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풍우연귀래

33. 기나 긴 사연

오늘의 쉼터 2014. 10. 26. 12:26

33. 기나 긴 사연

 

 

하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주약란은 약간 노기를 띄웠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누가 했어요?]
[홍이 언니와 함께 생각하고 의논한 거에요.]
하는 말에 주약란은 무슨 결심이라도 한 듯 표정을 굳혔다.
[심소저,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말아요.

허황한 말을 해서 양상공이나 나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지 말
고 그만해 둬요. 만일? 이런 일을 강호에서 듣는다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하며 비웃겠어요.]
하고는 일단 말을 중단했다가 좀 더 차갑게 말을 다시 이었다.
[심소저도 그렇지만 이소저나 양상공도 그런 생각을 하면 안돼요. 혼인은 인생에 가장 큰 대사예요. 그런 것
을 깊이 생각하지않고 한다는 것은 모두 경솔하다고 밖에 볼? 수 없어요. 앞으로는 더 말하지 말아요. 저도
대답하지 않겠어요.]
그제야 하림은 주약란이 노여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힘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둘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러갔다. 그리고 잠시 후 먼저 하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잘 알겠어요. 저는 너무나 언니를 좋아하기 때문에 언니와 함께 살고 싶어서 한 말이에요. 모두 용서해 주
세요.]
하고는 쓸쓸히 웃었다.
그러한 하림을 보는 주약란의 마음이? 괴로웠다. 아직 어린 마음에서 혼인이라는 대사가 어떤? 것인지도 모
르는 듯? 천진난만하게 하는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도 없지만? 한편 맹랑하기도 하고 어떻게 들으
면 정신이 나간 사람같기도 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주약란 자신이? 진정 양몽환에게 애정이 없다면 모르지만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는 지금 하림에게
자기의 마음 속을 보인것같아 가슴이 콩콩 뛰기도 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차가운 음성으로 말
했지만 그 소리에 슬퍼하는 하림이 또 측은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약란은 음성을 부드럽게 바꾸었다.
[됐어요. 그럼 우리 다른 이야기를 해요.]
그러자 하림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주약란의 손을 끌어 침대에? 앉히고 자기도 옆에 앉으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언니!]
[?............]
[꼭 한가지만 더 말할 것이 있어요.]
[무슨 이야긴데? 또 그런 이야기라면 듣지 않겠어요.]
[아니에요. 조금만 들어주세요.]
주약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럼 해봐요.]
[우리 부부 이야기인데요.]
하고는 다음과 갈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홍이 언니와 저는 혼인식을 마친? 첫날밤 서로 신부방에 들기를? 거절했어요. 그래서 그이는 혼자 서재
에서? 밤을 새웠어요. 그로부터 그이는 서재가 바로? 침실이 되었어요.? 그것은 홍이 언니와 제가 그이에게
어려운 문제를 하나 내놓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침실에 들기로 했어요. 그런데 언니는? 그 어려운 문
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바로 언니와 관계된 일인 걸요.]
[무공에 관한 것인가?......]
[아니 언니를 수월산장으로 오시게......]
하고 말하자 하림의 말을 주약란은 황급히 손을 흔들어 제지시켰다.
그리고는 매우 불쾌한 듯이 눈썹을 올렸다.
[그런 이야기는 듣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그만둬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화나게 하지 말아요.]
노골적으로 불쾌하게 말하는 주약란을 바라다보던 하림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러한 하림을 내려다보는? 주약란은 저토록 하림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하는 생각에 발칵 성이 나
기도 했다. 그러나 감정을 지그시 누르며 모른 체하고 화제를 돌렸다.
[심소저, 불을 좀 더 크게 해요. 도옥이 보낸 편지를 봐야 되겠어요.]
하는 말에 무안해하던 하림은 한 자루의 초를 더 켜놓았다.
그러자 주약란은 음성을 더 부드럽게 해서 말했다.
[이리와요, 같이 읽어요.]
그제야 하림은 슬픈 기색을 거두고 주약란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 주약란은 <주약란 귀하>라고 쏜 겉봉부터 읽어 내려갔다.
<양몽환이 주소저의 협조를 얻어 강호에 이름을 날리며? 아울러? 무술계의 존경과 총애를 받는데 비하여
이 도옥은 단인필마(單人匹馬)로서 그와 싸워야 할 불행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천하를 아무리 둘러 보아
도 이 도옥을 도와 대업을 이룩해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이 도옥에게 복을 내려 웅후하
고 절묘한? 무공과 기지를 주어 대업의 무림제패의 날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도옥은 반드
시 천하 무술계를 통솔하고 그 이름을 후세에 길이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형세를? 돌아보면 모든 고수들이
이 도옥에게 대항해 오고 있습니다만 주소저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 일격에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비록 양몽환을 대협이라고? 떠받들지만 그의? 속인기질(俗人氣質)로서는 무술계
를 통솔할 능력도 없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소접의 무공이 극치에 달했다
고 하지만 더 이상의 진보도 없을 것이고 이 도옥을 괴롭힐? 존재도 되지 못한다는 것은 주소저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이 도옥에게는?? 실로 불행히도 주약란 한 사람만이 무공이나? 재질로서
이 도옥과 적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 도옥의 앞 길이 평탄치 않으리라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하늘이 이 도옥을 도와 귀원비급을 내려? 주시고 또 극치의 무공까지 터득하게 되었다
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천기진인과 삼음신니의 여음(餘陰)으로 이제? 일년 후면 완전무결한 무공으로
이 도옥은? 만천하 무술계를 놀라게 할 것입니다. 이로서 명석한? 주소저는 깨닫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이
도옥으로 말하면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외롭고 괴로운 저주의 나날을 지내왔습니다. 그러던 중에도? 더
불행이 덮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양몽환이라는 놈입니다. 도대체 양몽환이 어떤 자이기에? 이 도옥 앞에 튀
어나와 어려서부터 장래를 약속했던 이요홍을 뺏아가고 천하에 미녀라는 미녀를 모두 휘어잡으니 괘씸하고
분통이 터질 노릇입니다. 그래서 나 도옥은 귀원비급을 손에 넣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와신상담(臥薪嘗膽)
으로 무공을 닦아 이 천하를 뒤집어 엎어 분함을 풀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은 또 이 도옥에게 좋은
기회를 주어 백장봉(百丈峯)에서 재색을 겸비한 아름다운 여인을 주셨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당신 주소저
입니다......>
서찰은 더 계속되었지만? 비위가 상하고 메스꺼워 더 읽을 흥미도? 없는 주약란은 크게 코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악마같은 도옥, 자신의 행실은 돌아보지도 않고 내가? 뭐 어쨌다고......흥! 더 읽어 보나 마나지. 심소저,
그만 태워 버려요.]
하면서 들고 있던 서찰을 하림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러자 하림은 정색을 했다.
[언니, 이왕 읽은 서찰인데 마저 읽어요. 뭐라고 또 썼는지...]
하고는 하림이 대신 소리내어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이 도옥은 옛날에 너무? 방종하여 주소저의 정(情)을 얻기에 여러가지로 어려운 난관이 있을 줄
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주소저의 재색이나? 무공으로 볼 때 이 도옥과 같은? 남자가 아니면 배필이 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사방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이 도옥보다 더 훌륭한 남자가 이 세상에 어
디? 있는가를 말입니다. 이 도옥도 몇번 고쳐 생각하고 이제? 결심했습니다. 만일 주소저가 이 도옥의 위인
됨을 잘 보시고 가히 남자답다면 이 도옥과 배필이 되어 주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이 도옥은 즉각 천용방
을 해산하고 새 사람이 될 것은 물론 강호에서 손을 떼고 주소저와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 내려가던 하림은 읽기를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건방진 소리군요. 언니. 옛날 동숙정 언니를 생각해서라도 감히 이런 말을 란이 언니에게 할 수 있어요? 그
리고 이제는 언니에게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속이려고......]
하고 한탄하며 다시 서찰을 읽어 내려갔다.
<주소저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주소저가? 이 도옥과 배필이 되어 애정으로 감싸 준다면 천하 무술계
를 재난의 풍파에서 구해내는 것은 물론? 수 백 수 천 명의 인명을 죽음에서 구하는 일입니다. 주소저가 이
도옥과 배필이 된다는? 것은 실로 만 천하가 경하해 줄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뿐아니라 이 도옥에게는 만행(萬幸)이오? 나아가서는 주소저께서도 행복이 약속된다는 것을 알아? 주시고
부디 기쁜 회답을 주시길 고대하겠습니다. 곧 회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도옥>
이렇게 해서 다섯 장의 긴 서찰은 끝을 맺었다.
서찰을 다 읽은 하림은 서찰을 말아 쥐며 주약란에게 물었다.
[다 읽었어요. 태워 버릴까요?]
이때 주약란은 하림이 읽는 서찰에 귀를? 기울이고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다가 하림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태워 버려요.]
그리고는 잠시 후에 계속해서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양상공에게도 말하지 말고요.]
하는 것이었다. 도시 도옥의 서찰? 따위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조금 생각해 볼 필요
가 있다는 것인지? 주약란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하림이 서찰을 다? 태우기를 기다려
주약란도 틀고 있던 겉봉을 태웠다.
그리하여 장문(長文)의 서찰은 삽시간에 재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자 주약란은 휴! 한숨을 쉬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 조소저가 귀원비급을 갖고 있을 때는 너무 나이가 어려 무공을 연마한 방법이 조금 달랐어요.]
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꺼내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도옥이 보낸 서찰을 읽고 난? 직후여서
그 서찰과 관계있는 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하림은 되물었다.
[어떻게 다른가요?]
[다른 사람들은 쉽게 시작해서 어렵게 무공을 터득했지만 조소저는 어렵게 시작해서 쉽게 터득한 셈이에요.
그리고 나이가 어린탓으로 귀원비급의? 책장이 두 겹으로 되어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렇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진기역연은 물론 그보다 더 절묘한 무공도 터득했을 거에요.]
그렇다면 지금 도옥의 무공은 굉장하군요. 그래서 일년만 지나면 언니의 무공을 능가한다고 하는군요.]
[그래요. 그래서 나는 이번에 이곳? 수월산장으로 와서 조소저와 그리고? 여러분들과 함께 무공을 연구해서
도옥과 대항하자는 것이에요.]
[그럼 저도 언니를 도와드릴께요.]
[물론 도와줘야 해요. 지금 나는 어떤? 무공을 연구하고 있는데 그 무공만? 터득하면 도옥을 겁내지 않아도
돼요.]
[정말이에요?]
[그럼, 거짓말을 하겠어요?]
이와 같이 주약란과 하림은 밤이 새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 하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수월산장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사흘이라는 시일이 지나갔다.
그런데 벌써 수월산장으로? 왔어야 할 조소접이? 더구나 건마를 타고? 한 걸음 먼저? 수월산장으로 간다고
떠난 그녀가 사흘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된 일인지 아직 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날도 조소접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던 이른 아침.
뒷짐을 쥔 채 천천히 앞 뜰을 거닐던? 양몽환은 이른 아침의 안개를 헤치며 달려오는 한 필의 말을 발견하
고 긴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직? 오지 않는 조소접을? 기다리던 양몽환은 눈을? 크게 뜨고 유성같이? 달려오는 건마를
주시했다. 혹시 조소접이 오는가? 해서였다. 그러나 안개를 헤치고? 차츰 자태를 나타내는 건마에는 조소접
같지 않은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아무리 크게 눈을 뜨고 주시해도 건마를 탄 사람은 조소접이 아니었다.
이윽고 양몽환과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서는 것이었다.
이때 양몽환도 이른 아침부터 말을 몰고 오는 사람이 누굴까 하고 경계 태세를 취하며 마주 나갔다. 그러나
말 위의 사람은 경장을 한 장정으로서 낯이 익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단 멈추어 섰던? 말은 양몽환이 나타나자 히잉!? 소리를 내며 그대로 달려나오지 않는
가. 그리고 더욱 놀랍고 이상한? 것은 말 위에 앉은 장정이 양몽환을 보고도 못본 체하는지 아니면 보지 못
했는지 그대로 앉아서 말고삐를 쥐고 있는 것이었다. 일단 땅을 박차며 앞으로 내달린? 말은 양몽환과 정면
으로 부딪칠 기세로 달려나오고 말 위에 앉은 장정도 역시 말을 세우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위
기에 직면한 양몽환은 재빨리 옆으로 비켜서며 번개같이 말고삐를 잡자마자 힘껏? 잡아당겼다. 그제야 달려
나오던 말은 앞? 발을 들었다 놓으면서 멈추어 서는 것과 함께 장정도 떨어졌다.
그제야 양몽환은 떨어진? 장정이 심한 중상을 입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급히 장정의 가슴에 손을 얹
었다. 그리고? 가늘게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느낀? 양몽환은 재빨리 오른 손을 장정의 등에 대고 진기를
돋우어 주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긴 숨과 함께 가래를 뱉아내며 장정은 눈을 뜨고 양몽환을 올려보는 것이었다.
[당신이 바로 양대협이시오?]
[그렇소만 당신은 누군데 어디서 이토록 중상을 입었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장정은 입술만 움직일 뿐 말을 하지 못하다가 선혈을 뿜으며 기절해 버리고 마는 것이
었다. 양몽환은 급히 가슴에 손을 대어 보았으나 숨은 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시 손만 써서 치료해 준다면 생명은 건질? 수 있을 것같아 장정을 안고 집으로 들어가 방에 눕혔다.
그리고 추궁과혈수법으로 장정의 여러? 혈도를 유통시켰으나 장정은 좀체로 혼절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얼마동안을 그렇게 치료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손을 떼고 길게 탄식한 양몽환은 무슨 일로
장정이 이곳까지 왔는지는? 모르지만 우선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혹시 주약란이라면 치료해서 회생시킬 수
있을 것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급히 주약란을 찾았다. 그러나 검술을 익히고 있는 하림만이 있을 뿐 주
약란은 보이지 않았다.
[주소저는 어디 갔소?]
그러자 하림은 뒷뜰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언니는 저쪽으로 가셨어요.]
뒷뜰로 급히 달려간 양몽환은 화초 앞에 물끄러미 서 있는 주약란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양몽환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주약란이 먼저 물었다.
[조금전 중상을 입은 한 명의? 장정이 말을 타고 달려와 기절했습니다 좀체로 깨어나지 못하는군요.]
[아는 사람인가요?]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요? 그럼 누굴까요? 모르는 사람이 이곳까지 올리가 없지 않아요?]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주소저에게 물으려고 왔습니다. 치료도 해주어야겠고......]
[지금 어디 있어요?]
[안채에 있습니다.]
[참 이상하군요. 모르는? 사람이 이곳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 왔을 거에요. 양상공
의 장인님은 어디 계시죠?? 아무래도 노영웅님이 가보시는 것이 좋겠어요. 노영웅님이 그 장정을 보시면 무
슨 일인지 아실 거에요.]
하고 이창란에게 나가보도록 미루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도 장인 어른 같으면 혹시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곧 몸을 돌려 이창란을 찾아갔다.
이때 이창란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의자에? 깊숙이 묻히듯 앉아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가오는 인기척에 눈을 뜨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사위인 것을 알고는 반가히 맞아주었다.
[자네 잘 왔네. 마침 자네와 상의할 일이 있었는데......]
[무슨 말씀이라도?......]
[음. 지금 검북 네 형제가? 알려 준 말인데 이? 수월산장 주위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사실인
가?]
하는 것이었다.
[예. 저도 지금 그 일 때문에 급히 찾아왔습니다.]
[음......자네도 알고 있었군......그래 주소저에게 알렸나?]
[예. 지금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래 뭐라든가?]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면 이상한 일이라고 하더군요.]
[조심해야겠군. 주소저의 말을? 들으면 도옥은 아직 내상이? 중해서 나타나지 못할 것이고......
혹시 자네는? 이 무림 중에서 특별히?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도옥을 제하고 말이네.]
[글쎄요......별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이상한 일이군......]
하는 바로 그때였다.
흘연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내며 한 필의 말이 수월산장의? 대문을 우당탕 열어젖히며 들어오는 것이었다.
순간, 이창란은 벌떡 일어나며 용두지팡이를 거꾸로 쥔 채 달려나갔다. 그 서슬에 양몽환도 급히 뒤를 따라
나왔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요란히 필마를? 물고 달려든 사람은 바로 등가보의 소보주인 등개우가 아닌가, 반갑고 기
쁜 마음에 양몽환은 주먹을 마주 쥐고 흔들었다.
[등형! 오랜만이오. 혼자 오셨소?]
그러나 등개우는 말 위에 목석처럼 앉아 있을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순간 이상히 생각한 양몽환은 가까이 다가가 등개우를 흔들었다.
그러자 흔들흔들하던 등개우는 썩은 기둥처럼 푹 쓰러지며 그대로 굴러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깜
짝 놀란 양몽환은 급히 말에서 떨어지는 등개우를 받아 안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땅에 눕히고 등개우의 요혈을 짚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를 주무르며? 깨어나기를 기다
렸으나 등개우도? 좀 전에 장정처럼 멀거니 눈을 뜬? 채 좀체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한편 밖으로 뛰어나갔던 이창란은 별로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채 수염을 풀풀 날리며 곧 되돌아 오다
쓰러져 있는 등개우를 주무르고 있는 양몽환을 보고 묻는 것이었다.
[그가 누군가?]
[바로 등고강의 아드님인 개우형입니다.]
[등개우? 웬일이냐?]
[어느 누구에게 중상을 당한 것같습니다.]
이창란은 입을 한 일자로 국 다물고 눈을 번쩍였다.
[음......어떤? 자가 무예계의? 인사들을? 고의로? 중상을 입혀? 이곳? 수월산장으로 보내고 있군......틀림없어.
무슨 심사로 이따위 비열한 짓을 한담......]
그러는데 또 다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다섯 필의 말이 질풍처럼 달려와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었다. 어떻게 된 노릇인지 미처 정신조차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경계 태세를 취하며 말 위에 앉아 있는 다섯 명의 장정을 휘둘러 보았다.
그들은 모두 한 자루의 장검을 각기? 쥐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썩은 기둥처럼 풀썩풀썩 쓰러지며 말 위에
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었다.
일시에 여섯 명의 반송장을 질펀하게 마당에 눕힌 양몽환은 거의 미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장인 어른,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며 당황하는 양몽환의 말에 이창란도 이마를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예전같으면 내 성질에 돌보지도 않겠네만? 자네는 그래도 대협아닌가. 우선 편안히 눕혀 놓도록 하게.]
하고는 먼저 쓰러진 장정을 안아다 등개우 옆에 뉘어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사람을 안으려고 하는데 또?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나며 또 다른 다섯 필의 말이 마당으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그 말 역시 반 죽음 상태의 사람들을 태우고 달려온 것이다.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달려드는 중상자에? 그만 분통이 터진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로 땅을 후려 갈기며 소리
치고 말았다.
[어느 놈이 이따위 장난을 하는지. 음, 내가 나가서 당장에 요절을 내야지!]
하고 뛰어나가려는 이창란을 급히 만류한 양몽환은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 참으세요. 이미 검북사의가 나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거 어디 분통이 터져 보고 있을 수 있나?
이왕 중상자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인데 어디 끝까지 받아들여 봅시다. 도대체 몇명이나 보내는지......]
그제야 이창란도 용두지팡이를 옆구리에 끼고? 말에서부터 쓰러져 떨어지는 장정을? 한 명씩 받아 안아 나
란히 눕혀놓는 것이었다.
그러자 또 한 때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며 중상자를 실은 말이 달려오고 그리하여 삽시간에 마당에는 시체
나 다름없는 사람이 가득히 눕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등개우까지 합쳐 모두 스물네 명이었다.
땀을 흘리며 스물네 명을 나란히 눕혀놓은 이창란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악독한 놈들......이젠 더 와도 받아들일 수 없네. 어디에 눕혀놓는담?]
괴롭다는 듯이 하는 말에 양몽환도 이마에 땀을 닦으며 허리를 폈다.
[모두 혈도를 짚힌 것같군요......]
[글쎄 혈도를 짚히지 않았다면 어떤 약물(藥物)에 중독된 것같네.]
그러자 양몽환은 쓰러진 사람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같군요...... 이럴 때 백독옹 노인이 있으면 어떤 약물에 중독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여하간 속히 주소저를 불러 오게.]
하는 말에 양몽환은 급히 뒷뜰로? 주약란을 찾아갔으나 거실로 돌아갔는지 주약란은 보이지 않았다. 그대신
하림을 도중에서 만났다.
[주소저는?]
[거실에서 운기 중이에요.]
[속히 좀 불러 주시오.]
[급해요? 그럼 같이 가요.]
하림과 함께 주약란의 방문을 열었을 때 주약란은 침대 위에 단정히 앉아 운기 조식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녀의 운기 조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동안 초조하고 지루한 시간이 지나서야 천천히 눈을 뜬 주약란은 앞에 서 있는 하림과 양몽
환을 보며 물었다.
[웬일이죠?]
[한 가지 알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
[어디서 보내는지는 모르지만 말 위에 사람을 태워 연신 대문안으로 들여보내는데 혈도를 짚혔는지 들어오
는 대로 쓰러져 버립니다.]
주약란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태연히 묻는 것이었다.
[몇 명이나 되는데요?]
[스물네 명입니다.]
[그래요? 이노영웅님께 알렸어요?]
[예, 지금 마당에 계십니다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시겠다며 주소저를 뵙자고 하십니다.]
[그럼 그들은 말도 못하겠군요?]
[그렇습니다. 모두 중태입니다.]
[추궁과혈법을 써 보셨어요?]
[써봤습니다만 별무효과입니다.]
그제야 주약란은 몸을 일으키며 간단히 대답하는 것이었다.
[좋아요. 같이 가요.]
과연 양몽환의 말대로 마당에는 의식을 잃은 장정이 여럿이 누워 있어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이때 용두지팡이를 거꾸로 쥔 채?? 멍하니 장정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창란에게? 다가간 주약란은 가볍게
기침을 하며 물었다.
[노선배님께서는 무슨 방법으로 이렇게 의식을 잃었는지 아셨어요?]
그러나 이창란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세밀히 살펴보았지만 알 수가 없군요. 상처라고는 보이지도 않소.]
그러자 주약란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이상하군요. 그런데 어떻게 이 수월산장까지 보내져 왔을까요?......]
[예,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 일 때문에 주소저를 좀 오시라고 했소이다.]
그러자 주약란은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장정의 가슴에 손을 대고 맥을 짚어보고 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
며 허리를 펴는 것이었다.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 주약란을 바라보며 이창란은 수염을 내려 쓸었다.
[그럼 주소저도 생각이 안나시오? 이? 늙은이가 보기에는 타혈(打穴)수법에 의한 것은 아닌 것같소.]
[글쎄요. 저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하고 말한 주약란은 몇 명의 장정을 더 훑어보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들이 타고 온 말들은 어떻게 되었죠?]
[사람을 내려놓고는 모두 어디론가 되돌아갔소. 더러 이 용두지팡이에 맞아 죽기도 했고......]
이때 양몽환이 한 걸음 나서며 입을 열었다.
[제가 이상히 생각하는? 것은 이들이 혈도를 짚힌 것도 아니고? 또 심장은 뛰고 있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하는 말에 주약란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들의 몸이나 혈도에 이상이 없던가요?]
[예, 아무리 살펴봐도 상처를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창란이 주약란에게 물었다.
[혹시 어떤 약물에 중독된 것은 아닐까요?]
[글쎄요. 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약물에 중독된 것도 아닌 것같군요. 어떤? 놀라운 무공에 상처를 입은 것
같은데요.]
하고는 곧이어 다시 양몽환에게 물었다.
[양상공, 혹시 이 수월산장에 견고한 창고가 없나요?]
[창고요? 그런 곳을 왜 찾으십니까?]
[우선 창고나 은밀한 방으로 옮기고 경과를 보도록 해야죠. 이렇게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아요? 명망이 있
는 양상공이 중상을 당한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었다는 소문이 나면 좋지 않아요.]
그제야 양몽환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얼마만에 고개를 들었다.
[견고하진 못합니다만 창고가 하나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많은 사람들을? 다 눕혀놓을 수 있을런지 모
르겠습니다.]
[협소한가요?]
[예, 조금 좁습니다.]
[할 수 없어요. 그곳에라도 함께 눕혀놀 수밖에.]
[그럼 그렇게 하죠.]
하고는 쓰러져 있는 장정들을 한 손에 한 명씩 끼어 안고는 후원의 창고로 옮기기 시작했다.
양몽환의 말대로 창고는? 협소했다. 그러나 달리 창고도 없는? 형편이어서 끼어앉히듯 해서 스물 네명의 반
송장을 창고 속에 몰아? 넣었다.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장정들을 창고 속으로 모두 옮기기를 기다려 주약란은

양몽환에게 분부하듯 말했다.
[누구 한 사람이 좀 지켰으면 좋겠는데요.]
그러자 양몽환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지킬만한 사람이 없군요.]
[그럼......]
하고는 이창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선배님께서는 검북사의를 데리고 오시지 않았나요?]
[오긴 왔소만 주위를 돌아보고 오라고 내보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는군요.]
[그럼 할 수 없군요......]
하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중상자가 더 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그만 보낼 모양이에요.

이런? 형태로 나간다면 어두워지기 전에는 별일이 없을 것같습니다.

혹시 어두워지면 몰라도......]
[그렇다면 우리도 무슨 대비책이 있어야 되지 않겠소?]
[예, 준비를 해야죠. 그런데 우선 검북사의가 돌아오는대로 주위를 잘 경계하도록 하고

사태를 기다려 보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그것이 좋겠소.

검북사의가 돌아오는대로 창고의 장정들을 지키게 하고 주위도 경계하도록 하겠소이다.]
[그럼 노선배님 부탁하겠어요.

그리고 저 중상자들이 어떤? 증세를 나타내는지 잘 관찰시키도록 하세요.

그래서 이상한 증세가 보이면 곧 알려 주세요.]
[주소저는 염려마시오. 그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 늙은이가 창고를 지키겠소.]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어두워져서 검북사의가 돌아오지 않으면 저와 양상공이 번갈아 지키도록 하겠어요.]
[천만에, 몸은 비록 늙었어도 장정 이십 명쯤은 아직 문제없소.

아무 염려말고 그동안 무공이나 닦으시오.]
그러자 주약란도 고개를 흔들며 양몽환에게 물었다.
[양상공, 밤이? 어두워져도 검북사형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저에게 알려? 주세요. 제가 지키겠어요.]
한마디 남기고는 자기의 거실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주약란이 먼저 들어가고 뒤이어 이창란도 용두지팡이를 끌며 역시 자기의 거실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혼자 남은 양몽환은 중상자가 더 오지 않는가 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요란한 말발굽 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그 후에도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별로 이상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자기 거실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하여 불안한 한나절이 서서히 지나갔다.한편, 하림은 분주히 수월산장 안팎을 돌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양몽환이 등가보로 떠날 때 그 많던? 하인들을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낸 후라 부엌일이며 집안의 청소
까지 도맡아야 하는 하림은 잠시도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더구나 식사 때면 더 종종 걸음을 쳐야? 했다. 한 곳에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기의 거실에
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이창란부터 시작해서 주약란 양몽환 이런? 순으로 밥상을 날라가고 또 날라와야 하
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림은 양몽환의 방문을 열고 밥상을 디밀고 또 내올 때는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지내는 때가 허다했다. 그러나 하림은 힘든줄 모르고 즐겁게 뛰어다녔다.
지금도 역시 하림이 갖다 놓고 간 밥상을?? 마주 앉아 몇 술 뜨는둥 마는둥? 하고 일어난 양몽환은 창고를
둘러보기 위해서 뒷뜰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창고를 지키고 있는 이창란을 발견했다.
[장인 어른은 들어가십시오. 제가 지키겠습니다.]
하고 교대할 뜻을 표했다. 그러나 이창란은 완강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이곳은 염려말고 자네 할 일이나 하게.]
할 수 없이 되돌아온 양몽환은? 밤이 깊도록 초조한 마음으로 주위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자시(子時)가
지나도 여전히 주위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이 지난 바로 그때였다.
홀연, 가까운 거리에서부터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그 휘파람 소리는 이상하게도 양몽환의 몸에? 소름을 쏴악 일으키게 하고 전율할 만큼 두려운 휘파람 소리
였다.
순간, 양몽환은 몸에 진기를 잔뜩 불어 넣으며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곧장 창고로 가서 이창란을 찾았다.
이때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를 단단히 거머쥐고 창고? 안을 주시하고 있다가? 펄쩍 인기척에 놀라 휙! 돌아
서다 양몽환임을 알고는 급히 수염을 내려쓰는 것이었다.
[장인 어른, 별일 없으십니까?]
[음, 아무 일도 없네.]
하며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양몽환은 목을 길게 뽑아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창고 안에는 한 개의? 초가 환한 불빛을 발해 쓰러져 있는 장정들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스물네 명의 반송장은 처음 앉혀놓은 그대로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
[검북사형제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아직 안왔네그려.]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것이 아닐까요?]
[글쎄...... 그들이 이 늙은이를 사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이 늙은 이에 대해서 다른 마음을 품지는 않았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혹시 강적이라도 만나지 않았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런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적을 만나도 끝장을 보고 돌아오는 성질들이니까 조금 더 기다려
보세......]
그러는 바로 그때 또 좀 전과 같은?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이번에는? 둥,
둥 하는 북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바람에 바싹 긴장한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를 휘두르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자네도 들었지, 무슨 북소린가?]
양몽환 역시 놀랍고 어리둥절한 지금 그 북소리가 무슨 북소리인지 알리 만무했다.
[글쎄요......제가 가보고 오겠습니다.]
하는데 이번에는 북소리와 징소리가 합쳐져 요란하게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휘파
람 소리는 동쪽에서, 북소리는 남쪽에서 그리고 징소리는 북쪽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장인 어른님, 오늘 밤에 아무래도 큰 일이 벌어질 것같군요.]
[그럴 것같은데. 내 평생에 괴이한 일을 수없이 겪어 왔지만 오늘 저녁과 같이 흉악한 일은 처음이네. 지금
저 징소리가 또 이상하지 않나?]
[예, 저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입니다.]
[그럴테지...... 저 징소리는 꼭 호남성(湖南省)지방에서 시체를 묻을 때 치는 징소리같네.]
[시체를요? 그러면 이 창고 속에 있는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하고는 곧장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반송장이나 다름없이 꼼짝? 못하던 장정 중에서 몇 사람이?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몸을
비비 꼬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뜻밖의 일에? 기절하듯 놀란 양몽환은 황망히 밖으로? 뛰어나와 이창란을 찾았다. 그러나? 옷자락을
펄럭이며 북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는? 이창란의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어둠 속에
묻혀 그나마 이창란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할 수 없이 되돌아 서서 창고로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그렇게 밝게 비추던 촛불이 꺼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름이 쫙 끼쳤다. 그것은 양몽환이 급히 문을 열고
나가면서 엉겁결에 힘껏 닫았기? 때문에 문짝에서 바람이 일어 촛불을 끄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런 것을 알리 없는 양몽환은 식은 땀을 흘리며 머리 끝이 쭈뼛했다.
틀림없이 어떤 괴한이 들어와서 불을 끄지 않았다면 팔과 다리를 움직이던 장정이 껐으리라고 여기며 순간
긴장했다. 그리고는 창고의 벽에? 몸을 바싹 붙이고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창고 안에서는 아무 이상을 발
견하지는 못했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은 온 누리를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으시시한 바람이 불어 주위는 더욱 음산하고 공포
가 양몽환을 휘감았다.
이때 창고 옆을 돌아나오는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왔구나!>
생각한 양몽환은 숨소리를 죽이고 창고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그림자는 의외에도 작은 소리로 양몽환을 부르는 것이었다.
[양상공!]
음성은 뜻밖에도 주약란이었다. 주약란의 음성을 들은 양몽환은 마치 구원병이나 얻은 것처럼?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자태를 나타냈다.
[주소저, 여기 있습니다.]
하는 대답에 주약란은 양몽환 가까이 다가왔다.
[별일 없어요?]
[지금 북소리와 징소리를 들었습니까?]
[들었어요.]
[바로 그 북소리와 징소리가 들려온 후부터? 이곳 창고 속의 장정 몇 명이 손과 발을 움직이는데 이상한 일
이군요.]
[그래요? 그런데 왜 불을 켜놓지 않았죠?]
[불을 켜놓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꺼졌군요.? 처음에는? 이상히 생각했지만 손 발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잘못 건드려 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럼 여기 혼자 계셨어요?]
[아니, 저도 조금 전에 나왔습니다. 그 전에는 장인 어른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어디 가셨어요?]
[북소리와 징소리를 듣고 쫓아 나갔습니다.]
하는 순간이었다.
얌전히 양몽환과 말을? 주고 받던 주약란은 갑자기 눈썹을 치켜올리며? 오른? 손을 들어 양몽환의 귀 밑으
로 날카로운 지풍을 날려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양몽환은 허리를 굽히며 뒤로 돌아섰다.
그 순간, 창고의 창문에 한 발을 걸치고 마악 넘어 나오려던 한 명의 장정이 뒤로 벌렁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실신했던 한? 명의 장정이 정신을 차리고 창문으로 뛰어? 나오는 것을 주약란이 발견하고 천강지의
지풍을 날렸던 것이었다.
그때, 깜짝 놀란 양몽환은 가슴을 내려 쓸며 말했다.
[주소저, 지금 그 장정들은 일부러 실신시켜 수월산장으로 보낸 적의? 밀정들이 아닐까요? 유사시에 대응하
도록 말입니다.]
하는 말에 주약란도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아직 확실한 것은 알 수? 없군요. 혹시 강요당해서 온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러나 조금 전의 북소리나 징소리가 이 장정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미리 이 장정들을 모두 움직이지 못하게 혈도를 짚어두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주약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해요.]
하는데 창고 안에서는 극히 작은?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걸음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오
는 소리같기도 했다.
음산한 밤, 가끔? 나뭇잎을 굴리며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넓은? 뜰과 외따로 떨어져 있는 창고, 지금 그 창
고 속에서? 실신하고 있던 장정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리며 어둠 속에서 일어나 앉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소품이 끼칠 일이었다.
그러나 양몽환과 주약란은 진기를 돋우며 다음에 일어낱 사태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이때, 바람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뒷뜰을 번개같이 지나 창고 지붕 위로 몸을
날리는 것이었다.
순간, 주먹을 쥐고? 뛰어들려던 양몽환은 지붕 위에 우뚝 선? 그림자를 바로 해천일수 이창란 즉 장인 어른
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일시? 맥이 풀렸다. 그때 주약란이 먼저 이창란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노선배님......사태가 어떻습니까?]
그러자 지붕 위의 이창란도 주약란을 알아보고는 역시 큰 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것같소.]
[무슨 이상한 일이라도 일어났어요?]
[이 주위 일대를 모조리 뒤져 보았소만 이상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소. 그러나? 조금 전에 들린 북소리나 징
소리는 이 중원(中原) 땅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오.]
[그래요? 저는 그런 것은 모르고 있었는데요.]
[이 늙은이의 기억으로서는 그 북소리와? 징소리가 호남성 지방에서 시체를 묻을? 때 치는 소리같은데... 그
러나 어떻게 들으면? 만지(蠻地)의 징소리같기도 하고......여하튼 정체불명인들이 치는 징소리같소.]
[저도 이상한 생각은 들었지만 그토록 괴이한 징소리인 줄은 몰랐어요.]
[여하간 조심해서 일을 처리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안될 것같소이다.]
[그럼 이 창고 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사태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만큼 인정(人情)이나 동정(同情)으로 대할 것은 없소. 미리 손을 써서 죽여버리
든지 아니면 혈도를 짚어버리는 수밖에 없소.]
하고 말을 마치는 바로 그때, 주약란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낮은 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쉬잇! 누가 왔어요.]
하자마자 세 개의 검은 그림자가 담장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곧장 창고 앞으로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이창란은 수염을? 곤두세우고 용두지팡이를 휘두르며 지붕위에서? 뛰어내려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며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웬 놈이냐?]
그러자 달려오던 세 명의 검은 그림자는 일제히 뛰기를 멈추고 나란히 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세 사람은 키가 모두 육척을? 넘을 듯하고 한 사람은 북을, 그 다음 사람은 징을 그리고 맨 옆에
선 사람만이 장검을 메었을 뿐 적수공권(赤手空拳)이나 다름 없었다.
그들은 거치는 것 없이 마구 달려오다가 지붕 위에서부터 뛰어내리며 벽력같은 소리와 함께 나타난 이창란
에게 놀랐는지 뚫어지게 노려볼? 뿐 아무 말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석상(石像)
처럼 서서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었다.
얼마를 노려보며 그들이 대답하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아무 말이없자 이창란은 그만 분통을 터뜨
리고 말았다.
[이놈들아, 이 늙은이가 누군지나 아느냐?]
그제야 세 명 중에서 가운데 섰던 사람이 통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알게 뭐요.]
[이놈 봐라! 알게 뭐냐구? 핫......하...... 이놈들아, 이 늙은이가 옛날에는 무술계의 일인자였다. 그래도 모른단
말이냐?]
그러자 역시 퉁명스럽게 대답한 사람이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는 한번 모른다면 모르오. 이곳 중원 땅에서 아는 사람이? 있다면 도옥이라는 사람과 주약란이라는 사
람 둘뿐이오.]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발음이 이상한 것으로 보아 이곳 중원땅 사람이 아니란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둘뿐이라?...... 그럼 당신들은 어디서 왔소?]
이창란은 음성을 부드럽게? 낮추어 다시 물었다. 아무래도 가볍게? 볼 인물들이 아닌 것같아서였다.
[서역(西域)땅에서 왔소.]
[서역? 그럼 묘강(苗彊)땅에서 왔소?]
그러자 흑의를 입은 가운데 사람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천만에, 아니오.]
[그럼?]
[천축국(天竺國)에서 왔소.]
[음......멀리서 왔군...... 그런데 천축국에서 이 중원 땅까지 무슨 일로 왔소?]
그러자 숨을 한 번 쉬더니 말하는 것이었다.
[주약란이란 사람을 찾아 왔소.]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눈을 커다랗게? 뜬 양몽환은 이창란 옆으로 나서며 물었다.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무슨 일로 주소저를 찾는 거요?]
[우리 대국사(大國師)님이? 천축국에 와서 상승무공(上乘武功)을 같이? 배우자고 데려오라 했소.? 그래서 우
리가 왔소.]
[이곳 중원 땅에 있는 무공만 해도 다 배우지 못하는데 천축국까지 가서 배울 것이 뭐 있소?]
[하, 모르는 말. 우리 대국사님의 명령이오. 꼭 가야하오.]
하고 눈을 부릅뜨는 것이었다. 그러는? 흑의인의 태도는 죽는 한이 있어도 주약란을 데리고? 가야겠다는 표
정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양몽환은 옆에 있는 이창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잠깐 기다려 보게.]
하고 말한 이창란은 큰 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여보시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그러자 그 흑의인은 여유를 두지않고 즉시 대답했다.
[철라법왕(鐵羅法王)이오!]
[철라법왕?]
[그렇소.]
하고는 곧이어 설명까지 붙이는 것이었다.
[대국사님 밑에 네 명의 법왕이 있소. 나는 그 중에 한 법왕이오.]
[그 대국사라는 분은 어디 계시오?]
[지금 천축국에 있소.]
그러자 이번에는 양몽환이 입을 열었다.
[주소저는 여자의 몸인데 어찌 머나먼 천축국까지 간단 말이오.

무공을 같이 배우겠으면 이 중원 땅으로 오라고 하시오.]
그러자 철라법왕은 역시 완강히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안되오. 우리 대국사님은 지금 두 가지 불법(佛法)을 연구하고 있소.]
[그래서 못온단 말이오?]
[그렇소.]
[그러면 주소저도 갈 수 없소. 그렇게 전하오.]
하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철라법왕은 안색을 확 바꾸면서 갑자기 손을 들어 흔드는 것이었다.
그것을 신호로 해서 왼쪽에 북을 들고 있던 장정이?

둥......둥......둥......하고 북을 세 번 치는 것과 함께 징을 들고 있던 장정도

꼭 세 번 징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퍼진 북소리와? 징소리는 별로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 여운은 굉장한 위력을? 가지고 있어서 듣는 사람의 심금이 짜릿하게 하고

한편으로 불안한 공포감마저 안겨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북소리와 징소리에 따라 창고 속에 시체나 다름 없이 누워 있던 사람들이

부시럭부시럭 소리를 내며 이상한 소리까지 내는 것이었다.
그제야 양몽환은 처음 북소리와 징소리가 들렸을 때 창고 속의 사람 몇 명이

손과 발을 움직이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 그렇지, 저 소리에 혼절했던? 사람들이 움직였지...... 그렇다면 바로 이 세 사람이?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진기를 돋우어 경계 태세를 취했다.
철라법왕을 비롯한 세 명을 경계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창고 속의 괴한들도 경계해야 했다.
그러나 창고 속에서는 더 이상한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철라법왕은 껄껄 웃었다.
[북과 징을 다시 울려라!]
하고 명하는 것을 이창란이 급히 소리쳐 제지했다.
[잠깐! 할 말이 있소.]
[?............]
[이 중원 땅에 주약란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도옥이라는 사람이 우리 대국사님께 알려왔소.]
그러자 이창란은 용두지팡이로 땅을 두들기며 수염을 곤두세웠다.

그리고는 양몽환에게 말했다.
[더 묻지 말게. 역시? 도옥의 계략으로 이놈들이 온 거다.

분명히 무슨 준비를 하고 왔을 거다.

그렇다면 좋게 돌려보낼 수 없지!]
하는데 그때까지 창고? 옆에서 듣고 있던 주약란이? 자태를? 나타냈다.

그리고는 차가운 눈초리로 세 명의 흑의인을 훑어보고는 날카롭게 물었다.
[당신들의 대국사와 나는 한 번 만나 본 일도 없는데 무슨 일로 찾아왔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철라법왕은 일시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정신이 홀리기나 한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못이라도 박은 듯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아차! 정신을 수습하며 입을 씰룩거리는 것이었다.
[당신, 주약란이오?]
[그래요!]
이마를 찌푸리며 싸늘하게 대답하자 철라법왕은 크게 소리내어 웃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웃음소리는 마치 호랑이가 밤의 공기를 찢으며 포효(咆哮)하듯 우렁찼다.
그 웃음소리에 울컥 화가 치민 양몽환은 꽥! 소리를 질렀다.
[뭐가 우습다고 그 야단이오? 속히 이야기나 하시오!]
그제서야 철라법왕은 그 호탕한 웃음을 거두며 주약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 철라법왕은 주약란을 우리 대국사님께까지 인도하면 큰 상이 돌아온단 말이오.]
하는 사이에 주약란은 이미 결심을 했는지 전음지술로 양몽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양상공, 저 자들이 북과 징으로 창고에 있는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같아요.

이제 싸우게 된다면 저 북과 징부터 빼앗으세요.

그러면 그 북과 징에서 이상한 물건들을 발견할지도 몰라요.

더구나 천축국에는 이상한 무공이 많아요.

얕잡아 보지 마세요.

그리고 만일? 북과 징을 빼앗지 못하면 부수어 버려도 돼요.]
하는 말이 끝났을 때 철라법왕은 두어 걸음 성큼성큼 나서다가 땅바닥에 벌렁 누우며

한 번 뒹굴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에 이상하게 생각한 주약란은 엄숙하게 꾸짖는 것이었다.
[무슨 짓이에요? 그게?]
그러자 철라법왕은 껄껄 웃으며 뒷걸음질 해서 자기의 본래 서 있던 자리로 가며

 천천히 입을 여는 것이었다.
[우리 대국사님이 소저를 만나면 실례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소.

그래서 나 법왕은 우리 천축국의 대례(大禮)로 알현한 것이오. 그리고 한가지 부탁이 있소.]
[무슨 부탁인가요?]
[소저는 나 법왕을 따라가서 우리 대국사님을 만나시오.]
[흥!]
[그럼 안가겠단 말이오?]
하는데 등불을 든 하림이 달려와 주약란 옆에 서며 세 명의 흑의인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입은 열지 않았다.
이에 다시 주약란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들의 대국사라는 사람이 나 한 사람만 데려 오라던가요? 아니면 또 다른 분부라도 있었던가요?]
[별다른 분부는 없소. 주약란 한 사람만 데려오라고 했소.]
그러자 주약란은 장정들이 갇혀있는 창고를 가리키며 다시 계속해서 물었다.
[저 창고 속에는 많은 장정들이 중상을 입고 누워 있는데 당신들이 중상을 입혔어요?]
[허......허......걱정마시오. 그들은 먼저 파견한 우리들의 조수(助手)들이오.]
[조수라구요? 흥! 중상을 입혀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조수 역할을 하겠어요?]
[헛......허......중상? 천만에 말이오.

이 중원 땅 사람들은 모두 악종이라고 하오.

그래서 우리는 날렵한 고수들만 뽑아 일부러 어떤 술법으로 실신시켜서 이곳으로 보낸 거요.]
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주약란은 그들과 슬슬 이야기를 해서 그들의 의중을 알아보려는 듯

일부러 태연한 척하면서 가끔 웃기도 했다.
[그렇다면 알겠어요. 당신들의 천축국에는 기기묘묘한 요가술과 미혼대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바로 그 수법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했는가요? ]
[그렇소. 주소저는 우리나라의 특이한 술법을 잘 알고 있소?]
[오래 전부터 천축국에는 기물기술(奇物奇術)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한 번 가보고 싶어하던중이에요.]
그러자 철라법왕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그것 참 좋소. 빨리 갑시다. 나 법왕이 안내하겠소.]
그러나 주약란은 화제를 이리저리 끌며 묻는 말에 쉽게 대답하지 않고 다시 화제를 돌렸다.
[철라법왕은 나라에서 봉한 칭호(稱號)인가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철라법왕은 머리에 썼던 두건(頭巾)을 벗는 것이었다.
두건을 썼을 때는 몰랐지만 두건을 벗은 철라법왕의 머리는 칼로 머리털을 밀어버린 듯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었다.
[그렇소. 더구나 우리 대국사님의 칭호는 국왕이 직접 봉하오.

그래서 직위의 높음은 말할 것도 없소.

또 국정(國政)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소만 국왕님은 우리 대국사님께 물어 행하오.]
[그럼 저 두 분은 무슨 법왕이죠?]
하며 철라법왕 옆에 서 있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러자? 철라법왕은 껄껄 소리내어 웃다가 뚝 그치는 것이었다.
[법왕이란 칭호가 그렇게 쉽게 봉해지는 건 아니오.]
[그렇게 높은 직위인가요?]
[그렇소. 대국사님 밑으로 제자가 삼천이오. 그 중에서 법왕은 꼭 네 명 밖에 없소.]
은근히 자신의 직위를 자랑하는 철라법왕의 말에 주약란은 사뭇 놀랍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렸다.
[아휴, 그림 상당한 지위네요?]
득의만만한 철라법왕은 팔까지 휘두르며 으쓱했다.
[다른 법왕은 어디 있어요?]
[그건 모르오. 우리는 따로따로 주소저를 찾아 떠났소.]
[음......그러면......당신의 대국사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죠?]
[말도 할 수 없이 그리워 하고 있소 그렇지 않다면 나 법왕을 이곳까지 보내 주소저를 찾게 하지 않소.]
[그리워 해요? 만나 본 일도 없는데?]
그러자 철라법왕은 급히 품 속에서 한 폭의 그림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림을 한 번 보고 또 주약란을 한 번 보고 몇번 되풀이 하던

철라법왕은 머리를 끄덕끄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히죽 웃었다.
[틀림없소.]
하며 또 그림을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이에 이상한 생각이 든 주약란은 저자가 갑자기 왜 저 모양일까 생각하며 물었다.
[그 그림은 뭐에요?]
[바로 당신이오. 자 보시오.]
하며 두 손으로 그림의 한 귀씩 잡고 머리 위로 치켜 올리는 것은 틀림없는

주약란 자기의 얼굴이었다.

주약란은 깜짝 놀랐다.
[누가 그렸죠?]
[아주 잘 그렸소. 꼭 닮았소.]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주약란은 불쾌한 듯 음성을 조금 높였다.
[누가 그렸는가 물었어요!]
그제야 철라법왕은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건 모르오. 대국사님이 주셨소.]
[이리 좀 줘봐요.]
그러자 철라법왕은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 용단을 내며 건네어 주는 것이었다.
그림을 받아든 주약란은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 보았다.

틀림없는 자기의 얼굴이었고 퍽 잘 그려져 흡사 살아 있는 모습같았다.
그러나 자기의 얼굴이 모르는 남자의 품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 왜 그런지 불쾌하고 싫었다.
[당신의 대국사는 이런 그림을 몇 장이나 가지고 있어요?]
[열장이오.]
[그렇게 많이?]
[그렇소. 우리 대국사님은 소저의 그림을 보시고 하늘의 선녀와? 같다고 하셨소.

그래서 유명한 화공을 불러 그리게 했소.]
[그걸 다 무엇에 쓰죠?]
[주소저를 찾는데 쓰오.

우선 나 법왕과 다른 법왕이? 한 장씩? 가지고 소저를 찾으러 중원 땅에 온 것이오.]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 대국사님은 주소저의 화상을 객실에 한 장, 침실에 한 장, 대청에도 한 장

두루두루 붙여 놓고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게 해 놓았소.]
그러자 이때 하림이 툭 튀어나왔다.
[여보세요. 당신들은 중이 아닌가요?]
하는 물음에 이건 또 누구냐 하는 듯이 하림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아무 생각없이

대답하는 철라법왕이었다.
[맞소!]
깎은 머리와 입고 있는 옷으로 봐서? 충분히 알텐데 새삼스럽게 묻는 하림을 도리어

이상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하림은 표독스럽게 쏘아 붙였다.
[중이라면 응당히 여자를 멀리하고 도나 닦을 일이지 어찌 우리 언니의 그림을 붙여 놓고

나쁜 생각만 하는 거죠?]
그제야 철라법왕은 중이 아니냐고 물은 뜻을 알겠다는 듯이 허허 웃는 것이었다.
[모르는 소리 마시오. 중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보는 법이오.]
하고 능청을 떠는 것이었다.
한면 자기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들고 있던 주약란은 그림을 접어 자기의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냉랭히 말했다.
[이 그림은 내가 몇 장 옮겨 그려야겠어요.]
그러자 철라법왕은 펄쩍 뛰었다.
[안되오. 시간없소.]
[무슨 시간이 없단 말이에요?]
[나 법왕은 주소저를 데리고 급히 대국사님께 돌아가야 하오.]
그러자 주약란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며 다시 화제를 돌렸다.
[잠깐, 당신은 한 가지를 잊고 있어요.]
[잊고 있다 천만에, 내가 주소저를 데리고만 가면 큰 상금을 내리신다고 했소.

그것을 나 법왕은 잊지 않고 있소. 그런데 잊고있다?]
그러는 동안 주약란은 암암리에 진기를 돋우며 태연을 가장했다.
[만일 내가 안가겠다면?]
[나 법왕은 명령을 받고 왔소. 꼭 가야 하오.]
그러나 주약란은 철라법왕을 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화제를 돌렸다.
[당신이 이 중원 땅에 올 때 대국사가 무슨 말을 하지 않던가요?]
[무슨 말입니까?]
[이곳 중원 땅에는 기기묘묘하고 웅후한 무공이 많아

결코 천축국과 비교도 안된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러자 무슨 말인가 얼핏 알아차리지 못한 듯 멍청히 섰던 철라법왕은

얼마만에야 알아챘는지 크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핫...... 하...... 그런 말은 나 법왕도 잘 알고 있소.

주소저는 나 법왕과 한번 무공을 겨루어 보겠다 이거요?]
하고는 태세를 갖추려는 듯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동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버티고 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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