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여제(麗濟)동맹 10
그는 갑진년(644년) 정월에 고구려 사신이 조공을 바치러 오자
곧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에게 새서(璽書:황제의 인이 찍힌 친서)를 주어 평양으로 파견했다.
현장이 대궐에 이르러 보장왕을 알현했을 때 하필 개소문은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치러 가서
평양에 없었다.
개소문이 이미 신라의 두 성을 파하고 남쪽에서 한창 기세를 올릴 때였다.
보장왕은 현장이 바친 새서를 개봉했다.
신라는 우리나라를 섬기고 조공을 거르지 않으니 귀국은 백제와 더불어 마땅히 전쟁을 그치고
병장기를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또다시 신라를 침공한다면 나는 명년에 군사를 일으켜 부득불 귀국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주가 보낸 글을 읽고 난 보장왕은 돌연 안색이 변하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황급히 전장으로 사람을 보내 연개소문을 불러들였다.
개소문이 돌아오자 왕은 당주의 국서를 전하고 함께 현장을 만났다.
현장이 제 주군의 뜻을 말하고 거듭 신라를 침해하지 말라고 요구하자
개소문은 미간에 내천자(川)를 그리며 대답했다.
“우리와 신라는 원한으로 틈이 생긴 지가 오래요.
먼저 신라가 빼앗아간 우리 땅 5백 리를 되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은 아마 그치지 않을 것이외다.”
“이미 지나간 일을 추론해 무엇하겠소?
지금 요동의 제성(諸城)들도 본래는 다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우리는 이를 말하지 않았는데
왜 고구려만 반드시 옛땅을 찾으려는 것이오?”
현장이 따지고 들자 개소문은 잠시 난처한 기색을 보이다가,
“요동의 제성이 중국의 군현이었던 것은 우리 호태 대왕 시절 요서 땅이 전부
우리 강역이었던 것과 같소. 그렇게 따지자면 끝이 없는 얘기요.
하지만 신라가 빼앗아간 죽령 서북은 그것과는 다르오.
우리 양원 대왕 시절에 함부로 성읍을 점령하고 백성들을 잡아갔으니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올시다.”
하며 맞섰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조공으로 말하면 우리 또한 한 번도 거르지 않았는데 귀국의 처사는 어찌 그리도 편파적이오?
수년 전 신라의 김유신이란 자가 우리 낭비성을 쳐서 성주를 죽이고 성읍을 착취했을 때는
한 마디도 하지 않다가 왜 우리가 신라를 칠 때만 트집을 잡으시오?
나는 그것이 대단히 불만스럽소.”
하니 현장이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귀국한 현장으로부터 개소문의 반응을 전해 들은 이세민은 머리털이 곤두설 만큼 격노했다.
사해가 이미 그의 발 아래 복속하여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던 그였다.
“개소문은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해치며 백성들을 잔인하게 괴롭히더니
이제는 또 짐이 내린 조명까지 받들지 않으니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즉시 휘하의 장수들과 만조의 문무 백관들을 불러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때가 갑진년(644년) 늦봄,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한 지 불과 얼마 뒤의 일이었다.
“폐하의 용병과 지략은 신과 같아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폐하께서는 수말(隋末)의 난리를 친히 평정하시고 적을 무찔렀습니다.
북방의 오랑캐가 변방을 침략하고 서쪽 무리가 무례하게 굴 때도
장군들을 시켜 이들을 요격하였나이다.”
한사코 요동 정벌을 만류하던 간의대부 위징(魏徵)마저 죽고 없는 데다
삼공(三公:정승) 방현령(房玄齡)은 병상에 있었다.
위징의 뒤를 이은 간의대부 저수량이 간곡히 말했다.
“그러나 지금 폐하께서 장수를 내어 고구려를 토벌한다는 말을 들으니
신으로선 의심과 혼란스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폐하의 신출귀몰한 무용과 영예로운 명성은 북주(北周)나
수나라의 군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군사가 요하를 건너가선 반드시 적을 이겨야 합니다.
만일 이기지 못하면 폐하의 위엄을 멀리까지 떨칠 수 없게 되고,
폐하께서는 필경 크게 노여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전란에 빠져버리면 나라의 안위는 결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개부의동삼사 울지경덕도 만류했다.
“천자께서 친히 요동으로 어가를 옮기신다면 황태자는 정주(定州)에서 국사를 돌봐야 합니다.
결국 동서 두 서울(장안과 낙양)의 국고는 텅 비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요동은 길이 멉니다. 지난날 양현감(楊玄感:隋나라 말의 叛臣)의 변고와 같은 것이
일어날까 심히 두렵나이다.
고구려와 같은 변방의 소국을 왜 친히 정벌하려 하시옵니까?
비록 고난을 이기고 승리해도 무공이라 칭하기 어렵고,
자칫 패배하면 세상의 비웃음만 살 뿐입니다.
그럼에도 굳이 고구려를 정벌하려면 장수들에게 맡기십시오.”
그 뒤로도 수많은 신하들이 친정(親征)에 나서려는 황제를 맹렬히 뜯어말렸지만
이세민은 듣지 않았다.
7월에 이세민은 홍주(洪州:강서성 남창), 요주(饒州:강서성 심양), 강주(江州:호북성 소무창)
일대에 칙령을 내려 전선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營州:하북성 역주)
도독 장검(張儉)을 파견해 유주(북경)와 영주의 군사, 거란, 해(奚), 말갈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해 그 형세를 살피게 했다.
또 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을 곡식을 운반하는 궤수사(運糧使)로 삼아 하북 각주에서는
모두 위정의 절도를 받도록 하되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편의종사(便宜從事)를 허락하였고,
소경(少卿) 소예(蕭銳)에게는 하남 각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바닷길로 들어오게 했다.
결전을 앞두고 대대적인 전쟁 준비에 착수한 셈이었다.
이를 알아차린 연개소문은 그해 9월, 사신을 장안에 보내 백금(白金:은)을 바치며 화친을 도모했다.
그는 정변을 일으킨 뒤부터 나름대로 당나라를 경계하여 치밀한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수십 년간 노역과 악정에 시달린 국력은 단기간에 회복되지 않았다.
부득불 전쟁이 일어난다면 어쩔 도리가 없었지만, 되도록 시일을 늦춰보자는 것이 연개소문의 의도였다.
그래서 해마다 정월이면 변함없이 조공사도 보내고 거짓으로 당을 섬기는 체하며 시간을 벌고 있었다.
연개소문이 백금을 보내오자 간의대부 겸 황문시랑(黃門侍郞) 저수량이 말했다.
“막리지는 임금을 죽여 구이(九夷:곧 고구려)에서 용납할 수 없는 자입니다.
이제 그를 토벌하려는데 백금을 바치니 이는 고정의 부류이므로 받지 않는 것이 타당합니다.
옛날에도 군주를 살해한 적을 토벌할 때에는 그들의 재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재화를 받고 무슨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겠나이까? 신이 생각하기엔 앞으로 막리지가 바치는 물건은
어떤 것이라도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세민은 저수량의 말이 옳다고 여겨 선물을 물리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백금을 들고 온 고구려 사신이 말하기를,
“저희 막리지께서 관인 50명을 장안에 보내려고 하니 숙위할 것을 허락해주십시오.”
하니 이세민은 크게 노하여,
“너희들은 모두 고무(高武:榮留王)를 섬겨 관작을 받았는데 막리지가 임금을 죽이고
역모를 일으켜도 아무도 이를 복수하지 않고 하물며 이제 그를 받들며 대국을 기만하니
어찌 그 죄가 막대하지 아니한가?”
하고는 사신 일행을 모조리 옥에 가두고 말았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5장 여제(麗濟)동맹 12 (0) | 2014.11.01 |
---|---|
제25장 여제(麗濟)동맹 11 (0) | 2014.11.01 |
제25장 여제(麗濟)동맹 9 (0) | 2014.10.31 |
제25장 여제(麗濟)동맹 8 (0) | 2014.10.31 |
제25장 여제(麗濟)동맹 7 (0) | 2014.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