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791. 중개자 (5)

오늘의 쉼터 2014. 10. 9. 13:16

791. 중개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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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테이프를 다 들은 이명진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조철봉을 보았다.

방금 이명진은 양수진과 조철봉의 대화 내용을 들은 것이다.

조철봉은 차 안에서의 대화를 주머니에 넣어둔 녹음기로 녹음해 놓았다.

그때 이명진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이명진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왠지 속이 개운하네요.”

“다 끝이 있는 겁니다.”

소파에 앉은 조철봉이 차분해진 표정으로 앞쪽의 이명진을 바라보며 말한다.

조철봉의 사무실 안이다. 방에는 최갑중까지 셋이 둘러앉았는데

오늘도 혜주는 옆방인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표정을 보니까 진심인 것 같았습니다.”

“이 여자가 집을 나간 건 내 탓도 있습니다.”

이명진이 턱으로 녹음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얼굴이 조금 일그러져 있다.

“내가 좀 그것이 약했거든요.

그래서 한달에 한번, 어떤 때는 바쁘다고 석달에 한번 할까 말까 했습니다.”

최갑중이 얼른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다시 이명진의 말이 이어졌다.

“반면에 이 여자는 뜨거웠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럭저럭 맞췄지만 세월이 흐르니까 내가 달리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노력을 해보는 것이 아니라 기피했습니다.”

“…….”

“그것이 스트레스가 되어서 혜주한테도 영향이 갔을 겁니다.

본래는 애를 참 사랑했던 여잔데요.”

그러고는 이명진이 길게 숨을 뱉는다.

“죽을 때가 다 되니까 이렇게 털어놓게 되는군요.

아니, 조 사장님을 만난 덕분에 털어 놓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

“하마터면 이 사실을 무덤 속까지 가져갈 뻔했습니다.

혜주 엄마도 그런 이유를 말하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해도….”

헛기침을 하고 난 조철봉이 똑바로 이명진을 보았다.

“남편을 배신하고 집까지 저당잡혀 돈을 만들어 달아난 것이 정당하다고 볼 수는 없죠.

더구나 사춘기 딸도 버리고 말입니다.”

“혜주한테는 나쁜 엄마죠.

저 죽고 나서 혜주에게 그런 이유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고 통하지도 않을 테니까요.”

그러더니 이명진이 소파에 등을 붙이고 눈을 감았으므로 놀란 갑중이 엉거주춤 일어서며 묻는다.

“따님을 불러드릴까요?”

“아닙니다. 참아 보겠습니다.”

이명진이 힘들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얼굴의 땀을 닦는다.

어느덧 얼굴에 땀이 가득 돋아나 있었던 것이다.

한참 만에 다시 눈을 뜬 이명진이 조철봉을 보았다.

초점이 흐린 눈이다.

“사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혜주 엄마를 만나고 싶습니다.”

힘들게 말한 이명진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는다.

“결심했습니다. 나도 잘못을 사과하기로 말입니다.”

조철봉과 최갑중의 시선이 마주쳤고 이명진의 말이 이어졌다.

“혜주까지 셋이, 그리고 사장님까지 계셔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혜주까지 말입니까?”

확인하듯 조철봉이 묻자 이명진의 눈이 다시 번들거린다.

“다 컸으니 알아야죠. 털어놓고 가렵니다. 그래야 후련할 것 같네요.”

조철봉은 심호흡부터 했다. 

 

 

 

 

(2160)중개자-10 

 

 

다음날 저녁, 소공동의 일식당 ‘동경’ 방 안에서 기다리던 이명진과 이혜주 부녀는

방 안으로 들어서는 두 남녀를 본다. 조철봉과 양수진이다.

이명진은 차분한 표정으로 맞았지만 혜주의 안색은 대번에 하얗게 굳어졌다.

양수진이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

입을 딱 벌렸던 혜주가 비명처럼 불렀을 때 이명진이 혜주의 손을 움켜쥐었다.

“가만있어라. 내가 불렀다.”

“나, 갈 테야.”

하고 혜주가 벌떡 일어섰을 때 이번에는 조철봉이 눈을 크게 뜨고 말한다.

“앉아 있어. 너 때문에 다 모인 거야.”

너 때문이라는 말에 부담을 느꼈는지 혜주가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동안 양수진은 시선을 내린 채 숨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넷이 자리에 앉았을 때 종업원이 들어와 주문을 받고 나갔다.

그때 이명진이 입을 열었다.

“혜주야, 내가 오라고 했는데 너도 듣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혜주는 외면한 채 말이 없고 양수진도 머리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다.

이명진이 말을 잇는다.

“네 엄마가 도망간 건 내 책임도 있어. 한창 젊은 나이에 난 엄마하고 석 달에 한 번,

어떤 때는 반년이 넘도록 잠자리를 안 했거든.”

그러자 혜주는 눈만 껌벅였고 양수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조철봉은 양수진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않은 것이다.

이명진이 똑바로 양수진을 보았다.

“원인은 나한테 있어. 난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고 대신 사업에만 몰두했어.

집 안에만 있던 당신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 미안하게 생각해.”

“아버지.”

그때 혜주가 소리쳐 이명진을 불러 말을 자른다.

그러나 뒷말을 잇지는 못했다. 한동안 눈을 감았다 뜬 이명진이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한다.

“법적으로 나하고는 갈라섰지만 당신은 혜주 생모야.

혜주가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끝까지 노력해 주기를 바래.”

“아, 싫어!”

다시 혜주가 바락 소리쳤다.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들고 혜주가 양수진을 노려보았다.

“아버지는 용서하신다고 해도 난 못해. 나는 나야!

나도 생각이 있는 성인이라고! 난 용서 못해!”

“난 용서한다.”

어깨를 늘어뜨린 이명진이 차분하게 말하고는 옆에 앉은 혜주의 손을 쥐었다.

“그럼, 네 상처는 우리보다 더 크지. 아버지가 너한테도 사과한다. 내 책임이 컸어.”

그때 양수진이 머리를 들고 이명진을 보았다.

얼굴이 다시 하얗게 굳어져 있었지만 멀쩡하다.

오늘은 눈물 바람을 하지 않는다.

“내가 잘못했어요. 용서받지 못할 행동을 했습니다. 이렇게 사과드립니다.”

그러고는 이명진한테 머리를 숙여 보인 양수진이 이제는 혜주를 보았다.

“잘못했다. 네 얼굴을 보고 잘못을 빌고 싶었는데 오늘 소원을 풀었다.”

“난 용서 못해!”

외면한 채 혜주가 말하더니 흐느꼈다.

“당신 때문에 아빠가 죽게 되었어.”

“그건 아냐.”

이명진이 서둘러 머리를 저었지만 양수진이 말을 잇는다.

“제 인생에서 세 식구가 같이 지냈던 몇 년이 가장 행복했어요.

그런 추억이 있었다는 게 저한테는 유일한 기쁨이죠.”

눈으로 혜주를 가리킨 양수진이 웃는다.

그 웃음이 밝아서 조철봉은 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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