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6. 외유(1)
(2053)외유-1
비즈니스 클래스에 타는 것은 조철봉의 버릇이다.
오래전에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을 때부터 조철봉은 비행기를 타면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했다.
세계적인 갑부, 또는 한국에서도 재벌급 부자 누구누구가 일반석을 타고 여행한다는 것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지만 그것이 바로 비정상이라고 조철봉은 생각한다.
그러니까 언론에도 보도가 될 것이다.
돈이 있으면 있는 만큼 써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
아끼고 아꼈다가 돌아갈 적에 장학금이나 자선사업으로 모두 기부하고 가는 분이라면 모를까,
있을 때 써야 한다는 것이 조철봉의 신념이다.
솔직히 비즈니스나 일등석을 타는 것도 이코노미 승객을 위한 봉사 내지는 투자라고 볼 수도 있다.
이코노미 승객만으로는 항공사가 수지를 맞추지 못해 서비스에 차질이 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앞에 앉거나 꽁무니에 앉거나 가는 건 마찬가지니 남는 돈으로 다른 짓 하겠다고 우기는
사람들에게는 할 말 없다.
나카무라 의원한테서는 초청장까지 받았지만 도착 시간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공항에는
이토라는 보좌관이 마중나와 있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조철봉에게 이토가 유창한 한국어로 말한다.
“저희가 공항 입국자 명단을 체크했거든요. 번거롭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천만에요. 그런데….”
도쿄 시내로 향하는 차 안에서 조철봉이 앞자리에 앉은 이토에게 묻는다.
“한국어를 아주 잘하십니다. 마치 한국사람 같은데.”
“일본사람입니다.”
그러고는 이토가 웃고 나서 말을 이었다.
“한국어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여긴 한국 유학생도 많아서요.”
이토는 30대 중후반쯤으로 보였는데 피부가 희고 머리를 단정하게 가르마를 탄 미남형이다.
조철봉이 다시 묻는다.
“이토씨라고 하셨는데 혹시 안중근 의사를 아십니까?”
“의사 선생님 말입니까?”
“그렇지. 아니….”
했다가 조철봉이 헛기침을 했고 옆에 앉은 최갑중은 눈동자만 굴린다.
이럴 때는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다.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혹시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총에 맞은 적 없습니까?”
“예? 총에요?”
놀란 이토가 눈썹을 찌푸리고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제 기억에는 그런 분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왜 그런 걸 물으십니까?”
“저기, 이토 히로부미는 아시지요?”
그러자 이토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다.
“아아, 그분 말씀을 하시는 것이군요. 저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분입니다.”
“으음, 그렇군.”
어깨를 늘어뜨린 조철봉이 아직도 눈동자만 굴리는 최갑중을 괜히 흘겨보았다.
“너도 책 좀 읽어, 인마.”
“예, 의원님.”
했지만 대답이 당연히 건성일 수밖에 없다.
그때 이토가 다시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오늘 저녁에 나카무라 의원님께서 저녁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만 피곤하면
연기하셔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식사에 곁들여서 술 한잔 했으면 좋겠는데.”
대뜸 말을 받은 조철봉이 은근하게 웃는다.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말입니다.
좋은 곳을 알려만 주시면 술은 내가 산다고 전해 주시렵니까?”
그러자 이토가 따라 웃는다. 예상했던 것 같다.
(2054)외유-2
나카무라는 자민당 간사장까지 지낸 7선 중진으로 친한파로도 알려져 있었는데
유명해서 조철봉도 얼굴은 안다.
물론 사진을 본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하고 요릿집 방 안에서 기다리던 나카무라가 일어나 조철봉을 맞는다.
인사는 한국말로 했다. 웃음 띤 얼굴, 60대 중반이지만 피부에 윤기가 흘렀으며 짙고 검은 머리,
허리도 곧고 악수를 하는 악력도 강하다. 방에 자리 잡고 앉았을 때 이제는 나카무라가 옆에
앉은 이토에게 말했다.
일본어다. 나카무라의 말을 듣고 난 이토가 조철봉에게 묻는다.
“조금 후에 식사 끝나고 여자를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파트너로 일본녀를 부를까요?
아니면 한국말 잘하는 재일동포도 있습니다.”
“재일동포가 낫겠네요.”
조철봉의 말을 옮겨 들은 나카무라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재일동포가 오히려 더 미인이라는군요.”
이토의 말을 들은 조철봉이 따라 웃었다.
방에는 최갑중까지 넷이 사각형 식탁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았는데 다다미방 분위기는 정결했다.
곧 방문이 열리더니 기모노 차림의 종업원 둘이 음식을 날라 왔는데 역시 정결하고 산뜻했다.
술은 정종. 서울 일식집에서 별걸 다 먹어본 터라 조철봉에게는 익숙한 분위기다.
술을 한잔씩 마셨을 때 나카무라가 말한다.
“요즘 조 의원님이 한국에서 큰일을 하고 계시는 것을 주의 깊게 보고 계셨답니다.”
이토가 통역하자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내가 이용하기에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죠.
특별한 재능이나 인맥이 있는 게 아니지요.”
통역의 말을 들은 나카무라가 정색했다.
“나카무라 의원님은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받는 것이 인생사라고 하시는군요.”
“새겨듣겠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리고.”
다시 술잔을 든 조철봉이 나카무라를 향해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말을 잇는다.
“신세는 꼭 갚겠다고도 말씀 드리시오.”
조철봉의 말을 들은 나카무라가 술을 권했고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다.
얼굴에 술기운이 오른 나카무라가 웃음 띤 얼굴로 묻는다.
“요즘 다케시마 문제로 한일 관계가 식어져 있는데 조 의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토가 다케시마라고 말하는 바람에 조철봉은 못 알아들었다.
그래서 최갑중을 보았지만 최갑중은 다꾸앙이나 다시마 정도로 들은 것 같다.
그래서 조철봉이 이토에게 다시 묻는다.
“다케시마라니? 그게 뭔데요?”
“저기. 그.”
이토가 조금 당황한 듯 말을 더듬더니 정색했다.
“한국에서는 독도라고 부르더군요.”
“아아, 독도.”
머리를 끄덕인 조철봉이 입맛을 다셨으므로 나카무라는 긴장한 듯 눈썹 사이가 조금 좁혀졌다.
그때 조철봉이 말했다.
“내가 말씀입니다. 얼마 전에 임진왜란 책을 읽었는데 말입니다. 임진왜란 알지요?”
이토가 굳어진 얼굴로 끄덕였고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조철봉이 말을 잇는다.
“전쟁이 6년 반이나 계속되었더구먼. 그, 일본놈들. 아, 실례. 일본군이 6년 반 동안 조선인
코를 떼어간 게 내 생각이지만 몇십만개는 되었을 거요.
그러고 아마 조선 여자 절반은 따먹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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