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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호각세(互角勢) 29

오늘의 쉼터 2014. 10. 4. 15:50

제21장 호각세(互角勢) 29

 

 

 

“태자는 윤충을 데리고 하산하여 신하들을 안심시켜라. 나도 곧 뒤따라 내려가마.”

명을 받은 태자가 윤충을 데려가려 하자 윤충이 놀란 얼굴로 왕을 향하여,

“어찌하여 소인도 같이 가라고 하옵니까?”

하고 물었다. 왕이 다정하고 온화한 낯으로,

“너야 태자의 목숨을 구했으니 나라의 일등 공신이 아니냐?

 

이제부터 너는 태자의 사람이다.

 

비록 상중이긴 하다만 여긴 형도 있고 나랏일도 위중하니

 

경사에서 벼슬살 채비를 하고 가거라.

 

돌아가신 너의 어머니도 아시면 기뻐할 것이다.”

하고 성충을 돌아보며,

“그래도 되겠는가?”

하니 성충이 그 아우와 눈을 맞추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성은이 하해와 같습니다.”

하고 아우를 대신해 임금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는 모두 윤충의 공이요 백성에 대한 상벌은 임금의 책무라 성은을 논할 일이 아니다.”

하고 말을 분질렀다.

 

 태자가 윤충을 데리고 여막을 나선 뒤 장왕은 눈빛을 빛내며 성충에게 가까이 다가앉았다.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노라.

 

수당(隋唐)이 중국 대륙을 토평하였듯이 우리도 동적과 북적의 강역을 병탄해

 

7백 년 정족세에 종지부를 찍고, 마침내 삼한을 일가로 아울러 만대에 분쟁 없는

 

나라를 만들 원대한 계책이 혹시 그대의 수중에 있던가?”

성충도 임금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허공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눈에 일순 광채가 감돌았다.

 

잠깐 침묵의 시간이 흐른 뒤 성충이 이윽고 입을 열어 짤막하게 대답했다.

“있습니다.”

“내게 간략히 말해볼 수 있는가?”

“대개 군주가 이웃 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땅을 취하기 위함이나 현군은 백성들을 얻고자

 

군사를 일으킵니다.

 

보통의 임금은 성곽과 구루에 연연해 군사로써 민심을 해치지만 성군은 민심을 취하는 일이라면

 

오히려 성곽 따위는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물건을 훔치는 자는 도둑이며 마음을 훔치는 이는 성인입니다.

 

천하를 탐내는 자는 오히려 망하고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이는 크게 흥한다고 하였나이다.

 

덕은 칼보다 무디지만 만인을 한꺼번에 복종시키는 가공할 무기요,

 

성군의 덕업이 빛을 발하면 천군만마가 하지 못하는 일도 일시에 일어날 수 있는 법입니다.

 

삼한의 일도 이와 마찬가지지요.

 

삼한의 강역을 탐하는 자가 아니라 삼한 백성들을 덕업으로 감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삼한은 비로소 하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무엇이 아쉬워 이웃 나라를 창칼로써만 치려고 하십니까?

 

 백제의 살림은 이만하면 부족함이 없고, 백제 백성들은 사람마다 넉넉하고 행복합니다.

 

전하께서는 초원에서 풀을 뜯는 남의 짐승들을 모두 죽이고 내 집의 소와 양들로만

 

초원을 채우려 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모든 짐승들이 배불리 먹고 삼라만상이 골고루 풍요롭기를 원하시나이까?

 

이제는 대범하고 넓은 마음으로 천하의 민심을 노려볼 만한 때입니다.

 

군사를 내어 영토를 넓히고 계책을 써서 양적을 멸하는 일은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성충의 목소리는 구슬이 쟁반 위를 굴러가듯 낭랑하고 청아하였지만 장왕은 표정 없는 얼굴로

 

성충의 말을 경청했다.

 

다시 짧은 침묵이 스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장왕은 무슨 생각에선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성충이 황급히 따라 몸을 일으켰으나 왕은 말없이 초막을 나섰다.

 

그 모습이 흡사 성충에게 화라도 난 사람 같았다.

밖에는 7월의 만월이 중천에 떠올라 휘황하게 칠악을 비추고 있었다.

 

왕은 인사도 건네지 않고 그대로 산을 내려갈 태세였다.

 

달빛 아래로 난 굽은 길을 따라 저만치 몇 발짝을 성큼성큼 옮겨놓자

 

성충은 임금의 등뒤에 대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왕이 돌아본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는 무엇을 잊은 사람처럼 성충에게 돌아왔다.

“삼상(三喪) 끝나는 날이 언제인가?”

“올 시월 초닷새입니다.”

“알았네. 인연이 있거든 다시 보세나.”

말을 마치자 왕은 다시 발걸음을 돌리고 특유의 활달한 걸음걸이로 산을 내려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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