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여제(麗濟)동맹 9
처음에 여주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김춘추를 사신으로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춘추는 그다지 탐탁찮은 기색을 보였다.
여주는 춘추에게 이유가 있음을 짐작하고 저녁에 따로 그를 불렀다.
“이번만은 다른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으면 합니다.”
과연 춘추에겐 다른 생각이 있었다.
“신이 당주에게 가서 사정을 말하고 동맹을 맺기란 어렵지 않지만
만일 당주가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경우 이를 거절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당주의 속셈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우선 다른 사람을 보내어 당주의 의사를 알아보고 나서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춘추의 말이 옳다고 여긴 임금은 고구려에 다녀온 사찬 훈신을 다시 당나라로 급파했다.
여주는 훈신 편에 보낸 친서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한 일을 말하고 그들 양국이
곧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것 같다는 삼한의 긴박한 동향을 전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반드시 사직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므로 삼가 사신을 파견해
대국의 군사를 청하오니 구원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입조한 신라사(新羅使)는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어찌하여 춘추공이 오지 않았는가?”
글을 읽고 난 당주 이세민은 제일 먼저 김춘추의 안부를 물었다.
훈신은 미리 준비한 대로 춘추가 갑자기 복통이 나서 자신이 대신 왔다고 둘러댔다.
당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나는 실로 그대 나라가 고구려와 백제에게 시달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번번이 사자를 보내
삼국이 서로 화친하도록 권하였으나 돌아서면 내 당부를 저버리고 맹세를 번복하니
근심이 아닐 수 없다.
미루어 짐작컨대 여제(麗濟) 양국은 그대 나라의 땅을 기어코 병탄하여 분할하고야 말 것 같구나.
그대 나라에서는 과연 어떻게 저들의 침해를 모면하고 사직을 보전하려는지 그 모책을 듣고 싶다.”
훈신은 국궁재배한 뒤 대답했다.
“우리 임금은 형편이 궁하고 계책이 다하였으므로 특별히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로지 위급한 사정을 대국에 알려 구원을 받음으로써 나라를 보전하려 할 따름입니다.”
훈신의 대답을 듣자 이세민은 다시 입을 열어,
“나에게 세 가지 방법이 있으니 들어보겠는가?”
하고는 내처 말하기를,
“내가 변방의 군사를 조금 보내 거란과 말갈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쳐들어가면
그대 나라의 위급함은 저절로 풀려 적어도 1년쯤은 환난을 면할 수 있겠지만
그 뒤에 우리 군사가 계속 요동에 주둔하지 않으면 도리어 침략을 마음대로 하여
4국이 함께 소란할 것이다.
그대 나라엔 미안한 일이나 이것이 나의 첫번째 계책이다.
또는 내가 그대에게 수천의 주포(朱袍:붉은 옷)와 단치(丹幟:붉은 기)를 주어
만일 여제(麗濟) 양국이 쳐들어올 때 그것을 세워 벌여놓으면 저들이
우리 군사가 온 줄 알고 필연 달아날 것이니 이것이 두번째 방책이다.”
하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백제는 해역이 험한 것만을 믿고 병기구를 수리하지 않으며 남녀가 서로 뒤섞여 연회만 하고 있으니
우리가 전선에 갑졸을 싣고 함매(銜枚:정숙을 위해 군사들의 입에 물리는 막대)를 물려
가만히 쳐들어가고 싶지만 그러기에 앞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대 나라가 이웃의 업신여김을 당하여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것은 임금이 여인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겪는 모든 어려움은 여기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친척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임금으로 삼되,
자연히 혼자 갈 수는 없으므로 군사를 파견해 그를 호위하게 하였다가
그대 나라가 안정이 되고 나면 정사를 인도하여 자수(自守)토록 하는 것이 나의 세번째 계책이다.
그대는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지 잘 판단해보라. 어느 것을 좇겠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나 당주가 말한 그 어떤 방책도 훈신으로선 감히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훈신은 대답을 미루고 그저 예예, 하고만 말하자
이세민은 훈신에게 결정권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 그대는 위급함을 고하고 군사를 구걸할 인재가 아니구나.
어찌 너 따위가 사신으로 왔단 말인가?”
훈신은 무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 일은 이세민으로 하여금 삼한 정세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구려가 백제와 동맹을 맺은 사실을 알게 된 이세민은 이를 묵과할 수가 없었다.
특히 그를 노엽게 만든 것은 고구려였다.
그는 연개소문이 당조에 지극히 우호적이었던 건무왕을 살해하고 친당파 신하 1백여 명을
참살한 것이 줄곧 마음에 걸렸다.
한때 절친한 사이여서 더욱 원망이 컸던 것일까.
그는 현무문에서 형과 아우를 죽인 뒤에야 연개소문이 원길과 친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뒤에 만날 기회가 있으면 해명하려 하였으나 연개소문은 인사도 없이 장안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거사를 고깝게 여긴다는 것쯤 능히 알 만한 처사였다.
그러고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연개소문이 어느 날 갑자기 요동의 맹주로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난 거였다.
황제가 되기 전부터 고구려의 동향에 부쩍 신경을 곤두세워온 그로선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개소문은 그 임금을 시해하고 국정을 마음대로 하니 정말 참지 못하겠구나.
오늘의 우리 병력으로써 요동을 취하기란 어렵지 않지만 다만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이
마음에 걸려 군사를 내지 못했을 뿐이다.
만일 거란과 말갈을 시켜 고구려를 치면 어떻겠느냐?”
정변 소식이 전해진 직후 이세민은 신하들을 불러모으고 물었다.
그러자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나서서 대답했다.
“개소문은 이미 자신의 죄가 큰 것을 잘 알고 대국의 토벌을 두려워하여 수비를 강화할 것입니다.
만일 폐하께서 더 참고 계시면 그는 조만간 안심하고 스스로 풀어져서 반드시 교만함과 포악함을
드러낼 것이니 그때를 기다렸다가 토벌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세민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게다가 정변이 일어난 뒤로 고구려가 거만하게 나오면 모를까,
겉으로는 조공사도 변함없이 보내고 심지어 도교(道敎)를 가르칠 만한 사람도 보내달라는
요청까지 해오니 군사를 일으킬 명분도 없었다.
그는 연개소문을 안심시키기 위해 고구려에 책봉사를 파견하고 조서로써 말하기를,
먼 나라를 회유(懷柔)하는 법규는 전왕의 아름다운 선례이며 세대를 계승하는 의리는
역대의 구장(舊章)입니다.
고구려왕 장(臧)은 바탕과 마음씨가 민첩하고 아름다우며 식견이 발라
일찍이 예교(禮敎)를 배워 덕의가 있음을 들었고, 번방의 왕업을 이어받아 정성을 다하므로
마땅히 작위를 내릴 만합니다.
이에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합니다.
하였다.
그 뒤로 이세민은 연개소문이 스스로 경계를 풀고 교만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신라사가 와서 백제와 동맹한 사실을 말하자 더 이상 이를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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