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3. 거인 탄생(11)
(2028)거인 탄생-21
문이 열리더니 신영선이 웃음 띤 얼굴로 조철봉을 맞는다.
“들어와.”
10시반. 신영선은 오늘 가게에 나가지 않은 것 같다.
조철봉이 소파로 다가갔을 때 신영선이 뒤에서 양복 저고리를 잡아 벗기면서 말한다.
“오늘은 이야기만 하고 가.”
“그게 무슨 말이야?”
정색한 조철봉의 시선을 받더니 신영선이 비죽 웃었다.
“글쎄, 내 말대로 해. 앞으로 처신 더 조심해야 돼.”
“내 바탕은 다 드러났는 걸 뭐.”
소파에 앉은 조철봉이 쓴웃음을 짓는다.
“점잖은 척 해봐야 위선이라는 걸 다 안다고.”
주방에서 미리 준비한 과일을 챙기면서 신영선은 뒷모습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래도 조심하는 척이라도 해야 되는 거야.
국민들은 다 알고도 눈을 감아 준다고.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게 하면 안돼.”
과일이 담긴 접시를 들고 오면서 신영선은 머리를 젓는다.
“그땐 끝장이야.”
“예를 들면 대놓고 오입하면 안 된단 말인가?”
“그렇지. 숨기는 척이라도 해야지.”
“내가 여기 다니는 것도 말이지?”
“그럼. 하지만.”
앞자리에 앉은 신영선이 포크로 사과를 찍어 건네면서 말을 잇는다.
“아마 기관에서는 이미 다 파악했을 걸? 북한 측에서도 말야.”
“어이구, 누님도 유명인사가 되었구나.”
“농담 마.”
눈을 흘긴 신영선이 정색했다.
“내가 동생한테 상의할 일이 있어서 보자고 했어.”
“우리, 벗고 상의하면 안 될까?”
“가게에 오는 의원들 중에서 동생한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벗고 이야기하자니까.”
“민족당 의원도 있어. 하나 둘이 아냐.”
“이봐, 섰는데.”
하고 조철봉이 눈으로 바지 지퍼 부근을 가리켰지만 신영선은 말을 잇는다.
정색한 표정으로 눈동자도 고정되었다.
“정치도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야. 주고받는다고.”
“이봐, 얘가 주고 싶어서 미치겠다는데.”
“기회를 놓치면 안돼.”
“지금 섰어. 기회야.”
“지금 모임을 하나 만들어야 돼.
통일연구회라든지 남북한 교류협의회라든지 이름은 아무래도 좋아.
원내 의원들만 모아도 정예로 30명은 모을 수 있어.”
이제는 조철봉도 바지에서 시선을 떼고는 찬찬히 신영선을 보았다.
신영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북한 국방위원장도 아마 그걸 기대하고 있을 거야.
지금의 남북한 의원연맹은 거물들이 다 끼어 있어서 일은 동생이 다 하지만
생색도 안 나고 능률적이지도 못해. 동생이 전권을 장악한 모임을 만들어야 돼.
그럼 북한 위원장도 밀어 줄 것이고 우리 대통령도 마찬가지야.
아무도 동생을 막지 못한다고.”
신영선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고 불빛에 반사된 두 눈이 번들거렸다.
조철봉이 심호흡을 하고 말한다.
“누님 되게 섹시하네.”
“내일부터 당장 시작해. 기회 놓치지마.”
“누님이 오늘 한 번만 해주면 내가 적극 고려해 볼게.”
“내가 명단도 대충 뽑아 놓았어.”
“바지만 벗을까?”
그러자 신영선이 머리를 들고 벽시계를 보더니 말한다.
“그래. 침대로 갈 것 없이 여기서 하자.”
(2029)거인 탄생-22
신영선은 양성택과 똑같은 제안을 했다.
그러나 둘이 입을 맞췄을 리가 있겠는가?
오랫동안 정치인의 속성과 부침, 권력 투쟁을 지척에서 지켜본 신영선의 조언과 맞은 것이다.
다음날 오전, 조철봉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김경준과 최갑중이 적극 찬성을 한 것은 물론이다.
조철봉이 혼자 결심을 한 것처럼 말했기 때문인지 김경준은 더 감동했다.
“50명은 모을 수 있습니다. 의원님.”
김경준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을 때 조철봉은 쓴웃음을 지었다.
양성택은 현역의원 100명은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신영선은
정예로 30명은 모은다고 했던 것이다.
“우선 명단을 뽑아 보고 나서 상의를 하기로 하지.”
“당분간 비밀로 해야 될 것입니다.”
정색하고 김경준이 말했지만 두 눈은 생기로 번들거린다.
그때 최갑중이 머리를 들고 조철봉을 본다.
“숫자만 많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그리고 때묻지 않고 능력있는 인사가 낫습니다. 거물들은 필요 없습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최갑중이 입술 끝을 올리며 웃는다.
“이미 의원님은 거물이 되셨거든요.
다른 거물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어졌단 말씀이죠.”
“그럼 못써.”
이맛살을 찌푸린 조철봉이 나무라듯 말한다.
“거물들의 경륜도 필요한 거다.
오래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때가 묻을 수도 있는 법이여, 나를 봐라.”
그러고는 조철봉이 엄지를 구부려 자기의 정색한 얼굴을 가리킨다.
“내가 얼마나 잘났는데?
내가 사람 차별한다면 지나가는 강아지도 다 웃을 거다.
그러니 그런 내색조차 말아야 돼.”
“알겠습니다.”
선선히 머리를 끄덕인 최갑중이 김경준과 함께 방을 나갔으므로
조철봉은 소파에 등을 붙였다.
어젯밤 대통령을 만났다는 것을 둘은 알고 있는 것이다.
보스가 대통령과 독대하는 신분이 되면 부하들의 사기도 올라가는 법이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번호를 본 조철봉이 머리를 기울이고 나서 귀에 붙였다.
모르는 번호였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의원님, 저, 이혜정입니다.”
수화구에서 그렇게 여자 목소리가 울린 순간 조철봉은 숨을 멈췄다.
그러고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어, 그래.”
하마터면 평양에서 언제 떠났느냐고 물을 뻔했다.
그러자 이혜정이 웃음띤 얼굴로 묻는다.
“통화해도 괜찮으세요?”
“아, 그럼, 괜찮아.”
“제 전화번호 입력되었으니까 보관시켜 놓으세요.”
“알았어, 그런데.”
“언제 시간 있으세요?”
하고 이혜정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먼저 심호흡부터 했다.
그러자 이혜정의 신음소리가 환청처럼 귀에서 울렸고
눈 앞에는 꿈틀거리는 알몸이 떠돌았다.
“으음, 내가 연락할게.”
그렇게 말하고 난 조철봉이 얼른 덧붙였다.
“곧.”
“기다릴게요. 의원님.”
“다른 일 없지?”
“네, 없어요. 오늘은 그냥 안부전화 드린거예요.”
“반갑다.”
그래 놓고 조철봉이 침을 삼켰을 때 이혜정의 목소리가 수화구를 울린다.
“저도요.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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