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1. 새출발(11)
(2121)새출발-21
그러고는 위원장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조철봉에게 말한다.
“조 특보, 나하고 둘이서 이야기 좀 할까?”
“예, 위원장님.”
누구 말이라고 거부하겠는가?
조철봉은 위원장을 따라 방을 나왔다.
한영기와 이강준은 양성택과 함께 방에 남았고 열걸음쯤 뒤를 경호장군이 천천히 따르고 있다.
지금 위원장과 조철봉은 주석궁의 대리석이 깔린 복도 위를 나란히 서서 걷는다.
복도의 넓이는 10미터도 더 되는 것 같고 길이는 축구장보다 더 길어 보였는데
양쪽 벽에 그려진 산수화가 실제의 숲과 산 같다.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샹들리에는 웅장하고도 호화스럽다.
위원장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앞을 응시하고 걷는다. 둘의 발걸음 소리만 낮게 울리고 있다.
그렇게 이십보쯤 걸었을 때였다. 앞을 향한 채로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내가 마음을 비운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냐.”
조철봉은 긴장했고 위원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지, 남조선에서 잘 쓰는 말인데 여기서도 기득권 세력이 있다네.
그자들은 또한 나의 가장 충성스러운 세력들이기도 하지.”
그러고는 위원장이 길게 숨을 뱉는다.
“개혁 개방이 되면 군과 기득권 세력,
즉 내 양쪽 팔 역할을 해온 두 집단이 기득권을 빼앗기게 된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위원장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차분한 표정이다.
“예, 알 것 같습니다.”
“핵은 체제 방어용이야, 위협용도, 침략용도 아냐, 절대로.”
“예.”
했지만 조철봉은 시선을 내린다.
그러고는 속으로 말했다.
이 분위기에서 그게 아닙니다.
하고 위원장한테 대드는 인간이 있다면 내가 손가락에다 장을 지지겠다.
그런 놈은 인간도 아니다. 그런 놈이야 말로 나라 말아먹는다.
그때 위원장이 걸음을 멈췄으므로 조철봉도 섰다.
뒤를 따르던 경호장군도 서더니 벽화를 본다.
위원장이 조철봉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래, 우리 공화국 경제 체제는 실패했어. 난 자네한테 처음으로 말하는 거야.”
말문이 막힌 조철봉이 이를 악물었고 위원장의 말이 이어진다.
“90년대 내 동포들이 굶어 죽은 걸 생각하면 피눈물이 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울기도 한다네.”
그러고는 위원장이 시선을 내렸으므로 조철봉은 숨을 죽였다.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자신 하나뿐일 것이다. 틀림없다.
이렇게 누구한테 말 하겠는가? 와이프? 자식? 측근? 어림없다.
그때 위원장이 목소리를 낮췄다.
“대통령께 말씀드려 주게,
우리가 강경하게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열등감 때문이라고 말이네.
우리가 쩔쩔매면서 얻어먹는 꼴을 인민들이 본다면 당장에 반란이 일어날지도 몰라.
특히 군이 말일세.”
어깨를 늘어뜨린 위원장이 길게 숨을 뱉는다.
“내가 또 사과를 하고 저자세를 보인다면 군이 가만있지 않을지도 몰라.”
“위원장님.”
마침내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조철봉이 열기띤 눈으로 위원장을 보았다.
“제가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인간다워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국의 지도자한테서 이런 고백을 듣고 감동하지 않는 놈은 인간도 아닐 것이다.
조철봉의 머릿속에 순간 떠오른 생각이다.
(2122)새출발-22
“발기인이 돌아오다.”
어느 언론에서는 점잖게 그런 타이틀을 달아 놓아 사람들이 많이 웃었다고 했다.
조철봉이 개성의 국경 검문소를 통과했을 때부터 언론사 차량이 수십대 따라 붙었지만
다 차단당했다.
경찰기동대가 개미새끼 한마리도 근접하지 못할 만큼 경호해 주었기 때문이다.
조철봉은 승용차 편으로 곧장 청와대를 향해 달려간다. 대통령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와대 본관 앞에 차가 멈췄을 때 기다리고 있던 의전비서관이 조철봉을 맞는다.
함께 내린 한영기와 이강준에게 눈인사를 한 비서관이 조철봉에게 말한다.
“대통령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철봉만 부른다는 표시였다.
비서관을 따라 이층 소회의실로 들어간 조철봉을 국정원장 김광준이 맞는다.
그러더니 잠깐 방을 나간 비서관이 대통령실장 유세진과 대통령을 모시고 들어왔다.
“조 특보, 고생하셨지?”
대통령이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묻더니 손을 내밀었다.
“아닙니다.”
악수를 마친 넷은 원탁에 둘러앉았다. 방안에는 이제 넷뿐이다.
비서관도 어느 틈에 사라져 버렸다.
조철봉은 가방을 열고 금박 장식이 붙은 서류봉투를 꺼내 대통령께 두 손으로 바쳤다.
“위원장의 서신입니다.”
대통령이 머리를 끄덕였고 대신 유세진이 받는다.
유세진이 봉투의 봉인을 풀고 내용물인 몇 장의 종이를 꺼내더니 대통령께 바쳤다.
편지다. 이른바 친서. 대통령이 친서를 읽는 동안 방안은 조용하다.
편지가 넘겨질 때 종이 소리가 날 뿐 모두 숨소리를 죽이고 있다.
이윽고 편지를 내려놓은 대통령이 먼저 조철봉에게 머리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는 머리를 돌려 유세진과 김광준을 차례로 본다. 대통령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핵은 남조선 인민이 위협을 느낀다면 폐기시키겠다는군.”
대통령의 말이 이어졌다.
“이 편지로 약속을 했어. 미국 정부에 보여줘도 된다는 거야.
다만 당분간 내부 수습이 끝날 때까지 공개를 보류시켜 달라고 하는구먼.”
그러고는 대통령이 편지를 국정원장 김광준에게 넘겨주면서 혼잣말을 한다.
“위원장 입장도 어려운 것 같군.”
“예, 기득권 세력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조철봉이 말을 받자 대통령이 눈을 크게 떴다.
대통령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위원장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그런가?”
이윽고 조철봉의 말이 끝났을 때 대통령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양반, 나보다 더 머리가 아플까? 한쪽 손으로는 경제를,
또 한쪽 손으로는 내부의 혼란을 조정해야 하는 나보다 말야.”
과연 그렇다. 남쪽에 비교하면 북쪽의 통치는 단순하다.
이른바 공개적 반대 세력이 없다.
며칠 전 한국에서 끝났지만 만일 평양 도심에서 촛불을 든 시위대가
위원장을 욕하는 구호를 쓴 깃발을 휘날리며 보위부원의 버스를 뒤집어엎고
보위부원을 감금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만일 그랬다면 다 사살되었다.
조철봉이 위원장을 좋아하지만 그것 하나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위원장 지시가 아니더라도 다 알아서 처리한다.
그렇게 된 체제다. 그때 김광준이 입을 열었다.
“이것 또한 시간끌기 작전일 수 있습니다, 대통령님.”
국정원장다운 말이다.
친서에는 그렇게 썼지만 공개를 미뤄 달라고 하는 것은 공식 효과가 없다.
개인간의 약속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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