다.
긴숨을 내쉬면서 이재영은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인질은 교환되지 않은 것이다.
이쪽은 저쪽의 속임수에 다시 당한 꼴이 된 것이다.
크리스틴 호텔은 무궁화 세 개짜리의 호텔이었으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설이 좋았다.
특히 지하실에 있는 사우나탕은 일급 호텔의 사우나보다 나았으므로 강북의 명소가 되어 있었다.
저녁 1시 50달이 되자호텔의 벨맨 김용구는모자를 고쳐 쓰고는 호텔의 현관으로 나놨다.
현관 직원인 임상용이 자동차 키를 점검하고 있다가 머리를 들었다.
"왜?누가 와?"
"응, 8시에 가족 손님이야."
"짐이 많아?"
"아니, 그건 모르겠어 "
전화 예약만 받았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른다.
한 시간 전에도 다시 연락이 온 모양으로 프런트의 장성환이 나가서 맞으라고 했던 것이다.
김용구는 머리를 돌려 좌우를 살폈다. 사거리의 모퉁이에 호텔이 위치해 있는 관계로
좌측에서도 들어을 수도 있지만 우측의 샛길로 해서도 올 수 있는 것이다.
가족 손님이건 단체 손님이건 제발로 들어와 프런트로 가면 좋으련만 몇 번씩 확인을 해서
현관으로 마중 나가게 하는 골치 아픈 손님들도 간혹은 있다.
옆을 지나는 아가씨에게 잠시 정신이 팔렸던 김용구는 다시 시계를 보았다.
8시 5분전이었다.
호텔의 우측에 있는 샛길은 왕복 이차선의 좁은 길이었는데 길 건너편에는
타자 학원과 서예 학원,치과 병원의 간판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자은 5층 건물이 있었다.
』층에 있는 서예 학원의 사무실 창가에 서 있던 유혁근은 벨맨이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는
것을 보았다.
자신은 금방 시계를 보았으므로 시간을 알고 있었다.
4분전 8시일 것이다.
유혁근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입맛을 다셨다.
벌써 몇 번째인지도 모르는 행동이었다.
어떻게 정보가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윗선에서 오늘 저녁 8시에 르리스틴 호텔에서
인질 교환이 있다는 정보가 내려온 것이다.
이정환은 그렇지 않아도 회의를 느끼는 판에 자존심까지 다쳐서
얼굴이 하암게 되었었고 유혁근은 유혁근대로 그에게 면목이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으므로 그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어 귀에 대었다.
"계장님, 옵니다. 승용차 한 대, 버스 한 댑니다. 아니, 또 있습니다.
승용차가 한 대 더."
서두르는 듯한 강 형사의 목소리였다.
머리를 든 유혁근은 자신의 발밑을 천천히 굴러가는 차량들을 보았다.
차량들은 토두 좌측의 깜박이를 켜고 호텔의 입구로 들어가려는 표시를 하고 있다.
"계장님, 보십시오. 호텔의 현관 쪽을 말입니다. "
강 형사가 다시 다급하게 소리쳤다.
호텔의 현관에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나와 있었다. 벨맨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의 사내들을 바라보고 있다.
차량들은 이제 좌측으로 꺾여 호텔의 현관 쪽으로 다가갔다.
그것을 바라보던 유혁근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호텔의 안쪽에서 승용차 한 대가 올라왔는데 지하 차고에서 올라온 것 같았다.
승용차는 호텔의 입구에서 멈추어 섰고 차 안에서 두 사내가 내렸다.
현관 당번이 그들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차가 일자로 멈춰 서 있어서 차량들의 통행을 가로막은 것이다.
이쪽의 승용차에서 사내들이 내리고 소형 버스의 문이 열리더니
두어 명의 사래가 내려섰다.
유혁근은 눈을 크게 떴다.
앞장서 내린 것은 강만철의 직계 부하이자 김원국 조직이 중간 보스인 고태석이었던 것이다.
버스 안에는 인질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세라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고태석과 사내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고태석의 뒤에 선 부하가
귀에 휴대폰을 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쪽은 붉은 옷을 입은 현관 당번이 사내에게 가슴을 세차게 떠밀려 됫걸음질을 치고 있는 중이다
"계장님!"
아직까지도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었던 유혁근은 강 형사의 외침 소리에 퍼뜩 놀랐다.
그리고는 와락 짜증 소리를 뱉으려던 입을 딱 벌렸다.
차고의 오른쪽 모퉁이에서 얼핏 보아서 스무 명도 넘는 사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모두들 손에 쇠몽둥이나 긴 칼을 쥐고 있는 것이 끔찍했고 더구나 아무 소리도 지르지 않고
쳐들어 가는 것에 소름이 끼친 것이다.
벨맨과 현관 담당이 곤두박질을 치면서 호텔 안으로 들어서다가 다시 그쪽에서 쏟아져 나오는
십여 명에게 부딪쳐 모자가 벗겨지고 땅바닥에 굴었다.
이쪽의 십여 명의 사내들은 일사 불란하게 움직였다.
한두 명이 맞아 땅바닥에 굴었으나 소형 버스를 향해 달려가 버스를 등지고 섰다.
그러나 원체 중과부적인 데다가 기습을 당한 것이다.
그들을 젖히고 서너 명의 사내들이 소형 버스로 달려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놈들은 한세라를 돌려주지 않고 이철우의 가족들을 빼앗아 가려는 것이다.
"계장님!"
강 형사도 다시 고함을 질렀으므로 유혁근은 정신을 차렸다.
이제 버스를 가로 막고 있는 사내들은 서너 명밖에 되지 않는다.
고태석이 미친 사람처림 날뛰고 있었다.
그는 어느 사이에 상대방의 쇠몽둥이 한 개를 빼앗아 악을 쓰며 휘두르고 있었다.
이제 그의 주위에는 한두 사람밖에 없다.
"좋아, 저놈들을 잡아!"
유혁근이 소리치며 휴대폰을 집어 넣었다.
강 형사와 이 형사는 이쪽빌딩의 1충에 있었다.
그들은제각기 권총을휴대하고 있을 것이니 우선 유혈을 막아야 한다.
서예 학원을 뛰쳐 나와 계단을 서너 개씩 뛰어 내려가는데 권총의 발사음이 들렸다.
두 발, 세 발, 밤 하늘에다 대고 그들이 어지럽게 공포탄을 쏘는 것이다.
이를 악문 유혁근은 3충을 내려와 다시 2충으로 달렸다.
공포탄 발사음 소리가 다시 서너 방 들렸다.
2층을 뛰어 내려가 1충의 복도를 달려나간 유혁근은 빌딩의 비상구를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이차선 도로를 건너면서 입을 따악 벌렸다.
십여명의 사내들이 쓰러졌거나 버스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강 형사와 이 형사는 보이지 않는다. 단숨에 길을 건너 그들에게로 다가간 유혁근이 소리를 쳤다.
"경찰이다! 경찰이야!"
그러자 버스 안에서 이상야릇한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유리창이 부서졌고 다른 물건이 부딪치는 소리토 났다.
권총을 빼든 유혁근은 버스 안으로 뛰쳐 올라갔다.
사내 두어 명이 겹치듯 의자위에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안쪽에 서 있는 것은 고태석이었다.
그가 다시 어지는 듯한 고함 소리를 지르며 쇠몽둥이로 의자를 내려쳤다.
"멈춰!"
고함을 지른 유혁근이 권총을 겨누었다.
"이 자식아! 멈추라니간! 경찰이다!"
그러자 고태석이 몸을 돌렸다. 눈에 핏발이 서 있었고 온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데다가 이를 드러낸 흥칙한 모습이었다.
"이것 봐! 이걸 보란 말이야!"
그가 다시 어지는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는데 유혁근은
온몸을 굳히고 나서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됫좌석에는 피투성이가 된 이철우의 일가족이 겹치듯 쓰러져 있었다.
아이도 있었고 엄마도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아이 한 명을 껴안고 있었다
숨을 들이킨 유혁근이 권총을 들어올려 고태석을 겨누었다가
자신도 모르게 천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버스 안에 총소리가 진동을 했고 고태석이 다시 울부짖었다.
"놈들이 이랬단 말이야!"
"이 개새끼, 널 체포한다. "
이를 갈듯 말하며 유혁근이 그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고태석이 다시 어지는 듯한 소리로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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