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4. 새출발(4)
(2107)새출발-7
여자는 30대 후반쯤 되었을까?
갸름한 얼굴이었는데 약간 위로 솟은 눈매가 날카로웠고 도톰한 입술은 꾹 닫혀 있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그것이 자극적이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다.
“안녕하세요? 조 의원님.”
그 순간 조철봉은 숨을 삼켰고 앞쪽의 최갑중도 몸을 굳혔다.
조철봉의 표정을 본 여자가 이번에는 이를 드러내고 소리없이 웃는다.
“어머, 놀라셨나 봐.”
“저, 웨이터놈이 말해 줍디까?”
우선 그렇게 물었던 조철봉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러자 여자가 머리를 젓는다.
“고명하신 조 의원님을 왜 모르겠어요?
웨이터는 잘나가는 회사 사장님이라고 소개를 해주더군요.”
“그 말이 맞지. 내가 의원직 사퇴한 거 모르시나?”
“알죠. 하지만 개혁당 발기인이자 상임위원이시잖아요?”
“그렇다면 발기인이라고 부르든지, 발기는 항상 되니까.”
“그러죠.”
정색한 채 머리를 끄덕인 여자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경은입니다. 발기인님.”
“어쨌든 오늘 작업은 실패로군.”
여자의 손을 쥔 조철봉이 길게 숨을 뱉는다.
“백번 발기가 되어도 정체가 탄로난 상황에서는 힘들어.”
“왜요? 개혁당 이미지 때문에요?”
여전히 여자가 정색하고 물었고 앞쪽 최갑중은 둘의 대화를 넋이 빠진 표정으로 듣는다.
조철봉이 술잔을 쥐자 여자는 술병을 쥐더니 술을 따라 주었다.
날카로운 인상과는 달리 사근사근하다.
“그럼. 지난번 일본에서도 혼났는데,
여기서 들통나면 큰일이지. 여러 곳에서 날 노리고 있을 텐데.”
“제가 비밀 지켜 드릴게요.”
“경은씨라고 했어요? 내가 경은씨를 어떻게 믿어?”
그러고는 조철봉이 앞에 있던 최갑중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친구 옆에 앉았던 여자는 왜 나간 거요? 뭐가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상석을 빼앗겼기 때문이죠. 그런 애들 있어요.
제가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양이 차지 않는 애들.”
“친구요?”
“백화점 옆쪽 매장 주인이죠.”
“백화점에서 무슨 매장을 하시는데?”
“옷.”
하더니 여자가 지그시 조철봉을 보았다.
“저 이혼했어요.”
“요즘은 절반은 이혼한 것 같더구먼.”
“한국 정치에 대해서 오늘밤 강의해 주시지 않을래요?”
해놓고 이초쯤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둘이 말이죠.”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웨이터가 여자 하나를 모시고 들어왔다.
역시 미인. 그러나 옆에 앉은 이경은보다는 조금 처졌다.
“모시고 왔습니다.”
웨이터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을 때 이경은이 풀썩 웃는다. 왜 웃을까?
그러자 방에 들어선 여자도 이경은을 보더니 따라 웃는다.
이경은 또래로 보이는 여자는 세련되었다. 웃는 모습도 곱다.
조철봉은 문득 새 세상으로 들어선 자신을 깨닫는다.
그저 이곳에서 거짓말 실컷 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발기인이 되지 않을 때까지
생을 즐기다가 떠나고 싶다. 명예가 무엇이고 권력이 무엇이냐?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다가 가는 존재라고 하지 않던가?
(2108)새출발-8
“오늘 백화점 업주들 계 모임이거든요”하고
이경은이 최갑중 옆에 앉는 여자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저 여자는 유아용품 매장 업주.”
최갑중은 기다리던 중이어서 모양에는 상관없이 감지덕지한 표정을 지었고
옆에 앉는 유아용품 매장 업주도 싫은 기색이 아니다.
어깨를 늘어뜨린 웨이터가 나갔을 때 조철봉이 신참 여자에게 눈인사를 하고 나서
이경은에게 물었다.
“애는 몇살?”
그러자 이경은이 눈웃음을 치고 나서 대답했다.
“초등학교 5학년짜리 하나.”
“집에 혼자 있나?”
“아니, 친정 엄마하고 같이 사니까요.”
“그럼 집에서 정치 교육은 안되겠군.”
“내 오피스텔이 있어요.”
“교육용 오피스텔?”
“그런 셈이지.”
정색하고 말한 이경은이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설마 내가 지금까지 의원님,
아니, 발기인님만을 기다리며 독수공방 해오기를 기대한 건 아니죠?”
“말은 잘한다.”
“발기인님이 끝내준다는 소문이 났어요.”
“소, 소문이?”
놀란 조철봉이 정색하자 이경은은 빙그레 웃었다.
“하긴 이런 소문은 본인만 모르는 법이지,
한 번에 최소한 한 시간 정도라고 하데요. 그 동안 여자는 세 번쯤 싸고.”
“이건 또 악의적으로 축소되었군.”
“어머, 실제는 얼만데?”
“한 시간 반에 다섯 번이 최소야.”
“어머나.”
어느덧 이경은의 두 눈이 번들거렸고 술기운에 달아올랐던 얼굴은 더 붉어졌다.
자작한 위스키를 한 모금에 삼킨 이경은이 말을 잇는다.
“알아요? 발기인님의 또 다른 소문.”
“내가 알리가 있나?”
“북한 정권의 대리인.”
“내가?”
엄지를 구부려 제 코끝을 가리켜 보인 조철봉을 향해 이경은이 머리를 끄덕인다.
“곧 개혁당의 요직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났데요.”
“미치겠군.”
“발기인에 상임위원으로 실제 창당을 주도하신 건 다 아는 사실이니 당연하죠.”
“개혁당 성향은 어떻게들 보시나?”
“짬뽕이어서 곧 개판이 될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또 친북당이 된다는 사람도 있지만 난.”
이경은이 똑바로 조철봉을 보았다.
“국민들 잘만 살게 해준다면 상관 않겠어. 그건 우리 계원들도 다 그래.”
“그렇지.”
건성으로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을 향해 이경은이 말을 잇는다.
“다만 원칙을 지켜야지, 안그래요?”
“그럼, 그렇구 말구.”
이제는 눈의 초점을 잡고 조철봉이 다시 머리를 끄덕였다.
국민 수준을 얕보면 큰일나는 것이다. 국사를 논한다는 정치인보다 더 유식하고
더 멀리 앞을 내다보며 현실을 더 깊게 알고 있다.
그때 문득 이경은이 혼잣소리처럼 말한다.
“대통령이 잘 이끌고 가야 하는데.”
정신을 차린 조철봉이 머리를 들었을 때 술잔을 든 이경은이 길게 숨을 뱉는다.
“운이 좋았으면 좋겠어, 그 양반.”
그 양반이란 대통령이 아닌가?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국민이 대통령의 운을 걱정하다니,
이건 무슨 뜻인가? 능력을, 힘을 기대해야 정상 아닌가?
그렇다면 다른 건 다 포기했고 운만 남았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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