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6. 대타협 (8)
(2189)대타협-15
“정상회담에 대한 말씀을 하셨어.”
고려호텔 객실로 일행을 불러 모은 조철봉이 그렇게 말했다.
밤 11시, 세쌍의 눈이 조철봉을 주시한 채 떼어지지 않는다.
그들을 차례로 둘러보던 조철봉의 시선이 민유미한테서 멈췄다.
아름답다. 불빛에 반사된 눈동자가 반짝였고 붉은 입술은 조금 벌어져 있다.
문득 저 입에서 울리는 탄성을 듣고 싶고 저 반짝이는 두 눈이 쾌락에 젖어 흐려져 있는 것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핵 폐기 문제는 정상회담 때 협의하신다고 하는구먼.
보상금 이야기는 꺼낼 분위기도 아니었어.”
“그럼 정상회담은 성사가 되는 것이군요.”
그것만 해도 어디냐는 듯이 김경준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회담 장소는 어디로 하는 겁니까?”
“제주도.”
“제주도.”
셋이 거의 동시에 제주도라고 말을 뱉는다.
한국 대통령이 두 번 평양에 갔고 이제 세 번째에는 북한 통치자가 한국에 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통전부장이 공식적으로 한국 통일장관하고 상의하기로 했어.”
던지듯이 말한 조철봉이 소파에 등을 붙이고는 입맛을 다셨다.
“이제 그 이야기만 청와대에다 해주면 정상회담에서 내 역할은 끝난다.”
“보상금 문제가 나왔을 때 사장님이 다시 필요하게 되지 않을까요?”
하고 최갑중이 위로하듯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쓴웃음을 짓는다.
“그거야 내가 나서야지. 하지만 불러줄 때까지 기다려야만 돼.”
조철봉의 시선이 잠자코 앉아 있는 민유미에게로 옮겨졌다.
“위원장이 오늘 날 부른 것은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것을 통보해주려는 것도 있지만
나한테서 민심을 듣고 싶었던 것 같아.”
“민심이라면.”
얼른 이해를 하지 못한 민유미가 긴장하고 되물었을 때 김경준이 풀이해줬다.
“여론이죠. 국민들의 생각.”
“아, 여론.”
그러자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국민 대다수가 정상회담을 환영할 것이라고 말씀드렸지.”
오늘밤 조철봉은 민유미가 CIA의 정보원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위원장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것이다.
부끄럽기도 했고 나중에는 화까지 났다가 지금은 차분해졌다.
그래서 오늘 위원장한테서 들은 중요한 내용은 민유미 앞에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 민유미가 불쑥 묻는다.
“위원장 건강은 어떻던가요?”
“나하고 양주 한 병을 반병씩 나눠 마셨어. 통전부장은 아예 한잔도 안마시고.”
조철봉이 정색하고 말했지만 그 반대다.
통전부장하고 조철봉이 나눠 마셨다.
머리를 끄덕인 민유미가 두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수술했다는 말은 헛소문이군요? 양주를 반병이나 마신 걸 보면.”
“그런 소문이 어디 한두번인가?”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나보다도 더 센 것 같더라구.”
“어쨌든 수고하셨습니다. 서울에 돌아가 보고하면 난리가 나겠군요.”
김경준이 들뜬 표정으로 말하더니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최갑중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선다.
“피곤하실 텐데 쉬셔야지요.”
그러면서 최갑중의 시선이 부딪쳐 왔으므로 민유미의 얼굴이 괜히 따끔거렸다.
따라 일어선 민유미가 소리죽여 숨을 뱉는다.
(2190)대타협-16
다음날 아침, 조철봉은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전화기를 들면서 탁자에 부착된 시계를 보았더니 7시반이다.
“예.”
잠이 덜깬 목소리로 송화구에 대고 응답했을 때 양성택의 목소리가 울렸다.
“8시에 위원장님이 가십니다. 준비하고 계시도록.”
놀란 조철봉이 숨을 죽였고 양성택이 말을 잇는다.
“곧 귀빈실로 안내해드릴 겁니다.”
전화가 끊겼을 때 조철봉은 침대에서 튕겨나듯이 일어섰다.
그로부터 20분쯤 후에 조철봉은 안내원을 따라 5층에 위치한 귀빈실로 들어섰다.
호화롭게 장식된 귀빈실 소파에 혼자 앉아 기다리던 조철봉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졌다.
갑자기 위원장이 찾아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방문이 열렸을 때 긴장했던 조철봉은 서둘러 일어섰다.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위원장이 들어서고 있다.
위원장은 웃음띤 얼굴로 조철봉의 인사를 받는다.
“갑자기 찾아와 놀랐나?”
다가선 위원장이 부드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했지만 조철봉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소파에 앉은 위원장이 조철봉에게 앞쪽 자리를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어느새 경호원은 사라졌고 방안에는 둘뿐이다.
의자에 등을 붙인 위원장이 자리에 앉은 조철봉에게 말했다.
“이봐, 조 사장.”
조철봉이 숨을 삼켰다.
위원장의 표정은 어둡다.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예, 위원장님.”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예에?”
놀란 조철봉이 외마디 소리처럼 물었다가 몸을 굳힌다.
그때 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진심으로 평화 공존을 바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로서 남조선 인민의 신뢰를 얻겠는가?”
한마디씩 또박또박 위원장이 말했을 때 조철봉은 참았던 숨을 소리죽여 뱉는다.
위원장도 인간이다. 신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싫은 소리는 싫고 달콤한 말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철봉은 위원장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 순간 가슴이 무언가로 가득 찬 느낌이 든다.
아마 위원장한테 한국인의 입장, 보통 한국인이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해준 인간은 없을 것이었다.
어디 그런 기회가 있었겠는가?
위원장은 그 여론조사 따위를 알고 싶은 것이 아니다.
보통 한국인, 자신처럼 자본주의의 더러움에 실컷 물든 인간의 생각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대다수 한국인의 사고인 것으로 믿는다. 조철봉은 어금니를 물었다가 푼다.
남북한 관계니 민족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고 내가 그럴 만한 그릇도 아니다.
오직 위원장이 믿고 물어보는 것에만 있는 그대로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었다.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경제도 어려운데 자꾸 긴장을 조성하는 건 결코 북한에 이롭지 않습니다.
위원장님, 오히려 적개심만 일어나거든요.”
위원장은 머리만 끄덕였고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너무 자주 그런 상황이 반복되어서 한국 국민들은 면역도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지금은 정권이 바뀐 것이다.
그것까지는 말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잠시 말을 멈췄던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위원장님이 통 크게 있는 그대로를 말씀하시면 한국인 모두는 감동할 것입니다.
제 생각이지만 위원장님은 북한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있으실 수도 있습니다.”
진심이다.
네티즌만 움직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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