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풍우연귀래

32. 정실(正室)의 자리

오늘의 쉼터 2014. 10. 26. 11:21

32. 정실(正室)의 자리

 

 

양몽환의 어색한 대답에 주약란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

당신에게 달린 문젠데......

남자 한 사람에 여자가 넷이면 무공을 닦는데도 불편하지 않겠요.

심소저나 이소저는 당신의 부인이시고 조소저나 저는 친구 사이에 지나지 않고요.

강호의 뭇남자들은 당신을 부러워 할지도 모르지만...... 호...... 호......

여자 네 명을 어떻게 다루겠어요?]
[그거야 각기 별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무공 연마에만 전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것이 어려운 일이에요.

더구나 우리는 여자인걸요.

그리고 조소저가 당신을 치료해 준 옛일을 잊지 않았다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그때 그녀는 남자라면 모두 증오의 대상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그때의 증오는 지금 애정으로 변했어요.?

그녀가 왜 다정선자라고 자칭하며 강호를 다녔는지는 물론 아시고 계시겠죠?]
[예. 어렴풋이 들어 약간 알고는 있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에 못이겨 회포를 풀려고 그런 거에요.

그러다 당신을 대신할 만한 남자라도 발견하면 해서 말이에요.]
하고 잠시 말을 끊었던 주약란은 먼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응시하며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과? 마음은 이미 당신 하나에게만 있어 아무리 강호를 돌아 다녀도

딴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던 거에요.]
[헌데, 주소저는 어떻게 그 일을 알고 있습니까?]
[조소저에게 듣지 않아도 저는모두 짐작할 수 있어요.

그러나 처음에 제가 그녀를 설득해서 천기석부로 불러 들이려고 했으나 끝내 듣지 않았어요.

그러던 그녀가 지금은 당신의 말을 듣고 수월산장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은 당신에 대한

그녀의 마음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어요?]
양몽환은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얼마 동안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던 양몽환은 힘없이 입을 열었다.
[글쎄 저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주소저는 무슨 방도가 없습니까?]
[저에게 무슨 방도가 있겠어요?

당신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에요.

그러나 약속한 말은 꼭 지키도록 하세요.]
[저는 조소저에게 별 말을 하지도 않았고 또 약속한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천기석부로 가자해서 결국 수월산장으로 가게 된 것이 아니에요?

당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왜 수월산장으로 가겠다고 결심했죠?]
[그거야 무공을 닦기 위해서 한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약란은 걸음을 떼어 놓으며 입을 열었다.
[여하간 당신이 알아서 처리하세요.

그리고 조소저의 일에 대해서도 이미 당신의 장인 어른께 말씀해 두었어요.]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걸음 속도를 빨리 하며 먼저 계곡을 올라갔다.
양몽환 역시 주약란을 따라 가며 다시 물었다.
[아니,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물론 조소저에 대해서죠. 당신의 장인도 짐작하고 계시더군요.

분명히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은연중 찬의를 표하더군요.

이제 당신의 부모님에게만 말씀드리면 될 거에요.]
양몽환은 가늘게 탄식할 뿐 더 말하지 않고 묵묵히 계곡을 올라갔다.
이때 뒤에 따라오는 양몽환이 아무 대꾸가 없자 주약란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말하기 싫은가요?]
하는 물음에 양몽환은 쓸쓸히 웃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더구나 저의 부부도 주소저의 은혜를 크게 입고 있지 않습니까?

어떠한 일이든 주소저가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모든 것을 주약란에게 일임하는 것이었다.
[그럼 일은 간단해요.]
[그러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데요?]
[예로부터 무예계의 정사(正邪)는 지혜나 무공으로 판가름이 났을 뿐 한 두 사람의 정(情)에 의해

무예계가 좌우된 일은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럼,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되나요? 지금의 형세를 잘 살펴 보시면 아실 거에요.]

[물론 조소저의 무공이 장차 무술계에? 많은 영향을 끼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무술계가 필요로하는 사람은 조소저가 아니라 주소저 당신입니다.]
하고 말하는 것을 얼핏 잘못 들으면 조소저보다 주소저와 혼인하겠다는 말이 되기도 했다.
그 바람에 잠시 멈칫한 주약란은 약간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요? 저는 그런 큰 그릇이 되지 못해요.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하고는 더 말하지 않고 걸음을 빨리해서 산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양몽환도 더 말하지 못하고 주약란의 뒤를 따랐다.
산 위로 먼저 오른 주약란은 홀연? 길게 휘파람을 부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조용한 정적이? 감돌던 계곡은 휘파람의 메아리가 길게 꼬리를 물고 울려 퍼졌다.
이상하게 생각한 양몽환은 사방을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기로 했습니까?]
[예. 제가 당신을 따라 수윌산장으로 가면 천기석부를 지킬 사람이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천기석부를 지키게 하려고 해요.

그 간사한 도옥이 언제 천기석부에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 아녜요?]
[그럼 누구를 보낸단 말입니까?]
[옥소선자.]
하는데 과연 저쪽 나무 숲에서부터 옥소선자가 달려 나오는 것이었다.
주약란 앞에까지 달려온 옥소선자는 공손히 절을 했다.
[오래 기다렸나요?]
[아니, 지금 왔어요. 그런데 몇 번 말했지만 우리는 서로 자매처럼 지내요. 그렇게 절을 하지 말아요.]
공손히 절하는 것이 주약란의 성미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옥소선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마음 속 깊이 아가씨를 존경하고 있어서 하는 일이에요.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러자 주약란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가늘게 한숨을 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화제를 돌렸다.
[모두 준비 되었나요?]
[예. 분부대로 모두 준비했습니다. 팽언니도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조소저가 거느리고 있는 시녀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몇 명은 조소저와 함께 먼저 떠났고 남은 사람들은 아가씨의 분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됐어요. 수고스럽지만 옥소언니가 그녀들을 데리고 천기석부로 돌아가세요.]
하는 말에 옥소선자는 눈을 크게 뜨며 어리둥절했다.
[아니, 그럼 아가씨는 어디로 가시겠어요.]
[저는 수월산장으로 가야겠어요. 원래 천기석부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하고는 옆에 있는 양몽환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계속해서 말했다.
[천기석부에 돌아가는대로 제가 그려 도표에 따라 복병을 세우고 방비를 게을리 하지 마세요.

언제 어느 때 도옥이 공격해 올지 모르니까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가씨.]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가씨에게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 말해도 괜찮겠어요?]
[관계없어요. 말씀하세요.]
[조소저도 수월산장으로 간다고 하며 떠났고 아가씨께서도 수월산장으로 가신다고 하는데

수월산장에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별 일은 없어요.

그저 그곳이 거리상으로 편리할 것같아서 그곳에 가서 무공을 좀 닦으려고 해요.

아무 염려마세요.]
[그렇다면 마음을 놓겠습니다만 모두 천기석부로 돌려 보내면 수월산장에서 아가씨 시중은 누가 들죠?]
하는 말에 주약란은 잊을 뻔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우선 천기석부로 돌아가 모든 일을 정리한 다음

조소저의 시녀 중에서 몇 명 뽑아 옥소언니가 데리고 수월산장으로 오세요.]
[예. 그렇게 하겠어요. 그럼 언제 떠나면 좋을까요?]
[지금 곧 천기석부로 돌아가세요.]
그러자 옥소선자는 처음처럼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물러가는 것이었다.
그러한 옥소선자를 지켜보고 있던 양몽환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옥소선자는 주소저의 한 팔과 같군요.]
하자 주약란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사실이에요. 옥소언니는 지혜나 무공으로도 놀라워요.

감히 일반 사람이 따르지 못할 분이에요.
그리고 천기석부도 옥소언니가 깨끗이 정리해서 훌륭한 곳이 됐어요.]
[옛날 옥소선자가 무예를 종횡할 때에는 가는 곳마다 모두 두려워하고

흡사 마녀(魔女)처럼 대했는데 주소저가 온순한 사람으로 감화를 시켰군요.

주소저가 아니면 엄두도 못낼 일입니다.]
하고 옛날의 일을 되새기며 감회에 젖은 말을 하자 주약란은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옥소언니가 온순한 사람으로 된 것도 사실은 당신과 관계있는 일이에요.]
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양몽환은 깜짝 놀라며 음성까지 떨었다.
[아니? 저와 관계가 있다구요?]
[그래요. 옥소언니도 당신에게? 얼마나 깊은 정을 지니고 있었다구요. 그런 것을 당신은 모르는 척했죠.]
사실이었다. 대각사의 설삼과를 훔쳐다 양몽환 자기에게 먹여 생명을 구해 주며 정을 주던 옥소선자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고 시인하기에는 왜 그런지 쑥스러웠다.

그래서 겨우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만 말했다.
[옛날에 그녀가 저를 구한 일이 있어 아직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하자 주약란은 가볍게 탄식했다.
[옥소언니의 당신에 대한 사모의 정은 결코 조소저에 못지 않아요.?

다만 표현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에요.
여하간 당신은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고 있어요.

겨우 반생(半生)에 이렇듯 많은 여인이 따르니......]
그 말에 양몽환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절로 한숨이 토해졌다.
[저도 마음이 괴롭습니다.]
[아니에요. 괴로워하지 말고 모든 여인들이 당신을 위하고 사랑하는 만큼 당신도 분발해서

그녀들의 뜻에 보답하도록 하세요.

어찌 부부라야만 하나요?

당신을 생각하는 모든 여자를 위해서 꼭 큰 인물이 되고 성공하세요.]
하고 말하는 주약란의 음성도 약간 떨렸다.

그리고 주약란과 양몽환 사이에는 착잡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주약란이 먼저 상기된 얼굴을 들었다.
[이젠 내려가요. 심소저와 만날 시간이 됐어요.]
착잡한 침묵을 깨며 먼저 절벽을 타고? 계곡 밑으로 내려가는 주약란의 뒤를 따라 양몽환도 내려왔다.
절벽은 수 십장이나 되는 절벽으로 깎아지른 듯 가파르고 날카로웠다.
그러한 절벽을 주약란은 민첩하게 경신법을 이용해서 내려가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수법이었다.
양몽환 역시 주약란의 뒤를 바싹 따라 내려갔다.
이윽고 절벽 밑으로 내려온 양몽환은 한 걸음 앞서가는 주약란을 바라보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주소저의 경신법은 더욱 놀랍군요. 제가 따를 수 없군요.]
그러자 주약란은 방긋이 웃으며 양몽환을 올려다 보았다.
[당신도 놀라울 정도에요.]
[부끄럽습니다. 사실 저는 이 몇년 동안 무공에 전념하지 않고 옛날 일만 생각하고는

도옥을 능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형세는 너무나 놀랍도록 그 양상이 판이하게 달라져 그동안 무공 터득에

게을리 한 것이 후회막급입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당신의 타고난 재질이 도옥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다만 귀원비급을 가진 도옥이 당신보다 진보가 빠를 것임엔 틀림없어요.]
[그렇다면 도옥의 실력은 앞으로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무슨 일에나 한계가 있는 법이에요.

한계점에 도달하면 그 이상의 진보는 없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 아니겠어요?]
하고는 길게 한숨을 토하며 다시 이었다.
[천기진인과 삼음신니 두 분이 비록 희대(稀代)의 인물이긴 하지만

그분들이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다행히도 귀원비급의 무공을 터득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귀원비급을

소유하고 있는 강적과 만나 대적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주소저와 같은 재인(才人)이 없었다면 이 무술계에서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참호한 시대가 되올 것이며 도옥은 더욱 기세등등히 강호를 휩쓸었을 겁니다.]
하고 칭찬하는 말에 주약란은 얼굴을 붉히며 화제를 돌리는 것이었다.
[그만하고 어서 가요. 심소저가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어디서 만나기로 하였습니까?]
[바로 저쪽 길가에서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걸음을 재촉해서 숲 속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숲 속을 빠져나가자 바로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가에 하림이 그림처럼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약란과 양몽환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하림은 곧 달려오며 주약란을 불렀다.
[란이 언니!]
[심소저. 오래 기다렸죠?]
[아니, 괜찮아요. 그런데 도옥이 언니에게 서찰을 보내왔군요.]
[서찰?]
[예, 여기 있어요.]
하며 내미는 한 장의 서찰을 주약란은 급히 받아 겉봉부터 살피며 하림에게 물었다.
[이 서찰은 누가 가져 왔어요?]
[며칠 전에 도옥의 화신 두 명이 양상공에게 서찰을 가지고 왔었어요.

그때 그중 한 사람은 인질로 남기고 한 사람은 보낸 일이 있어요.

그런데 그때 보낸 화신이 이 서찰을 주고는 인질로 잡아두었던 화신까지 데리고 갔어요.]
그러자 양몽환은 도옥의 화신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는 하림에게 물었다.
[왜 그냥 보냈소?]
[그냥 보내진 않았어요. 보내주는 대신 손가락을 짜르랬어요.]
[손가락?]
[예.]
[그래서!]
[냉큼 짤라 놓고 도망치듯 가버렸어요.]
하는 동안 주약란은 서찰을 뒤적이며 혼자 코웃음을 터뜨렸다.
[또 이 간사한 도옥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 모르겠군......

이까짓 서찰은 아예 보지도 말고 불에 태우는 것이 좋겠는데......]
그러자 하림이 손을 저으며 말렸다.
[태우지 마세요. 그 서찰을 줄 때 매우 중요한 사연이라고 하면서 꼭 읽어보라고

신신당부 하더라는 도옥의 전갈이에요.]
[그 외에 다른 말은 없었어요?]
[다른 말은 없고 꼭 그 서찰을 읽어보라고만 하더군요.]
그러자 주약란은 들고 있던 서찰을 양몽환에게 건네어 주는 것이었다.
[저는 이까짓거 보기도 싫어요. 양상공이 보시고 말해 주세요.]
그러나 양몽환은 고개를 저었다.
[주소저에게 보낸 서찰인데 우선 먼저 읽어 보시오. 저는 나중에 보겠습니다.]
하고 거절했다.
그러자 주약란은 들고 있던 서찰을 소매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렇다면 저도 다음에 보기로 하겠어요.?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 우리의? 일에 방해라도 놓으려는 속셈이라면 귀찮아요.]
하고 보기를 단념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양몽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았다. 이때 하림이 화제를 바꾸었다.
[란이 언니. 옥소언니와? 팽언니가 조소저의 시녀들과 함께? 천기석부로 간다고 떠났는데

언니도 알고 계신가요?]
[알고 있어요.]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죠? 천기석부로 가지 않나요?]
[천기석부에는 천천히 가기로 해요.]
[그럼?]
[심소저의 집인 수월산장으로 가요.]
[수월산장으로요?]
[그래요. 이제부터는 수월산장에서 무공을 닦고 모든 계획을 세우기로 하겠어요.]
그러나 하림은 얼핏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더 묻지 않고 다른 말을 물었다.
[조소저는 어디로 갔어요?]
[역시 수월산장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만나기로 하고 먼저 떠났어요.]
[그럼 그곳에서 우리 모두 만나겠군요.?

그러면 얼마나 기쁠까...그런데 언니는 아직 수월산장에 가보지 못하셨죠?]
무슨 짐작이 가는지 하림은 연신 미소를 띄우며 눈을 반짝이는 것이었다.
[아직 못가봤어요.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곳에서 오래 살게 될 거에요.]
하고는 생긋이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수월산장의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던데......]
하고는 곧이어 양몽환에게 고개를 돌렸다.
[양상공. 이제는 떠나요.]
하는 주약란의 말을 따라 일행 세 명은 수월산장을 향해 첫걸음을 밟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십 여일이 지난 오후.
멀리 바라보이는 수월산장의 붉은 벽돌담을 바라보며 일행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보이는 집이 바로 저희 집입니다.]
양몽환이 손가락질하는 곳으로 주약란은 시선을 고정시켰다.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아늑한 양지에 붉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한 채의 큰 기와집과 그 앞으로 실오리처럼 흐르는 맑은 시냇물이 한 눈에 들어왔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시냇가에 하늘하늘 늘어진 버들가지가 더 한층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주약란은 옛 고향에라도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뿌듯하고 감회가 서렸다.
양몽환은 양몽환대로 하림은 하림대로 몇 개월만에 돌아오는 고향집을 보자 감개가 무량했다.
그러나 양몽환은 애써 감개에 서리는 마음을 억제하며 앞장을 서서 수월산장으로 향했다.
일행이 수월산장에 이르렀을 때는 육중한 대문도 활짝 열리고 집안은 누군가에 의해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다.
먼저 대문 앞에 다가간 양몽환은 큰 소리로 불렀다.
[안에 누가 있습니까?]
그러자 안에서부터 용두지팡이를 든 이창란이 껄껄 웃으며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창란은 양몽환보다 먼저 수월산장으로 와서 집안을 깨끗이 손질하고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양몽환은 대문을 열고 나타나는 이창란에게 정중히 허리를 굽히며 주먹을 쥐었다.
[장인 어른께서 먼저 오셨군요.]
하는 인사에 이창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반가히 맞아 주었다.
[어서 오게.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기다리는 손님이 있네.]
[손님이라구요?]
[백독옹(百毒翁)이라는 분일세.]
순간 양몽환은 깜짝 놀랐다.

백독옹이라면 이전에 등가보에서 옥소선자에게 패해 무릎을 끓고

옥소선자의 부하가 되겠다고 맹세했던 노인이다.

그러나 그 노인은 그로부터 지금까지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백독노인이 지금 이곳 수월산장에 와 있다는 것이었다.
[백독옹이 어떻게 왔습니까?]
[자세히는 모르겠네만 도옥의 암수에 걸려 약속한 날짜에 오지 못하고 이제야

겨우 빠져나와 바로 이곳으로 왔다고 하더군.]
하고는 뒤에 서 있는 주약란에게 주먹을 쥐어 보이는 것이었다.
[주소저. 이곳까지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소. 그런데 옥소아가씨는 오지 않습니까?]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주약란도 약간 허리를 굽혀 반례하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예. 그녀는 천기석부로 보냈습니다만 노선배님께서는 그녀에게 혹시 볼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이 늙은이가 볼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독옹이라는 노인이 옥소아가씨를

꼭 만나게 해 달라고 해서 묻는 말이오.]
[백독옹 노인 그분이라면 독에 명인(名人)이라는 분이 아닌가요? 제가 좀 만나볼 수 없을까요?]
그러자 이창란은 난처한 표정을 짓다 말고 고개를 천천히 흔드는 것이었다.
[이 늙은이가 미리 짐작하고 주소저와 만나기를 권했으나 백독옹은 응낙하질 않소이다.

옥소아가씨가 주소저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옥소아가씨를 먼저 만나본 후 주소저를 만나겠다고 합니다.]
[그래요? 사람마다 각기 성질이 달라서 하는 말이겠지만 제가 먼저 만나봐도 상관없을 거에요.]
하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집구석 어디에도 백독옹의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양몽환 일행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백독옹은 어디로 몸을 숨긴 모양이었다.
이때 뒤늦게 따라온 이창란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혀를 찼다.
[기어이 이 늙은이가 도망갔군...... 그렇지 않아도 도망갈까 염려했는데......]
하며 사뭇 분해했다.
그러자 주약란은 조용히 이창란에게 말했다.
[관계없어요. 며칠 지나면 옥소언니가 올거에요. 그러면 그때 만나기로 하겠어요.]
하고 위로하듯 하는 말에 이창란은 긴 수염을 내려쓸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안으로? 들어가 잠시 쉬도록 하시오. 오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소.

그러면 이 노부가 안내하겠소.]
하며 친절을 아끼지 않는 이창란의 말에 주약란은 마음이 송구스러웠다.
[노선배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젠 그만 수고하시고 편히 지내셔야 할 몸이신데

이토록 수고를 끼쳐서 죄송하기 그지없습니다.]
[허......허......무슨 말씀을......이 늙은이는 무술계애 떠돌아다니면서도 아직 옳은 일을 못했소이다.

비록 나이는 늙었지만 이제라도 옳은 일을 해야겠소. 허...... 허......]
하며 쾌활하게 웃은 이창란은 깨끗이 정리된 방까지 일행을 안내해 주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수월산장의 주인은 양몽환이지만 한 걸음이라도 먼저 온 이창란이 수고를 무릅쓰고 주인 노릇을 하며

성의를 다하는 것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양몽환이었고 주약란이었다.
그러한 이창란이 등을 돌리고 사라지자 주약란은 가늘게 한숨을 토하며 양몽환에게 말했다.
[한 때는 영웅으로서 그리고 천용방의 방주로서 강호를 질타하시던 노영웅이 따님을 위해

저렇듯 수고하시고 장차 무술계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군요.

양상공께서 잘 모셔야 겠어요......]
한숨섞인 주약란의 말에 양몽환도 머리가 숙여졌다.
[옳은 말씀입니다. 늙으신 분에게 효도는 못할망정 수고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저도 가끔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실 거에요. 앞으로 이소저를 잘? 대해 주세요.

그러면 이노영웅님에게 보답하는 것이 될 거에요.]
하는데 몇 개의 향(香)을 든 하림이 다가왔다.
그러자 주약란은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향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 그 향은 어디에 쓰려고 가져왔어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양상공의 사촌 누님의 무덤이 있어요. 그래서 그곳에 가려고 왔어요.]
[그래요? 그럼 나도 같이 가요.]
세 사람은 수월산장을 빠져나와 한참을 침묵속에 걸었다.

그러던 얼마 후에 무덤에 도착하였다.
지금 이 무덤 속에 누워있는 주인공은 예전 양몽환의 사촌누이 옥견(玉 ) 의 무덤으로서

양몽환이 첫 사랑을 바쳤던 여인이었다.

그 무덤에서 양몽환이 너무나 애통히 울다가 쓰러졌을 때 때마침 달려온 하림에 의해

구원을 받은 곳이기도 했다.
향을 피우고 고인의 명복을 빌고 났을 때는 그 긴 해도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어지는 시각이었다.
마지막으로 무덤 앞에 무릎을 꿇고 두 번 절하는 것으로 성묘를 마친 일행은 석양에 긴 그림자를

끌며 수월산장으로 돌아왔다.
수월산장에는 등불이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하림은 주약란을 미리 마련해 둔 깨끗한 방으로 안내하고 양몽환은 양몽환대로 예전에

서재겸 침실로 쓰던 자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하림의 안내로 깨끗이 정리된 방에 들어선 주약란은 눈이 둥그래졌다.

깨끗한 침구가 깔린 침대와 둥근 탁자, 그리고 탁자위에 꼬리를 길게 끌며 타고 있는

한 자루의 초, 그리고 아늑한 기운이 떠도는 방은? 실로 주약란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눈치를 챈 하림은 방긋 웃으며 주약란의 손을 감싸 쥐었다.
[언니, 이게 언니 방이에요.]
하는 말에 주약란은 또 한번 놀랐다.
[아니, 내 방?]
[예. 언니 방이에요. 제가 옛날에 홍이 언니와 함께 꾸며놓고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뭐라고 내가 수월산장에 온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럼?]
[저와 홍이 언니는 마음 속으로 언니가 이곳 수월산장으로 오기를 빌고 있었어요.

그리고 꼭 오실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기어이 오셨군요......]
그러자 주약란은 약간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밝지 않은 촛불이어서 그런지 주약란의 홍조띈 얼굴빛을 하림은 보지 못했다.
주약란은 표정을 고치며 방안을 휘둘러 보았다.

그리고 창가에 드리워진 휘장 옆의 둥근 탁자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한아름의 이름모를 꽃이 화병 가득히 꽃혀져 향긋한 향기를 뿜고 있었고

그와 대조적으로 맞은편 벽에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걸려져 있었다.

이때 하림은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저와 홍이 언니가 함께 그린 그림이에요. 잘 그렸죠. 호...... 호......]
벽에 걸린 그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림은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였지만 어두워서 잘 그렸는지 어쨌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주약란은 미소를 띄워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다시 방안을 둘러보던 주약란은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것도 그럴 것이 방안의 휘장이나 이불 그리고 모기장까지 분홍색 일색이었다.
이 분홍색은 예로부터 신혼부부의 침실을 장식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

눈살이 찌푸려질 만도 했다.
그것이 주약란의 마음을 약간 거슬렸다.
[그런데 왜 온통 분홍색이죠?]
절로 찌푸려지는 이마를 펴며 주약란이 묻자?

하림은 그저 기렇 표정만 지으며 생글생글 웃는 것이었다.
[왜요? 언니의 신방(新房)을 일부러 마련했는데요.]
[신방? 심소저도 장난이 심하군요.]
별로 노한 어조는 아니었다.
[정말이에요. 저와 홍이 언니는 매일 한번씩 이 방에 와서 언니의 이야기를 하곤 했어요.]
천진하다고 할까. 어쨌든 질투나 시기심이 조금도 없는 하림의 표정에 주약란도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알겠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겐 신방이니 뭐니 말하지 말아요.]
[그러면 안 되나요 다 알고 있는데요.]
[다 알고 있다고요?]
[시부모님도 시녀들도 다 알고 있는 걸요..... 괜찮아요.]
그러자 주약란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분들을 어떻게 대할 수 있단 말이에요......]
[저의 시어머님은 언니를 이곳으로 모셔 오라고까지 하셨는데요......

언니를 보고 싶다고도 하셨어요.]
[그럼 어떡하나......]
걱정하면서도 불쾌해 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주약란의 눈치에 하림은 용기를 얻은 듯 입을 열었다.
[언니, 사실 우리들이 이 방을 마련해 두고 또 홍이 언니와 제가 정실을 정하지 않은 것은

모두 언니 때문이었어요.]
하고 점점 맹랑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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